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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0533 vote 0 2006.11.28 (20:05:08)



바다 한 가운데서 돌개바람을 만나면 갑판에 쌓인 화물을 버려 배의 중량을 줄여야 한다. 짐을 다 버리되 그 중에 하나만 남길 수 있다면 무엇을 붙잡겠는가?

‘가치’를 잡아야 한다. 가치를 잡은 자는 끝까지 갈 것이요 다른 것을 부여잡은 자는 그 바다에서 배와 함께 수장되고 말 것이다.

끝끝내 놓치지 말아야 할 우리의 가치는 무엇인가?

‘어려울수록 돌아가라’고 했다. 소모적인 말싸움으로 대응해봤자 화풀이에 지나지 않는다. 멀리 보고 생산적인 일에 남은 힘을 쏟아부어야 한다.

적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적들은 이쪽을 관찰하여 정보를 얻고 전략을 세우려 한다. 우리가 의연한 모습을 보인다면 적들의 두려움은 커질 것이다.




이상주의자가 되라

진보의 위기다. 진보의 위기는 이상주의의 위기다. 이상주의를 잃었기 때문에 혹은 이상주의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에 오늘날 진보가 위기에 처한 것이다.

진보가 있기 앞서 이상주의가 있었다. 이상주의라면 유토피아관을 말할 수 있다. 모든 철학과 사상의 중심에는 어떤 형태로든 유토피아관이 존재한다.

일찍이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이 있었고 토마스 모어가 유토피아를 썼으니 이것이 근대 소설의 효시가 되었다. 15세기 이래 르네상스 운동과 근대 계몽주의 사상의 이면에는 당시에 붐을 이루었던 유토피아론의 역할이 있다.

여러 형태의 유토피아가 있다. 밀턴의 실낙원은 에덴동산 개념에서 파라다이스를 그리고 있다. 제임스 힐튼의 ‘잃어버린 지평선’에 등장하는 샹그릴라도 있다. 플라톤의 이상국가나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와는 다르다.

우리에겐 우리식 유토피아가 있다. 중국에 도연명의 무릉도원이 있고 한국의 고려가요에 청산별곡이 있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바로 그것이다. 고려인의 유토피아관이 반영되어 있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이 말하고 싶어하는 ‘산 뒤에 있는 그리운 것들’에는 그의 소박한 유토피아관이 발그레 상기된 얼굴로 숨어 있다. 이외수가 다목리에 꾸미려 하는 것도 하나의 작은 유토피아가 아니겠는가.

이준익 감독의 영화 ‘라디오스타’는 강원도의 소도시 영월을 배경으로 남성들만의 작은 유토피아를 그려내고 있다. 멀리서 찾을 일이 아니다. 의외로 이상주의는 우리 가까운 곳에 다양한 형태로 모습을 숨기고 있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유토피아.. 그것은 영감(靈感)의 원천이다. 모든 문학과 예술은 작가의 심중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이상주의로부터 아이디어를 조달한다. 누구나 마음 속에 이상향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우리의 정신은 참으로 가난해지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미 그것을 가졌는가? 당신의 샹그릴라는 어떤 것인가?

어린이의 동화책..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나 오즈의 마법사나 미하엘 엔데의 모모나 아라비안 나이트나.. 나름대로 소박한 유토피아관을 반영하고 있다. 그것이 인성의 씨앗이 된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그 상상력의 씨앗이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다가 어느 구석진 곳에 뿌리를 내리고 점차 자라나 가지를 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때.. 그대의 인간성을 오롯이 규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상주의가 리얼리즘이다

오늘날 진보는 유토피아를 잃어버렸다. 진보의 출발점이 유토피아인데 출발점을 잃고 방향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마르크스가 과학적 사회주의를 제창한 이래 리얼리즘이 득세하면서 진보는 유토피아를 잃고 왜소해졌다.

무슨 일이든 근본이 중요한 법이다. 그런데 근본을 잊었다. 원천을 잃어버렸다. 아이디어가 샘솟던 상상력의 샘이 말라버렸다. 비단옷 입고 돌아갈 고향을 잃어버렸다. 길은 떠나왔는데 떠나온 목적을 잊어버렸다.

