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읽기
read 11374 vote 0 2006.05.18 (13:28:35)

5리(2키로) 떨어진 큰 마을에서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함성소리는 끊어지지 않고 계속 되었다. 무슨 일인가 하고 마을 어른들이 당산나무 아래 모여 수근거린다. 젊은이 하나가 대표로 선발되어 큰마을까지 달려가 보기로 했다.

“해방이다..!”

큰 마을까지 달려갔던 젊은이가 두 팔을 뻗어 만세를 외치며 달려온다. 곧 소식을 듣고 마을 어른들이 즉석에서 태극기를 만들어 5리 떨어진 큰마을까지 달려가서 만세대열에 합류한다.

어머니에게 들은 45년 8월 15일 어느 시골마을의 풍경이다. 워낙 시골이라 마을에 라디오 있는 집이 한 집도 없었다고 한다.

일제시대 조선사람들은 일본을 조국으로 여기지 않았다. 겉으로는 복종하는 척 해도 내심으로는 다들 저항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유년의 나는 이 이야기에 상당히 고무되어 있었다.

박정희가 죽었다. 45년의 그날처럼 만세대열이 터져나오지 않을까 하고 기대를 했다. 경주시내를 자전거로 한 바퀴 둘러보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아무도 만세를 부르지 않았다. 그날 하루 경주는 조용했다.

뒷산 솔밭 무덤가에서 혼자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그날의 감상을 기록해 두었다. 먼 훗날 누가 옳았는지 확인해 보기 위하여. 어쩌면 내가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일말의 불안감도 있었을 거다.

일제가 망했을 때 만세를 부른 그 국민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되었지? 왜 이렇게 나약해졌지? 일제의 노예가 되었을 때 분노한 조선사람들이 독재자의 노예가 된 사실에 대해서는 왜 분노하지 않는 거지?

물론 사람마다 의견은 다를수 있다. 김일성이 죽었을 때 울부짖는 북한 주민들 까짓거 이해하려면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본래 그런 존재다. 그러나 북한 동포 2천만이 모두 그렇다면 낙담할 밖에.

박정희가 죽었는데 4000만 국민 중에서 단 한 사람도 만세를 부르지 않는다면? 그런 나라에 희망은 없다. 그런 나라에 미래는 없다. 옳고 그름을 뜨나 패기가 없고 의기가 없다. 하다못해 객기라도 있어야 한다. 나약하다.

그런 식으로는 떠먹여주는 밥이나 삼킬 뿐이지 제 힘으로는 아무 것도 못한다. 속세를 떠나 10년간 산으로 들로 바다로 쏘다닌 것은 그 때문이다. 이 인간들에게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다.

박정희 죽은 날 기죽어서 닥치고 있었던 졸장부들과 사귀지 않는다. 그들과 같은 공간에서 숨 쉬어야 한다는 사실이 짜증난다. 내사 투사도 아니고 활동가도 아니다. 나는 단지 인간이 그리울 뿐이다.

동물원의 전시된 원숭이가 아닌, 길들여진 가축이 아닌, 생생하게 살아있는 인간 말이다. 자존심도 알고 부끄러움도 아는 인간 말이다. 인간이라면 인간의 냄새가 나야 한다. 그런데 너 인간 맞냐?

80년 5월의 광주는 나의 피를 끓게 했다. 광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지 못했다. 시외버스를 타본 일이 없는 15살 소년.. 어떻게 경주에서 광주까지 갈 수 있는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광주에서 먼저 터졌으니 곧 대구에서도 터지고 부산에서도 터지고 경주에서도 터지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다. 그러나 조용했다. 사람들은 모른척 하고 있었다. 별 일이 아닌 것처럼. 옆에서 친구가 맞아죽어도 모른 척.

그 공기가 싫었다. 벌거숭이 임금님의 고추를 보고도 다들 못본 척 하는 그 분위기가 싫었다. 인간이란 존재가 다 무엇인가? 어째서 너는 스스로를 개나 돼지와 다른 존재로 여기고 있는 거지?  

