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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1417 vote 0 2006.11.23 (22:27:03)

조지 오웰의 세계

조지 오웰의 ‘1984’년은 인간을 길들여 노예로 만드는 전체주의 사회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서구사상을 함부로 받아들이는 한국의 강단학계 역시 정신적 노예상태에 머물러 있다.

‘1984년’에서 가상의 제국 오세아니아 국가군은 신어(newspeak)를 제정하여 구어를 대체하게 한다. 신어는 평화나 자유, 사랑, 용기, 호기심과 같은 불온한(?) 말을 없애버린 것이다.

전체주의가 인간을 통제하는 방법은 언어를 파괴하는 방법으로 인간의 비판능력을 마비시키는 것이다. 실제로 구 소련에서는 언론이나 문단에서 ‘사랑’이라는 말을 일반적으로 쓰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의 지식인들 역시 ‘진리’나 ‘사랑’이나 ‘깨달음’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것을 점잖지 못한 일로 여긴다. 사랑이나 영혼이나 열정을 말하면 체면이 깎인다고 여긴다.

그들의 사고는 여전히 사농공상의 유교적 신분질서에 묶여있다. 월급쟁이가 양복에 넥타이를 매는 방법으로 자기 신분을 나타내듯이 그들은 언어라는 의복으로 자신을 단장하는 것이다. 두려움 깊이 감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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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칼럼에 ‘지식을 가졌다는 것은 목수가 규구를 가지는 것과 같아서’라고 썼더니 화를 내는 분이 있었다. 그 분이 규구를 몰라도 normal은 알 것이다. 남의 normal은 알아도 우리의 규구는 모른다는데 슬픔이 있다.

규구(規矩)는 콤파스와 곱자(norm)다. 문제는 규칙이나 규격이나 규율이나 규범이 다 규구에서 나왔는데 규구를 모르면서 어찌 규칙을 알고 규격을 알고 규율을 알고 규범을 알겠느냐다.

규는 콤파스다. 콤파스는 하나의 중심점을 기준으로 동그랗게 묶어버린다. 땅바닥에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그 그어진 금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것이 곧 규칙이나 규격이나 규율이나 규범이다.

그런데 국어사전은 다르게 말하고 있다. ‘행동하거나 판단할 때에 마땅히 따르고 지켜야 할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설명된다.

● 마땅히 지켜야 할 가치판단 기준.
● 그어놓은 금 밖으로 나가지 마라.

느낌이 다르다. 달라도 너무나 다르다. 단어는 같은데 그 본래의 의미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180도로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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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컵의 물이 있다. 반 밖에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는 사람이고 반컵이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래에서 위로 우러러보는 사람이다. 보는 위치에 따라서 달라진다.

컵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컵이라는 거울에 자기 자신을 비추어보는 것이다. 어떤 위치에서 바라볼 것이냐다. 주인의 관점에서 보면 규범은 ‘금 밖으로 나가지 마라’고 노예의 관점에서 보면 ‘마땅히 지켜야 할 기준’이다.

국어사전은 노예의 관점에서 기술되어 있다. 조지 오웰의 1984년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언어는 파괴되고 있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노예의 언어에 중독되어 있다.  

‘금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것이 규범이다. 이러한 본질을 안다면 단박에 의문이 든다. 머리카락 길이를 5센티로 제한하는 고등학교의 교칙이 있다면 5센티 기준으로 금을 딱 그어놓고 금 밖으로 나가지 마라는 거다.

그런데 왜 5.5센티면 안되고 딱 5센티여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이렇게 의문을 가지는 것이 민주주의다. 그러나 이러한 본질을 모른다면 어떻게 될까? 의문을 가질래야 가질 수가 없다.

조지 오웰의 ‘1984년’에서는 단어줄이기 방법을 쓴다. 영국 사회주의(England Socialism)는 영사(INGSOC)로 줄여진다. 이런 식으로 언어는 점차 암호가 되고 기호가 된다. 언어가 인간을 병들게 한다.

