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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1703 vote 0 2007.04.11 (23:48:43)

왜 소통이어야 하는가?
우리 자신의 모습을 완성할 때 세계도 완성된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완전을 추구한다. 완전한 인간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체 게바라처럼 정글에서 총 들고 싸우는 모습일까? 간디처럼 깨벗고 물레질 하는 모습일까?

석가는 왕자로 태어났고 예수는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노자는 성문지기에게 책 한 권을 써주었고 공자는 제자들을 출세시켜 주지 못한 미안함을 가지고 열국의 왕들을 만나러 다녔다.

샤르트르는 체 게바라를 일러 이 시대의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 했다. 상류층 신분의 의사가 민중의 삶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체 게바라는 오토바이 한 대로 남아메리카를 종단하면서 민중의 삶 속으로 들어갔다.

신분이 낮은 사람이 성공하면 상류사회의 고상한 분위기를 동경한다. 세상의 풍파를 겪어보지 못한 상류층 신분의 지식인들은 난폭한 군중으로 돌변하기 쉬운 하층민의 세계를 두려워한다. 그들을 통제할 자신이 없다.

왕자로 태어난 석가는 민중의 세계로 충분히 내려오지 못했다. 그는 형이상학적인 깨달음의 세계에 머물러 있었다. 가난한 목수 출신의 예수에게 있어 지배집단인 율법사들과의 마찰은 필연적이다.  

체 게바라는 혁명정부의 재무부장관을 맡았지만 쿠바경제를 재건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나 아프리카로 떠났다. 그는 실패했다. 그는 실패함으로써 성공한 것이다. 무엇에 성공하였나? 소통에 성공하였다.  

역사이래 완전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의 원초적인 불완전성 그 자체를 직시하고 받아들일 때 위대한 완전성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 인간은 소통함에 의해 완전해질 수 있다.

체 게바라는 그 정글에서 실패했지만 그의 메시지는 그 시대의 세계정신과 소통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적어도 드라마를 남겼다. 그 드라마의 완성도는 지극히 높다. 관객과의 소통에 성공하고 있다.

인간은 불완전하다. 소통함으로써 완성된다. 소통은 두 세계 사이의 소통이다. 수호지의 양산박과 같은 거칠기 짝이 없는 그러나 건강한 생명력이 넘치는 민중의 세계와 창백한 낯빛을 한 엘리트 지식인의 세계가 있다. 통해야 한다.

바티칸 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는 라파엘로의 벽화 아테네학당은 54인의 희랍 지성인들 중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특별히 중앙에 배치하고 있다. 플라톤은 하늘을 가리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을 가리킨다.

플라톤이 가리키는 하늘은 지배집단이 그리고 지식인이 말하는 우주의 질서 곧 완전성의 표상으로서의 진리를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가리키는 땅은 그에 맞선 인간의 가치 그 적나라한 욕망을 이야기한다.

완전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신(神)이거나 진리다. 그리고 그 완전한 진리에 맞서서 불완전한 인간의 실존이 있다. 둘은 마주본다. 그리고 손을 내민다. 그 내밀어진 손길 사이에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능성이 있다.  

천상의 진리를 지상의 인간사회에 반영하여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려는 이가 있는가 하면 불완전한 인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려는 이도 있다. 전자는 질서를 주장하고 후자는 가치를 주장한다.

전자는 유교주의에 가깝고 후자는 도교주의에 가깝다. 전자는 플라톤에 가깝고 후자는 아리스토텔레스에 가깝다. 전자는 아폴론에 가깝고 후자는 디오니소스에 가깝다. 전자는 클래식에 가깝고 후자는 팝에 가깝다.

이상이 있고 현실이 있다. 완전성이 있고 불완전성이 있다. 사실주의가 있고 인상주의가 있다. 계몽이 있고 소통이 있다. 이 둘의 맞섬이야말로 존재의 본질과 통한다 할 것이다. 세상의 전모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무엇이 완전한가?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떳떳한 것이며 아름다운 것이다. 무엇이 자연스러운가? 둘의 만남이 자연스럽다. 어색한 것은 잘못된 만남이고 자연스러운 것은 잘된 만남이다.  

무엇이 떳떳한가?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야 할 장소에서 만날 때 떳떳하다. 그리고 아름답다. 아름다운 만남, 떳떳한 만남, 자연스러운 만남이 소통을 낳는다. 그럴 때 존재는 완전에 가깝다.

추사와 다산과 초의가 만났을 때 아름답다. 유교와 불교, 주류와 비주류, 다른 세대에 다른 신분의 세 사람이 서로에 대한 간절함을 담은 편지로 만나서 더욱 아름답다. 그 빛나는 만남이 소통을 낳는다.

혼자서 완전한 것은 없다. 석가도 완전하지 않고 예수도 완전하지 않다. 공자는 길 위에서 서성거렸고 노자는 스스로 고립되었다. 체 게바라는 정글에서 죽어갔고 샤르트르는 그를 부러워 했다.

