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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구꼴통의 존재는 사회병리 현상

 

“도둑질이 나쁜 건가요?” 7살 동생과 함께 절도를 일삼은 12살 소녀의 민희(가명) 이야기를 보도한 25일자 경향신문 기사 제목이다.

아무도 그녀에게 ‘도둑질은 나쁜 것’이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새아빠는 집에 들어오는 날이 드물었고 엄마는 지능이 모자란다.

누가 이 소녀에게 도둑질이 나쁘다고 말해줄 수 있을까? 그럴 자격이 있을까? 신뢰할 수 있는 가족만이 그렇게 말할 권리가 있다.

사회는 하나의 가족이다. 그러므로 사회는 민희에게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말할 자격이 있다. 그런데 과연 우리 사회는 가족인가? 그런가?

그동안 민희를 내버려 두었던 사회가 갑자기 개입한다면..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 한 번도 얼굴 본 적이 없는 먼 친척이 갑자기 나타나서 ‘이제부터 내가 네 부모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소녀는 사회를 향하여 반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도둑질 안하고 착하게 살면 사회가 나를 보장해 주나요? 그 약속 믿어도 되나요?”

이 질문에 대하여 “그렇다. 사회의 약속을 믿어!”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어차피 사회는 생존경쟁의 정글인데.. 눈 감으면 코 베어간다는 아귀다툼의 아수라장에서 민희는 나름대로 살아남아 보려고 악착같이 덤볐고 그 결과가 도둑질로 나타났는데 그걸 비판할 수 있는가이다.

원하는 것을 소유하는 인간의 방법은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강탈, 둘째는 절도, 셋째는 구매, 넷째는 생산, 다섯째는 대여다.

힘이 있으면 강탈할 수 있다. 돈이 있으면 구매할 수 있고, 신용이 있으면 대여할 수 있고, 기술이 있으면 생산할 수 있다. 12살 소녀가 가진 것은 꾀 밖에 없다. 그는 절도의 방법을 선택했다.

아귀다툼이 벌어지는 생존경쟁의 정글에서 나름대로 방법을 찾은 것이다. 그 방법이 틀렸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그의 가족임을 증명해야 한다. 사회가 가족이고 세계가 가족임을 증명해야 한다.

가족이면 힘을 합쳐야 하고 힘을 합치면 기술을 이루어 생산할 수도 있고, 신용을 이루어 대여할 수도 있고, 소득을 이루어 구매할 수도 있다. 도둑질은 신용을 파괴하여 가족이 힘을 합칠 수 없게 한다.

도둑질이 나쁜 이유는 가족이 힘을 합쳐서 이룰 수 있는 생산의 방법, 신용의 방법, 구매의 방법을 방해하기 때문에 나쁘다. 도둑질을 하면 신용을 잃어 타인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된다. 생산할수도 구매할 수도 없게 된다. 그러므로 나쁘다.  

소녀는 마음이 병들어 있다. 병든 소녀를 나무랄 수 없다. 환자는 치료와 보호의 대상이지 징벌의 대상이 아니다. 소녀를 방치한 부모를 나무래야 한다. 그러나 부모 역시 병들어 있다. 어머니는 지능이 모자라고 새아빠 역시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누구를 나무래야 하나? 병든 가족을 방치한 사회에 책임이 있다. 소녀의 마음이 병든 이유는 부모 때문이고, 부모의 마음이 병든 이유는 사회 때문이다. 문제는 그 사회조차 건강하지 않다는데 있다. 사회가 건강하다면 이 가족을 이렇게 방치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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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들은 아무런 죄의식 없이 남의 것을 훔친다. 인디언 사회에는 원래 절도가 없다. 소유권 개념이 없기 때문에 절도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도둑이 없다.

19세기 때의 이야기다. 인디언 사회에서는 친구인가 적인가가 중요하다. 친구의 집에 마음에 드는 것이 있다면 달라고 한다. 친구가 원하면 내줘야 한다. 줄 수 없는 것이라면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여분의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주지 않으면? 친구가 아니다. 친구가 달라는데 어떻게 안줄 수가 있다는 말인가? 주지 않는다면 친구가 아니고 친구가 아니면 적이다. 적은 죽인다. 그것이 인디언의 방식이다.

대부분의 인디언 부족들에는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라이벌 부족이 하나씩 있다. 친구관계가 아닌 라이벌 부족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죽인다.

