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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2318 vote 0 2007.02.16 (01:42:16)

<개인적인 글입니다>

진보의 구조

자연의 진화와 인간의 진보는 본질에서 같다. 다윈의 진화론은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으로 발전했고 사회진화론은 마르크스주의와 격렬하게 충돌했다.

사회진화론은 극우주의로 나아갔고 나치의 인종주의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그렇다면 둘 중의 하나가 틀렸거나 아니면 둘 다 틀렸다.

사회진화론이 과학적 진실이 아님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만큼 진화론도 문제가 있다. 그러나 진화와 진보가 본질에서 같다는 착상은 여전히 유효하다.

구조론이 이 문제를 해소한다. 사회의 진보와 자연의 진화는 같다. 별의 탄생과 생물의 탄생은 같다. 소립자의 구성원리와 인간 사회의 작동원리는 같다.

● 생물은 진화되었다.
● 물질은 구성되었다.
● 사회는 진보되었다.

사람이 길을 가더라도 왼발과 오른발이 교차하면서 밸런스의 문제에 직면한다. 모든 진보하는 것, 발전하는 것, 성장하는 것은 동일한 문제에 봉착된다.

진보해야 살아남지만 그 과정은 위험하다. 진보하지 않으면 밀려나고 진보를 시도하면 위험해진다. 그러므로 제어가 필요하고 밸런스가 필요하다.

시장의 발전, 조직의 발달, 국가의 건설, 태풍의 진로에도 이 원리는 그대로 적용된다. 모든 발전하고 진보하는 것은 동일한 제어-밸런스 원리에 직면한다.

새로운 토대 위에서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진화론과 원자론, 시장이론, 사회의 진보이론이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 구조론으로 가능하다.

진화론은 생장구조이론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마르크스가 강조하는 힘과 투쟁의 논리는 구조론이 말하는 가치와 미와 소통의 논리로 보완되어야 한다.

진보주의는 지나치게 힘과 질서와 능률과 과학에 의존하고 있다. 공산주의가 자본주의보다 더 능률적이고 과학적이며 질서있고 힘이 있다는 거다.

강한 과학적 사회주의가 그 과학의 강한 힘으로 모순에 가득찬 허약한 자본주의를 이긴다고 말하면 진화론이 말하는 약육강식의 논리 그대로다.

그러나 다윈의 진화론은 틀렸다. 약육강식은 약자를 동정하는 인간의 정서일 뿐 자연의 생태계는 강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지배되고 끌려가지 않는다.

젊은 숫사자 역시 늙은 숫사자에게 물려죽는다. 허기진 사자가 배부른 사슴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에는 인간 위주의 정치적 관점이 개입해 있다.

자연에는 강자와 약자의 존재 이전에 생태계 환경이 있다. 생태계 환경은 정교한 제어장치에 의해 밸런스를 유지하며 강자와 약자를 동시에 통제한다.

과학과 힘과 질서를 앞세우는 좌파의 논리는 녹색당으로 대표되는 오늘날의 진보주의 경향과 다르다. 지난 시대의 가치일 뿐 21세기의 강조점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와 다윈은 동시대인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명백히 진화론의 영향을 받았다. 마르크스주의는 태생적으로 극우로 변질할 요소를 갖추고 있다.

진보 지식인들이 도덕적 양심에 따라 그 점을 감추려 애쓴데 비해 스펜서는 뻔뻔스럽게도 그 점을 노골화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는 과학과 힘과 질서와 권력과 능률에 주목했을 뿐 그 반대편에서 그 힘과 그 과학을 제어하고 통제하며 보완하는 개념이 없다.

과학의 능률에 감탄했을 뿐 인간의 가치에 소홀했다. 소외를 말하여 자신의 단점을 보완했으나 그 소외를 극복하게 하는 소통을 말하지 않아서 실패다.

생산력과 생산관계, 물적토대와 상부구조로 설명하는 마르크스의 변혁이론은 물리력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다윈의 생존경쟁이론과 비슷하다.

사회는 힘과 투쟁에 의해서도 변화하지만 가치와 소통에 의해서 더 크게 변화한다. 힘과 가치 사이에 밸런스를 얻어야 한다.

인간의 가치와 공동체적 소통 노력이 마르크스주의가 강조하는 과학의 힘과 기계적 질서의 폭주가능성을 경계하고 제어해야 한다.

다윈의 생존경쟁이론은 또 극우적인 시장만능주의와 통한다. 생태계에서의 생존경쟁이 시장에서의 경쟁 그리고 국가간의 전쟁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생태계의 경쟁이 무한경쟁으로 치닫는 일은 절대로 없다. 사자가 사슴을 잡아먹어 사슴이 바닥났을 때 사자도 죽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장에서의 경쟁 역시 무한경쟁으로 폭주되어서 안 된다. 국가간의 전쟁 역시 공동체의 소통노력에 의해 통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마르크스가 질서에 주목할 뿐 가치에 소홀함은 우파들이 능률에 주목할 뿐 공동체적 소통에 소홀함과 같다. 그런데 오늘날 진보주의는 반대로 가고 있다.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환경운동과 생태적 삶의 강조, 전원에서의 느리고 조화로운 삶의 추구는 마르크스의 도시-노동자-투쟁-혁명과 다르다.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실질적인 진보는 점차 마르크스에서 멀어지고 있다. 지금 녹색당은 딜렘마에 빠져 있다. 물리력을 앞세운 환경운동은 정당한가?

간디와 소로는 마르크스의 적인가 동지인가?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은 진보인가 수구인가? 소로의 웰빙주의와 마틴 루터 킹의 비폭력노선은 옳지 않은가?

분명히 말하면 힘과 투쟁이 사회를 바꾸는 만큼 가치와 소통도 사회를 바꾼다. 간디와 소로와 킹 목사는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구조론은 질서와 경쟁과 능률과 시장의 논리를 전면부정하지 않는다. 진화론, 원자론, 시장이론, 진보주의의 성취를 전면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되 기존의 이론에서 빠진 부분을 보강한다. 경쟁+밸런스다. 변혁+제어다. 능률+소통이다. 부족한 나머지 절반을 채워간다.  

밸런스를 잃은 경쟁은 실패한다. 제어에 실패한 변혁, 소통이 없는 능률은 실패한다. 좌파든 우파든 지금은 존재의 절반만을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경쟁하면서 밸런스를 잃지 말아야 하고 변혁을 추구하면서 제어에 성공해야 하고 능률을 지향하면서 공동체적 소통에도 성공해야 한다.

조직의 생산성이 1 증가할 때 조직 내에서 정보의 소통도 1 증가해야 한다. 그러나 보통은 생산성 향상을 위해 정보의 쌍방향적 소통을 희생시킨다.

그러다 망하는게 자본주의다. 경쟁이 1 증가할 때 그 경쟁의 장을 제공하는 시장도 1 성숙해야 한다. 시장환경의 성숙없는 무한경쟁은 재앙을 낳는다.

사회의 진보, 생물의 진화, 물질의 구조, 시장의 발달, 국가의 발전을 하나의 기준에 맞추어서 하나의 논리로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구조를 이해하고 그 구조가 낳는 밸런스를 이해하고 그 밸런스가 낳는 제어를 이해하고 공동체적 소통과 그 소통의 수단인 미학을 이해할 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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