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읽기
read 10936 vote 0 2007.02.02 (00:47:23)

단 한 사람을 위한 이야기


양식으로 소통한다

필자가 영화 전문가는 아니다. 누구나 다 아는 - 그러므로 말이 통하는 - 영화라는 소재를 빌려 말할 뿐이다. 영화평론가가 내 글을 본다면 불쾌해질 것이다. 영화계 종사자가 본다해도 역시 착한 글은 아니다.

영화 이전에 문화가 있다. 문화의 본질은 의사소통이다. 의사소통은 언어로 가능하다. 그 언어에는 문법이 있다. 마찬가지로 문화에는 양식이 있다. 양식은 문화의 문법이다. 그리고 그 양식은 변화한다.

세상이 변하기 때문에 - 그 변화를 반영하여 양식도 변한다. 세상의 변화에 일정한 방향성이 있기 때문에, 양식의 변화에도 일정한 방향성이 있으며 영화의 변화를 예로 들어 이러한 변화의 방향성을 설명할 수 있다.

결국 필자는 ‘사회적 의사소통’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양식이 곧 소통이다. ‘진정한 의사소통은 어떠한 양식으로 가능한가?’ 그 점을 영화를 빌려 설명하려는 것이 필자의 고안한 바 ‘기술방식’이다.

두 가지 포인트가 있다. 첫째는 ‘차’가 좋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그 차에 ‘좋은 화물’을 실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는 스타일이고 둘째는 메시지다. 형식(스타일)과 내용(메시지) 중 어느 쪽이 우선인가?

● 스타일 - 차가 좋아야 한다.
● 메시지 - 화물이 좋아야 한다.

필자의 지론은 물론 당연히 둘 다 좋아야 하겠지만.. 우선순위로 말하면 차가 먼저라는 것이다. 스타일(양식)이 완성되지 않으면 거기에 좋은 메시지를 실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영화가 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던지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스타일의 영화를 만드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점은 문학이나 음악 혹은 조형예술이라도 마찬가지다.

더 나아가 ‘스타일이 곧 메시지다’는 거. 그것이 필자의 미학이다.

이는 보편원리다. 세상은 부단히 변화한다. 그 변화의 흐름에 걸맞는 양식을 창안하지 못하면 서로는 소통하지 못한다. 철 따라 옷을 갈아입듯이 영화는 끝없이 새로운 양식을 창안해야 한다.


스타일이 메시지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새 부대가 곧 새 술이다. 부대가 술을 규정한다. 형식이 내용을 규정한다. 이 말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교과서에서는 항상 내용이 중요하다고 배웠으니까.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내용보다 형식이 중요하다. 내용이 중요하다는 말은 인간사회에나 해당되는 이야기다. 자연법칙에는 형식이 중요하다. 왜인가? 형식을 조작하여 내용을 속임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속임수이기 때문이다.

자연에는 속임수가 없다. 그러므로 자연은 형식과 내용이 항상 일치한다. 자연의 진리로 보면 항상 형식이 내용을 앞서간다.

문화는 물과 같다. 어떤 모양의 컵에 담느냐에 따라 형태가 정해진다. 그 형식을 바꾸는 것이 진보다. 체제를 바꾸고 시스템을 바꾸고 패러다임을 바꾸고 룰을 바꾸는 것이 진보다.

중세에는 기사가 전쟁을 했다. 기사 1인이 최소 종자 2인을 거느린다. 마부 1인과 허드렛일 담당의 1인이 따라붙어야 한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주종관계가 정해지고 봉건적 계급제도가 생겨난다.

전쟁의 형태가 사회구조를 결정하는 것이다. 왜? 당시만 해도 전쟁이 가장 높은 생산력을 자랑하는 국가 기간산업이었으니까.

그런데 어느날 소총이 등장했다. 유능한 기사가 되려면 적어도 수년을 마상에서 수련해야 하는데 소총은 누구나 한 시간만 배우면 쏠 수 있다. 가격도 싸고 종자를 거느릴 필요도 없다. 이에 봉건제도가 무너진 것이다.

사회의 발전은 선한 사람의 선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념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상이나 교육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사≫소총’이라는 전술의 변화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다.

지금은 미디어가 무기다. 종이신문으로 소총을 쏘고 TV로 폭탄을 던지고 영화로 탱크를 몰며 인터넷으로 융단폭격을 한다. 종이신문에서 인터넷이라는 미디어의 변화가 문명 그 자체의 성격을 변화시킨다. 그것이 진정한 진보다.