백인들은 창고에 식량을 쌓아둔다. 인디언이 우연히 백인의 식량창고를 목격하고 깜짝 놀란다. 이렇게 많은 식량이 쌓여 있는데도 친구에게 나눠주지 않다니. 인디언은 배신감에 치를 떤다.

6개월 전 분명히 큰 아버지(대통령)의 이름으로 인디언 추장 미친 말과 약속을 했다. 인디언과 백인은 이제부터 친구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고에 식량을 따로 감춰놓고 있다니 세상에 이런 친구도 있는가?

옳고 그름의 가치판단에는 사회라는 존재가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논자들은 종종 그 전제를 까먹는다. 충분한 사회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친구인지 적인지가 불명한 상태에서 함부로 옳고 그름을 논한다. 우스울 뿐이다.

백인 사회는 2~10명으로 이루어진 가족이 하나의 단위를 이루고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지만 인디언은 부락 전체가 하나의 가족 공동체다. 친구가 되었다면 곧 가족이다. 가족 모르게 식량을 따로 꼬불쳐 놓고 있다면 이야말로 벼락맞아 죽을 짓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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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물이 있다. 그는 타고난 민족주의자다. 그가 설립한 학교 이름은 민족하사 고등학교다. 그 학교의 교복은 한복과 두루마기다. 스스로 교장에 취임한 그는 매주 전교생 조회를 열어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킨다.

“내가 소학교를 다닐 때 담임 선생님이 나까무라 선생님이었어. 나는 그 분의 크나큰 은혜를 입었지. 그 엄동설한에 말야. 나까무라 선생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구. 엉엉.”.

민족주의자 교장은 자기도취에 빠져서 눈물을 흘린다. 선생님의 훈화를 듣는 고등학생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배알이 뒤틀린다. 입술을 지그시 깨문다. 어떻게 저리도 속속들이 친일에 쩔은 자가 민족주의를 팔아먹는다는 말인가.

문제는 그 사이비 민족주의자가 자신이 얼마나 뒤틀려 있는지 모른다는데 있다. 그가 학교를 설립한 계기도 일본의 마쓰시다 정경숙을 보고 감동한 데 있다. 그는 철저한 친일분자이면서도 대단한 민족주의자로 여기고 있다.

일본을 모방하고 일본을 표절하고 일본을 추종하면서도 그 입으로 감히 민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외치는 민족 조차도 일본 극우주의자의 민족주의에 영향받은 것일 터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사이비임을 모른다,

사실이 그렇다. 일제시대 조선에 온 모든 일본인들이 다 쳐죽일 악당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 중에는 훌륭한 사람도 많았다. 훌륭한 일본인도 있고 나쁜 일본인도 있다고 순진하게 믿어버릴때 세뇌되는 것이다.

세상을 바라볼 때는 구조적인 시선을 얻어야 한다. 좋은 일본인과 나쁜 일본인 따위는 없다. 문제는 일본이라는 문명 전체의 수준이다. 그러한 본질을 보지 못하고 선악(善惡)의 개념에 빠져 있으면 어리석은 것이다. 이 이야기는 픽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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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학승들이 일생을 산중에서 보낸 노스님의 토굴(암자)을 방문한다. 당분간은 깊은 산속의 작은 암자에서 노스님과 함께 생활해야 한다. 노스님이 반기며 묻는다.

“얘들아. 너희들 혹시 종이 필요하지 않니?”

젊은 스님들이 입을 모아 대답한다.

“아뇨. 저희들 종이 이렇게 많이 있어요. 안주셔도 돼요.”

젊은 학승들은 안달한다. 5살 어린 아기때 산문 앞에 버려져 일생의 대부분을 절에서만 보낸 노스님께 BMW가 얼마나 잘 나가는 차인지 인터넷이 얼마나 빠른지 채팅이 뭐고 외계어는 뭔지 말하고 싶어 죽겠다.   

아프리카를 방문한 백인 탐험가가 알몸으로 깨벗고 사는 원주민들에게 문명세계의 도리를 가르쳐 주고 싶어서 안달하는 기분.. 그 기분을 아는가?

식사준비는 젊은 스님 담당이다. 쌀을 씻다가 쌀알 몇 개가 수채구녕으로 흘러든다. 보름쯤 지나자 쌀알과 밥찌끼가 수채구녕에 제법 쌓였다. 버려진 쌀알에 곰팡이가 피려고 한다.

