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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1612 vote 0 2008.01.11 (19:07:49)

텐징과 힐러리 중 누가 먼저 정상을 밟았을까?

이 행사를 기획한 자들은 영국인들이며, 정상정복을 세계에 자랑한 나라도 영국이다. 과거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울 때도 영국인 힐러리로 배웠다.그런데 힐러리가 죽은 지금에 와서 힐러리의 등정을 기념하는 나라는 영국이 아닌 뉴질랜드다.

힐러리의 초상을 지폐에 넣은 유일한 나라는 영국이 아니라 뉴질랜드였던 것이다. 영국은 힐러리를 불러 떠들썩하게 행사를 치르고 기사 작위를 수여했지만 실제로는 뉴질랜드인 힐러리와 셰르파 텐징을 1차 정상공격조에서 배제했다. 영국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일장기를 달고 올림픽에 출전한 손기정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히말라야의 신은 그들 영국인들을 허락하지 않았다. 신의 불허에 의해 어쩔 수 없이 2차 공격조인 텐징 노르게이와 에드먼드 힐러리가 정상을 밟게 되었던 것이다. 왜 히말라야의 신은 그들 영국인들을 허용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에베레스트 정상을 찍은 그 역사적인 사진에는 왜 티베트인 텐징의 모습만 있는 것일까?

텐징과 힐러리 중 누가 먼저 정상을 밟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텐징은 35년 부터 20여년간 꾸준히 에베레스트에 도전했고 식민지인 힐러리는 우연히 2차 정상공격조에 포함되었을 뿐이다.

영국인들은 영국의 행사에 동반한 짐꾼 세르파가 우연히 정상공격조에 포함되었다고 말하지만 식민지인 힐러리의 등정도 어느 면에서는 우연이다. 그 행사는 본래 여왕의 대관식을 위한 행사였으니까.

텐징이 20년간 개척해놓은 에베레스트에 영국은 숟갈 하나 얹은 것 뿐일 수도 있다.

어쨌든 두 사람의 등정 이후 언론사의 선정주의와 각국의 애국주의가 기승하여 온갖 언설들을 쏟아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인간이 꾸며낸 이야기들 중에 신이 쓴 드라마 보다 나은 드라마는 없었다. 신은 힐러리가 정상에 우뚝 선 사진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필자가 말하려는 것은 바로 그 점이다. 힐러리가 품은 3년간의 이야기와 텐징이 품은 20년간의 이야기 중 어느 쪽이 더 풍부한가? 질에서나 양에서나. 중요한건 드라마다. 인간이 끝끝내 남길 수 있는 것도 드라마 뿐이다. 텐징에게는 드라마가 있다.

아래는 펀글

산악인 박명환의 히말라야 이야기 (11)


 

나는 나 자신을 한번도 영웅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텐징은 예외였다. 그는 진정한 영웅이었다. 그는 미천하게 출발하여 세상의 정상에 올랐다.” -에드먼드 힐러리.

11일 89세의 힐러리가 죽었다. 사진은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텐징과 힐러리

1997년 6월 세계에서 처음으로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에드먼드 힐러리가 텐징 노르게이를 두고 한 말이다.

1953년 5월29일 영국이 세계 최초로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등정하자 영국은 대영제국의 부활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영국의 신문들은 일제히 에베레스트 등정 소식을 전 세계에 타전하며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체면을 세웠다며 홍보했다.

에베레스트 등정 소식을 세상에서 가장 먼저 타전해 전 세계적으로 특종한 타임지는 “뉴질랜드의 양봉가 에드먼드 힐러리와 근골이 건장한 셰르파족 텐징의 눈부신 업적에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대리 만족을 느꼈다. 용기와 헌신으로 인류의 에베레스트 정복이 가능함을 떠올렸던 것이다”며 당시의 분위기를 전했다.

그러나 알려진 바와 달리 힐러리는 영국인이 아니라 뉴질랜드인이었다. 손기정이 일본인이 아니듯이.

또 뉴스 클로니클은 “‘영국의 혈손’을 정상에 보낸 것은 영국탐험대였다. 공교롭게도 이 위대한 성공은 새로운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 시기와 일치했다. 쇠약해지는 대영제국의 역사에서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다”며 헤드라인을 장식하며 영국의 위대함을 세상에 알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영국의 고민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에베레스트 정상에 선 사람이 바로 순수한 영국 국적이 아닌 당시 식민지였던 뉴질랜드인이기 때문이었다.

더욱 영국을 곤혹스럽게 한 것은 에드먼드 힐러리와 텐징 노르게이 가운데 누가 먼저 등정했느냐 하는 것이다. 전 세계로 타전돼 일제히 언론에 실린 사진은 에드먼드 힐러리가 아닌 텐징 노르게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드먼드 힐러리와 텐징 노르게이는 등정 후 “누가 먼저 정상에 섰느냐?”라는 질문에는 “함께 올랐다”면서도 그들은 “누가 먼저 정상에 섰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함께 정상에 갔고 함께 살아서 내려왔다”라는 말로 질문의 요지를 피해갔다.

◆텐징 노르게이의 탄생= 텐징처럼 많은 국적을 지닌 사람을 아마 없을 것이다.

히말라야 약소부족 출신이며 세상의 밑바닥을 살던 셰르파족인 텐징이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등정하자 네팔과 티베트. 인도는 자기네 국민이자 ‘영웅’이라며 텐징을 떠받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텐징은 티베트에서 출생했으며. 첫돌을 보낸 후 네팔로 이동. 성장했다. 또 인도가 18세기말. 19세기 초 티베트. 네팔에서 강력한 영향권을 행사하면서 텐징이 자신의 국민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텐징은 1914년 티베트 카르타 지역에서 태어났다. 텐징의 부모들은 첫 돌을 카르타 지역에서 보낸 후 네팔·티베트 국경지역인 타메이 마을로 이동했다.

당시 셰르파족들은 네팔 쿰부지역에서 대부분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티베트에서 네팔로 이주했다.

텐징의 아버지 밍마와 어머니 킨촘 사이에는 14명의 자녀를 뒀으며 텐징은 11번째로 태어났다. 그러나 텐징은 티베트 카라트 지역의 열악한 환경으로 14명의 형제 가운데 8명이 어렸을 때 숨졌으며 그 역시 쇠약하게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는 티베트 카르타 지역의 생활여건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힐러리가 정상에서 찍은 사진에 힐러리는 없었다.

