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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9334 vote 0 2007.04.23 (19:55:43)

"계몽인가 소통인가"
'노무현은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작품'

14년 간 소통을 말했더니.. ‘그런데 소통이 뭐지?’ 하고 되묻는 분 있다. ‘그래. 소통의 중요성은 알아들었고 이제부터 무슨 소통을 어떻게 해야하지? 알맹이를 말해봐!’ 하고 헛다리 짚는 분도 있다.

소통이 안 되는 분들이다. 이미 마음의 문을 굳게 닫은 분들이다. 그런 분들과는 소통하지 않는다. 어차피 소통 안 되는 벽창호님들은 계속 소통 안 되게 놔두고 소통이 되는 분들을 위주로 진도 나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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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는 죽은 다음에야 관객과의 소통에 성공했다. 이중섭 역시 사후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았다. 나사렛 출신 예수가 그랬듯이.. 어쩌면 노무현 역시 퇴임한 이후에나 제대로 된 평가가 내려질 것이다.

(노무현이 어떻게 평가받는가는 노무현 세력이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의해 결정된다. 노무현 세력이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는 역사가 그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고흐의 그림값이 올라간 것은.. 관객들이 갑자기 고흐를 이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시대에 와서 사회분위기가 전반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카메라가 보급되면서 초상화 같은 그림은 필요없다는 사실을 모두 알게 되었다.

시대가 인물을 규정한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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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이라는 코끼리가 등장했다. 많은 사람들이 목격했다. 코끼리 이야기는 도처에서 들을 수 있다. 시장바닥에서도 들을 수 있고 정치판에서도 들을 수 있고 방송에서도 들을 수 있다.

코끼리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소통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누구든 소통을 말하는 시대가 되었다. 사회가 그렇게 변한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 코끼리의 참다운 의미를 아는 사람은 없다.

누구는 코끼리의 다리를 만졌고 누구는 코끼리의 배를 만졌다. 배를 만져본 사람은 말한다. 소통이라는 코끼리는 천장처럼 평평하다고. 다리를 만져본 사람은 말한다. 소통이라는 코끼리는 기둥처럼 우뚝하다고.

여전히 소통되지 못하고 있다. 전모를 보아야 소통이 이루어진다. 필자가 말하는 소통은.. ‘밀도있는 소통’이다. 진정한 소통이어야 한다. 쌍방향 소통이어야 한다. 피드백이 되어야 한다. 에너지 순환의 1사이클이 완전해야 한다.

소통이라는 말이 이 시대의 화두로 떠오른다. 점차 더 많은 사람이 소통을 말하게 된다. 서점가에는 소통의 이름으로 책이 나오고 지식인들은 소통의 이름으로 담론을 전개하고 정치인들은 동과 서, 남과 북을 소통시키는 정책을 들고 나온다.

왜인가?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역사의 발전단계가 한 단계 더 이행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소통의 시대가 활짝 열린 것이다. 숙종 때 상평통보가 보급되면서 전국 곳곳에 오일장이 생겨났듯이..

그 여파로 양반계급의 지배질서가 무너지고 전국 각지에 요호부민이 출현하면서 상민계급의 발언권이 강화되어 시전상인의 금난전권이 철폐되었듯이 세상이 밑바닥에서부터 확 바뀌어버린 것이다.

그렇다. 소통이라는 것은.. 막연히 소통하고자 한다고 해서 소통되지 않는다. 상평통보가 없으면 물산이 소통되지 않는다. 은행제도가 없으면 자본이 소통되지 않는다. 주식회사 제도가 없으면 경제가 소통되지 않는다.