유토피아는 비현실적이다. 눈앞의 승부에 집중하려면 현실문제로 눈을 돌려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말은 단기적으로 옳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 비현실을 부정한 결과 진보는 유전적 다양성을 잃어버렸다.

장기적으로 보면 위험을 헤지(hedge)해야 한다. 수출기업이 환율변동의 위험을 헤지하기 위해 달러를 유로로 바꾸는 판이다. 여우굴에 출입구가 아홉이라 했는데 진보는 리얼리즘이라는 하나의 출입구를 고수한 결과 위기가 닥쳤을 때 도망갈 퇴로는 끊어지고.. 전략적 유연성을 상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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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이상으로서의 가치가 있다. 이상이 현실에 반영되지 않더라도 이상의 존재 그 자체로 충분히 좋은 것이다. 이상을 무리하게 현실과 접목시키려 하기 때문에 도리어 실패한다.

근대는 대탈주였다. 기독교가 그어놓은 금제의 울타리를 넘어 일제히 달아난 것이다. 왜? 누군가가 그들의 상상력에 불을 질렀기 때문다. 그것이 유토피아다. 지리상의 발견, 원양항해, 신대륙 진출, 동양에 대한 동경이 모두 여기서 출발하고 있다.

기독교도에 천국이 있으면 불교에 극락이 있다. 천국과 극락 역시 하나의 유토피아다. 토마스 모어가 유토피아를 쓰자 천국이라는 상상력의 울타리가 파괴되었다. 그들은 천국이 하늘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미지의 신대륙이나 동양의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다고 믿고 일제히 탈주를 벌였고 그 결과 근대라는 징검다리를 만났다.

공자는 요순시대라는 이상향을 창안했다. 기독교가 천국이라는 울타리로 묶어버렸듯이 공자는 주나라의 이상정치라는 울타리로 묶어버렸다. 불행하게도 중국에 토마스 모어가 없었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왕도정치라는 공자의 울타리에 얌전히 갇혀 있었다.

동양인들은 공자의 요순이라는 이상향을 압도하는 새로운 유토피아를 상상해내지 못했다. 상상하지 않으니 모험하지 않는다. 호기심과 열정이 죽어버렸다. 탈주를 벌이지 못했다. 근대를 만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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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주의는 리얼리즘이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천국이 왜 현실적인지 이 역설을 이해해야 한다. 무엇인가? 내가 어떤 이상향을 상상하는가에 따라 내가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할 지가 결정되는 것이다.

엘도라도를 상상하는 사람과는 증권사 객장에서 만난다. 샹그릴라를 상상하는 사람과는 티벳 오지에서 만난다. 청산별곡을 노래하는 사람과는 자연 속의 작은 풀꽃마을에서 만난다.  

내가 어떤 유토피아를 가슴 속에 품느냐에 따라 어떤 사람을 사귈 것인가 하는 현실적인, 너무나 현실적인 문제가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상주의는 리얼리즘이다.

이러한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오늘날 종교가 가진 권력의 1/10도 가지지 못한 진보의 현실을 극복할 수 없다. 왜 맹랑하기 짝이 없는 종교 따위에도 밀리고 있는가? 그것은 진보가 너무나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리얼리즘을 강조하는 진보가 오히려 비현실적이라는 역설을 이해해야 한다. 하나의 전술을 고집하게 되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천국이라는, 유교가 요순이라는 하나의 유토피아를 고집하다 왜소해진 것과 같다.

게임 속의 캐릭터들은 비현실적이지만 그 게임을 하는 소년들은 현실공간에 실재한다. 사라지지 않는다. 이건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매일 아침에 밥을 먹듯이 이상주의라는 정량의 꿈을 섭취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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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에서는 무능한 유비가 주인공이고 유능한 조조가 악역이다. 조조가 나은데 왜 유비인가? 독자들은 역사 속의 실존인물 유비나 조조의 업적을 평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상주의를 평가한다.

● 조조의 이상주의
● 유비의 이상주의

유비삼형제가 도원에서 맺었던 맹세는 너무나 현실적이다. 왜인가? 그 소설의 독자들도 그들처럼 맹세하고 싶기 때문이다. 유비가 관우, 장비를 얻었듯이 그들도 얻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조조의 업적인 둔전법의 시행은.. 어쩌라고?

생각하라. 본받아 얼마나 많은 도원결의와 삼고초려가 이루어졌겠는가를.