노스님이 철 없는 젊은 학승들 보라는 듯이 수채구녕에 모인 쌀알과 밥풀데기를 낱낱이 주워모아 맑은 물에 씻더니 찧어서 떡을 만들어 드신다. 젊은 스님은 충격을 받는다.

‘큰스님! 쌀독에 쌀 많이 있걸랑요. 수채구녕에 버려진 쌀알에 곰팡이가 피어서 몸에 해롭걸랑요. 그거 안 주워 드셔도 돼요.’ 라고 방정맞게 말해야 할까?

어느날 방 한 구석에서 20년 동안 불교신문에 끼어들어온 광고지 전단의 접힌 부분을 다리미로 일일이 펴서 차곡차곡 쌓아놓은 모습을 발견하고 놀란다. 지난번에 ‘종이 필요하지 않니’ 하고 물었던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하신 말씀일까.

20년 동안이나 방 한구석에 쌓여서 언젠가 한 번은 쓰여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광고전단.. 감동이다. 그렇다면 그때 종이가 필요하지 않았어도 필요하다고 답변했어야 했던 걸까. 정신이 어지러워진다. 아찔한 현기증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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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 이광수는 당대의 선각자요 최고 엘리트였다. 남들이 동학이니 어쩌니 하면서 되도 않은 소모전을 벌이고 있을 때 그는 일찍이 서구문명과 동양문명의 대결을 보았다.

선각자의 넓은 시야로 볼 때 조선과 일본의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다. 그는 거대한 신문명의 도래를 발견한 것이다. 그는 그 위대한 문명의 흐름에서 최전선에 서고 싶었다. 시대의 첨단을 걷는 선구자가 되고 싶었다.

그는 일본의 최고 지성인과도 토론하였다. 거대한 문명의 전환이라니.. 세 세상에 신천지에 새 물결이 도래하도다. 새로운 문명의 태양이 동경만에 떠오르도다. 이 얼마나 가슴벅찬 일인가. 선구자인 내가 여기서 뒤 처지면 안되지.

그렇다. 위대한 춘원 이광수는 조선 지성인의 대표자로 일본의 최고 지성인과 담론을 나누게 되었다. 그런데 쪼잔하게 식민지니 침략이니 민족주의니 이런 하찮은 걸로 논쟁한대서야 될 일인가. 그거 챙피하다.

그는 문득 위대한 세계주의자가 된다. 그렇다. 조선과 일본은 본래 형제였다. 서세동점의 거대한 조류 앞에서 아시아가 힘을 합쳐서 서구문명의 침략에 대항해야 할 이 중차대한 시점에 조선이니 일본이니 아웅다웅 한 대서야 될 일인가?

그렇게 그는 친일파가 되어갔다. 그는 조선 지성의 대표자로 너무 위대해져 버렸던 것이다. 수소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하늘 모르고 솟구쳤다. 뻥 터져 버렸다.  

최장집은 이 시대의 선각자요 최고 엘리트다. 그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대결이라는 인류문명 단위의 일대사건 앞에서 호남과 영남의 지역주의 같은 쪼잔한 문제는 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독립운동 1세대들은 대략 변절했다. 1919년 3.1의 날에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민족대표 33인 중 몇이나 절개를 지켰을까? 한용운, 양전백, 양한묵 세 사람을 제외하고 대략 변절했거나 침묵하며 묵시적으로 동조했다고 한다.

역사의 큰 흐름을 읽지 못하면 반드시 변절하거나 대오에서 이탈하게 된다. 문명개화 자체가 대단한 일로 여겨졌기 때문에.. 흥분해서 오바했기 때문에.. 그 문명의 파도에 떠서 촐싹대고 허둥대었기 때문에..

오늘날 진중권류 얼치기가 지역주의 문제를 사소한 일로 치부하듯이.. 1919년 무렵에 조선과 일본의 갈등 따위는 오늘날 호남과 영남의 갈등과 같은 사소한 문제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소인배가 큰 바다를 보면 반드시 흥분한다. 흥분해서 오바한다. 촐싹댄다. 피해갈 수 없는 리트머스 시험지다. 그들은 시대의 첨단을 걷는 동경의 댄디보이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촌넘이 서울구경 하면 대미지를 입어서 그렇게 된다. 진중권이 독일가면 그렇게 되고 이광수가 일본 가면 그렇게 된다.

