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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6964 vote 0 2014.05.27 (22:24:19)

 

    의사결정학의 개요 


    프로이드는 없는 학문을 만들어냈다. 학문은 새로 만들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학계 내부의 시스템적인 문제로 인해 인류가 놓쳐버린 학문분야가 여럿 있다. 경영학만 해도 확실한 이론적 체계가 없다.


    웹에서 본 어느 경영학도의 말에 따르면, 경영학이라는 것은 뚜렷한 이론적 근거없이 그냥 ‘이렇게 한 번 시도해 보면 효과가 있지 않을까’ 하는 식으로 개인의 주관적 의견을 두서없이 나열하고 있다고 한다.


    이론적으로 허술한 분야는 많다. 그러나 학문적 수요가 있으므로 최소한의 존립근거는 갖추고 있다. 학문적 생산성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산성의 측면으로 볼 때 종교의 입지는 각별하다.


    종교는 전혀 학문의 형식을 갖추고 있지 않지만 수요자의 요구에 응답한다는 점에서 결과론적인 효용성이 있으므로 때로는 학문 이상의 대접을 받는다. 학문적 체계는 없지만 수요가 있고 효용이 있고 상호작용이 있다.


    반면 동양의 여러 학문적 전통들은 상당한 학문적 성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학문의 위세에 눌려 일괄적으로 폐기처분 되었다.


    이 세계에는 든든한 학문의 기반을 갖춘 것도 있고, 이론적 체계가 부실하지만 최소한의 존립근거를 얻어 버티는 것도 있고, 전혀 학문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지만 외곽에서 나름대로 입지를 굳히고 위세를 과시하는 것도 있고, 상당한 학문적 근거가 있지만 제도권의 위세에 눌려 매장된 것도 있다.


    의사결정학은 동양정신의 큰 줄기라 할 깨달음에 이론적 근거를 부여하여 학문화 한 것이다. 프로이드가 새로 학문을 열었을 뿐 아니라 마르크스나 다윈이나 아담 스미스도 나름대로 일가를 이루어 한 분야의 비조가 된다.


    그들은 무에서 갑자기 새로운 학문의 장을 열었다. 이들이 학문의 근거를 갖출 수 있었던 것은 직간접으로 뉴턴이라는 큰 기둥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다. 뉴턴의 기둥과 이어진 연결고리가 견고하지 않은 것들이 있다. 경영학이라면 어떨까? 경영은 부단한 의사결정의 연속이다. 그런데 집단의 의사결정이라는 핵심을 놓치고 있다.


    경영이 인간의 심리적 부분을 제외하고 이윤이나 효율에 기댄다면 결국 뉴턴의 기둥에 연결시킨 것이다. 뉴턴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할 수는 없다. 뉴턴은 서구정신의 관점에 불과하다.


    또다른 학문의 기둥이 필요하다. 경영학은 의사결정학에 의지해야 한다. 종교 역시 인간의 의사결정을 돕는다는 점에서 과학혁명에도 불구하고 저항하는 이유를 알게 한다. 인류가 놓친 부분이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사회학이나 프로이드의 심리학도 의사결정이라는 관점에서 재구축되어야 한다. 그들은 번짓수를 잘못 짚었다. 어떻게든 뉴턴을 끌어들이려 애를 쓰지만 허당이다.


    필자는 또다른 학문의 기둥을 세우고자 한다. 뉴턴적 사고의 맹점은 의사결정의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서 대상을 살필 뿐 주체를 보지 않는 데 있다. 의사결정은 관측대상의 사정 뿐 아니라 주체의 입장까지 고려해야 한다. 심리학, 사회학, 철학, 미학은 모두 대상이 아니라 주체를 해명한다는 점에서 뉴턴과는 다른 관점에 서 있다.


    그러나 역시 주체를 대상화하는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하고 있다. 의사결정의 관점에 설때 주체와 대상와 관계가 바르게 해명된다. 뉴턴과의 연결고리가 약해서 이론적 근거에 의문부호가 붙은 여러 학문분야가 튼튼한 이론의 기둥을 획득하게 된다. 학문영역 바깥에서 학문의 기능을 일부 대체하는 종교의 문제 역시 해소된다.