내게 있어서 광주는 인간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다. 혹은 폭도라고도 하고 혹은 간첩이라고도 하고 혹은 빨갱이라고도 한다. 그건 논의대상이 아니다. 폭도든 간첩이든 빨갱이든 언어유희에 불과하다.

인간이라는 말이다. 폭도라도 인간이고 빨갱이라도 인간이고 간첩이라도 인간이다. 개가 아닌 인간이다. 돼지가 아닌 인간이다. 인간은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한다. 옳은 결정도 스스로 하고 잘못된 결정도 스스로 한다.

옳으냐 그르냐의 판단에 빠져 있다면 유치할 뿐. 옳든 그르든 선택권을 자신이 갖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내게 있어서 80년 5월의 광주는 인간선언이었다. 한국에도 인간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조금 더 믿어보기로 했다. 민주화가 되지 않았다면 영영 사회로 복귀하지 않을 심산이었지만 어쩌면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한 가닥의 기대는 있었다.

서울대 총학생회가 한총련 탈퇴를 선언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럴 수 있다. 서울대에 인간의 그림자가 사라진 지는 오래되었다. 근데 잼있는건 퇴임한 정운찬이 기특하게도 황라열들의 몽매함을 비판했다는 거다.

서울대 망신은 골고루 다 시킨 정운찬이 이 인간이.. 그래도 대통령이 되고 싶은 욕심은 있다는 말인가. 우습다. 하기사 머 독재자 딸에 노가다 십장도 대통령을 하겠다고 설레발이 치는 판이니 정운찬이라고 못할거 있나.

하여간 한총련이 옳은가 그른가, 혹은 좌파가 옳은가 우파가 옳은가 이전에 인간이 아닌 개나 도야지의 무리들은 원초적으로 안쳐준다. 황라열들의 도야지 선언으로 서울대는 도매급으로 가축시장이 되었다.

현대나 삼성에서 파견된 농장주들이 서울대가 잘 키워놓은 우량돼지와 우량강아지를 선발해갈 것이다. 서울대 황라열들이 적어도 고기값은 할 것이다. 그렇게 서울대는 ‘그래도 고기값은 하는’ 가축시장이 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이기주의라는 점이다. 학생들이 농활을 한다고 해서 농촌에 무슨 보탬이 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러나 농활이 없으면 학생들은 이 나라의 근본을 이루는 흙에 대해서 무지하게 된다.

흙을 모르고는 그 흙 위에 숨붙이고 사는 인간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인간이 근본이다. 이게 옳으니 저게 옳으니 백년을 따져봐도 답 안나온다. 정답은 인간이다. 인간을 모르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발상을 바꿔야 한다. 농활은 지금 현재 농민을 돕는 일이 아니라 농민들과 미래에 관한 약속을 새롭게 하는 거다. 농활을 안한다는 것은 약속을 안한다는 거다. 노선이 옳고 그름을 떠나 운동을 안한다는 건 약속을 안한다는 거다.

지금 우리당이 읍소하고 반성하고 사과하며 뼈를 깍더니 뼈가 없어져서 문어나 낙지로 빌빌거리는 것도 그렇다. 그게 멍청한 짓이다. 과감하게 한나라당을 정면으로 비판해야 한다.

한나라당을 박살내 주는 것은 네거티브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거창한 약속을 하는 것이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도 좋다. 일단은 뭐라도 약속은 해야 한다. 약속을 안하는 바보들에게는 무슨 일을 맡길 수 없다.

왜인가? 약속을 안한다는 것은 소통의 창구를 폐쇄하는 거다. 우리가 아닌 남남으로 갈라서는 거다. 그렇게 되면 영영 끝이다. 다시는 볼 일이 없게 된다.

지키지 못한 개혁 약속은 빚으로 남는다. 빚도 재산이다. 국민이 우리당에 대한 채권을 행사하게 해야 한다.  국민이 우리당만 집중적으로 갈군다는 것은.. 어쨌든 그렇게라도 대화를 이어간다는 거다. 갈구다가 정 들게 해야 한다.