미개한 동양이 진보한 서구를 쫓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서구를 쫓아가기 위해서는 제법 진도씩이나 나가주는 일본에 잠시 빌붙어 가는 것도 방책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문명 그 자체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민주화 운동의 원로들 중에는 여성주의에 문제에 대해서도 냉소적으로 대응하는 완고한 가부장들이 많다. 진보정당에 몸답고 있지만 남존여비에 투철한 조선시대의 선비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독재타도가 중요한데 남녀가 힘을 합쳐야지 우리끼리 무슨 내부갈등이냐고 생각하는 것이다. 강고한 좌파 원칙가일수록 사생활은 완고한 보수주의다. 이념이 진보이고 노선이 진보일 뿐 일상생활은 전혀 진보가 아니다.

박헌영 등 사회주의 1세대들은 세계혁명에 관심이 있었다. 세계가 다 혁명하자는 판인데 우리나라가 소련방에 들어간들 어떠리? 조선 소비에트의 건설이 당장의 과제인데 이를 모스크바의 소비에트 연방과 합친들 어떠리? 어차피 소비에트는 다 소비에트인데 무슨 차이가 있다는 말인가?

이승만 등 독립운동 1세대들은 조선이 미국연방에 편입되어도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문명개화 하자는 판인데 조선이고 일본이고 따질 때냐? 미국은 민족국가가 아니다. 아직도 민족이 국가의 단위여야 한다는 촌스러운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니 될 말인가?

그들에게는 국가의 존재에 앞서 더 상위개념인 문명을 보았다. 근대문명과 봉건문명이 충돌하고 있음을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우쭐해 했다. 너희들이 전라도냐 경상도냐 하고 있을 때 우리는 국가를 본다. 너희들이 한국이냐 일본이냐 하고 있을 때 우리는 세계를 바라본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렇게 하나 둘 매국노가 되어간 것이다. 지식인의 병이다. 선각자의 병이다.

그러나 백범이나 노무현은 달랐다. 밑바닥을 경험해 본 사람이 본질을 안다. 밑바닥 세계를 경험하지 않으면 반드시 오바한다. 과대망상에 빠져 흥분한다. 촐싹댄다. 이념의 사상누각을 짓게 된다.  

지금은 경인선이 고작이지만 조만간 조선팔도 방방곡곡에 철도가 깔린다. 영국에서 영불해저터널을 타고 시베리아를 거쳐 조선에서 대마도를 거쳐 일본까지 직통철도가 뚫리는 좋은 시절이 온다. 국경 따위는 없어진다고 봐야한다.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는 판인데 유치하게 국가가 다 뭐야? 까짓거 오바하는 김에 확실히 오바하자. 미래의 전쟁은 아마도 화성인 아니면 외계인과의 전쟁이 될 것이다. 지구 인류는 힘을 합쳐 한 개의 연방국가로 통일되어야 한다. 점점 더 과대망상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최남선들은 일본의 최고 지성인과 사귀었다. 못됐기로는 말단의 일본 순사가 못됐지 일본 최고의 지성인들은 그런대로 신사였다. 그들은 선해 보인다. 말이 통한다. 그들은 조선의 지식인을 동정해 주었다. 헌신적으로 보살펴 주었다. 은혜를 베풀었다. 조선의 젊은 지식인을 격려하고 포용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감동했다. 바보였다. 감동하는 즉 당한 것이다. 얼이 빠졌으니 감동한 것이다.

최남선에게는 일본 지식인과의 사귐이 조선의 독립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는 나쁜 일본인과 좋은 일본인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나쁜 일은 소수 나쁜 일본인이 저지른 문제이지 일본인 모두가 나쁜 것은 아니라고 착각하기 시작한다. 단지 못된 미꾸라지 몇 마리가 흙탕물을 일으켰을 뿐 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자신을 위조해 나간다. 미꾸라지는 본래 구정물에만 산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말이다.

선각자병에 걸리지 말아야 한다. 인간이 자유에 눈을 떴다는 사실 그 자체가 너무 감격스러워서 흑인 노예의 자유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못했던 토마스 제퍼슨. 인간의 계몽에 눈을 떴다는 사실이 너무 감격스러워서 자기 자식의 교육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도 안썼던 룻소.