보병이 들판에서 육전을 벌일 때는 청동제 투구와 갑옷을 마련할 수 있는 극소수 상층계급의 시민이 권력을 잡았다. 희랍시대에는 철기가 널리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극소수 상층계급만 군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페르시아 전쟁을 전후로 갤리선이 활약하면서 갤리선에서 노를 젓는 하층계급이 정치의 주도권을 잡고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꽃피우게 된다. 반면 육전을 위주로 한 스파르타에는 귀족정치가 계속된다.

생산력의 변화가 생산관계의 변화를 낳고 이것이 세상을 바꾼다. 시스템과 구조와 패러다임이 변하지 않은 채로 이념만 가지고는 세상을 못바꾼다. 이념은 이미 바뀌어진 세상을 설명하고 변화를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전파할 뿐이다.


왜 영화인가?

필자는 94년경부터 영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요즘은 뜸해졌다. 이미 한국영화가 충분히 강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영화에 대한 흥미가 줄었다.

94년경 부터 필자는 한국영화의 미래를 낙관한 바 있다. 필자의 예상대로 되었다. 물론 영화판에는 많은 문제가 있지만 솔직히 영화인이 가진 역량의 한계도 인정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만하면 충분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한국영화만 강해진 것이 아니다. 일본영화도 강해지고 있다. 지난해 처음으로 일본의 자국영화 수익이 헐리우드를 제쳤다고 한다. 헐리우드의 소재고갈은 필연적이고 구조적인 이유가 있다.

(지난번 글에서 말한대로 권선징악의 고전적 형식에 얽매이는 한 헐리우드는 소재제한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한국영화의 소재고갈 현상도 비슷하다. 미학적 성취가 없으면 절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왜 한국영화는 강한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부분은 유교주의와 도교주의(선종불교 사상)에 관한 것이다. 유교를 무시하면 허무해지고 도교를 무시하면 미학이 죽는다.

● 유교 - 질서
● 도교 - 가치

질서와 가치, 이 둘로 세상을 전부 설명할 수 있다. 질서는 문제를 해결하고 가치는 동기를 부여한다. 질서는 힘이고 가치는 미(美)다.

● 힘의 질서 - 문제를 해결한다.
● 미의 가치 - 동기를 부여한다.

질서가 없으면 긴장이 풀린다. 관객이 극에 몰입을 못한다. 당연히 재미가 없다. 미가 없으면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 오르가즘을 느끼지 못한다. 작품의 수준이 떨어져서 매니아층이 형성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좋은 영화를 만들려면 질서와 가치라는 두 기준을 조화시켜야 한다. 이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제압할 때 영화가 망한다. 영화 뿐 아니라 소설도 망하고 드라마도 망한다. 사회도 망하고 정당도 망한다.

일본영화는 대략 허무한데 그 이유는 선종불교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다. 홍콩영화가 허풍이 센 것은 도교 영향을 받았다. 둘 다 유교적 관점이 약하기 때문에 강한 긴장감을 유발하지 못한다.

선종불교는 도교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둘이 비슷하지만 확실히 다른 점은 선종의 문화가 축소지향이라면 도교는 확대지향이라는 점이다. 선종사상은 우주를 통째로 압축하여 작은 바늘귀 속에 집어넣으려는 발상이다.

작은 점을 하나 찍는다. 그 안에 우주를 통째로 구겨넣는다. 일본의 하이쿠나 분재, 수석취미가 그렇다. 불교 선사들의 선문답이 이런 구조를 가지고 있다.

도교사상은 장자가 하룻밤에 구만리를 날아간다는 붕새를 이야기 하듯이 우주적으로 스케일을 키우는 것이다. 선종과 도교의 공통점은 우주를 혹은 진리를 어떤 사물이나 대상에 집어넣어 은유적으로 설명하는 기법을 사용한다는 것.

홍콩영화가 액션과 코미디 위주로 흘러서 뒷심이 약하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주적으로 사건이 확대되지만 뼈대가 없어서 풍선처럼 터져버린다. 중국이 유교의 본고장이라지만 실제로 그 문화는 도교에 기울어 있다.

유교가 갈등을 드러내고 도교가 미학을 완성한다. 유교는 뼈대를 세우고 도교와 선종불교는 살을 채운다. 이 둘이 만나는 접점에 한국문화가 있다. 그래서 한국영화와 드라마가 강하다.

특히 가부장제도 때문에 일어나는 가족간의 갈등이라는 아이디어 창고를 한국은 가지고 있다. 유치하지만 무궁무진 우려먹을 소재가 거기서 나온다. 일본은? 한국과 달리 갈등을 회피하는 문화다. 유교적 억압도 없고 긴장감도 없다.