텐징의 원래 이름은 남걀 왕디(Namgyal Wang야)였다. 그러나 텐징은 태어난 후 몸이 쇠약해 생사의 갈림길에 섰다. 결국 그의 부모는 티베트의 관습에 따라 이름을 바꾸기로 했다.

밍마와 킨촘은 당시 위대한 종교 지도자였던 나왕 텐징 노르부를 찾아갔다. 나왕 텐징 노르부는 수많은 사원을 건립하거나 건립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했다.

현재 에베레스트 서쪽에 위치하며 가장 유명한 사원 가운데 하나인 탕보체 사원 역시 나왕 텐징 노르부가 세계 1차대전 후 자금을 지원해 설립된 것으로 유명하다.

나왕 텐징 노르부는 텐징에게 ‘종교의 후원자’를 의미하는 텐징과. ‘부유함’을 뜻하는 노르게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줬다. 가장 위대한 셰르파 텐징은 이렇게 해서 태어났다.

그는 1953년 5월29일 오전 11시30분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오르면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부상했다.

하지만 그는 우울하고 암울한 소년기를 보낸다.

그는 12살 때와 18살 때 어려운 가정형편을 비관. 두 차례나 가출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텐징 노르게이 가족들은 티베트 카르타에서 가재도구만 챙기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낭파라 고개(5806m)를 넘어 네팔 타메마을로 이주했다.

그러나 텐징 가족이 도착했을 당시인 1920년께 타메마을에는 많은 셰르파들이 이주해온 뒤라 개간할 땅이 거의 없었다. 결국 텐징의 가족들은 남의 머슴살이를 하는 등 궁핍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기자들의 집요한 추궁과 애국주의에도 불구하고 텐징과 힐러리는 끝내 둘 중 누가 먼저 발을 내밀었는지 말하지 않았다.

텐징 노르게이가 7살이던 1921년 영국의 등반대가 에베레스트를 등반하기 위해 티베트를 찾았다. 많은 셰르파들이 영국 등반대의 짐을 나르는 대가로 돈을 벌기 위해 낭파라 고개를 넘어 티베트 카르타마을로 몰려들었다.

텐징은 에베레스트를 꿈꾸기 시작했다. 찢어지게 가난한 이 생활을 하루 빨리 벗어나는 길은 바로 에베레스 등반대의 짐꾼으로 선정돼 많은 돈을 버는 것이었다. 하지만 가난한 텐징의 눈앞에는 풀을 뜯는 야크만 보일 뿐이었다.

야크를 보는 목동으로서는 돈을 벌 수 없다고 생각한 텐징은 열두 살 때인 1926년 그 험한 낭파라 고개를 넘어 자신이 태어났던 티베트 카르타로 도망쳤다. 카르타로 도망친 텐징은 보디나스 사원에서 얻어 먹으며 방황하다 2주일 후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쿰중마을 부잣집에서 머슴살이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맨 왼쪽이 텐징 가운데 네루 앞은 텐징의 가족들

그러나 텐징의 방황은 진정되지 않았다. 타메마을에 일대 사건이 발생했다. 텐징을 비롯한 마을 소년과 소녀 12명이 인도 다르질링으로 달아났다. 이들은 음식을 미리 감추는 등 치밀한 준비를 거쳐 당시 영국군의 휴양지로 유명했던 다르질링으로 도망간 것이다.

◆다르질링= 다르질링은 습기가 많고 땅이 비옥해 차로 유명하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1835년 다르질링을 인도 시킴주로 합병하고 영국군 요양소를 건설했다.

그러나 영국측의 예상과 달리 다르질링의 안개는 병사들을 더욱 우울하게 만들면서 한겨울에 14명이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결국 영국은 요양소를 폐쇄하지만 차가 재배되면서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특히 다르질링은 히말라야 등반 초창기 에베레스트로 가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원정대는 이곳에서 포터와 셰르파를 고용하고 필요한 식량을 구입하는 등 다르질링은 유럽 원정대와 이들에게 고용돼 짐을 나르고 돈을 벌기 위해 몰려든 네팔과 티베트인들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인력시장이었다.

실제로 텐징이 다르질링으로 도망친 1930년께 인구는 약 3천여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수백명이 셰르파일 정도였다. 다르질링에서 1년을 보낸 텐징은 부모에게로 돌아갔다. 그 후 텐징은 고향에서 몇 개월간 일하다가 다시 다르질링으로 갔다.

다르질링을 찾은 텐징은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된다.

이곳이 히말라야다 이곳에 에베레스트가 있다.

◆텐징 노르게이 원정대원으로 선발= 175㎝의 깡마른 체질의 텐징은 모험으로 가득찬 에베레스트 원정을 동경했다.

1932년 텐징이 18살이 되자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찾아온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텐징은 원정대에 참여하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하지만 당시 원정대에 참여하는 것은 능력뿐만 아니라 든든한 후원자 없이는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웠다.

1933년 2월 영국원정대가 셰르파를 고용하기 위해 다르질링에 도착하자 셰르파들도 다르질링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물론 텐징도 있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후원자도 없어 선발되지 못했다.

텐징은 당시 “그들은 나를 위해 전혀 손을 쓰지 않았다. 내 평생 그토록 화가 난 적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결국 텐징은 영국원정대가 티베트 국경으로 떠나가는 모습을 쓸쓸히 지켜봐야 했다.

1935년 텐징은 다와 푸티와 결혼했으며 이후 경사가 겹쳤다. 첫 번째는 아내 다와 푸티가 임신을 한 것이고 두 번째는 영국의 제5차 원정대가 결성됐다는 것이다.

1935년 영국의 제5차 원정대 대장은 젊은 에릭 십튼이었다. 원정대는 다르질링에서 14명의 셰르파를 선별했다. 그러나 고용된 포터에 텐징의 이름은 없었다.

텐징이 자란 티베트 마을

텐징은 실망했다. 다르질링에 도착한 원정대장 십튼은 2명의 셰르파가 더 필요하다고 판단. 2명을 추가로 뽑기로 했다. 2명을 뽑는 과정에 모두 20명의 셰르파가 지원했다. 물론 텐징도 있었다.

텐징은 히말랴야 클럽이 발급한 증명서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이끌어줄 유능한 포터도 없어 떨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원정대장 에릭 십튼은 젊은 셰르파 텐징에게 묘한 매력을 느끼고 선택했다.