    지금까지 인류의 학문은 철학이나 미학, 사회학, 심리학처럼 주체를 해명하거나 혹은 자연과학, 경제학, 수학처럼 대상을 해명하거나다. 그러나 주체를 대상화하는 오류를 범하므로 어느 쪽이든 3인칭 시점이 되고 만다. 학문을 인간에게서 분리하여 타자화 하고 대상화 하는 관점은 뉴턴에 의지하는 서구정신의 학문적 전통이다.


    동양정신은 완전히 다른 학문적 전통을 가지고 있으나 근대과학의 위세에 눌려 일괄폐기되었다. 동양정신의 전통은 복원되어야 한다. 의사결정학은 깨달음의 학문이다. 깨달음은 일반적인 지식과 달리 타자화 되지 않고, 대상화 되지 않는다. 주체와 대상을 일체화 하여 1인칭 시점에서 바라본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모든 학문과 출발점이 다르다.


    ◎ 지식은 자동차와 마차를 분별할줄 안다.
    ◎ 깨달음은 자동차에 올라타고 운전할줄 안다.


    자동차를 안다는 것이 지식이라면 자동차를 운전할줄 아는 것은 깨달음이다. 밖에서 자동차를 관찰하여 아는 것은 일반의 지식으로도 충분하다. 이때 자동차는 대상화 된다. 관측자와 분리되어 별도로 저쪽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 자동차에 올라타고 운전하는 것은 다르다. 주체와 대상을 분리하여 바라보는 3인칭의 시선으로는 자동차의 운전이 불가능하다. 자동차가 아니라 말과 기수의 관계라면 더욱 그렇다. 말은 자기 등에 올라탄 기수가 초짜인지 아닌지 알아본다고 한다.


    말과 호흡을 맞추지 못하는 서투른 기수는 낙마시켜 버린다. 말을 사슴과 구분할줄 아는 것과 말을 탈줄 아는 것은 다르다. 지식의 언어는 3인칭으로 저쪽에 존재하지만 깨달음의 언어는 나와 일체가 되어 있다. 달리는 말에 올라타고 있다. 대상화 될 수 없다. 그 말에서 뛰어내릴 수 없다.


    깨달음이 필요하다. 무엇을 깨닫는가? 동적균형을 깨닫는다. 필요한 것은 의사결정이다. 바른 의사결정은 주체와 대상 사이의 상호작용에 있어서의 동적균형에 의해 도출된다. 왜 동적균형인가?


    연동되기 때문이다. 말과 기수의 호흡은 연동된다. 의사결정의 세계는 크게 연동되는 세계다. 하나를 결정하면 이에 연동되어 다른 많은 부분들이 부수적으로 결정된다. 동적균형을 잃으면 연동되지 않고 연동되지 않으면 통제되지 않고 통제되지 않으면 기수는 달리는 말에서 굴러떨어진다.


    ◎ 지식은 주체와 대상을 분리하고 지적 대상을 대상화 한다.
    ◎ 깨달음은 동적균형을 통해 주체와 대상을 하나로 연동시킨다.


    나무가 있다면 두 방향이 있다. 가지와 잎이 있는 복잡한 방향과, 줄기가 있는 단순한 방향이 있다. 복잡한 방향으로 가서 나무의 가지와 잎을 하나씩 셈하는 것이 뉴턴의 방식이라면 잔가지와 잎새들을 나무의 큰 줄기 하나에 연동시켜 일괄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동적균형의 방식이다.


    둘은 완전히 다른 지점에 서 있다. 기수와 말이 호흡을 맞추는 접점이 있다. 나무의 가지가 갈라지는 분기점이 있다. 그것은 하나의 작은 점이다. 그 접점의 문제만 해결하면 나머지는 절로 따라온다. 동적균형으로 그 접점의 문제가 해결된다.