무거움과 세련됨.

무거움이 긴장을 유발하고 세련됨이 멋을 낳는다. 멋이 미의 완성이다. 유교주의가 무거움을 낳고 도교와 선종불교가 멋을 낳는다. 유교에 치우치면 권선징악에 빠져서 수준이 낮아지고 도교에 치우치면 허무해진다.

‘미녀는 괴로워’를 일본인이 만들었다면 결말이 허무해졌을 것이다. 올드보이도 원작인 일본만화는 결말이 허무하다.

유교에 치우치면 막판에 주인공들이 다 죽어버린다. 파이란의  송해성 감독이 ‘미녀는 괴로워’를 만들었다면 강한나는 막판에 자살했을 것이다.

김용화 감독은 유교와 도교, 무거움과 세련됨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평형을 유지하고 있다. 밸런스가 맞다. 힘조절에 성공하고 있다. 이게 흥행비결.

유교의 논리는 질서의 논리다. 질서는 강한 긴장을 유발시킨다. 미녀는 괴로워에서 과연 ‘성형이 옳은가?’하는 도덕적 문제제기가 질서의 관점이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긴장감은 극도로 낮아진다.

관객들이 끝까지 긴장감을 가지고 몰입해서 보는 이유는 ‘성형이 옳은가?’하는 질문으로 주인공을 계속 괴롭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선과 악의 대결이다. 그런데 선과 악이 마냥 대결하기만 하고 있으면 영화가 끝이 나지 않는다.

80년대 한국영화는 단지 끝을 내기 위해 주인공을 죽이는 방법을 쓴다. 그래서 파이란의 강재는 죽어야 한다. 왜? 영화를 끝내기 위해.

‘미녀는 괴로워’ - 출구가 있는 영화다. 선과 악의 부딪힘, 교착상태.. 어떻게 이 위기를 타개할 것인가? 강한나는 강재처럼 죽어야 하나? 강재가 그랬듯이 넘보아서 안될 사랑을 넘본 죄로 죽어야 하나?

교착상태에 빠졌을 때 제 3의 지점에서 돌파구를 열어 변방에서 새로운 전단을 마련하고 이 방법으로 난국을 타개하는 것이 미학이다. 미학은 자기완성이다. 강한나는 강한나의 스타일을 완성한다.

그것은 자기류의 기준을 채택하여 목표를 좁혀놓고 그 제한된 영역의 작은 동그라미 안에서 이야기를 끝내는 것이다. 왕의 남자에서 장생과 공길은 자유로운 광대로 남겠다는 자기류의 목표를 정해놓고 그 목표에 도달하는 지점에서 이야기를 끝내버린다.

그 동그라미는 자기 안의 백프로를 끌어내어 자기 자신을 완성하는 것이다. 노래를 잘 부르는 강한나는 그 노래실력의 백프로를 끌어낼 수 있는 자기만의 무대를 완성하는 것이다. 관객의 도움을 얻어서.

● 유교적 문제제기 - 성형은 옳은가?
● 도교적 가치완성 - 어떻게 최고의 무대를 완성하는가?

미녀는 괴로워는 유교적인 관점에서 출발하더니 방향을 틀어 도교적인, 아니 미학적인 관점에서 이야기를 끝낸다. 방향을 바꿔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악역이 없다. 아니 악역이 있지만 무시된다. 악인을 혼내주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거.

이러한 방향전환에 성공한 영화들은 대부분 히트하고 있다. 왕의 남자만 해도 동성애라는 심각한 문제제기를 하지만 방향을 슬쩍 틀어버린다. 왕과 민중의 대결로 가는듯 하더니 한번 더 틀어버린다.

괴물도 괴수이야기로 시작하지만 사회를 풍자하는 듯, 반미이야기를 하는듯, 가족과 인간애로 방향을 틀어버린다.


영화의 구조

첫째 어떻게 긴장을 유발할 것인가? 둘째 어떻게 긴장을 90분 동안 유지할 것인가? 셋째 어떻게 결말을 지을 것인가? 여기서 스타일이 나오는 것이다. 그 스타일을 변화시켜 보여야 한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도 바꿔야 하고 결말을 맺는 방식도 바꿔야 한다. 끝없이 새로운 이야기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결론은 소통이다. 소통한다는 것.. 극중 강한나가 진실을 고백할 때 한상준은 뚱뚱하던 시절이 비디오를 튼다. 그럴 때 중국집 배달원은 말한다. 괜찮아. 모든 관객이 따라한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소통 그 자체를 말하고 있다. 척하면 착하고 맞아떨어지는 것. 이심전심이 되는 것. 인간이 인간을 이해하는 것, 뭔가 아귀가 착착 들어맞아 가는 것. 각자의 포지션을 찾아내는 것, 그리하여 거대한 그림을 완성하는 것. 그것이 소통이다.

