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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6580 vote 0 2014.08.06 (19:19:16)

 


    옛글인데 의도가 잘 전달되지 않았다고 보고 고쳐 씁니다.


    권한이냐 보상이냐


    언제라도 활이 화살을 쏠 뿐, 화살이 활을 쏘는 일은 없다. 원인이 결과를 쏠 뿐, 결과가 원인을 쏘는 일은 없다. 당신이 활과 화살 중에서 하나의 포지션을 선택한다면 마땅히 활을 선택해야 한다. 그것은 사건의 원인측에 서는 것이다. 원인측에 서면 권한을 받고 결과측에 서면 보상을 받는다. 보상을 바라다가 권한을 잃는게 인생의 비애다. 무엇인가? 자기 안의 에너지로 문제를 일으키는 자가 되어야 한다. 피해자보다는 차라리 가해자가 되어야 한다. 해군보다 해적을 택하겠다는 스티브 잡스의 패기를 떠올려도 좋다.


    ◎ 가치 - 사건의 원인측에 선다. 활과 화살에서 활을 선택한다.
    ◎ 의미 - 사건의 결과를 배달한다. 활이 화살을 지배한다.


    인생은 권한과 보상의 방정식이다. 대개 보상 찾다가 권한 잃어서 망한다. 두 마리 토끼를 다잡으려면 권한을 먼저 얻어야 한다. 보상은 자연히 따라오는 것이며, 설사 보상받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다.


    철학은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찾는다. 권한은 가치다. 보상은 의미다. 가치가 의미에 앞선다. 가치는 활과 화살 중에서 활을 선택하는 것이고, 의미는 그 활이 화살을 지배하는 것이다. 가치를 선택하면 의미가 따라오지만, 의미만 빼먹으려 하면 가치가 죽고 마침내 의미도 죽는다.


    권한도 필요하고 의미도 필요하다. 가치도 필요하고 의미도 필요하다. 활없는 화살은 가치가 없고, 화살없는 활은 의미가 없다. 그럴 때 허무하다. 이렇듯 활과 화살, 권한과 보상을 대립적인 관계로 보지 않고, 둘을 하나의 사건 안에서의 기승전결로 연동시켜 보는 관점이 1인칭 주체적 관점이다.


    가치있는 인생을 살았느냐는 화살을 쏜 활의 삶을 살았느냐다. 자식을 낳은 엄마, 제자를 키운 스승, 곡식을 키운 농부와 같다. 의미있는 인생을 살았느냐는 그 화살이 똑바로 날아갔느냐다. 자식과 제자와 곡식이 기대한대로 커주었느냐다. 감독은 가치가 있고, 우승은 의미가 있다. 감독은 되었는데 우승은 못한 홍명보나, 우승반지는 끼었는데 왠지 쓸쓸한 김병현이나.


    인생의 무대에서 어디서 무엇을 할것인가다. 가치에 서서 의미를 배달해야 한다. 권한을 챙기고 보상을 꾀해야 한다. 어떻게 가능한가? 1인칭 동적균형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한다. 그들은 보상받기만을 원한다. 가치를 건너띄고 의미를 찾는다. 많은 보상을 받으면 의미있다고 생각한다. 보상의 쾌감이 크면 막연히 가치있다고 여긴다.


    ◎ 보통의 의미와 가치 – 남보다 더 많은 보상을 받는다.
    ◎ 깨달음 의미와 가치 – 팀플레이 안에서 주도권을 잡는다.


    보통사람은 남보다 비교우위에 서는 것을 가치라 하고, 보상받는 것을 의미라 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말한다면 인생에 보상은 없다. 범죄자의 징벌은 범죄자가 된 사실 자체이며, 의인의 보상은 의인이 된 자체다. 내가 의인이 되었다면 세상이 알아주든 말든 보상은 이미 충분하다. 사회의 보상이란 궁극적으로 열등감의 보상에 지나지 않는다. 열등감이 있는 사람이 보상받고 우쭐대는 것이며, 열등감이 없는 사람은 아무 것도 바라는게 없어야 한다.


    깨달음의 관점은 1인칭이다. 1인칭은 혼자이므로 보상이 없다. 무인도에 조난당한 사람이 금덩이를 발견한 것과 같다. 거기서 그 황금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1인칭은 주인이다. 주인은 보상받지 못한다. 3인칭에 서는 강아지는 집을 잘 지켰다는 이유로 보상을 받는다. 뼈다귀라도 챙긴다. 하인은 일을 잘 했다는 이유로 보상을 받지만 주인은 보상받지 못한다. 그렇다면 1인칭은 무엇을 얻는가? 자기발전을 얻는다. 자기 내부로부터의 보상이다.


    ◎ 깨달음 1인칭 – 시간에서 자신의 성장을 평가한다.
    ◎ 역설의 2인칭 - 경쟁자와 상대평가로 실적을 비교한다.
    ◎ 객관의 3인칭 - 주인이 하인들의 실적을 절대평가한다.