에릭 십튼은 그의 저서에서 “15명의 셰르파 가운데 대부분 아는 사람을 선발했다. 하지만 19살 청년의 매력적인 웃음 때문에 그를 선택했다. 그의 이름은 텐징 노르게이”라고 회상했다.

우여곡절 끝에 영국 제5차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선발된 텐징은 첫 등반에서 해발 7000m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그의 인간적인 매력은 영국 산악인들을 매료시켰으며 이후 세계 각국의 원정에 참여하면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르는 경험을 쌓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은 히말라야 등반을 멈추게 했다. 히말라야 등반에 전 국가적 차원에서 나섰던 영국과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등이 전쟁에 휘말리면서 히말라야는 오랜만에 평온을 되찾았다.

  텐징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1947년 텐징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스위스 원정대가 인도 북부(가르왈) 히말라야에 있는 케다르나스(6940m) 원정에 나설 때 텐징은 포터로 일했다.

  다섯명의 정상 공격조가 구성됐다. 스위스 산악인 4명과 셰르파 1명으로 구성된 정상 공격조는 정상으로 향하는 마지막 능선에서 추락했다. 셰르파 사다(우두머리)인 왕디 노르부와 스위스 산악인 알베르트 수터가 300m를 미끄러져 큰 부상을 입었다.

정상의 텐징.. 힐러리가 찍은 사진

  추락하지 않은 스위스 원정대원들은 수터와 왕디 노르부를 구하러 내려갔다. 그러나 스위스 원정대원들은 다리가 부러진 왕디 노르부를 얼음 사이에 옮긴 후 지친 몸을 이끌고 하산했다. 혼자 남은 왕디 노르부는 칼로 자살을 기도했지만, 다음날 텐징 노르게이와 셰르파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살아 돌아왔다.

  이 우연한 사고로 스위스 원정대는 새로운 사다를 뽑았는데 바로 텐징 노르게이였다. 텐징의 새로운 등반이 시작됐다. 그것도 텐징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한 나라인 스위스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당시 영국은 1922년 이후 매년 등반을 하면서 셰르파나 포터들을 고용했지만 몇몇 원정대는 급여를 지급하지 않거나 비인간적으로 취급, 티베트인들이나 네팔인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스위스는 영국이나 독일에 비해 매우 신사적이고 인간적으로 다뤄 히말라야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스위스 원정대에 참여하다

텐징과 힐러리

  티베트와 네팔에서도 정국이 갑자기 악화되는 등 상황이 영국쪽에 좋지 않았다. 1950년 중국이 티베트를 점령, 유럽국가들의 등반허가를 내주지 않았으며 네팔 역시 혁명이 일어나 영국 연합군을 물리쳤다.

  당시 에베레스트는 1년에 한 개 팀에 원정을 내주고 있었다. 영국은 프랑스가 8000m를 첫 등정한 기세를 몰아 에베레스트에 도전할 경우 자칫 세계 초등을 내줄 수 있다고 판단, 에베레스트 등반을 강력히 추진했다.

  여기에 스위스나 독일, 이탈리아의 강력한 도전이 영국의 조바심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1950년 미국이 처음으로 네팔 방면으로 에베레스트를 도전하자 영국의 불안감은 극에 달했다.

  영국 런던히말라야위원회는 1952년 대규모 원정대를 구성, 에베레스트 원정을 계획했지만 네팔은 영국이 아닌 스위스에게 등반허가를 내줬다. 네팔 새 정부는 지배국인 영국에 대한 충성심이 없었으며 스위스가 먼저 등반을 요청해 허가를 내줬다.

  당황한 영국은 어쩔 수 없이 스위스가 실패하기만을 바라며 티베트에 위치한 세계 6위봉 초오유(8201m)를 등반키로 했다. 스위스 원정대장 위스 뒤낭은 텐징을 사다로 초청했으며 38살의 텐징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스위스 원정대원은 앙드레 로흐, 장자크 애스퍼, 레이몽 랑베르 등 유럽 최고의 등반가가 참여했다. 또 셰르파도 텐징의 노력으로 역대 최강의 멤버로 구성했다. 셰르파 가운데 텐징의 친구인 다 툰두(46세)는 1934년과 1937년 세계 9위봉 낭가파르밧(8125m)과 세계 2위봉 K2(8611m), 그리고 세계 10위봉 안나푸르나(8091m)를 등반한 당대 최고의 셰르파였다.

  1952년 4월26일 스위스팀은 가장 난코스인 아이스 폴 지대에 도착했다. 에베레스트 등반에서 가장 어려운 구간으로 알려진 아이스 폴 지대는 언제 무너질지 몰라 셰르파는 물론 등반대원들에게 가장 위험한 얼음기둥이었다.

  아이스 폴 지대는 에베레스트 정상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또 다른 산이었다. 하지만 대원들은 3일 만에 아이스 폴 지대를 통과했다.

  아이스 폴 끝지점에 3캠프를 건설하자 셰르파들은 식량과 장비 등 물자공급에 나서 3주간 옮겼다. 대원들과 셰르파는 짝을 이뤄 등반하며 천천히 고도를 높여 갔다. 5월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에베레스트의 날씨가 폭풍을 동반하는 등 급변했다.

  스위스팀은 몬순의 초기인 것을 감안, 정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5월24일 공격조가 구성됐다. 랑베르와 텐징, 플로리, 오베르 그리고 셰르파 6명이었다. 공격조는 웨스턴 쿰으로부터 제네바 스퍼 위 사우스 콜을 향해 출발했다. 그러나 출발 여덟시간 만에 2명이 등반을 포기하고 하산했으며, 남은 대원들은 짐을 분산한 후 다시 10시간 동안 정상을 향해 나아갔다.

2인용 텐트 2개에 3명과 4명씩 쪼그리고 앉아 끊임없이 몰아치는 강풍과 맞서며 길고 긴 밤을 지샜다. 하늘은 계속 스위스와 텐징을 도우고 있었다. 밤새 텐트를 날려버릴 기세로 몰아치던 바람은 멈추고 쾌청한 날씨를 보였다. 다음날 새벽 텐징과 3명의 산악인은 정상으로 향했으며 2명의 셰르파들은 짐을 가지러 하산했다. 오전 10시 텐징과 스위스 산악인 3명은 해발 7900m의 사우스콜에 도착, 거의 정상에 근접했다.