유비와 관우와 장비의 우정은 누구라도 흉내낼 수 있다. 제갈량의 삼고초려도 주변에서 얼마든지 있을 법한 이야기다. 너무나 현실적이다. 조조의 둔전법은 흉내낼 수 없으므로 비현실적이다. 이건 역사가의 관점과는 다른 미학적 관점이다.

왜 미학의 관점을 포기하고 권력의 관점만을 강요하는가?  

우리가 수호지나 임꺽정이나 홍길동전을 읽을 때 그 안에 감추어진 이상주의를 보는 것이다. 그것을 현실로 착각하는 바보는 없다. 임꺽정은 영웅이 아니라 산도적이다. 그것을 모르는 독자는 없다.

그러나 오늘날 좌파의 계몽주의는 어떠한가? 그들은 비뚤어진 시선으로 감시한다. 독자가 혹시나 소설 속의 가상세계를 현실로 착각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그들은 독자들이 임꺽정이나 홍길동을 본받아 도둑이 되지 않을까 경계한다.

천만에! 독자들은 청석골이나 율도국의 이상주의를 빌릴 뿐이다. 그 작은 이상향에서 민중이 스스로 내부에 질서를 부여하여 나아가는 과정을 본받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비록 현실세계에서 도둑이라 해도 그들이 가슴 속에 품었던 이상주의는 얼마든지 유효하다.

청석골은 살아있다. 율도국은 살아있다. 이상주의는 살아있다. 나는 오늘도 사이버 청석골을 꿈 꾸고 인터넷 율도국을 꿈 꾼다. 우리들만의 작고 빛나는 공동체를 꿈 꾼다. 이상주의는 죽지 않는다.

엘도라도를 꿈 꾸는 사람과는 증권사 객장에서 만나고 샹그릴라를 꿈 꾸는 사람과는 티벳 오지에서 만난다. 내가 만나야 할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신은 진정 누구를 만나기를 원하는가?  

인생에서 얻는 것은 하나 뿐이다. 기다려야 할 신통한 소식은 하나 뿐이다. 그것은 진정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어떻게 만날 것인가?

60억 인류에게 60억 가지의 이상주의가 있어야 한다. 각자에게 각자의 이상주의를 찾아주는 방법으로 그들이 진정 만나고자 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맺어주는 일이 문화인의 몫이다. 모든 작가와 예술가의 역할이 그러하다.


공자와 노자의 유토피아

옛부터 두 가지 형태의 이상주의가 있었다. 니체는 이를 질서를 숭상하는 아폴론의 이상과 무질서를 숭상하는 디오니소스의 이상으로 설명하고 있다.

르네상스는 그리이스 정신의 부활이다. 그리이스적인 것은? 비너스상의 황금비례 팔등신으로 대표되는 극도의 질서다. 그러나 그것은 스파르타 군대의 질서다.  

아테네의 자유분방함은 다른 것이다. 오늘날 서구정신은 아폴론을 살려내되 디오니소스를 살려내지 못하고 있다. 서구의 미학은 지나치게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질서의 논리에 얽매여 있다.

로마가 그리이스를 제압하면서 그리이스의 미학을 받아들였지만 스파르타를 배우되 아테네를 배우지 못하였다. 아폴론을 배우되 디오니소스를 배우지 못하였다. 불완전하다.

그리이스가 불과 백년 만에 전 세계에 널리 전파했던 것을 로마는 천년을 지배하고도 전파하지 못하였다. 오늘날 그들의 정신은 널리 인류와 소통하지 못한다. 그다지 매력적이지가 않다. 유혹하지 못한다.


● 컨버전스의 이상.. 공자의 예(禮)는 질서다. 그것은 코스모스의 세계다. 니체의 아폴론이다. 플라톤의 이상국가,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와 같다.

● 디버전스의 이상.. 장자의 혼돈(混沌)은 무질서다. 그것은 카오스의 세계다. 니체의 디오니소스다. 파라다이스, 샹그릴라, 무릉도원, 청산별곡과 같다.

공자에게는 요순시대의 왕도정치라는 유토피아관이 있다. 요순시절에는 군신간에 상하간에 질서가 있었는데 춘추전국의 혼란기에 그 질서가 없어졌다는 거다. 신하가 임금을 거역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거역하게 되었다. 바로잡아야 한다.