원전을 잃고 뿌리를 잃고 근본을 잃고 본질을 잊어서 비판할래야 비판할 수 없게 된다. 오늘날 한국어는 한자어에 오염되고 영어에 오염되고 지식인의 계급어에 의하여 변개된 결과 이미 1984년의 newspeak가 되어가고 있다.

인간은 길들여진다. 야성을 잃고 순치된다. 비판능력은 마비된다. 우리말 그림쇠를 잊고 외국어 콤파스를 쓴다. 우리의 규구를 잊고 외국어 norm을 쓴다. 조지 오웰의 디스토피아는 우리 속 깊이 침투해 있다.

본질을 알아야 한다. 출발점을 알아야 한다. 뿌리를 찾아야 한다. 원시의 삶을 알아야 한다. 부족민의 삶을 알아야 한다. 자연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야성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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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가 왜 떨어지지?”
“무거우니까 떨어지는 거지.”
“아 그렇구나? 무거우니까 사과가 떨어지는 구나.”

이런 식으로는 뉴튼 할아버지가 와도 만유인력을 발견할 수 없다. 인간은 언어에 속는다. 무겁다라는 단어가 인간을 속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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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구준승(規矩準繩)이라 했다. 콤파스와 곱자(norm)와 수준기와 먹줄이다. 먹줄은 점에서 선에 이르고, 곱자는 선에서 각에 이르고, 콤파스는 각에서 입체에 이르고 수준기는 입체에서 공간에 도달한다.  

무엇인가? 한 채의 건물은 벽돌과 벽돌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규구준승이 점과 선과 각과 입체를 조직하여 공간에 도달함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거대한 발상의 전환이다.

무엇인가? 건축가는 벽돌을 쌓거나 나무를 깎고 돌을 쪼는 사람이 아니라 공간을 조직하는 사람이다. 만약 나무를 짜서 집을 짓는 것이 맞다면 목수의 상징은 망치와 대패와 끌과 톱이어야 한다.

고대인은 왜 목수의 상징을 망치와 대패와 톱과 끌로 하지 않고 규구준승으로 정했을까? 당신은 여전히 건축이 벽돌을 쌓거나 나무를 짜거나 돌을 쪼아서 이루어진다고 믿는가 아니면 공간을 조직하여 이루어진다고 믿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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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를 안다는 것은 엔진과 기어의 결합을 아는 것이 아니라 토크와 마력의 상호관계를 아는 것이다. 건물이 공간을 조직함으로 이루어진다면 자동차는 운동을 조직함으로 이루어진다.

● 노예의 시선 - 엔진과 기어의 결합
● 주인의 시선 - 토크와 마력의 상호관계

자동차가 엔진과 기어로 조직된다고 믿는 자는 기껏해야 운전수가 될 수 있을 뿐이다. 토크와 마력으로 조직된다고 믿는 자가 진정한 장인이 될 수 있다. 이것은 동일한 하나의 대상에 대한 상이한 다른 관점이다.

필자는 사물을 보는 시선에 있어 우리의 일상적인 고정관념과 다른 더 높은 시선이 존재함을 말하고 있다.

규범이 마땅히 지켜야 할 가치판단 기준이라 믿는 자는 건물이 벽돌의 집합으로 보일 것이고 자동차가 엔진과 기어의 결합으로 보일 것이고 사과가 떨어지는 이유는 무겁기 때문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것은 노예의 시선이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서 답을 찾는다. 그들은 실패한다. 망치와 톱과 끌과 대패로 무장한 목수는 한옥을 지을 수 있으되 양옥을 지을 수 없다. 규구준승으로 무장한 목수는 한옥이든 양옥이든 지을 수 있다.

망치와 끌과 대패와 톱은 구체적이고 기계적이다. 규구준승은 추상적이고 수학적이다. 구상은 특수하되 추상은 보편된다. 구상은 소재와 재료의 벽에 막힌다. 추상은 그 벽을 넘는다.