관중과 포숙아는 불완전하지만 둘의 우정은 완전하다. 백이와 숙제는 둘 다 불완전하지만 그들이 남긴 전설은 완전을 그린다. 공자와 노자 둘 다 불완전하지만 서로의 단점을 보완한다.

소크라테스는 불완전하지만 제자 플라톤과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로 계승되어 완전하다. 알렉산더는 불완전하지만 그가 이룩한 동서양의 만남은 완전에 가깝다. 만나서 소통하고 계승될 때 완전하다.

모든 인간은 불완전하다. 죽기 때문에 불완전하다. 그러나 계승되는 것은 죽지 않는다. 제자와 후학들에 의해 본받아질 때 죽지 않는다. 본보기의 본이 될 때 그러허다. 그렇게 시대를 뛰어넘어 역사와 소통함으로 하여 완성된다.

홀로 고립된 채 완전할 수는 없다.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하여 뜻하지 않게 고립될 수도 있다. 그러나 대신 드라마를 남길 수 있다. 관객의 참여로 소통할 수 있고 평론가가 거들어 소통할 수 있고 역사가가 기록하여 소통할 수 있다.

고흐는 700여 점의 작품을 그렸지만 살아서는 한 점도 팔지 못했다고 한다. 이중섭은 음화를 그린 혐의로 전시회의 작품을 압수당하고 상심한 채 죽어갔다. 그러나 외롭지 않았다. 드라마를 남겼기 때문이다.

일찍이 인간 존재의 비참함을 보고 낙담했다. 별 수 없는 인간이라는 한계를 넘어서고 싶었다. 깨달음 밖에 없다. 깨달음은 직관이며 직관은 패턴을 읽는 능력이며 패턴은 소통의 구조다. 깨달음은 소통을 깨달음이다.

위대한 것은 만남이다. 한 인간의 존재는 비참 뿐이지만 두 인격의 만남은 비참을 극복한다. 그러므로 통해야 한다. 60억 인간이 소통한다면 60억 세포를 가진 인간을 넘어선 또다른 인격이 탄생하는 것이다.   

인류문명은 그 자체로서 또 하나의 지성체이다. 한 인간의 일생은 이성과 욕망 사이에서 모순에 가득찬 삶이 되지만 그 사람이 촉발한 그가 속한 그룹 전체의 집단인격, 집단이성, 집단지능의 상승은 충분히 아름답다.

한 인간이 그가 속한 그룹 전체의 집단인격을 상승시킬 때 그 문명은 한 차원 더 높은 세계로 비약한다. 그럴 때 그 세계는 완성된다. 하나의 단계를 완성하고 새로운 스테이지로 나아가는 것이다.

노예와 시민 사이의 단절을 끝장낼 때 그 거대한 소통으로 하여 고대문명이라는 한 시대를 끝막고 중세로 넘어오듯이, 또 동양과 서양의 단절을 끝장낼 때 그 위대한 소통으로 하여 중세를 끝막고 근대라는 새 시대로 나아가듯이.

하나의 소통의 문이 열릴 때 마다 그 이전의 단계는 완성된다. 그리고 상승한다. 집단인격과 집단지능과 집단이성이 비약한다. 그럴 때 아름답다. 개인은 늙고 죽어가지만 인류문명이라는 지성체는 완전에 다다른다.

지금 우리는 ‘근대’라는 하나의 스테이지를 마감해야 한다. 완성해야 한다. 끝장내야 한다. 꽃 피워야 한다. 열매맺어야 한다. 수확해야 한다. 또다른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더 큰 세계와의 소통의 문을 열어젖힘으로써 가능하다.

지금 우리 사회는 민주화 대장정이라는 하나의 스테이지를 완성해야 한다. 끝장내야 한다. 꽃 피워야 한다. 열매맺어야 한다. 수확해야 한다. 또다른 거대한 소통의 세계로 지금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두려움없이 주저함이 없이 부끄러움도 없이 어색함도 없이 거침없이 나아가야 한다. 새로운 소통의 문을 열어젖혀야 한다. 새로운 문명의 지평을 열어야 한다. 그렇게 우리 자신의 모습을 완성할 때 세계도 완성된다.

소통할 때 아름답다. 한 마리 나비와 한 송이 꽃이 소통할 때 아름답고 한 여자와 한 남자가 사랑할 때 아름답다. 모든 불의에 의해 갈라져 있는 것이 다시 만날 때 아름답다. 그 맞잡은 손에 다뜻한 온기가 통할 때 아름답다.

서예가의 붓이 종이를 만날 때 통한다. 도공의 손길이 흙을 매만질 때 전광석화 같은 통함이 있다. 연주자의 손길이 피아노 건반을 스쳐닿을 때 전율함이 있다. 열광이 있다. 광채가 있다. 갈채가 있다.

그렇게 서로는 서로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끌어당긴다. 유혹한다. 매력을 발산한다. 향(香)과 기(氣)가 그 가운데 있다. 그럴 때 존재는 찬란히 빛난다. 유혹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너를, 너는 나를, 서로는 서로를, 모두는 모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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