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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0865 vote 0 2007.07.27 (14:38:16)

<개인적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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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의 전개는 ‘객관적 회화’에서 ‘주관적 회화’로의 전개다. 고전주의가 객관이라면 낭만주의는 주관이다. 추사의 금석학이 객관적 과학이라면 그가 개발한 추사체는 주관적 회화다.

19세기가 ‘머리로 그리는’ 미완성의 객관이라면 20세기는 ‘눈으로 그리는’ 완성의 주관이고 21세기는 ‘마음으로 그리는’ 소통의 직관이다. 그러나 지식그룹의 이론은 여전히 낡은 시대의 객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영화평론가들은 ‘머리로 그린’ 영화를 선호한다. 아직도 관객을 가르치려 드는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현장의 관객들은 이미 주관주의를 넘어 직관주의를 선호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과학의 객관이 생산력의 변화를 낳는다. 생산력의 발전이 생산관계의 변화를 촉발하면 생산관계가 역전된다. 공급자 시장의 객관주의에서 수요자 시장의 주관주의로 시장의 질서가 전복된다.

상품의 가치는 비용과 효용이 결정한다. 객관은 생산자가 투입한 비용이다. 그 제조원가는 객관적으로 검증이 가능하다. 생산자가 상품제작에 100을 투입했다면 그 제품의 가치는 정확히 100이다.

주관은 소비자가 결정하는 제품의 용도다. 케이크 한 조각의 가치는 그것을 혼자 먹느냐 아니면 연인과 함께 먹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선물용 상품은 주는 쪽과 받는 쪽 양쪽에서 동시에 가치가 발생한다. 당연히 비싸다.

비용과 효용을 넘어 제 3의 가치가 있다. 직관은 ‘양식’의 가치다. 곧 브랜드 가치다. 그 상품의 소비와 무관한 3자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 때 그 전파의 값어치다. 객관의 비용도 아니고 주관의 효용도 아닌 별개의 가치가 있다.

시장의 질서는 공급자의 비용이 지배하는 단계에서 소비자의 효용이 지배하는 단계를 거쳐 브랜드의 파급효과가 지배하는 단계로 넘어간다. 타인에게 전파할 수 있느냐 그렇지 못하냐에 따라 가치는 달라진다.

비틀즈의 음악은 대중이 따라부를 수 있다. 전파할 수 있다. 고흐의 그림이 주는 울림은 더불어 공감할 수 있다. 예술이 대중화 되고 상업화 되는 이유는 전파에 의한 ‘양식화’라는 제 3의 가치를 창조하기 때문이다.  

나이키 신발 한 켤레의 가치는 제조원가로 검증되는 비용가치도 아니고 그 신발이 소년의 발을 보호하여 주는 효용가치도 아니다. 그 소년이 또래들에게 영향을 주는 가치다. 예술의 진정한 목적이 여기에 있다.

한 편의 영화가 관객에게 주는 즐거움은 작고 먼저 그 영화를 본 사람이 미처 그 영화를 보지 못한 사람에게 전파하는 즐거움은 크다. 함께 그 영화를 본 사람이 공감을 나누는 기쁨은 더욱 크다.

객관과 주관과 직관이 있다. 객관은 비용이고 주관은 효용이며 직관은 양식이다. 그것은 나와 타인의 행동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집단지능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더불어 함께 나눌수록 가치가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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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변한다. 작가가 전하는 메시지 위주의 객관적 회화에서 그려지는 대상 자체에 내재한 조형적 질서를 추구하는 주관적 회화를 거쳐 관객과의 쌍방향 소통을 위주로 하는 직관적 회화로 변한다.

무대 뒤의 연출자가 지배하는 드라마에서 무대 위의 배우가 즉석에서 애드립을 보여주는 쇼로 바뀐다. 마침내 객석의 관객이 댓글을 달고 추임새를 넣는 UCC로 뒤집어진다. 가치 창출의 주체가 바뀌는 것이다.

80년대 코미디는 연출자가 지배했다. 90년대 개그쇼는 배우의 즉흥연기가 지배했다. 그리고 지금은 어떻게든 관객의 쌍방향적 참여를 유도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모든 예술 분야에 공통된다.