구상을 넘어 추상에 도달해야 한다. 노예가 아닌 주인의 시선이다. 고대인은 알고 있었다. 규범은 그어놓은 금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것이며 목수는 공간을 조직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도시민이 노예의 시선을 가진다면 부족민은 주인의 시선을 가진다. 농경민은 노예의 시선을 가진다면 유목민은 주인의 시선을 가진다. 노예는 맡은 바 일을 할 뿐이다. 주인은 돌아가는 판 전체를 조망한다.

자유인이 되어야 한다. 자유인의 시선을 얻어야 자유인이 될 수 있다. 돌아가는 판의 일사이클의 전체과정에 참여해 본 사람이 자유인의 시선을 얻을 수 있다. 오늘날 고도화된 도시사회에서 그런 경험을 얻기는 매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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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연기자는 표정을 잘 짓는 사람이 아니라 그 무대를 장악하고 공간을 휘저을 수 있는 사람이다. 연기자가 얼굴을 찡그리거나 입을 헤벌려서 연기한다고 믿는다면 그 연기자는 성공하지 못한다.

연기자는 제 얼굴의 살갗을 움직여서 거기서 기막힌 표정을 끌어내는 사람이 아니라 관객과의 소통을 끌어내는 사람이다. 무대와 관객과의 거리는 10미터다. 그 10미터라는 공간을 장악하고 통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피아니스트는 건반을 때리는 사람이 아니라 음(音) 하나하나를 조각하는 사람이다. 음은 현에서 울려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에서 조립되고 건축된다. 음은 공간에서 자란다. 음은 그 공간에서 점에서 선으로 면으로 입체로 성장한다.

관광객은 관광지에 모여든다. 그들은 탑을 등지고 사진을 찍는다. 순례자는 지구라는 캔버스 위에 자기 발자국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 관광객이 노예의 마음으로 길을 떠난다면 순례자는 주인의 마음으로 여행을 떠난다.

동일한 하나의 대상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이 존재할 수 있다. 어떤 관점으로 바라볼 것인가이다. 노예의 마음으로 볼 것인가 주인의 마음으로 볼 것인가?

● 규범 - 마땅히 지켜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땅바닥에 그어놓은 금인가?
● 목수 - 나무를 깎는 사람인가 아니면 공간 그 자체를 조직하는 사람인가?
● 자동차 - 엔진과 기어의 결합인가 아니면 토크와 마력의 상호관계인가?
● 연기 - 얼굴을 찡그리는가 아니면 무대와 객석 사이의 공간을 휘젓는가?
● 사과 - 무겁기 때문에 떨어지는가 아니면 공간의 평형계가 존재하는가?
● 연주 - 건반을 때리는가 아니면 음 하나하나를 조각하는가?
● 여행 - 관광지에 모여드는가 아니면 지구라는 캔버스에 그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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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규범을 마땅히 지켜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한 노예의 마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유인의 시선을 얻을 수 없다. 이미 길들여진 것이다. 그것이 익숙하고 편해서 자유가 두렵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마술에 속는 이유는 마술사의 손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것이 홀리는 것이다. 홀리지 말아야 한다. 속지 말아야 한다. 보여주는 것을 보지 말아야 한다. 주인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사이를 보아야 한다.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구조가 있다. 그러므로 구조를 아는 것이 아는 것이다. 사이는 나와 너의 사이다. 사이에 구조가 있고 관계가 있고 인연이 있고 마음이 있고 만남이 있고 소통이 있다.

사이를 보는 방법을 얻을 때 규범이 땅 바닥에 그어놓은 금으로 보이고 목수가 공간을 조직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피아니스트가 음을 조각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자동차가 운동을 조직하는 매커니즘으로 보인다.

사이에 구조와 평형과 대칭과 시스템과 석가의 중도와 노자의 무위와 공자의 중용이 있다. 그 시선을 얻을 때 원시의 건강함과 비주류의 창발성과 부족민의 완전함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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