선각자병은 12살 소녀 민희의 문제, 인디언과 백인의 오해에 관한 문제, 노스님과 젊은 스님 사이에 있는 보이지 않는 장벽, 호남과 영남 사이의 갈등, 조선과 일본의 갈등, 이런 작은 문제의 이중나선 구조로 꽈배기 되어 있는 즉 구조적인 난맥상에 질려서 세계적인 문제로 도피하려는 심리다.

모든 위대한 선각자들은 그러한 병이 있다. 그들은 한 마디로 질려버린 것이다. 그들이 위대할수록 12살 소녀 민희의 문제 앞에서는 무기력하다. 수신제가를 포기하고 치국도 포기하고 바로 평천하로 도피한다.

우주적으로 고민하고 세계적으로 번민하며 위대한 인류의 지도자로 부상하려 한다. 이광수 되고 박헌영 되고 최남선 되고 최장집 된다. 진짜라면 자기 발등의 불부터 끌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인가? 본질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본질은 소통이다. 한 개인의 양심 안에서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질 때.. 얼치기 감동하지 않게 될 때.. 한 가족이 소통하게 되며.. 한 가족의 소통이 이루어질 때 12살 소녀 민희의 문제가 해결되고.. 그렇게 한 가족 단위의 소통에 성공할 때 한 국가가 소통에 성공하고 한 국가가 소통하여 성공모델이 만들어질 때 세계 단위의 소통이 이루어진다.

부분과 전체는 통한다. 한 개인이 완성되지 않으면 결코 한 사회가 완성되지 않는다. 한 사회가 완성되지 않으면 한 국가도 완성되지 않고 나아가 한 세계도 완성되지 않는다. 세계로 도피하지 말라. 먼저 당신의 인격 내부에서 소통에 성공하라. 작은 단위로도 기어이 완전에 이르지 않으면 안 된다.

세계의 완성을 위해 국가의 완성을 포기하고, 국가를 위해 지역을 포기하고, 전체를 위해 부분을 포기할 때 재앙이 닥친다. 12살 소녀 민희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그것을 도둑질을 한 개인의 탓으로 돌리거나, 혹은 아이를 잘못 가르친 부모의 탓으로 돌리는 무기력한 사회에 미래는 없다. 그것이 바로 당신의 문제임을 인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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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사건도 없고 이슈도 없는 태평시절에는 한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알아들을 귀가 몇이나 있을지 한탄스러울 뿐.

나까무라 선생의 은혜를 잊지 못하고 수시로 돌이켜보며 눈물을 흘리는 친일파 교장선생님께 ‘당신은 친일파가 맞소’ 하고 이해시키기는 불능이다. 그는 자신을 민족주의자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다. 그는 본래 순진한 사람이어서 한번 먹은 생각을 절대로 바꾸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다.

사실이지 그는 일본을 미워한다. 자신이 늘 일본인을 미워하므로 자신은 친일파가 아니라는 착각에 빠져 있다. 그러나 그는 나쁜 일본을 미워할 뿐 선한 일본을 미워하지는 않는다.

그는 일본에도 선한 사람이 많이 있고 선한 일본인이 만들어놓은 일본의 앞선 제도를 우리가 받아들여야 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생각하라. 세상에 나쁜 일본인은 없다. 그러므로 선한 일본인도 없다. 12살 민희는 선인도 아니고 악인도 아니다. 그는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고립된 것이다. 도둑질이 도둑질인지도 모르는 수우족 인디언처럼 선과 악의 경계 너머에 있는 존재인 것이다.

일본은 원래 미개한 사회였다. 아세아에서조차 고립되어 있었다. 그 고립된 일본에서 더 고립된 어느 촌 구석에서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변두리 젊은이들이 어느날 야반도주로 무작정 상경하여 동경의 화려함에 기죽어 있다가 자기네 시골촌넘보다 더 미개한 조선을 보고 흥분해서 오바했을 뿐이다. 그들은 일본 안에서도 안쳐주는 시골사람의 열등감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나쁜 일본인과 좋은 일본인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총체적인 의미에서 일본문명의 수준과 그 수준을 반영한 일본시스템이 존재할 뿐이며 그 일본시스템을 추종하는 자는 모두 친일파인 것이다.

박정희가 대한민국의 거대한 암종인 이유는 그가 일본시스템을 한국에 재이식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총체적인 의미에서 일본문명의 겉치레는 한국문명의 깊이에 미치지 못한다. 그것이 모순이다. 그래서 일본과 한국은 온전히 친해질 수 없다. 정신은 한국이 앞서있고 물질은 일본이 앞서있다는 모순이 존재하는 한.