  다음날 텐징과 랑베르, 프로리, 오베르는 하루치 식량과 텐트 1동으로 짐을 가볍게 한 후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4명의 도전자들은 산소를 사용하며 정상 300m 아래까지 진출, 마지막 캠프를 설치했으며 의논끝에 다음날 텐징과 랑베르가 남아 정상에 도전하기로 결정했다. 그날밤 침낭도 없이 랑베르와 텐징은 서로의 몸을 비비며 체온을 유지하고 숙명적인 밤을 보냈다. 그리고 아침이 밝았다. 흐린 날씨였지만 2명은 출발했다. 지난 3일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이들의 발걸음은 천근만근이었다. 많은 눈을 헤치며 교대로 전진하던 그들의 체력은 점점 바닥이 나고 있었다.

  텐징은 “정상 등정은 할 수 있다. 하지만 살아서 돌아가 가족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고 생각했다. 선두에서 묵묵히 정상을 향하던 랑베르는 해발 8595m에서 멈춰 섰다.

“상상은 했지만 실현될 것이라고는 절대 믿어지지 않던 장면이었다. 오전 11시30분 에드와 텐징이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다. 우리는 예정대로 정확히 해냈다. 빛나는 모든 선배들의 노력 덕분에 우리는 성공했다. 우리는 계속해서 쌓아온 힘든 경험과 노력의 정점에 섰다.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 -존 헌트

1952년 스위스 원정대가 봄. 가을 두 번에 걸친 에베레스트 등정에 실패하자 영국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1953년 등반 허가를 받아 놓은 영국은 1952년 스위스 원정대의 강력한 등반력과 팀워크. 그리고 무섭게 성장한 셰르파 텐징 노르게이의 역할로 스위스 원정대가 성공할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날씨로 인해 스위스 원정대가 정상 문턱에서 주저앉자 영국은 세계 초등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춰 나갔다.

영국 런던히말라야위원회는 그동안 영국원정대를 이끌던 원정대장 에릭 십턴을 존 헌트(42)로 교체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육군 대령인 헌트는 참모장교답게 완벽한 군사작전을 수행하듯이 원정을 이끌었다. 헌트는 적재적소에 보급품을 확보. 보급하는가 하면 대원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제공하는 등 원정대장으로서 완벽한 역할을 해냈다.

“상상은 했지만 실현될 것이라고는 절대 믿어지지 않던 장면이었다. 오전 11시30분 에드와 텐징이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다. 우리는 예정대로 정확히 해냈다. 빛나는 모든 선배들의 노력 덕분에 우리는 성공했다. 우리는 계속해서 쌓아온 힘든 경험과 노력의 정점에 섰다.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 -존 헌트

1952년 스위스 원정대가 봄. 가을 두 번에 걸친 에베레스트 등정에 실패하자 영국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1953년 등반 허가를 받아 놓은 영국은 1952년 스위스 원정대의 강력한 등반력과 팀워크. 그리고 무섭게 성장한 셰르파 텐징 노르게이의 역할로 스위스 원정대가 성공할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날씨로 인해 스위스 원정대가 정상 문턱에서 주저앉자 영국은 세계 초등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춰 나갔다.

영국 런던히말라야위원회는 그동안 영국원정대를 이끌던 원정대장 에릭 십턴을 존 헌트(42)로 교체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육군 대령인 헌트는 참모장교답게 완벽한 군사작전을 수행하듯이 원정을 이끌었다. 헌트는 적재적소에 보급품을 확보. 보급하는가 하면 대원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제공하는 등 원정대장으로서 완벽한 역할을 해냈다.

존 헌트는 13명의 대원을 선발했다. 영국의 9차 원정대는 존 헌트 대장을 비롯해 조지 밴드(24). 미첼 웨스트 마스마코트(27). 와리스 로우(28). 미첼 워드(28). 톰 보딜런(28). 찰스 와리(31). 에드먼드 힐러리(33). 찰스 에반스(34). 윌프 노이서(35). 톰 스토바트(38). 알프 그레고리(40). 에반스 퓨(43)다.

존 헌트 대장은 대원 선발 후 고민에 빠졌다. 대원이 13명으로 서양에서는 가장 불길한 숫자였기 때문이었다. 묘안으로 등장한 것이 텐징 노르게이였다.

존 헌트는 텐징이 1952년 스위스 원정대와의 2차례에 걸친 에베레스트 등반 때 보여준 활약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결국 존 헌트는 등정 확률을 높이는 한편 대원들이 13명이라는 불안감을 떨쳐 내기 위해 텐징 노르게이를 대원 겸 셰르파 우두머리인 사다로 임명했다.

 ◆정상 공격조에 선발되다

소수 민족으로 히말라야 오지에서 생활하던 셰르파족이 드디어 세상에 이름을 떨칠 기회가 찾아왔다.

영국 등 유럽국가들이 히말라야 정찰에 나선 초창기인 1920년대 최하층 계급으로 유럽인들을 대상으로 인력거를 끌던 셰르파가 텐징 노르게이의 대원 합류로 이제 대영제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1934년 독일원정대가 세계 9위봉 낭가파르밧(8125m) 등반 당시 폭풍우에 등반대원과 셰르파 등 16명이 고립됐다. 독일 원정대는 셰르파들과 지치고 쇠약해진 등반대원을 버려둔 채 스키를 타고 도망쳤다. 버려진 이들은 식량과 물. 텐트도 없이 며칠간의 사투 끝에 7명은 살아남지만 9명이 목숨을 잃었다.

셰르파족의 피해는 컸다. 이 사건을 계기로 셰르파들은 스스로 목숨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셰르파들은 텐징 노르게이의 뛰어난 역할로 히말라야 등반의 상징이 됐으며. 5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셰르파는 히말라야 등반에서 없어서는 안될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고 있다.

물론 텐징 노르게이 혼자의 힘이 아니라 수많은 등반에서 목숨을 잃은 셰르파들의 노력이 드디어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영국 9차 원정대는 해발 4000~5000m의 쿰부지역에서 고소적응을 실시하는 한편 아이스 폴을 넘을 사다리를 제작하고 이를 활용해 대량의 물자를 캠프4로 이동시켰다.

원정대장 존 헌트는 에베레스트 정상 등정을 위한 3명의 히든 카드를 준비했다. 바로 뉴질랜드 출신 산악인 조지 로우와 에드먼드 힐러리. 그리고 텐징 노르게이였다.