    3인칭은 외부의 제 3자가 객관으로 비교하여 판단한다. 2인칭은 상대방과 직접 비교하여 판단한다. 1인칭은 비교도 없고 보상도 없다. 대신 자기발전을 이룬다. 굳이 말한다면 자신의 과거와 오늘을 비교한다. 과거보다 나아졌다면 그걸로 된 거다. 나아진 근거는 권한을 쥐고 사건의 원인에 서는 거다.


    생선회의 비린내가 싫다고 먹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생선회와 불고기를 객관적으로 비교한다. 나도 어릴 때는 소주의 쓴맛이 싫어서 먹지 않았다. 그때 그시절 나는 소주와 콜라를 비교한 것이다. 불고기가 생선회보다 맛있고 콜라가 소주보다 달콤하다. 그러나 비교의 관점에 머물러 있는 한 자기발전은 없다. 생선회를 못 먹는 어제와 생선회를 먹을 수 있는 오늘을 비교해야 한다. 오닉 나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할 뿐 타자는 비교하지 않는다.


    쥐를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강아지와 쥐를 비교한다. 강아지는 귀엽고 쥐는 무섭다. 그러한 비교판단의 관점을 깨뜨려야 한다. 인생은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면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만약 당신이 무인도에 고립되었다면? 그 쥐를 잡아먹어야 한다. 판단의 기준을 바꿔야 한다.


    바다에서 갓 잡은 생선과 수족관에서 묵힌 생선은 맛이 다르다. 그 맛의 차이를 알아내면 기쁨 두 배다. 마트에서 산 포도와 포도밭에서 딴 포도의 맛은 천지차이다. A와 다른 B를 비교할게 아니라 A 안에서 어제와 오늘을 비교해야 한다. 이 관점을 얻으면 자기발전을 이룬다. 더 넓은 세계와 만난다.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 하지만 계속 두려워 하면 자기만 손해다. 어느 순간에 그것을 끊어내야 한다. 쥐를 무서워하거나 바퀴벌레를 무서워 한다면 역시 그것을 끊어내야 한다. 과일맛을 모른다면 알아내야 한다. 옥수수는 수확한지 네 시간 안에 삶아야 제 맛이 난다. 고구마는 식어야 맛이 있고, 감자는 식으면 맛이 없다. 쌀밥은 도정한 당일에 밥을 지어야 좋다.


    모르면 손해다. 한국인들은 쇠고기 부위를 40가지로 분류하지만 영국인들은 한 가지로 퉁친다. 고기먹을줄 모른다. 일본인은 원래 육류를 못 먹는다. 중국인은 생선회를 먹을줄 모른다. 거의 모든 것을 먹을줄 모르는 영국인은 맛없는 음식을 먹기 때문에 늘 화가 나 있고, 분풀이로 세계를 침략한다. 혹은 축구장에서 훌리건이 된다. 아랍인들은 술을 안 먹으니 화가 나 있는게 자기만 손해다. 일본인과 중국인은 젓가락 위주로 쓰므로 손해다. 인도사람도 맨손이라 뜨거운 국물을 먹을 수 없다. 바깥에서 비교하여 좋은걸 선택하려하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서 적극적으로 맛을 알아내야 한다. 모르면 손해다.


    깨달음도 이와 같다. 깨달음은 어떤 보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쾌감에 이른다. 사건의 원인측에 1인칭으로 설 때 그 쾌감을 누릴 수 있다. 우주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로 너무나 기쁨이 커서, 죽음의 두려움은 사소한 일로 된다. 그 기쁨을 모르면 손해다. 시상식 무대에 주인공으로 선 기쁨보다 우주무대에 인간으로 선 기쁨이 더 크다. 자신이 원인측에 선다면 말이다. 우주라는 무대에서는 자신이 상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나 죽음은 두렵다. 그러나 존재의 쾌감은 두려움을 압도한다. 생선회 맛을 알면 비린내 따위는 미미하다. 자전거를 처음 배우는 사람은 무섭다. 자전거를 잘 타게 되면 무서움이 사라질까? 아니다. 단지 그 무서움을 ‘스릴’이라는 말로 바꿀 뿐이다. 죽음의 두려움? 깨달음을 받아들일 때 그것은 ‘스릴’이다. 자신이 설계한 인생의 드라마에 꼭 있어야 하는 클라이막스의 장치다.


    원인에 설 것인가 결과에 설 것인가? 결과측에 선 개는 보상받기 원하여 꼬리를 친다. 원인측에 선 인간은 주도권을 행사한다. 의사결정권을 획득하고 세상을 설계해 나가는데 진정한 기쁨이 있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태도에 있어서, 어떤 둘을 비교하여 그 둘 중에서 더 나은 하나를 가지겠다는 마음을 버릴 때 진정한 세계에 이른다. 결과의 보상을 버리고 원인의 권한을 취하라. 원인은 사건을 벌이고, 사건은 거룩한 만남을 이루고, 만남은 기쁘다.


    ###


    쓰고 보니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가 연상되는군요. 존재는 권한이고 소유는 보상입니다. 존재는 가치고 소유는 의미입니다. 둘 다 좋으나 존재가 먼저, 가치가 먼저, 권한이 먼저, 이 순서를 지키지 않는데서 인생의 비극이 시작되는거. 중요한 것은 팀플레이 안에서 의사결정권자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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