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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적 지식인상 이상주의적 지식인상


 

하회탈을 주의깊게 보신 적이 있으신지. 양반탈은 해학적인 표정을 짓고 있는데 비해 선비탈은 인상을 쓰고 있다. 표정이 무섭다. 옛 시골의 무지렁이 백성들이 유교 선비들을 무서워 했던 거다.


왜? 


조선 초만 해도 선비들이 몽둥이 들고 사찰을 때려부수기에 분주했던 거다. 율곡선생이 젊었을 때 잠시 사찰에서 공부한 일로 트집을 잡혀 일생동안 여러 번 곤욕을 치렀을 정도이다.


소수서원, 병산서원을 비롯해서 전국의 유명한 서원들은 대개 불교의 사찰을 빼앗은 그 자리에 세워졌다. 소수서원의 앞뜰에는 여전히 무너진 석탑의 기단부와 부서진 석등이 나뒹굴고 있다.


오늘날 민중을 계몽하려 드는 지식인의 마음에는 조선왕조 초기 타락한 불교의 폐단을 공격하는 한편으로 삼강오륜의 유교 교리로 민중을 계몽하며 사찰을 때려부수던 선비들의 마음이 숨어 있다.


21세기에 이른 오늘날 서구 중심의 지식인상이 그렇다. 금세기 초 까지도 식인풍습이 남아있던 남태평양의 섬들에서 원주민의 고약한 악습을 교화하기에 분주하던 선교사들의 찌푸린 얼굴에 그 주름살이 아직도 펴지지 않고 있다.


그 표정, 그 얼굴, 그 시선, 그 꼬부장한 마음 그대로 민중 위에 군림하려 하고 있다. 그것이 서구가 말하는 비판적 지식인상이다. 하회탈 중에서도 유난히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선비탈 같다.


드라마 황진이가 꼬장꼬장한 비판적 지식인상 벽계수를 비판하고 민중의 마음과 소통하는 이상주의적 지식인상 서화담을 추켜세우는 뜻이 거기에 있다. 선비탈 굳은 표정 버리고 양반탈의 너털웃음 얻어야 한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천하를 근심하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시성(詩聖) 두보의 마음은 아름다우나 민중의 마음과의 거리는 먼 것이다. 인간이 사는 세속을 떠나 초인이 되기를 원했던 시선(詩仙) 이백의 마음이 오히려 민중과 가깝다. 


불교를 공격하고 민중을 계몽하던 조선 초기에는 두보형 지식인이 많았으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점차 이백형 지식인이 많아졌다. 율곡과 퇴계는 두보에 가깝고 후기의 추사와 다산은 보다 이백에 가깝다. 더 개방적이고 자유로웠다.


백성 위에 군림하며 만 백성의 모범이 되기 위해 스스로 위선을 떨며 엄격함을 가장했던 조선 초기의 지식인상. ‘낮퇴계 밤퇴계’라는 말은 그래서 생겨났다. 낮에는 제자들 앞에서 의관을 정제하고 책상다리 폼을 잡고 온갖 권위를 다 휘드르다 밤만 되면 여인네의 품속에서 홍알홍알 하는 그 이중성.


20세기를 넘어 21세기다. 산업화를 넘어 정보화다. 계몽주의를 넘어 이제는 문화주의다. 문자의 보급과 지식의 계몽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문화의 질이 세상을 바꾼다. 지금이야말로 초인이 필요한 때다.


계몽주의자가 아니라 낭만주의자가 필요하다. 지식인이 탈을 쓰되 무서운 얼굴의 선비탈이 아니라 해학적인 얼굴의 양반탈을 써야한다. 자기관리에 능한 깐깐한 지식인상이 아니라 여유와 해학과 열정의 지식인상이 필요하다.


참된 지성은 스스로 빛 나는 별이어야 한다. 앉아서 부시를 비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모든 비판은 뒷북에 지나지 않는다. 스스로 앞장서서 길을 열어가기 위해서는 이상주의가 있어야 한다.


행동하는 지성이 진짜 지성이다. 그러나 이상주의가 없으면 행동할 수 없다. 저 깊은 민중의 바다에 뛰어들 수 없다. 민중과 함께 얼싸안고 춤출 수 없다. 민중의 마음과 진정으로 소통할 수 없다.