조지 로우는 초등학교 교사로 강력한 등반실력을 갖췄으며. 에드먼드 힐러리는 1951년과 1952년 초오유 원정에 참여했다. 힐러리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한 후 대학에 들어갔지만 1년만에 중단했다. 그는 양봉업을 하는 아버지를 도우며 등반경력을 쌓은 강한 체력의 탁월한 등반가로 정평이 나 있었으며 무엇보다 예의바른 사람이었다.

마지막 카드는 텐징 노르게이였다.

헌트와 텐징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정상 등정이었다. 헌트는 1차 정상 공격조는 아닐지라도 텐징을 정상에 서게 만들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텐징은 세상에서 가장 먼저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등정해 인도 국기와 스위스 산악인 레이몽 랑베르가 자신에게 선물한 붉은 스카프를 매고 정상에 설 것이라고 다짐했다.

영국 9차 원정대의 가장 중심에 서 있던 텐징과 힐러리는 1953년 4월26일 서로의 목숨을 보호하는 자일을 연결하고 등반을 시작했다. 이들은 한 자일에 연결. 탁월한 등반실력을 발휘하며 장차 정상 공격을 위한 호흡을 맞췄다.

하지만 이날 힐러리가 크레바스에 빠지면서 죽음에 직면했을 때 텐징은 피켈을 눈속에 박고 힐러리의 목숨을 구했다. 힐러리는 텐징의 등반력과 자일 기술에 큰 감명을 받고 텐징을 정상 공격조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을 확신했다.

5월12일 원정대장 존 헌트는 베이스 캠프에서 정상 공격조를 발표했다. 1차 정상 공격자는 찰스 에반스와 톰 부르디런. 2차 정상 공격조는 에드먼드 힐러리와 텐징 노르게이였다. 헌트는 강력한 정상 등정자로 예상했던 뉴질랜드인 조지 로와 에드먼드 힐러리. 그리고 셰르파인 텐징 노르게이는 1차 정복팀에서 제외됐다.

존 헌트는 영국인이 가장 먼저 지구의 지붕 에베레스트에 오르기를 원했다. 아니 존 헌트뿐만 아니라 전 영국인들이 원했다. 영국왕립외과대학 특별연구원인 찰스 에반스와 옥스퍼드 연구원인 브르디론은 강한 체력을 지닌 등반가였지만. 2차 정상 공격조보다 뛰어난 등반력을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존 헌트는 영국인들이 실패했을 경우 세계 최고수준의 등반력을 갖춘 텐징과 힐러리가 버티고 있어 이같은 결정이 전혀 부담이 되지 않았다.

5월15일 원정대는 해발 7300m에 캠프7을 설치했다. 텐징과 힐러리는 선두에 서서 자신들의 실력을 발휘하고 싶었지만 존 헌트는 “정상 도전을 위한 힘을 아끼라”고 충고했다. 텐징과 힐러리는 대원들이 정상 도전에 필요한 물자를 나르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대원들은 정상 공격조가 반드시 필요한 산소를 최대한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당시 산소통 하나 무게는 거의 10㎏에 달해 운반에 많은 시간과 셰르파가 동원돼야 했다.

5월 하순에 접어들면서 영국대원들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등정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인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이 1주일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존 헌트는 정상 공격조로 나설 에반스와 보딜런이 정상에 올라 여왕의 대관식에 맞춰 정상 등정 소식을 알려주기를 기대했다. 대영제국의 대관식에 맞춰 정상 등정은 당연히 영국인의 몫이라는 것이 존 헌트 대장과 영국인들의 바람이었다.

이를 지켜본 텐징과 힐러리는 서운함을 감출 수 없었다.

1953년 5월26일 1차 등정조는 막중한 임무를 띠고 제8캠프를 출발했다. 2명의 대원들은 시간당 약 400m를 전진하는 놀라운 속도로 정상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옮겼다

그러나 산소 장치에 문제가 발생하고 좋지 않은 날씨로 인해 전진 속도가 늦어져 오후 1시 에베레스트 남봉(8760m)에 도착했다. 밑에서 지켜보던 셰르파들과 대원들은 남봉을 정상으로 믿고 일제히 “에레베스트를 등정했다”고 소리쳤다. 텐징과 힐러리도 말없이 남봉으로 접근하고 있는 두 명의 대원을 지켜보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에반스와 보딜런이 성과없이 돌아오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힐러리는 “에반스와 보딜런이 해낸 일에 크게 감탄했지만 한편으론 유감스럽게도 만족감을 느꼈다. 그들은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여전히 할 일이 남아 있다”고 회고했다.

이제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등정 기회는 텐징과 힐러리에게 운명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다

그것은 처음 보는 장관이었다. 그토록 거칠고 경이롭고 장엄한 광경을 다시는 못 볼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내가 느낀 것은 공포가 아니었다. 나는 산을 사랑했고 에베레스트를 사랑했다. 평생을 기다렸던 위대한 순간에 나의 산은 바위와 얼음뿐인 생명 없는 대상이 아니라 따뜻하고 친근하며 사랑스러운 존재였다." -텐징 노르게이

 

1953년 5월26일 톰 보딜런과 찰스 에반스는 마지막 정상 바로 문턱에서 실패하자 두번째 정상 정복조가 정상 등정을 시도했다. 비록 톰과 찰스의 실패는 다음 정상 공격조인 텐징 노르게이와 에드먼드 힐러리에게 값진 정보를 제공했다.

찰스 에반스는 텐징과 힐러리에게 "마지막 캠프를 조금만 더 높은 곳에 설치했다면 정상에 올랐을 것이다. 마지막 캠프는 진출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만들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5월27일 존 헌트는 8캠프를 떠나 9캠프로 떠나려는 텐징과 힐러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은 자네들이 무사히 돌아오는 것이야. 그걸 명심하게. 하지만 최선을 다해 해내게"라고 말했다.

에릭 쉽튼 대신 영국의 9차 원정대 대장인 존 헌트는 직접 8캠프까지 짐을 나르며 대원들을 챙기는 헌신적인 모습으로 대원들과 셰르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존 헌트는 정상도 중요하지만 목숨이 우선이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엘리자베스여왕 대관식 전 반드시 세계 최고봉 정상에 올라 '꺼져가는 대영제국'의 부활을 전 세계에 알려줄 것을 당부했다.

5월28일 텐징과 힐러리, 조지 로(28), 알프 그레고리(40) 그리고 셰르파 앙 니마는 정상을 향해 전진했다.