장자의 혼돈 개념에는 도교의 유토피아관이 숨어있다. 그것은 무질서한 세계다. 장자는 도시민의 유토피아가 아닌 부족민의 유토피아를 말하고 있다. 공자는 도시가 발달한 상나라의 후예이고 노자는 남쪽 초나라 사람이다.

당시만 해도 양자강 남쪽은 개발되지 않았다. 노자는 수레라는 것이 도무지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하고 생각했을 정도로 촌사람이었다.  

두 가지 이상주의가 있다. 하나는 공동체에 질서를 부여하여 높은 효율에 도달하려는 역학의 이상주의다. 다른 하나는 개인의 완성을 통해 온전한 소통에 이르려는 미학의 이상주의다. 전자는 유교에 가깝고 후자는 도교에 가깝다.

전자는 주류이고 후자는 비주류다. 전자가 아폴론이면 후자는 디오니소스다. 전자가 컨버전스이면 후자는 디버전스다. 전자가 역학적 가치를 주장하면 후자는 미학적 가치를 주장한다. 전자가 메인스트림이면 후자는 아웃사이더다. 전자가 정치의 지배면 후자는 문화의 전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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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이 침체한 것은 공자의 요순시대를 대체하는 새로운 유토피아를 상상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자가 왕도정치라는 낡은 이상주의로 그들의 상상력을 가두어 버린 것이다. 그 울타리를 벗어나는 탈주를 감행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지만은 않다. 동양사는 공자의 유토피아와 노자의 유토피아가 대결하는 역사다. 죽림칠현과 청담사상을 앞세워 남조시대에 발달한 미학은 도교사상과 선종불교 사상에 영향받은 것이다.  

중요한 점은 이 두가지 이상주의가 역사이래 공존해 왔으며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배척하지 못했다는데 있다. 둘은 상호보완적이기 때문이다. 진보와 보수의 싸움은 실상 두 이상주의의 싸움과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진보는 있고 보수는 없다

진보는 이념이 있고 보수는 이념이 없다. 이념이 없다는건 이상주의가 없다는 말이다. 보수는 진보가 가진 두 이상주의의 모순과 충돌과 견제와 분열과 실패에 따른 부스러기를 먹고 산다. 그들은 빌붙어 기생하는 것이다.

역사는 두 개의 날개로 난다. 진보와 보수의 날개가 아니라 공자의 이상과 노자의 이상이라는 두 날개로 난다. 아폴론의 날개와 디오니소스의 날개로 난다. 주류와 비주류의 날개로 난다. 도시민의 이상과 부족민의 이상으로 난다.

오늘날 보수를 키워온 것은 9할이 진보의 실패였다. 진보는 부단히 실패해 왔다. 왜 실패하는가? 날마다 새로운 이상을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결코 만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보는 실패하면서 나아가는 것이 맞다.

한국의 진보 역시 두 세력이 공존하고 있다. 평론가들에 의해 극찬을 받은 괴물에는 반미라는 컨버전스의 이상과 가족주의라는 디버전스의 이상이 공존하고 있다.(빌어먹을 헐리우드의 가족주의가 한국 영화를 오염시킨 것이다. 나쁘게 보자면 그렇다. 평론가들이 이 부분을 슬쩍 비켜가는 것이 얄궂다.)

반미라는 구호에는 반일이나 반북이라는 구호와 마찬가지로 가장 바깥에 크게 대척점을 세우므로서 내부를 하나의 질서로 묶어내려는 컨버전스의 동기가 숨어 있다. 외부를 적대하는 방법으로 내부를 결속하기다.

반미든 반일이든 반북이든 결론은 한 마디로 ‘내 밑으로 줄서라!’ 이거다. 그렇지 않은가? 외부를 반대하는 것은 내부를 결속하기 위한 전술에 불과하다.

말하려는 바는 이상주의의 등대를 보고 나아가는 것이 맞지 반미나 반일이나 반북으로 등대를 삼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가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무언가를 반대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모두 가짜다. 오늘날 반미에 앞장서고 있는 자들이 대개 친미적인 본질적 속성을 가진 것이 그러하다. 그들이 반미하는 척 하는 이유는 미국통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미국에 살고 있거나 아니면 미국을 드나들며 미국에 대해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 그걸로 장사한다. 반미를 표방하면서 실제로는 미국을 팔아먹고 일용할 양식을 조달한다. 조선일보의 반북상업주의와 같다.