소통은 막힌 것을 뚫는 것이다. 막힌 굴뚝은 굴뚝청소부가 뚫고 막힌 시장은 FTA로 뚫고, 막힌 도로는 신호등으로 뚫고, 막힌 외교는 반기문으로 뚫는다. 그 막힌 것을 뚫을 구체적인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

소통은 상평통보라는, 은행과 주식회사라는.. 구체적인 물적 토대의 뒷받침에 의해 가능하다. 그것이 없이 말로 소통을 백날 떠들어봤자 전혀 소통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상평통보는? 인터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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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은 계몽에 대해 소통이다. 계몽의 패러다임에 대해서 소통의 패러다임이다. 소통은 20세기의 근대를 끝막고 새로이 펼쳐지는 21세기의 탈근대를 규정하는 개념이다. 새로운 역사의 장이 펼쳐지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은 진작에 나왔지만 어수선하다. 병으로 치면 질병의 원인이 되는 바이러스를 규명한 것이 아니라.. 여러 증상을 모아서 뭉뚱그려 일컫는 ‘증후군’ 정도에 해당되겠다.

소통은 계몽과 대비될 때 의미가 있다. 말로는 소통한다면서 계속 계몽하고 있는 분들이 있는데 그거 전혀 소통 아니다. 민초들과 소통한다면서 계속 ‘스킨십’ 하고 있는 손학규들 있는데 그거 전혀 소통 아니다.

소통의 밀도가 있다. 밀도 높은 소통을 해야한다. 물물교환은 밀도가 낮은 소통이다. 상평통보라야 밀도있는 소통은 가능하다. 상평통보도 없이 소통하겠다고 떠드는 그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상평통보(常平通寶).. 이름 한번 좋다. 상민계급 중심으로 평등하게 소통한다는 것이다. 대중을 중심으로, 눈팅을 중심으로, 세력을 중심으로 가야한다는 철학이 그 시대에 이미 성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통은 자신이 아는 것을 상대방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이미 가지고 있는 잠재능력을 끌어내는 것이다. 소통은 쌍방향적일 때만 의미가 있다. 일방향적인 훈화는 전혀 소통이 아니다.

바야흐로 계몽의 시대는 지났고 소통의 시대가 도래했다. 시대가 변했다. 그 본질은 중등교육의 대량보급과 정보화다. 20세기까지는 교육받은 사람과 교육받지 못한 사람이 섞여 있었다. 이 경우 계몽에서 가치가 실현된다.

소통의 시대가 왔다고 해서 계몽이 필요없는 것은 아니다. 소통은 적어도 중등교육이라는 상평통보가 있어야 가능하다. 4, 50년대에 소년기를 보낸 이 나라의 기성세대는 평균학력이 초등학교 4학년 이하다.

그들은 여전히 지식의 물물교환 시대를 벗어나지 못한다. 소통이 안 된다. 이 분들은 계몽해야 한다. 조중동이나 쳐보는 사람들은 소통 보다 계몽이 먹힌다. 그들은 여전히 20세기를 살고있다.

이제 와서 왜 소통인가? 중등교육이 대량으로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인터넷을 할 수 있는 정도로 국민의 지적수준이 상승했기 때문이다. 이제 지식인이 민중 속으로 들어가서 계몽하던 시대는 지났다.(조중동 보는 사람 제외하고)

소통의 의미를 알려면 역사의 패러다임의 변화를 알아야 한다. 역사는 근대에서 탈근대가 아니라 계몽에서 소통으로 간다. 산업화에서 정보화로 간다. 산업화의 패러다임에서 정보화의 패러다임으로 말을 갈아타야 한다.

소통은 나의 백프로를 발휘하여 상대방의 백프로를 끌어내는 것이다. 민중의 잠재한 역량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다. 민중을 참여시키는 것, 민중이라는 좋은 바이얼린에서 최고의 음률을 끌어내는 것이다.

민중은 이미 참여의 열망으로 가득하다. 신바람이라는 말은 오래전에 나왔다. 웹 2.0이라는 것도 있고 UCC라는 것도 있다. 이 모두가 쌍방향적 소통을 의미한다. 독자의 참여에 기반하여 독자의 능력을 끌어낸 것이다.

2002년 이회창의 선거전략은 선거전문가의 기획으로 이루어졌다. 독자들은 참여하지 않았다. 노무현의 선거전략은? 없었다. 노사모의 돼지저금통은 독자의 참여에 의해 저절로 이루어졌다. 이것이 소통이다.