뉴질랜드 출신 로는 가장 앞서며 눈을 다져 길을 만들었으며 그레고리와 앙 니마는 25㎏이상의 무거운 짐을 운반했다. 이들은 헌신적으로 루트를 개척하며 장비를 운반했으며 정상 공격조인 텐징과 힐러리는 힘을 아꼈다. 완벽한 역할 분담으로 정상 정복이 한발 앞으로 다가섰다.

그들은 해발 8350m에 모였다. 당초 이들은 이곳에서 캠프9를 설치할 계획이었다. 만약 텐징과 힐러리가 이곳에서 캠프9를 설치했다면 정상 등정은 늦어졌을 것이다. 텐징과 힐러리는 전날 톰 보딜런과 찰스 에반스가 충고한 "가능한 한 가장 높은 곳까지 전진해 캠프를 설치하라"는 충고를 떠올려 힘들게 나아갔다.

대원들은 1952년 스위스팀이 올랐던 지점보다 고도가 100m정도 더 높은 8425m 지점에 어렵게 텐트를 설치할 만한 장소를 발견했다. 그들은 히말라야 등반사상 가장 높은 곳에 텐트를 설치해 등정 성공률을 높였다. 에베레스트 정상 8850m까지 불과 425m를 남겨 두고 있었다. 

눈물겹게 짐을 운반한 로와 그레고리, 그리고 셰르파 앙 니마는 서둘러 발길을 돌려 하산했다. 그들은 정상을 불과 400여m 남겨두고 돌아서야 했다.

 

산악인이라면 누구나 정상을 밟아 보는 것이 소원이다. 하지만 자신의 소원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등정을 위해 지원한 희생정신은 정상 등정 못지 않은 값진 것이었다.

 

대원들이 하산하자 텐징과 힐러리는 눈을 다져 텐트를 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해발 8400m 지점에서 피켈로 눈과 얼음을 다져 텐트 사이트를 만드는 고통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모를 정도로 힘든 작업이다. 결국 텐징과 힐러리는 오후 5시 텐트를 설치하고 치킨 수프와 핫 레몬 등으로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 있는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산소를 마셔가며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인류 최초로 세계 최고봉 정상에 오른다는 기대감에 잠을 청할 수 없었다. 텐징은 "잠을 청했지만 잘 수가 없었다. 불안감과 산소가 부족해 가쁜 숨을 몰아 쉴 수밖에 없었다"고 뒷날 회상했다.

 

운명의 1953년 5월29일

운명의 날이 밝았다.

5월29일 새벽 3시 텐징과 힐러리는 눈을 떴다. 그들은 핫 레몬으로 아침을 대신한 후 6시30분 정상을 향해 떠났다.

새벽에 강하게 불던 바람도 멎어 맑은 날씨였지만 기온은 영하 25℃로 추위가 그들을 엄습했다. 텐징이 앞서 나아가고 힐러리가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천천히, 하지만 서로 눈을 헤치며 전진했다.

8760m의 남봉을 통과한 그들 앞에 큰 바위기둥이 가로막았다. 텐징과 힐러리는 도저히 통과할 수 없을 벽으로 보였다.

결국 이 난구간 돌파에 힐러리가 나섰다. 텐징은 눈이나 얼음에서는 강했지만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절벽 등반 기술은 힐러리가 앞섰기 때문이다.

사투 끝에 12m 높이의 바위를 통과해 나아갔다. 이 구간은 에베레스트 등정에서 가장 어려운 곳으로 '힐러리 스텝'으로 명명,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힐러리 스텝을 통과한 텐징과 힐러리는 한숨을 몰아쉬며 정상을 향해 나아갔다.

1953년 5월29일 오전 11시30분 텐징과 힐러리는 티베트가 보이는 곳에 이르렀다. 그들의 발아래 로체와 마칼루, 칸첸충가가 있었다.

마침내 텐징 노르게이와 에드먼드 힐러리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세계의 지붕 정상에 올라섰다. 힐러리는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고 두 영웅은 악수 후 뜨겁게 포옹했다.

힐러리는 텐징의 피켈에 영국, 네팔, 인도, 그리고 UN깃발을 달고 사진을 찍었다. 히말라야 등반사상 가장 유명한 사진으로 기억되는 텐징의 역동적인 정상 사진이 마침내 카메라에 잡혔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에베레스트가 전부다. 산에서 생명은 너무 현실적이며 죽음도 너무나 가깝다. 인간은 그저 인간일 뿐이다. 그것이 전부다. 하지만 나중에는 정치와 논쟁. 나쁜 감정이 움트기 시작한다. 에베레스트에서 하산하자마자 내게 닥친 것이 바로 이것이다.” -텐징 노르게이

1953년 5월29일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에 오른 텐징 노르게이의 발아래 세상이 놓여 있었다.

텐징은 자신이 태어난 티베트와 자라고 성장한 네팔을 둘러봤다. 그는 정상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며 깊은 회상에 잠겼다. 동쪽은 자신이 태어났던 곳이고. 남쪽은 지독한 가난이 싫어 도망쳤던 쿰부지역이었으며. 북쪽의 롱부크와 노스콜은 등반가로서 첫발을 내디딘 곳이었다. 텐징은 정상에서 30여년간 힘들었던 지난 세월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였다.

에드먼드 힐러리는 정상에서 가장 먼저 올랐다는 것을 남기기 위해 텐징을 세워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정상에서 발아래 보이는 파노라마를 카메라에 담았다. 당시 정상 사진이 텐징 노르게이밖에 없었던 것은 에드먼드 힐러리가 텐징에게 카메라를 맡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카메라는 모두 수동이었으며 작동법도 복잡해 힐러리는 텐징에게 감히 카메라를 건네지 않았다. 결국히말라야 등반사상 가장 유명한 사진으로 기록될 사진 속 인물은 에드먼드 힐러리가 아닌 텐징 노르게이가 되고 말았다.

하산에 앞서 텐징은 눈을 파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딸이 준 작은 색연필 등 기념품을 묻었다.

◆두 영웅의 힘겨운 하산길

힐러리와 텐징은 정상 능선을 가로질러 기나긴 하산을 시작했다. 등정도 중요했지만 등정 후 소진한 체력으로 내려가는 것은 오르는 것보다 더 힘든 게 히말라야다.