이상주의에 기초한 진보주의의 애초의 기획의도는 객관이었다. 과학이었다. 사실주의였다. 그러나 그 과학이 촉발한 21세기의 새로운 물결은 민중이 주체가 되는 직관이다. 곧 ‘현대성’이다. 우리는 그런 시대를 맞이했다.  

한 편의 영화를 제작하려면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그 기술은 만인이 인정하는 객관의 과학이다. 그러나 컴퓨터 그래픽을 활용하는 첨단 촬영기술은 판타지와 결합하여 점점 더 주관으로 이행하고 있다.

80년대 홍콩영화의 성공 원인은 피아노줄을 이용한 아크로바틱한 액션기술이었다. 역시 기술의 발전이 성공의 원인이다. 그럴수록 판타지의 비중이 높아진다. 객관의 과학이 도리어 예술을 주관화 시킨다.   

CG기술이 발달할수록 인간의 내면을 주관적으로 묘사하게 된다. 머리로 영화를 보는 60년대의 구로자와에서 눈으로 영화를 보는 80년대의 스필버그를 넘어 마음으로 영화를 보는 21세기의 김기덕으로 간다.

예술의 본질은 소통이다. 무엇으로 소통할 것인가? 매개가 있어야 한다. 소리의매질은 공기다. 예술의 매질은 무엇인가? 고전적 아카데미즘은 텍스트로 기록된 성경이나 그리이스 신화의 메시지를 매개로 삼았다.

밀레와 쿠르베의 사실주의는 자연의 완전성을 매개로 쓴다. 마네와 모네의 인상주의는 자연에서 인간으로 옮겨온다. 표현주의는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끌어낸다. 결국 정답은 인간의 존엄이다.

고흐와 박수근은 안료의 특성을 활용한다. 추사는 붓과 먹과 종이라는 재료의 특성에서 찾아낸 조형적 질서를 매개로 쓴다. 현대성이란 무엇인가? 관객 개개인의 내면에 숨어있는 조형적 질서를 매개로 삼는 것이다.

만인이 공유하는 인간의 적나라한 본성 그 자체를 매개로 삼을 때 진정한 소통이 일어난다. 인간의 내면에 감추어진 미적 본성이 있다. 그것이 현대성이다. 김기덕의 영화가 그 수준에 도달하고 있다.

한국의 평론가들이 강조하는 주제의식 따위는 고전회화가 성경이나 신화에서 끌어온 텍스트를 이용하듯이 남의 것을 매개삼는 것이다. 관객 개개인의 가슴 속에서 끌어내지 않은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예술은 ‘조형적 질서’를 매개로 삼는다. 그것을 어디서 조달할 것인가? 고전회화는 그리스의 이상주의 혹은 성경의 텍스트에서 조달하였다. 사실주의는 자연의 완전성에서 그것을 조달하였다.

인상주의는 작가 자신이 주장하는 내적 정합성에서 조달한다. 표현주의는 인간의 내면에 깃든 미적 본성에서 조달한다. 그것은 존엄이다. 무엇인가? 인간이 부끄러움을 피하고 떳떳함을 바라는 마음이 그것이다.

내적 정합성이 있다. 대칭과 평형이 있다. A가 이렇게 하면 B는 이렇게 한다는 식의 작용 반작용 논리가 내적 정합성을 이룬다. 인간의 내면에서는 부끄러움과 떳떳함, 자연스러움과 어색함이 내적 정합성을 이룬다.

비틀즈는 노래한다. 네 안에서 내적 정합성을 이루는 자연스러움과 어색함의 대결이라는 밸런스의 존재를 포착하라고. 고흐와 김기덕은 말한다. 네 안에서 일어나는 떳떳함과 부끄러움의 부단한 대결구조를 포착하라고.

왜 인간은 존엄한가? 부끄러움을 피하고 떳떳함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어색함을 피하고 자연스러움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본래 하늘의 것이었다. 그리이스의 이상주의로 혹은 성경의 가르침으로 기록되었던 것이다.