문화는 소통을 위해 존재하며 소통의 방법은 양식을 완성하는 것이다. 양식은 포지션들을 조합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다. 각자가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끌어낼 때 그 포지션의 조합은 완성된다.

무엇인가? 강한나가 자기 안에서 최선의 노래를 끌어낼 때 그 순간 그 프로듀서는 최선의 프로듀서가 되고, 거기에 호응하는 관객은 최고의 관객이 되고 그들이 힘을 합쳐서 이루어내는 무대는 최고의 무대가 된다.

각자가 제 위치에서 자기만의 동그라미를 완성시킬 때 그 하나의 동그라미의 완성이 다른 동그라미의 완성을 촉발하며 그 완성된 작은 동그라미들이 합쳐져서 거대한 동그라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것이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이다. 그 방법으로 더 높은 가치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소통의 형식이다. 그 성공에 도달하는 것이 미학적 양식의 완성이다. 이러한 양식의 변화로만이 소재고갈의 벽을 넘을 수 있다.


세상은 변한다

친구간에 대화하는 방법이 다르고 사제간에, 군신간에, 주종간에 가족간에 대화하는 방법이 다르다. 생산력이 변화하면 생산관계가 변화해야 하고 계급제도가 변화하면 우리의 대화법도 바뀌어야 한다.

과부장체제에서 팀장체제로 시스템이 바뀌면 나이와 상관없이 존댓말을 해야한다. 직급이 낮아도 ‘김양아’ 하고 막 부르면 안되고 ‘아무개님’이라고 불러야 한다. 실제로 많이 바뀌고 있다.

권선징악의 구조는 봉건적 의사소통 구조를 반영하고 있다. 주제의식을 강조하는 가르치려 드는 분위기는 스승이 제자에게 말할 때나 쓰는 방법이다. 이제는 평등해 졌으므로 가르치려 들어서 안 된다.

이 시대에 한국영화가 고민해야 하는 것.. 관객을 가르치려 들지 않으면서도 관객과 완벽하게 소통하기. 미녀는 괴로워가 이 문제에 답을 제시하고 있다.

인터넷 시대에 맞는 새로운 소통법은 어떤 것인가? 새로운 정당구조는 어떤 것인가? 새로운 기업문화는 어떤 것인가? 새로운 대안언론은 어떤 것인가? 이 질문에 영화인은, 정치인은, 기업인은 그리고 우리는 답해야 한다.

List of Articles
No.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1787 긴장타자 긴장타! 김동렬 2007-07-15 10701
1786 긴장과 밸런스 그리고 릴렉스 김동렬 2007-07-13 12331
1785 한국의 교육 무엇이 문제인가?(수정) 김동렬 2007-07-12 9106
1784 아 전여옥 김동렬 2007-07-11 12446
1783 이명박의 지지율이 꺾이는 시점은? 김동렬 2007-07-10 11201
1782 하품을 하는 이유? 김동렬 2007-07-10 14228
1781 노랑제비꽃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해 김동렬 2007-07-05 12238
1780 유시민론에 부쳐 김동렬 2007-07-04 10565
1779 [단상] 칼융님의 글을 읽고 김동렬 2007-06-30 11150
1778 김두관과 이해찬 김동렬 2007-06-29 11174
1777 김두관, 참여정부가 암흑기였다? 김동렬 2007-06-28 18579
1776 인간은 평등한가? 김동렬 2007-06-28 13926
1775 자유민이 될것인가 노예가 될것인가? 김동렬 2007-06-27 11819
1774 구조론이란 무엇인가? 김동렬 2007-06-26 12428
1773 [단상] 황진이에서 민중적 리얼리즘 찾기 김동렬 2007-06-26 12559
1772 세상을 이해하는 기본 김동렬 2007-06-23 11285
1771 "당신은 감시당하고 있다" 김동렬 2007-06-22 11820
1770 [단상] 뜨는 달과 지는 달 image 김동렬 2007-06-21 12887
1769 이해찬이냐 유시민이냐 김동렬 2007-06-21 10331
1768 “황진이의 한계” 김동렬 2007-06-19 10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