유권자가 스스로 움직이게 하는 것, 숨겨져 있는 유권자의 능력을 끌어내는 것, 노무현 자신의 재능이 아니라 유권자의 재능을 활용하는 것이다. 한국의 유권자들은 노무현 개인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노무현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벌이는 일들이 신나고 재미있어서 노무현을 지지한 것이다. 노무현은 ‘노무현의 사람들’이 가진 재능을 끌어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진정한 소통에 성공한 것이다.

자기 머리에 든 것을 타인에게 이전하는 것이 계몽이면.. 타인의 마음 속에 본래 있는 것을 꺼집어내는 것이 소통이다. 내가 아는 것을 너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스스로 당신의 최선을 보여주도록 유도하기.

이 글을 읽는 독자가 모르던 것을 새로 알게 되었다면 소통이 아니다. 독자가 원래 가지고 있던 지혜를 발휘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것이 소통이다. 그것은 아는 것을 새롭게 각성시키는 것이다.

‘맞아! 나도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그게 원래 내 생각이야!’ 하고 동의하게 하는 것이 소통이다. 독자가 이미 가지고 있던 생각을, 독자의 체험 속에 녹아 있던 것을 정리해 주는 것이 소통이다.

계몽이 지식의 전달이라면 소통은 공명시키는 것, 전염시키는 것, 퍼뜨리는 것이다.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을.. 특정한 시점에, 특정한 장소에, 특정한 방향으로 정립하도록 자극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의 바탕에 원래 그것이 없다면? 소통은 실패다. 아래 한글 소프트웨어가 컴퓨터에 설치되어 있지 않는 사람과는 한글문서로 소통할 수 없다. 지식은 열심히 하면 언젠가는 되지만 소통은 안 되는건 안 되는 거다.

아무리 아둔한 사람이라도 열심히 가르치면 조금은 나아진다. 그러나 소통은 오로지 통하는 사람과만 통한다. 사전에 ‘체험의 공유’가 세팅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안 통하는 조중동과는 영원히 안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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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어떤 폭력배가 열차 안에서 여성을 폭행했는데 다수의 일본인 승객들이 그저 보고만 있었다고 한다. 여성이 울며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도 ‘뭘 쳐다봐!’ 하는 위협에 주눅들어 못본 체 한 거다.

그때 누군가가 폭력배를 제지하고 나섰다면 모든 승객이 참여했을 것이다.

일본인들은 내면에 용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가 방아쇠를 당겨주지 않으면, 그 뇌관에 점화해주지 않으면 그 용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한 번도 사용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사용하지 않는다.

한국인들은 다르다. 80년대 최루가스 마시면서 아스팔트 위를 달려본 그들은 다르다. 한국인들은 누군가가 방아쇠를 당겨야만 하는 시점에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는 연습이 되어 있다. 그러므로 소통이 가능하다.

지금 한국인들에게 부족한 것은 그 열차 안에서 용기있게 나서는 것이 옳다는 판단을 내려줄 지식이 아니라.. 그 방아쇠를 당겨줄 한 사람의 리더다. 한 사람이 하면 모두가 한다.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인은 그것을 보여주었다.

한국의 민중은 성숙하다. 그런데 여론조사를 하면 이명박을 지지한다고 말한다. 그 소통의 방아쇠를 누군가가 제거해버린 것이다. 그 결과 한국인들은 내가 나서서 폭력배를 제지해도 다른 사람이 도와줄지 확신하지 못하게 되었다.

한국인들이 더 높은 가치를 바라보고 더 멋진 꿈을 꾸고 더 위대한 이상을 가지고 더 중요한 정책에 자신의 한 표를 던지게 하는 것이 소통이다. 그것은 계몽으로 안 된다. 가르쳐서 안 된다.

한국인에게 부족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믿음이다. 내가 하면 모두 한다는 믿음. 그 믿음을 낳는 것은 체험의 공유다. 몰라서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안해봐서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체험이 필요하다.