한국문화는 한마디로 군대문화다. 까라면 까는 거다. 그 군대문화는 박정희가 일본군에서 들여온 것이다. 그러므로 박정희가 들여온 모든 시스템이 친일이고 그 친일의 극복이 우리시대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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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나 한겨레는 가끔 팔레스타인 문제에 관하여 의분에 찬 기사를 싣는다. 그 기사에 의하면 모든 나쁜 일들이 다 빌어먹을 부시와 이스라엘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기사들은 본질을 놓친다. 그 기사는 은근히 서구문명의 가치관을 기준으로 우리를 세뇌시킨다.

부시든 혹은 반부시든.. 둘 다 기독교 문명의 두 얼굴일 뿐이다. 기독교에는 본래 두 얼굴이 있다. 하나는 자선을 생활화 하는 선한 기독교의 얼굴이고 하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맞서는 악한 기독교의 얼굴이다.

선한 기독교와 악한 기독교의 싸움에서 한겨레와 오마이뉴스는 선한 기독교 편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 말하면.. 악한 일본인과 나쁜 일본인 따위는 원래 존재하지 않는다. 일본문명의 수준이 존재할 뿐이다.

기독교문명의 수준이 문제다. 부시와 네오콘과 이스라엘 정권을 미워하자는 식의 주장은 오히려 나쁜 일본인이 나쁠 뿐 대다수 선량한 일본인은 착하다는 착각을 낳게 한다. 그러면서 은근히 우리의 사고를 기독교 시스템에 녹아들어가게 유도하는 것이다. 그 속임수를 꿰뚫어 볼 줄 아는 자 몇이나 되겠는가.

부시현상으로 증명되는 것은 기독교 문명에는 원초적으로 문제해결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역사이래 그래왔다. 전쟁은 늘 그들의 최종적인 수단이었다. 지금의 불완전한 평화도 이차대전의 결과물에 불과하다. 문명이 문제를 해소한 것이 아니라 전쟁이 문제를 봉합한 것이다. 그들은 단 한 번도 이 공식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부시만 못하는 것이 아니라 클린턴도 못하고 카터도 못하고 클린턴 마누라도 못한다. 북핵사태도 그러하다. 이것은 하나의 문제다. 문제를 문제로 보고 문제해결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김정일이 나쁘다니 부시가 나쁘다니 하며 방방 뛰는 인간들은 나쁜 일본인과 선한 일본인이 따로 있다고 믿는 엉터리 민족주의자와 같다. 그는 자신이 친일파라는 사실을 아직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기독교 문명의 질적 수준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다. 부시 방식이나 클린턴 방식으로는 문제해결이 불가능한 것이다. 유교문명이 분쟁해결에 능하다. 원래 유교문명은 조정능력이 있다. 중국이 수천년간 줄창 오랑캐에게 깨지면서 그들의 본질을 보존해온 것이 그러하다.

문제해결 능력이 있는 우리가 사태를 장악하고 문제해결을 주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사실이 중요하다. 착한 일본인과 나쁜 일본인이 있다는 착각을 버려야 한다. 김정일 탓이냐 부시 탓이냐의 논란은 도둑질을 한 인디언 탓이냐 친구에게 식량을 나눠주지 않은 백인 탓이냐의 논쟁처럼 허무하다.

물론 부시는 나쁜 넘이다. 나쁜 일본인은 분명 나쁜 것이 맞다. 문제는 선과 악의 이분법적 사고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거다. 그것은 기독교문명의 실패다. 그들은 전쟁이 아닌 방법으로 해결한 전례가 없다.

구조적으로 보아야 한다. 구조적으로 사안에 접근하고 구조개혁의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 12살 소녀 민희가 선하거나 나쁜 것이 아니고 그 소녀와 우리 사회와의 소통의 단절이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소통의 방법으로만 해결된다. 막힌 데를 찾아서 뚫어준다. 그것이 구조적 접근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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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채구녕의 밥알을 한알 한알 주워서 떡을 만들어 드시다니.. 아! 노스님의 법력의 한계는 어디까지란 말인가.. 아아! 진정한 스님의 자세란 이런 것이었구나 하고 감동하여 반성하고 눈물을 흘리려는 찰나..

“아니 여기 선반에 놓아둔 내 아이스크림 어디 갔어?”