그 하늘의 것을 밀레와 쿠르베가 땅에 심었다. 마네와 모네가 한 떨기 꽃으로 길러내었다. 고흐와 김기덕이 마침내 그 꽃을 피워내고 그 향을 퍼뜨렸다. 예술은 인간의 내면에서 존엄을 끌어내는 과정이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이 팔 하나만 잘못 만들어져 있다면 당신은 매우 어색함을 느낄 것이다. 그 작품이 걸작에 가까울수록 약간의 실수는 더욱 크게 도드라져 보일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이 황금비례라는 하늘의 진리에 있다면 고전주의다. 그것이 자연의 완전성에 있다고 믿으면 사실주의다. 그것이 자연과 인간의 접촉에 있다면 인상주의다. 본래부터 인간의 내면에 그것이 있었다고 믿으면 표현주의다.

예술은 조형적 질서를 추구한다. 그것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본래 인간의 내면에 자연의 완전성을 포착하는 능력이 있다. 불완전을 어색해하고 완전을 떳떳해 하는 본능이 있다.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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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觀)은 볼관 자(字)다. ‘나는 이렇게 본다’는 것이다. 좋게 보거나 나쁘게 보거나다. 그러므로 본다는 것은 곧 평가한다는 것이다. 평가대상은 가치다. 주관과 객관과 직관은 가치를 평가하는 구분기준이다.

미완성에서 완성으로 갈수록 가치가 상승한다. 미완성의 부품은 자체적으로는 평가할 수 없다. 짝을 만나지 못한 부품의 가치는 제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의 가치는 언젠가 완성될 것을 기대한 잠재적 가치다.

젓가락 한 짝은 쓸모가 없다. 나머지 한 짝을 만나야먄 참된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불완전하다. 불완전한 젓가락 한 짝의 가치는 객관으로 평가된다. 제조원가로 평가된다. 투입된 비용으로 평가된다.

마침내 짝을 만나 한 벌의 수저를 이루었을 때 그 가치는 젓가락 사용자의 쓰는바가 결정한다. 쓰여지는 가치가 효용이다. 돼지에게 던져준 진주는 가치가 없다. 쓰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쓰여져야 가치가 발생한다.   

습작단계의 학생은 객관으로 평가한다. 학생의 시험이 객관인 이유는 그 공부가 미완성이기 때문이다. 완성단계의 작가는 작가 자신이 주관으로 평가한다. 진정한 것은 타인이 평가할 수 없다.   

대중화 단계에서는 직관으로 평가된다. 예술의 발달사가 그러하다. 객관으로 평가되고 있다면 태동기다. 주관으로 평가되면 완성기다. 직관으로 평가되고 있어야 널리 전파되는 예술의 대중화 단계다.

예술은 객관적 평가가 가능한 클래식한 흐름에서 객관적 평가가 불가능한 인상주의 경향을 거쳐 보다 직관이 강조되는 표현주의 단계로 넘어간다. 예술은 언제라도 객관≫주관≫직관의 궤도를 따라간다.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 클래식에서 팝으로, 계몽에서 소통으로 나아가며 점차 예술이 대중화 되고 상업화 된다. 그 과정에서 양식을 완성시킨다. 진정한 것은 소통의 양식이며 예술은 그 양식을 끌어내는 매개일 뿐이다.

베드로 성당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진실로 말하자면 석가탑과 다보탑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베르사이유 궁전의 가치는 없다. 진실로 말하면 베드로 성당을 성취한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의 양식이 가치있다.

예술은 양식을 완성시켜 그 사회의 구성원이 서로 소통할 수 있게 유도하는 매개다. 그러므로 양식이 완성되는 시점에 예술은 소멸된다. 양식이 완성된다면 예술가는 필요하지 않게 된다.

   

질병이 사라진다면 의사는 필요없다. 전쟁이 사라진다면 정치가는 실업자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서로 완벽하게 소통할 수 있다면 예술조차도 부질없다. 그러므로 고려의 청자보다 조선의 백자가 더 뜻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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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상품은 ‘태동기, 완성기, 확산기’의 1 사이클을 가진다. 상품은 객관으로 태동하고 주관으로 완성되고 직관으로 전파된다. 직관으로 나아갈수록 보다 인간의 실생활과 밀접해진다.