2002년의 그 여름에 수백만명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무질서해지기 십상이다. 영국의 훌리건처럼 될 수 있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붉은악마가 그 광장에서 먼저 방아쇠를 당겼기 때문에 소통이 되었다.

한국에서 훌리건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도 난동 부리지 않았다.(외국영화에는 집단난동 장면이 많다. 군중이 술집에서 맥주 마시다가 한 사람이 주먹을 휘두르면 일제히 주먹을 휘두른다. 그들은 훌리건 짓이 연습되어 있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한 번도 안해봐서 못할 때, 그 믿음의 방아쇠를 격발하는 능력이 노무현에게 있다. 노무현이 먼저 그 열차 안의 폭력배를 제지하자 모두가 합세하여 폭력배를 때려뉘었다. 빌어먹을 지역주의라는 폭력배를!

한국인들이 노무현을 당선시켰을 때 세계는 한국을 다시 보았다. 어제까지 독재자에게 굽실거리던 한국의 민초들이 언제 저렇게 수준이 높아졌지? 노무현은 한국인들에게 숨겨져 있던 ‘수준’을 끌어낸 것이다.

한국인들 스스로 자신의 성숙함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나에게 이런 능력이 있다니.’ 그것은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공명하는 것이다. 파장을 일치시킬 때 공명한다. 이를 위해 ‘체험의 공유’는 필수.

체험의 공유가 없으면 코드가 맞지 않는다. 이심전심 안 된다. 경험이 없으면, 누군가가 먼저 나서주지 않으면, 방아쇠를 격발해주지 않으면, 노련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지휘봉을 잡아주지 않으면 소통은 실패다.

지금 정치권을 보라. 민심을 읽는 정치인이 단 한 명도 없다. 손학규 민심장정 足빠지게 해도 지지율이 1프로도 안오른다. 왜 민심장정 하는데 민심이 등을 돌릴까? 소통이 안되기 때문이다.

노무현이 해낸 소통을 손학규는 못한다. 소통은 아무나 하는게 아니다. 서프에 리플 많이 달았다고 독자와 소통했다고 우기는건 손학규가 민심장정 했다고 민심과 소통했다고 우기는 것이다.  

민심은 자부심을 원한다. 손학규는 민중이 원하는 자부심을 주지 않았다. 체면을 세워주고 위신을 세워주고 긍지를 주기를 민심은 원한다. 그 민심이 원하는 것을 주어야 소통이 된다.

‘위대한 대한민국의 비전’이라는 자부심을 주지 않고 민생타령이라는 경제 슬럼프, 먹고사니즘이라는 ‘경제 우울증’을 전염시키고 있다. ‘동 태 박 박 손 찬’.. 전부 우울증 환자들이다. 아 소통 안 된다.

민중이 가진 능력, 민중의 열정도 신바람도 행동력도 그들은 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들 뒤에 줄을 설 때 한국인들은 초라해진다. 사농공상 중에서 사(士)로 상승하고 싶은 한국인들을 상(商)으로 추락시키려 한다.

이 시대에 민심은 하나의 스테이지를 끝내고 또다른 스테이지로 나아가기 원한다. 동기부여를 원한다. 2002년 그 열차안에서 합세해서 지역주의라는 폭력배를 때려뉘었듯이 이번에도 합세해서 수구떼를 때려누이기 원한다.

정치인과 합세해서 그 민중이 더 위대해져야 소통이다. 손학규 덕분에 한국인이 더 위대해졌나? 아니다. 소통이 아니다. 밀도있는 소통이 아니다. 나의 전부로 상대방의 전부를 끌어낸 것이 아니다. 소통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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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은 지식인의 ‘클래식’에서 대중의 ‘팝’으로 가는 것이다. 그저 그런 것이 아니라 역사의 필연법칙이다. 소통은 아폴론적 가치에서 디오니소스적 가치로 가는 것이다. 공자에서 노자로 가는 것이다.