   사진사2 105.jpg


    근본적으로 존재의 층위가 다른 별도의 두 세계가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계속 진도를 나갈 수 있습니다. 하늘과 땅과 사물은 인간이 찾아오기 전에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의 세계는 지금 이 순간에 상호작용하여 무로부터 새로 도출하는 세계입니다. 그것은 주체와 대상이 분리되지 않는 또다른 세계입니다. 고착된 세계를 분별하는 감각으로 이 세계에 접근한다면 곤란합니다. 에너지에 의해 자연이, 스트레스에 의해 사회가, 존엄에 의해 나의 내면이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을 때 비로소 진짜배기 연주는 시작됩니다. 그것은 머리 속에 집어넣어 두었다가 필요한 때 빼서 쓰는 지식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바로 이 장소에서 상호작용으로 처리해야 하는 의사결정의 세계입니다. 피아니스트의 연습은 지식의 학습과는 다른 것입니다.   


[레벨:6]sus4

2014.05.27 (23:50:42)

깨달음이 없는 주체와 대상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

운전을 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 자동차는 고철덩어리에 불과하다.

깨달음은 운전을 할 줄 아는 것이다.

운전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운전을 하면 차가 앞으로 나간다.

운전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운전을 하면 차가 전봇대에 처박힌다.

균형을 잃었기 때문이다.

동적균형이 있는 곳에 일체화 된 주체와 대상이 있고 깨달음이 있고 의사결정의 특이점이 있다.

그것은 부피와 면적이 없는 그야말로 단 하나의 점이다.

깨달음은 연주를 할 줄 아는 것이다.

연주자가 악기를 연주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지만

연주자가 손가락을 움직여 줄을 튕기면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깨달음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12]wisemo

2014.05.28 (01:51:11)

향기도 배어 나온다.^

[레벨:15]오세

2014.05.28 (09:18:31)

아!

드디어 인류에게도 깨달음의 학문이 주어지는군요. 

나중에 역사가 이것을 어떻게 기록할지 기대되네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30]ahmoo

2014.05.28 (10:20:24)

의사결정학 개론

2014년 역사적 초판 발행예정.. 

[레벨:8]상동

2014.05.28 (12:02:25)

현재의 경영학 또한 소승의 전제위에 세워져 있기에

의사결정의 대상이 해당 기업에 국한 되어 있고


주변환경을 타자화하여 이용의 대상으로 파악할뿐..

결코 주체화하여 동일시 하지 않습니다.


간혹 기업의 사회적의무니 하며 떠벌이는 것은

분위기에 편승한 위선이고요.


따라서 대승을 전제로 하는 의사결정학을 수용하기는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정치학 개론에 가장 먼저 소개되겠지요.


소승이란 의사결정의 단위가 곧 의사결정의 대상인 경우를 말한다.

대승이란 의사결정의 단위보다 의사결정의 대상이 큰 경우를 말한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27]오리

2014.05.28 (14:51:45)

01.jpg

멘델레예프 형이 주기율표를 만들어 원소들 간의 관계를 볼 수 있게 하였듯이.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를 정리하여 의사결정표라는 것을 만들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첨부
[레벨:3]낙오자

2014.05.30 (12:44:37)

'동적 균형을 깨닫는다'기 보다는

동적 균형을 이룬다, 동적 균형의 상태에 있다[ =깨달음]

고 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 아닐까요?^^

[레벨:8]상동

2014.05.30 (21:40:42)

이미 동적균형이니 새삼 다시 이루는게 아니구요..

생명이..사건이..이미 동적균형이거든요.. 아니면 쫑난거죠.


님의 눈에 그 동적균형이 보이느냐를 묻는 겁니다.

대게 정적균형을 동적균형으로 잘 못 알고 있다는 거죠..

[레벨:3]파워구조

2014.05.31 (12:48:56)

깨달음은 말 위에 올라탄다는 비유, 감동적입니다^^

모바일 버젼으로 선생님 글을 읽으면 가로가 잘려서 한 눈에 들어오지가 않습니다. 개선되면 더욱 가독성이 높아질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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