5월29일 오후 2시 두 영웅은 불과 8시간 전에 정상 도전에 나섰던 9캠프에 도착했으며. 산소 점검 후 계속 아래로 내려갔다. 그들은 8캠프에 도착 전 조지 로를 만나 텐트로 들어갔다. 텐트에 있던 윌프 로이스와 셰르파 파상 푸타르는 정상 정복 소식을 듣고 어린애처럼 기뻐했다.

하지만 밑에 있던 헌트 대장을 비롯해 다른 대원들은 에베레스트가 등정되는 날 이 소식을 알지 못했다. 5월30일 대원들은 하산을 시작했다. 캠프4에서 기다리던 대원들은 탈진해 쓰러질 것 같은 텐징과 힐러리를 보고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에드먼드 힐러리는 그들을 보는 순간 피켈을 하늘 높이 치켜 들었다. 실망했던 사람들은 그것이 등정했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곳에 있던 원정대장 존 헌트와 셰르파들은 환하게 웃으며 축하를 아끼지 않았다. 셰르파들은 텐징의 손에 이마를 갖다 대며 존경의 뜻을 표시했다. 영국의 제9차 원정대는 환희와 감격을 억누르지 못했다.

하지만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등정을 내심 가장 기쁘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타임스의 기자 제임스 모리스였다.

제임스 모리스는 영국의 에베레스트 9차 원정대 등반 과정을 취재하며 등정 후 사진과 기사를 단독으로 게재한다는 조건으로 동행했다. 제임스 모리스 기자는 캠프4에서 텐징과 에드먼드 힐러리를 만났다. 그는 이 세계적인 특종을 다른 언론사에 뺏길까봐 그들을 붙잡았다. 이 영리한 기자는 텐징이 만약 남체로 먼저 내려가 등정소식을 알린다면 낙종의 불명예를 안을 것이 분명했다.

텐징은 고민과 애원이 가득한 제임스 모리스 기자에게 “등정소식을 셰르파를 통해 남체에 알려줘 다른 곳에 특종을 내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영국원정대를 위해 일했고 그들의 대접을 받았다. 나는 셰르파들에게 이 소식을 퍼뜨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멸시받는 텐징 노르게이

결국 텐징의 배려 덕택에 제임스 모리스는 6월2일 타임스에 등정소식을 알렸다. 그것도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대관식에 맞춰 완벽한 기사로 영국은 물론 전 세계에 타전됐다.

영국은 저물어가는 대영제국이 새로 즉위한 여왕과 함께 부활할 것이라며 대대적인 홍보를 실시했다. 대영제국의 부흥을 꿈꾸는데 일조한 원정대가 텡보체에 도착하자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의 전보를 비롯해 수많은 전보가 날아들었다.

전보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대영제국이 에드먼드 힐러리에게 보낸 것이었는데. 바로 에드먼드 힐러리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한 것이다. 영국정부는 6월7일 에드먼드 힐러리와 존 헌트에게 대영제국 제1의 훈장인 기사작위를 수상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텐징 노르게이에게는 조지 훈장이 수여됐다. 조지 훈장은 영국 제2의 훈장으로 용감한 행위를 한 사람에게 주어진다. 에드먼드 힐러리가 받은 기사 작위에 비하면 정말 하찮은 것이었다.

특히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등정하는게 결정적인 기여를 했고. 오른 텐징 노르게이의 활약상에 비교하면 너무나 초라한 것이었다.

이같은 조치에 대해 영국은 물론 네팔과 인도 등 전 세계가 술렁였다. 네팔 수상 마트리카 프라사드 코이랄라는 영국의 이같은 조치에 대해 한마디로 ‘모욕’이라고 단정했다.

텐징과 함께 목숨을 건 등정을 한 에드먼드 힐러리도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며 불공평한 조치라고 생각했다.

영국의 가디언지는 “조지 훈장은 무장 범죄자를 체포한 경찰관에게 용감한 행위를 인정해 주는 것이다. 이 훈장은 텐징의 위업에 전혀 적합하지 않은 듯하다”고 영국정부를 비난했다. 하지만 한번 결정된 수상은 번복되지 않았다.

◆새로운 위험

네팔 카트만두로 돌아온 텐징은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위기에 처했다. 평범한 셰르파에서 영웅으로 탄생하면서 몰려드는 인파와 세계 주요 언론사의 취재 표적이 되면서 새로운 위험에 직면했다.

원정대원들은 타임스와 독점 계약을 맺었지만 텐징 노르게이는 예외였기 때문에 타임스를 비롯해 네팔. 인도 언론은 물론 전 세계 언론으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일부 언론은 텐징 노르게이에게 엄청난 금액을 제시하며 에베레스트 등정 독점권을 획득하려고 시도했다. 힐러리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의 일부 언론은 독점 취재 조건으로 당시 엄청난 금액인 1만달러를 제시하기도 했다.

텐징은 이제 출신이 도마에 올랐다. 네팔인이냐? 티베트인이냐? 인도 출신이냐? 등등. 평범한 셰르파가 일약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중 한명으로 기록되자 그를 둘러싼 국가간 논쟁이 불붙기 시작했다.

지구의 지붕 8850m 에베레스트 정상에 선 텐징 노르게이는 앞으로 다가올 엄청난 파장을 예상하지 못했다.

“내게 아주 많은 군중이 모여들면서 나는 더 이상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 우울해졌다. 유일한 행복은 가족과 함께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외딴 곳으로 떠나는 것뿐이었다” - 텐징 노르게이

1953년 5월29일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50m)를 오른 뒤 텐징 노르게이는 인류에서 가장 위대한 영웅으로 떠올랐다. 네팔과 인도. 티베트의 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가장 주목받는 인물이 됐다.

당시 네팔은 정치적 격변기였다. 트리부반 국왕과 라나 가문은 권력싸움으로 혼란스러웠으며 인도의 원조로 겨우 체면치레를 하는 권력층은 국민들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네팔 국민들 역시 조국에 대해 알지 못했다. 국민들은 나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를 정도로 먹고 살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네팔의 정부와 국민을 텐징 노르게이가 변화시켰다. 세상 어느 누구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던 국가와 국민의 인식을 텐징 노르게이가 바꾼 것이다.

네팔인들은 세상에서 보잘것없던 자신들을 세상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은 텐징의 에베레스트 등정으로 가능했으며. 자신들도 제2의 텐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텐징은 네팔 국민들에게 가능성과 자신감을 심어줬다.