운동을 하면 그 운동이 잘못 갈 때 비판할 수 있다. 그렇게 서로는 대화할 수 있다. 대화하다가 정들 수 있다. 그러나 운동을 않으면 잘못될 일이 없으니 비판할 일도 없다. 그렇다면 대화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 존재는 무(無)가 된다.

약속하지 않고, 대화하지 않고, 부대끼지 않고... 상관할 일이 없으니 인연은 끊어지고.. 점점 투명해져서 사라져 버린다. 그렇게 사라져 무(無)가 되었으므로 무시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서울대를 무(無)시하기로 했다.

서울대는 없다. 정운찬이 기특하게도 잘 키워놓았다는 우량돼지 우량강아지 반값세일의 신림동 가축시장이 있을 뿐.

1910년 광주학생의거 이후 1백년의 전통이다. 세계에서 유일하다. 인류의 자산이다. 학생운동이 면면히 이어져 온 뜻은 글 배운 인간들이.. 그 글을 배울 수 있었다는 자체로 사회로부터 은혜를 입은 것이며 그 은혜를 갚겠다는 거다.

좌파냐 우파냐.. 이런 식은 소리에 집착하는 머저리들과는 대화할 필요 없다. 중요한 것은 저들이 따뜻한 밥먹고 편안히 학교를 다닌다는 그 자체로 국가로부터 신세를 졌다는 거다. 그걸 사회에 도로 갚는 것이 운동인데.

그 사실을 무시하고.. 사회와의 대화를 포기하고.. 학업에나 전념한다는 것은..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 흙에 대한 부정은 결국 자기부정이다. 근본없는 넌 누구냐?

한총련에 문제가 있으면 그 안에 들어가서 싸워야 한다. 싸워서 이겨보여야 한다. 겁먹고 도망친다는 것이 지방대라면 몰라도 서울대 체면으로는 할 일이 아니다. 하여간 황라열.. 정형근, 김민석 이후 최대 기대주다. 그 길로 쭉 가보라. 그 끝이 무엇인지?

List of Articles
No. 제목 글쓴이 날짜sort 조회
1667 타짜 - 우리는 하수가 아니다 김동렬 2006-10-08 12419
1666 타짜 - 유해진 가고 조승우 온다. 김동렬 2006-10-03 14404
1665 김인 9단의 일침 김동렬 2006-09-25 11934
1664 얼빠진 오마이뉴스의 자업자득론 김동렬 2006-09-21 13993
1663 김대중 전대통령의 스케일 김동렬 2006-09-19 13527
1662 황란의 추억 - 유쾌한 한 판의 푸닥거리 김동렬 2006-09-02 14668
1661 어떤 왜넘의 콤플렉스 타령 김동렬 2006-08-31 13319
1660 오스트리아판 올드보이 image 김동렬 2006-08-30 14686
1659 대한민국호의 진로와 고민 김동렬 2006-08-24 13696
1658 도박 권하는 사회 김동렬 2006-08-24 14314
1657 어느 영화인의 죽음에 부쳐 김동렬 2006-08-21 15526
1656 세상에 말 걸기 김동렬 2006-08-20 15586
1655 거짓말 좀 하지 맙시다. 김동렬 2006-08-20 13467
1654 노무현 대통령이 잘못한 것들 김동렬 2006-08-19 18795
1653 근태, 동영, 맹바기, 핵규, 고건 김동렬 2006-08-18 16240
1652 전작권 환수 문제는 김동렬 2006-08-17 14413
1651 구조론이란 무엇인가? 김동렬 2006-08-15 10903
1650 주유소 습격사건과 괴물 김동렬 2006-08-13 13703
1649 깨달음의 룰 김동렬 2006-08-09 15698
1648 실존의 죽음과 그 건너편 김동렬 2006-08-08 113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