학문이 객관을 요청함은 실생활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수학이나 논리학은 객관일 수 밖에 없다. 그 자체로는 사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이 객관을 떠나 주관을 거쳐 직관으로 넘어가는 것은 직접 사용되기 때문이다.

연필이나 노트나 전화기나 컵은 객관으로 평가된다. 노트와 연필은 불완전하다. 둘이 만나서 글씨를 이룰 때까지 노트와 연필의 가치는 잠정적인 것이다. 객관으로 평가되는 것은 모두 만나서 완성될 부품들이다.

연필과 노트가 끝내 만나지 못한다면 둘의 가치는 소멸된다. 객관으로 평가되는 것은 모두 미완성이며 주관으로 평가되는 것은 모두 완성이며 직관으로 평가되는 것은 모두 전파되는 것이다.

조리된 음식, 그려진 그림, 써놓은 글, 잔에 따라놓은 술은 주관으로 평가된다. 배고플 때 먹는 음식의 가치와 배부를 때 먹는 음식의 가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 가치를 극대화 하는 방향으로 사용할 수 있다.

직관은 모임에 참여한 사람의 수에 따라 결정된다. 한잔의 술이 그 모임에 참여한 백 명의 흥을 돋군다면 그 가치는 증폭된다. 인간의 내면에 있는 자연스러움과 떳떳함을 끌어내기에 성공한다면 그 직관의 가치는 무한하다.

‘객관-비용-제조원가 ≫ 주관-효용-소비가치 ≫ 직관-양식-소통가치’

진정한 것은 미학적 양식이다. 모든 예술은 최종적으로 소통의 양식을 완성하기 위해 존재한다. 극장에서 한 편의 영화를 보고 재미있다며 만족해 하는 것은 당신이 그 영화를 보는 진짜 이유가 아니다.

왜 당신은 영화를 보는가? 영화가 재미있으니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같은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만들어진다. 그 공통점이 인간들 사이의 소통을 매끄럽게 한다. 그것이 당신이 영화를 보는 진짜 이유다.

당신이 ‘화려한 휴가’를 보는 이유는 ‘화려한 휴가를 본 사람’이 되기 위해서다. 3개월 후 한국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게 된다. 화려한 휴가를 본 사람과 보지 않은 사람이다. 둘은 서로 다른 방법으로 소통한다.

영화를 보는 진정한 이유는 영화를 본 사람이 되기 위해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무려 50만원이나 하는 비싼 돈을 들여서 재미도 없는 오페라 따위를 관람하는 어리석은 짓을 왜 하겠는가? 효용이라고는 거의 없을텐데 말이다.

존엄이 진짜다. 양식은 존엄을 지향한다. 인간의 내면에서 자연스러움과 떳떳함을 끌어내어 타인과 공명시킨다. 무엇이 떳떳하고 무엇이 자연스럽고 무엇이 부끄럽고 무엇이 어색한지에 대한 판단을 일치시키기 위해 예술은 존재한다.

화려한 휴가를 본 사람과 보지 않은 사람의 떳떳함과 부끄러움에 대한 판단은 달라진다. 두 그룹 사이의 소통은 어긋나고 만다. 그 공동체 내에서 최고수준의 사람과 소통하는 양식을 얻기 위해 예술이 필요하다.   

현대성이란 무엇인가? 새로운 시대의 삶의 양식이다. 그 양식은 보다 인간화된 것이어야 한다. 인간의 본성과 밀접한 것이어야 한다. 계몽에서 소통을 거쳐 존엄에 이르는 것이어야 한다.

평론가는 객관으로 설명하려 하나 작가는 주관으로 그려내고 관객은 직관으로 받아들인다. 비틀즈의 음악처럼 고흐의 그림처럼 새로운 시대의 삶의 양식을 끌어내는 직관의 소통이 진짜다.

내가 부끄러워 하는 지점에서 당신도 부끄러워 함이 직관이다. 내게 떳떳함을 느끼는 지점에서 당신도 떳떳함을 느끼게 하는 것, 그러므로 통하게 하는 것, 그것이 예술의 전부다. 통하지 않고는 사랑할 수가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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