미국통의 반미나 일본통의 반일이나 북한통의 반북은 속임수다. 그들은 반미를 주장하며 지속적으로 미국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서 우리의 관심사를 미국 하나에 묶어놓는다. 유럽도 있고 제 3 세계도 있는데 말이다.

“너희들이 미국을 알아? 미국에는 네오콘이라는 대마왕과 프리메이슨이라는 소마왕이 살고있다구. 니들은 몰랐지?”

이런 식이다. 우리의 관심을 미국에 묶어놓는 것, 그게 결론은 친미다. 이런 식으로 누군가를 반대하기 위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진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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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라면 스스로 빛을 내는 별이어야 한다. 누군가를 반대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매력으로 유혹해 보여야 한다.

이상주의는 반대하지 않는다. 이상주의는 스스로 유혹한다. 이상주의에는 국경이 없다. 이상주의는 어느 나라도 반대하지 않는다.

우리는 미국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식 슈퍼맨 싹쓸이 모델을 반대하는 것이다. 일본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동물 일본주식회사 모델을 반대하는 것이다. 우리는 실로 미국모델과 일본모델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모델을 자랑하는 것이다. 한국인에게는 자랑할 한국인의 유토피아가 있다. 이것이 진짜다.

반미하고 반일하고 반북하기 전에 한국모델은 무엇인가? 당신은 어떤 매력으로 타인을 유혹하고자 하는가? 진정 당신의 모델은 무엇인가? 당신의 심중에 있는 유토피아는 어떤 것인가?

각자는 각자의 모델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지만 소통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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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는 공자의 이상과 노자의 이상이 공존한다. 공자는 도시사람이 예로 공존하는 이상을 만들었고 노자는 시골사람이 도로 소통하는 이상을 만들었다.

공자의 이상은 만원지하철에서 장애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이상이고 노자의 이상은 시골사람이 멀리서 찾아온 손님을 환대하는 이상이다. 당신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싶다면 공자의 이상을 배워야 하고 옛 친구의 방문을 받고 싶다면 노자의 이상을 배워야 한다.

사람들이 이문열을 따시키는 것은 그에게 멀리서 찾아온 친구를 환대하는 노자의 이상이 없기 때문이고 이외수의 집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것은 그에게 누구에게라도 문을 열어놓는 노자의 이상이 있기 때문이다.

두 이상은 다르다. 그 다름을 드러내야 한다. 다름이 재산이고 다름이 가치다. 다르기 때문에 경쟁하고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보완하고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필요로 하고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사랑한다.

역사는 진보 뿐이며 보수는 없다. 보수는 이념이 없다. 보수는 이상주의가 없다. 어떤 이상주의든 당신 마음 깊숙한 곳에 꿈을 품고 있다면 그것이 결국 진보다. 물고기는 꼬리를 왼쪽으로 젓든 오른쪽으로 젓던 결국 앞으로 나아간다.

당신이 어떤 이상주의를 가지든 결국 타인의 이상주의와 만나 맞물리면서 전진하는 추력을 얻는다. 돈을 쫓는 엘도라도의 이상이든 평화를 쫓는 샹그릴라의 이상이든 그대에게 꿈이 있다면 그것은 결국 진보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비참한 것은 꿈이 없는 것이다. 그들은 남의 이상을 쫓는다. 그들은 미국의 이상을 쫓아 미국을 숭배하고 일본의 이상을 쫓아 일본을 숭배한다. 자기의 심중에 품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뻐꾸기 알을 키우는 개개비 신세다. 키워봤자 그것이 제 자식이 아닌 남의 자식인 것이다.

조중동과 딴나라는 자유가 저들의 이념인양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자유를 억압한 독재자의 하수인이다. 그들도 터진 입으로 곧잘 민주주의를 말하긴 하지만 본질은 민주주의 말살에 공이 있는 전두환의 졸개다.

그들의 목표는 모든 변화를 반대하고 기득권을 지키는 것이다. 꿈이 없는 인간에게 두려움 밖에 남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꿈이 있다면 금제의 울타리를 넘어 탈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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