어느 신도 분이 스님께 드린 아이스크림이 녹을세라 수건으로 싸놓았는데 젊은 스님이 다 녹아버릴까 해서 먹어버렸던 것이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후.. 어느 해 여름 안거기간에 선방에 모인 많은 스님들 앞에서..

“저저 저 저놈이야. 저 저 젊은 중놈이 그때 내 아이스크림을 낼름 훔쳐먹은 바로 그 싸가지 없는 중놈이라고. 참 버릇없는 놈이지. 고약한 놈이야!!”

확 깬다.

광고지 전단을 한장 한장 다리미로 다려서 20년간 모아두신 거룩한 노스님.. 수채구녕에 흘린 밥알 하나 조차도 회수하시는 위대한 스님, 20년 동안 낡은 장삼 하나로 버티며 수백번 기워입은 성철스님을 연상하게 하는 인격도 고매한 노스님이 어린아이처럼 아이스크림 하나를 가지고 몇 년이나 투정을 부린다.

어떤 벽이 있다. 넘을 수 없는 벽이다. 그 장벽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원초적인 소통의 장벽이다. 선과 악이 문제가 아니라 소통의 단절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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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구꼴통의 존재는 사회병리 현상의 하나다. 이것이 이념문제가 아니다. 친일파 교장은 이념이 비뚤어진 것이 아니라 12살 민희와 마찬가지로 근원적으로 뒤틀려버린 것이다. 역시 소통의 단절이다.

백인의 식량을 털어간 인디언들에게 그것이 도둑질이냐 아니냐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친구라면 원래 식량은 나누어 갖는 것이 맞다고 우기는 수우족 인디언과 말이 통하겠는가. 이건 옳고 그름을 넘어서 다른 차원의 문제다.

20년 동안 다림지로 펴서 광고지 전단을 차곡차곡 모아온 거룩한 스님과 아이스크림 하나로 3년 동안 집요하게 갈구는 스님은 동일인이다. 그 모순을 인위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노스님께.. ‘종이는 얼마든지 있거든요.’ 이런 식으로 설득하기는 불능이다. 당장 호통이 날아온다.

“네놈은 중의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아. 네놈이 꼴에 그러고서도 중이라고 할 수 있어? 중의 길은 험한 길이여.”

하고 일갈하는 우리의 위대한 노스님. 어쩔 것인가.

정신병자는 자신이 병자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걸 인정해야 치료가 된다. 그것이 병이다. 선진국에는 심리치료사도 많고 정신과 병원도 많다. 정신과를 찾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정신병원을 찾으면 당장 미친 놈이 된다. 아무도 정신병원을 찾지 않는다. 왜? 쪽팔리니까. 다들 미쳐간다.

병이란 무엇인가? 구조적으로 잘못된 것이 병이다.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다. 누가 나빠서가 문제가 아니다. 일본이 나빠서 문제가 아니고 김정일이 나빠서가 문제가 아니고 부시가 나빠서가 문제가 아니다.

당시 일본사회는 통합되어 있지 않았다. 일본 사회의 제일 밑바닥을 기던 변두리 천민들이 졸지에 신분상승해서 어린 시절 잘난 동경의 귀족들에게 당했던 분풀이를 조선에서 한다. 그런데 그 분풀이 대상인 조선인들의 인격적 수준이 제법 신사 흉내를 내지만 알고보면 천민 출신인 일본 순사보다 더 높다는 구조적인 모순. 이것이 병이었던 것이다.

조선에 와서 못된 짓 하는 일본인들은 일본에서도 몇몇 산간 오지의 비루한 천민 출신들이고 대다수 세련된 동경출신 하고도 상층부 에돗코들은 겪어보니 괜찮더라는 식으로 아리송하게 꽈배기 들어가면서 친일의 속임수는 시작된다.

핵문제는 지구가 병들어 있다는 증거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세계가 병들어 있다는 증거다. 기독교문명의 이분법에 속지 말라. 이것은 문제고 문제는 구조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구조적인 접근만이 해결책이다. 그것은 막힌 데를 뚫는 것이다. 단절로 생겨난 문제는 소통으로 해결한다.

기독교 좌파와 기독교 우파의 싸움에 말려들어 그 중 한쪽 편을 들다가 결국 기독교 문명의 해결방식에 말려드는 우를 범하지 말라. 둘은 본래 야누스다. 클린턴과 부시가 일란성 쌍둥이임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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