  

비판적 지식인상이 아니라 이상주의적 지식인상이 필요하다. 권력의 허물을 탓하고 부시의 허물을 탓하여 그들 정치집단의 실패에 따른 반사이익으로 먹고사는 수동적인 지식인상이 아니라 스스로의 매력으로 민중의 마음을 끌어들이는 능동적인 지식인상이어야 한다. 


두 개의 지식인상이 있다.


● 비판적인 서구의 지식인상

● 이상주의적인 동양의 지식인상


오늘날 진보는 종교적 신념에 가까운 것으로 변질되었다. 변화하는 시대의 현실과 멀어지고 민중의 마음과도 멀어진채 ‘그래도 우리가 옳다’는 신념만이 지식인의 마지막 자존심으로 남아있다.


그들의 진보는 비과학적이다. 그들은 이념의 이름으로 세계를 균질화 시키려는 그릇된 욕망에 빠져있다. 별 수 없는 기독교도들인 서구의 그들은 여전히 자기 존재 위에 파라오를 두고 있다.


출애굽 사건이 너무나 감동적이었던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출애굽하고 있다. 지구인의 90프로가 문맹이었던 20세기에 지식의 보급은 그 자체로 미망에서 빠져나오는 위대한 출애굽이었다. ‘오오 그 감격! 그 얼마나 위대한가?’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거기서 한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 이름이 파라오에서 마르크스로, 혹은 조직과 집단과 시스템으로 바뀐다 해도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들은 결코 강단이라는 ‘시내산’을 떠나지 못한다. 조직에 얽매여 시스템의 일부를 구성하는 퍼즐조각으로 쪼그라든 것이다.


 

신선이 되고 싶었던 초인 이백

 

두보는 인간적이었다. 그는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리얼리스트였다. 그는 정직하고 용기있는 지식인이었다. 이백은 엉뚱하게도 인간의 속세를 떠나 신선이 되기를 꿈꾸었다. 그는 방랑자였고 공상가였다. 그는 모험가였고 로맨티스트였다.


민중의 마음으로 보면 이백이 오히려 세속적이고 현실적이다.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두보가 오히려 지식의 상아탑이라는 은자의 동굴 속으로 도피해 버린 셈이다. 왜인가? 그에게 삶의 미학이 없었기 때문이다.


두보의 미학은 시(詩) 속에 숨어 있다. 이백의 미학은 그의 삶 속에 녹아있다. 삶으로 체화되어 있다. 이백의 미학은 행동하는 미학이다. 이백의 삶 그 자체가 한편의 드라마고 소설이고 시(詩)고 영화다.


미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만남이다. 만남이고 소통이다. 이백은 그의 삶 그자체로 우리가 낯선 사람과 만나 서로 인사하고 긴장을 푸는 방법을 알려준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모든 예술은 낯선 세계와 새로이 만나 긴장을 풀고 어깨동무하여 하나가 되는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 존재한다. 한 잔의 커피가 그러하고, 한 곡의 음악이 그러하고, 한 줄의 시가 그러하고, 한 편의 영화가 또한 그러하다.


만약 시가 없다면, 만약에 음악이 없다면, 만약에 영화가 없다면, 또 소설이 없다면 우리는 낯선 사람과 인사하지 못한다. 서로는 서먹서먹하고 어색해지고 불편해진다. 서로는 노려보다가 마음의 장벽을 쌓고, 등을 돌리고, 은둔하게 된다. 그렇지 않은가?


이상주의자의 삶은 그 자체로 예술이다. 이상주의자의 삶은 삶이 곧 음악이고 시(詩)고 그림이고 소설이고 드라마다. 섬진강 김용택의 삶은 그 자체로 한 폭의 풍경화다. 다목리 이외수의 삶 또한 그대로 소설이고 드라마다.


그러므로 이상주의가 리얼리즘이다. 오늘날 서구의 지식인상은 이상주의를 잃었다. 우울한 표정의 창백한 지식인 두보가 있되 해학과 여유의 너털웃음 이백이 없다. 엄격한 선생님 율곡과 퇴계가 있되 해학의 방랑자 김삿갓이 없다. 그다지 아름답지가 않다.


낯선 사람과도 친구가 되고 마음의 문을 열고 소통하는 방법을 그들은 알려주지 않는다. 우리네 민중의 삶의 현실과 멀어져 있다. 열정의 지식인, 낭만의 지식인, 도그마와 금제를 깨는 탈주의 지식인상이 나는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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