소승불교에서 대승불교로 가는 것이다. 금강경에서 간화선으로 가는 것이다. 점오점수에서 돈오돈수로 가는 것이다. 신의 완전성을 추구함에서 인간의 적나라한 욕망을 현시함으로 가는 것이다.

계몽은 힘이고 소통은 미(美)다. 계몽은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소통은 미(美)로 동기를 부여한다. 계몽과 소통은 원초적으로 접근법이 다르다. 계몽은 질서를 강조하고 소통은 가치를 강조한다.

계몽은 주류가 주도권을 잡고 소통은 비주류가 주도권을 잡는다. 계몽은 논객이 주도하고 소통은 눈팅이 주도한다. 일이 이렇게 가는 이유는 앞에서 말했듯이 교육이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정보화 때문이다.

한국이 세계최고의 교육열을 가지고 있어서 한국에서 먼저 계몽에서 소통으로 간다. 다만 수구떼는 학력이 낮아 어쩔 수 없이 소통 안 된다. 글자를 모르면 소통이 안 되고 인터넷이 안 되면 소통이 안 된다.

상평통보가 없으면 물산이 소통되지 않고 은행이 없으면 자본이 소통되지 않는다. 고속도로가 없으면 교통이 소통되지 않고 인천공항이 없으면 비행기가 소통되지 않는다. 이건 어쩔 수 없는 물리적 환경이다.

계몽은 고전주의고 소통은 낭만주의다. 계몽은 두보의 시고 소통은 이백의 시다. 계몽은 북종화고 소통은 남종화다. 계몽은 시점(視點)이고 소통은 관점(觀點)이다. 계몽은 코스모스고 소통은 카오스다.

계몽은 원형이고 소통은 변형이다. 계몽은 스파르타고 소통은 아테네다. 계몽은 질서고 소통은 무질서다. 무질서해야 소통되는데 지식인은 무질서를 싫어하여 함부로 파쇼라는 딱지를 붙인다. 무질서하면 계몽하기 어려우니까.

왜 소통해야 하는가? 계몽이 먹히지 않기 때문이다. 지식인이 아무리 좋은 정책을 개발해도 현재 한국의 정치, 언론구조에서는 그것이 먹히지 않기 때문에 노무현의 소통으로 타개해야 하는 것이다.

왜 소통이어야 하는가? 좌파들이 민중의 잠재력을 끌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선거에서 이기려면 우리가 옳다는 사실을 납득시켜야 하는데 ‘설명’으로는 안 되지만 ‘감동’으로는 되기 때문이다.

2002년 노무현은 ‘설명’이 아니라 ‘감동’으로 승리했다. 그 열차 안에서 폭력배를 제지해야 한다는 사실은 알고도 실천을 못한다. 몰라서 못한다면 지식인의 설명으로 해결이 되겠지만 알고도 못하는 것은 소통으로 해결할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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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일요일.. 시골에서 올 봄에 새로 난 두릅을 맛본다. 그 향기와 맛이 감동적이다. 어린시절 봄 마다 두릅을 먹었지만 그 향기와 맛에 주의한 적은 없었다. 그냥 허겁지겁 먹었던 것이다.

왜 이제와서 그 향기와 맛에 주목하게 되었을까?

백자 달항아리는 그냥 평범한 항아리다. 그 평범한 항아리의 가격이 5억원이다. 된장도 고추장도 담을 수도 없는, 쓸모라고는 없는 항아리의 가격이 5억원에 이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만약 그대에게 그 항아리가 감동적으로 다가온다면, 그 항아리의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면 이유가 있다. 당신은 무언가를 원하고 있다. 갈구하고 있다. 애타게 찾는 것이 있다.

백자 달 항아리는 ‘완전’에 대한 영감을 준다. 당신이 연주자라면 ‘완전한 연주’를 꾀할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백자 달 항아리를 찾게 될 것이다. 거기서 영감을 받고자 할 것이다.

당신이 화가라면 완전한 작품을 꾀할 것이다. 역시 달항아리에서 영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달항아리는 완전히 둥글지 않다. 완전히 희지도 않다. 불완전한듯 도리어 완전하다. 진정한 완전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 알려준다.