텐징이 에베레스트 등정 후 가장 먼저 한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등산학교를 세운 것이었다. 훗날 등산학교는 에베레스트뿐만 아니라 K2. 로체. 마칼루. 초오유 등 히말라야 거봉 등반에서 없어서는 안될 유능한 셰르파를 탄생시키는 초석이 됐다.

◆열광하는 네팔 국민. 그리고 언론

텐징을 포함한 원정대원들은 네팔 카트만두에 도착하자 몰려드는 군중과 언론 취재로 몸살을 앓았다.

특히 언론의 취재는 집요했다. 기자들은 에베레스트 등정보다는 에드먼드 힐러리. 텐징 노르게이 가운데 누가 먼저 정상에 섰느냐는 아주 원초적이고 감정적인 질문을 쏟아냈다.

에베레스트 초등을 독점 취재해 세계적인 특종을 한 타임스는 원정대와 독점 계약권을 맺어 유리한 위치에서 각종 기사를 쏟아냈다.

하지만 텐징은 타임스와 계약을 맺지 않아 수많은 언론과 기자들의 표적이 됐다.

에드먼드 힐러리도 언론의 취재대상이 됐다. 힐러리는 영국의 한 신문기자에게 독점취재의 조건으로 당시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1만 달러를 주겠다는 제의도 받았다.

6월20일 텐징을 비롯한 대원들은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로 향하는 카 퍼레이드에 올랐다. 도로 주변에는 수많은 인파들이 몰려들었으며 길가에 나부끼는 깃발에는 ‘텐징 만세’. ‘네팔의 영광’ 등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에드먼드 힐러리는 ‘에베레스트 최초 정복자 텐징 환영’이라는 문구를 보는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네팔 왕궁에 도착하자 트리부반 왕이 주최하는 환영식에 도착한 힐러리는 또 한번 자존심을 상했다. 트리부반 왕이 텐징이 정상에 최초로 올랐다는 말을 듣고 실망하고 말았다. 각종 환영식에서 주요 인사들은 고의적으로 “텐징이 가장 먼저 올랐다”며 텐징을 추켜세웠다.

텐징을 영웅화할수록 이번 원정에 참여해 정상 등정을 이뤘던 에드먼드 힐러리. 목숨을 걸고 장비를 나르며 정상 정복의 기틀을 마련한 대원들과 셰르파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지휘했던 존 헌트 대장은 철저하게 버림받았다.

이같은 분위기를 영국 라이프誌는 “헌트 대장과 원정대원들은 고통과 분노의 당혹감을 느꼈다. 아시아에서 영광적인 환영은 에베레스트의 진짜 영웅은 텐징 혼자라는 분명한 암시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시아인과 유럽인의 사심 없는 팀워크는 텐징을 고용인처럼 대우하는 보통 영국인의 관습에 의해 더 불타 오른 아시아 민족주의의 추한 모습에 일그러졌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유럽에 간 텐징 노르게이

네팔과 인도에서의 복잡한 문제로 골치가 아팠던 텐징을 비롯한 원정대원들은 6월 하순 영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에서 텐징과 헌트는 그간의 오해를 풀었다.

비행기가 런던에 도착하자 원정대장 존 헌트가 제일 먼저 내리며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헌트와 에드먼드 힐러리는 버킹엄궁에서 엘리자베스 2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텐징은 조지 훈장을 수여받았다.

텐징의 딸 펨펨. 니마는 찰스 왕자와 앤 공주의 방을 둘러보며 즐거운 영국생활을 보냈으며 텐징은 딸들을 보면서 만족했다. 텐징은 영국에 머무는 동안 자신과 함께 등반했던 사람들을 만났다.

특히 1952년 원정때 각별한 사이였던 스위스 산악인 레이몽 랑베르를 만나기 위해 제네바에 도착했다. 텐징과 랑베르는 2주간 같이 하며 지난 등반에 대해 함께 하며 에베레스트를 함께 올랐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고 회상했다. 이들은 에베레스트에서 못다한 등반을 위해 융프라우 정상을 오르기도 했다.

텐징은 스위스 등산연구재단이 주최한 리셉션에서 중요한 제안을 받았다. 스위스 등산연구재단 설립자인 카를 베버와 에른스트 포이츠가 인도 다르질링에 등산학교를 세우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텐징을 비롯한 참석자들은 단순히 신이 거주하는 곳이 아니라 스포츠와 지리적·문화적 자산을 연결해 히말라야를 부각시키기로 했다.

학교는 히말라야 등산학교로 결정했다. 히말라야 등산학교 설립에 가장 적극적인 사람은 인도 수상 네루와 서벵골주 행정관 로이 박사였다. 이들은 히말라야 등산학교 건립비와 운영자금 200만 루피(1루피 약 32원) 모금활동에 들어갔다. 네루는 텐징에게 “히말라야 등산학교가 건립되면 수천명의 텐징을 길러낼 것이다”고 격려했다.

출처 인터넷경남신문

펀곳   http://blog.daum.net/himax26/1264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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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 기독교도는 왜 사랑하지 않을까? 김동렬 2008-09-09 15965
1925 깨달음은 의사소통 수단이다 김동렬 2008-09-08 14765
1924 권정생, 이오덕, 김용택의 진정성? 김동렬 2008-09-05 15503
1923 깨달음의 구조(수정) 김동렬 2008-09-03 13927
1922 개념의 구조 김동렬 2008-09-01 13672
1921 공룡의 멸종원인 2 김동렬 2008-09-01 15757
1920 깨달음과 구조론 김동렬 2008-08-30 11046
1919 구조론과 깨달음 김동렬 2008-08-27 11681
1918 구조론 개념도 image 김동렬 2008-08-25 19243
1917 구조주의 양자론 김동렬 2008-08-19 10253
1916 예술의 본질 김동렬 2008-08-14 18136
1915 깨달음은 언제 소용되는가? 김동렬 2008-08-05 15886
1914 깨달음은 쉬운가? 김동렬 2008-08-04 12315
1913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론 김동렬 2008-07-19 14630
1912 다섯 가지 구조 김동렬 2008-07-18 13096
1911 극한의 법칙 김동렬 2008-07-08 15555
1910 구조론 개념도 김동렬 2008-07-05 10538
1909 상식의 고정관념을 깨라 김동렬 2008-07-01 12542
1908 구조주의 역사 김동렬 2008-06-25 11834
1907 구조는 대상을 통제한다 김동렬 2008-06-20 143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