완전을 꿈 꾸지 않는다면? 달항아리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완전한 하루를 꿈 꾸지 않으면, 완전한 한 끼의 식사를 기대하지 않으면, 완전한 하루의 데이트를 소망하지 않으면.. 당신은 달항아리와 소통하지 못한다.

완전한 것은 완전한 것과 통한다. 불완전한 것과는 소통하지 않는다. 아무나 소통되는 것은 아니다. 내부에 욕망을 가진 사람만이, 갈구하는 사람만이, 애타게 찾는 사람과만 소통할 수 있다.

봄에 새로 난 두릅의 향기는 하루종일 남아있다. 그 향에 내 몸에 배어 버린다. 잊혀지지 않는다. 두고두고 각성시킨다. 황토방의 흙냄새가 오래도록 떠나지 않듯이, 시골의 구수한 두엄냄새가 오래도록 머리에서 떠나지 않듯이.

만약 당신에게 그런 체험이 없다면.. 완전한 것은 평범하고 푸근한 곳에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 천만마리 개구리가 일제히 우는 까만 밤에 논둑길을 걸을 때의 전율할 듯한 느낌을 전하고자 하는.. 지금 나의 소통 시도는 실패다.

 


인물인가 정책인가?

인물과 정책은 비유하자면.. ‘배우’와 ‘감독’에 비할 수 있다. 확실히 감독이 배우보다 더 중요하지만 배우가 더 많은 돈을 받는다. 이건 모순이다. 이때 감독이 돈 잘 버는 배우를 질투한다면?

영화가 발전할수록 관객의 관심은 배우에서 감독으로 옮겨간다. 우리나라에도 최근에는 감독을 보고 영화를 선택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배우에 열광하는 관객의 수준이 낮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 해서 평론가가 배우에 열광하는 관객을 비난한다면? 그 평론가의 수준 또한 낮은 거다.

현명한 평론가라면.. 그 배우의 특별한 능력에 대해서도 적절히 짚어줄 것이다. 그것이 영화판 전체의 파이를 키우는데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인물보다 정책이 우위라 말함은.. 눈팅의 수준보다 논객의 수준이 우위라 말하는 것과 같다. 맞는 말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말하는 논객은 수준이 낮다.

어쨌든 배우보다 감독에 주목해야 한다는 말은 맞다. 마찬가지로 노무현이 정치를 이끌어가는게 아니라.. 범개혁세력의 지식인 집단 전체의 정책역량을 노무현이라는 인물이 대표할 뿐이다.

사실 나는 노무현 세력에 관심이 있지 노무현 개인에게는 관심이 없다. 어쩌면 서프에서 노빠가 아닌 사람은 나 뿐인지도 모른다. 노무현 보다 노무현이 모아놓은 서프의 힘이 탐이 난다.

나는 노무현을 이용한다. 어쨌든 노무현과 나는 코드가 맞다. 우연인지도 모르지만 내가 가려는 방향에는 항상 노무현이 있었다. 그래도 한국의 지식인 전체의 정책역량이 오늘날의 노무현을 창조했다고 나는 믿는다.

노무현 세력 없이 노무현은 탄생할 수도 없었다.

관객을 비난해서 안 되는 이유는.. 관객들은 기본적으로 영화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영화는 예술이 아니라 상품이다. 돈 내고 상품을 구매하러 온 소비자에게 예술을 이해못한다고 화내는건 생뚱맞다.

소비자들은 감독이 아니라 배우를 보고 극장을 찾는다. 그들은 실은 영화를 보러 온 것이 아니라 애인과 데이트를 하기 위해 극장을 이용하러 온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진정한 관객이 아니다.

그들에게.. ‘너희들이 영화를 알아? 영화에는 관심이 없고 데이트할 장소를 위해 극장을 찾은 너희들이 진정한 관객이라고 할 수 있어?’ 하고 다그칠까?

마찬가지로 서프 눈팅들 다수는 원래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노무현 덕분에 비로소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인물에 끌려 서프를 찾는다. 그리고 정치를 알아갈수록 인물 보다는 정책을 찾게 된다.

그들이 인물 보다 정책을 찾도록 유도하려면.. 일단 인물을 이용하여 그들을 이 공간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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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경도의 단점도 있다. 이명박에 홀린 딴거지들도 인물에 끌린 것이다. 그러므로 인물집착은 비판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나치면 안 된다.

인물에 홀려서.. 겨우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된 초보 눈팅들은 신입생처럼 환영해 주어야 한다. 배우에 홀려 극장을 찾은 초보관객들도 환영해야 한다. 데이트할 목적으로 극장을 찾은 얌체관객들도 환영해야 한다.

그들이 배우에서 감독으로, 그리고 인물에서 정책으로 점차 상승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평론가의 역할이고 논객의 역할이다.

소설이 천 페이지라 해도 핵심적인 메시지는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 한문장만 독자에게 전달하면? 아무도 소설을 읽지 않는다. 독자들은 작가의 주제의식 보다는 소설 자체의 흥미에 빠져있다.

그런 독자를 비난하면? 누가 소설을 읽겠는가?

결국 정책이라는 상품을 인물이라는 포장지에 사서 배달하는 것이며.. 단 한 줄의 메시지를 천 페이지짜리 포장지에 싼 것이 소설이며.. 소비자가 상품보다는 포장지에 홀려서 물건을 사더라도.. 일단 물건을 한번이라도 접촉하게 해야 그 물건의 품질을 알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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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좋아하다 망한 사례가 허풍선이 레이건이다. 미국인들이 등신 부시를 찍었다가 낭패를 보고도.. 그 아들 ‘상등신’ 조지 부시를 또 찍은 이유는 레이건 시대의 향수에 빠졌기 때문이다. 인물 중독이다.

반면 케네디의 성공사례도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케네디의 등장이 진보, 보수를 초월하는 ‘전쟁세력’ 대 ‘전후세력’의 바통터치에 의미가 있다는 점이다. 세력판도가 바뀐 것이다.

세력에 주목해야 한다. 사실 케네디의 정책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진보와 보수의 대결에서 케네디가 진보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19세기 권위주의에서 20세기 탈권위주의로 이행하는 변곡점에 그가 서 있었다는 것이다.

케네디 이전 시대를 보라. 영국의 처칠, 프랑스의 드골, 러시아의 스탈린, 미국의 아이젠하워.. 이런 70대 할배들이 세계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 시대 젊은이들은 숨막혀서 죽는줄 알았다. 그들은 케네디라는 탈출구를 찾았다.

이건 진보도 아니고 보수도 아니고 대단한 정책도 아니다. 차원이 다른 거다. 개념을 잡을 수 있어야 한다.

케네디는 진보, 보수를 초월하여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아니 케네디보다 재클린이 더했다. 재클린은 아무런 정책도 보여주지 못했지만.. 그의 존재 자체가 멋진 정책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삶 자체를 바꿔놓았다. 재클린 덕분에 생각이 바뀌고, 문화가 바뀌고, 삶이 바뀌고, 역사가 바뀌었다. 그 이유는 재클린의 의상이 상류사회 귀부인의 숨막히는 의상이 아니라 신세대 미국 젊은이들의 간편한 의상이었기 때문이다. 의상에서 혁명이 나왔다. 이것이 위대한 소통의 힘이다.

결론적으로 케네디 시대의 성공은 정책의 성공이 아니라 인물의 성공이며, 그 인물의 성공은 케네디라는 인물 그 자체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 당시 미국이 그런 절묘한 시점, 거대한 패러다임의 전환기에 와 있었기 때문이다.

인물 위에 정책이 있다면.. 그 정책 위에 시대가 있고 역사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대는, 그 역사는 소통의 바아쇠를 당겨줄 인물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인물에 집착하지 말라는건 케네디 아니라도 누군가가 그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지금 한국도 마찬가지다. 전환기의 갈등이다. 굵고 짧게 앓고 빠르게 넘어가야 한다. 진도나가야 한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한국이 지금 세력 대 세력의 대전환기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세력의 승부가 필요하다. 세력을 결집할 인물은 진보/보수의 정책차이를 초월하여 범민주화세력을 결집할 수 있는 인물이다. 50년 민주화 장정의 총결산이 필요한 시점이다. 조중동을 박살내고서야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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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이 중요하면 그 역시 정책으로 풀어야 한다. 정책방을 만드는 정책을 쓰든지.. 아니면 정책글 위주로 대문편집을 요구하고 인물글은 베스트뷰로 가게 하는 정책을 쓰든지..

아니면 정책전문가를 고정필진으로 추천하는 정책을 쓰든지.. 어떻든 정책문제는 정책적으로 해결해야지.. 인물을 씹어서 ‘쌈판났네 구경가세’ 하고 센세이션을 일으켜 눈길을 끌려한다면.. 그건 모순된다.

정책이라는 좋은 주장은 정책방 개설이라는 좋은 정책으로 풀어가야 한다. 사실 오늘날 서프의 발전도 눈팅의 의견을 반영하고 알바를 퇴치하는 등의 여러 정책 덕분에 가능했던 것이다.

정책을 강조함은 옳지만.. 정책은 논객 역할이고 인물은 독자의 관심사다. 정책은 대문으로 가고 인물은 울뷰로 간다. 서로의 역할을 존중해야 한다. 대선 때 투표장 가서 투표하는 사람은 논객이 아니라 눈팅이 다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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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이 정책이 아니라 인물을 중심으로 열전을 쓴 이유는? 미래와 소통하기 위해서다. 소통은 인물을 중심으로.. 정확히는 그 인물의 삶에 투영된 그 시대의 시대정신을 중심으로..

더 정확히는 그 시대정신에 반영된 사회적 양식의 미학적 완전성을 중심으로 시대와의 소통은 가능하다.

미학으로만 소통할 수 있다. 우리는 다보탑이나 석가탑의 양식에 반영된 신라인의 미학을 통해서 그 시대의 가치를 이해한다. 그 시대와 소통한다. 그러므로 가장 잘 쓴 역사는 그 시대의 미학적 양식을 중심으로 기술한 역사다.

사마천이 미학적 양식을 모르기 때문에.. 대충 인물 중심으로 열전을 쓴 것이다. 말하자면 다보탑이나 석가탑이 그 시대의 가치가 반영된 그 시대의 걸작품이라면.. 계백장군이나 온달장군 역시 그 시대가 낳은 걸작품이다.

우리는 우리의 후손들과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위대한 작품을 남겨놓으므로 소통할 수 있다. 후손들은 이 시대가 남긴 걸작품을 통해서 2007년을 이해한다.

후손들이 청계천 돌덩어리 보고 2007년을 이해할까? 아니면 노무현이라는 걸작품을 보고 이해할까? 전태일이 1970년대가 남긴 작품이라면 노무현은 2000년대가 남긴 작품이다.

세종이라는 인물이 조선을 위대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위대한 조선이 세종이라는 걸작품을 만든 것이다. 세종 안에 조선정신의 정수가 있다. 추사 김정희 안에 조선후기 문화와 시대정신이 다 들어있다.

우리가 라파엘로나 미켈란젤로가 남긴 작품을 보고 르네상스 시대를 이해하듯이 알렉산더나 카이사르 같은 인물을 보고 그 시대를 이해한다. 인물 속에 미학적 완전성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다빈치나 미켈란젤로라는 인물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르네상스가 다빈치라는, 미켈란제로라는, 라파엘로라는 작품을 창조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이 시간에도 노무현이라는 작품을 창조하고 있다.

인물 위에 정책있고, 정책 위에 역사있고, 역사 위에 미학있고, 그 미학은 인물이라는 작품을 통해 시대를 뛰어넘어 소통한다. 우리는 그 작품의 창조에 참여한다. 쌍방향 소통이라는 방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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