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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3070 vote 0 2008.01.03 (22:27:27)

    

● 권력

권력(權力)의 권(權)은 결정권이다. 권력의 힘은 의사결정의 힘이다. 무리가 길을 가다가 갈림길을 만나서 어느 길로 가야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모여있다. 무리가 리더를 선출하고 지도자에게 결정을 위임한다.

이때 무리가 갈림길 앞에서 결정을 못하고 시간을 지체하여 일어날 수 있는 피해의 크기가 100이라면 리더는 신속한 결정으로 그 100의 피해를 줄일 수 있다. 리더는 그 100의 크기 만큼 힘을 가진다.

신호등 앞에 자동차들이 모여있다. 그 모여있는 량의 크기가 신호등이 가진 권력의 크기다. 권력은 그 신호등이 신호등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자동차로부터 뺐을 수 있는 기회비용이다.

사고를 일으킨 자동차를 재빨리 갓길로 빼준다면 교통정체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사고를 낸 운전자가 뒤로 줄지어선 차의 운전자들에게 차를 빨리 빼줄테니 대신 돈을 달라고 하면? 이는 폭력배의 권력이다.  

국도가 아닌 고속도로를 이용하면 기름값과 시간을 아낀다. 대신 통행료를 내야 한다. 이때 통행료를 받을 수 있는 권리는 정당한 국가의 권력이다. 그러나 국가가 타락하면 권력은 폭력이 된다.

모든 권력이 정당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의도적으로 사고를 일으켜 길을 막아놓고 운전자들에게 돈을 내면 차를 빼주겠다고 협박하는 식의 일이 사회에 부지기수로 일어난다. 정당성을 잃은 권력은 폭력이다.  

어원으로 보면 권력의 권(權)은 저울이다. 일의 경중을 판단하고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저울이 가지는 힘이 권력이다. 축구시합의 저울은 심판이다. 심판은 경기운영을 방해하는 선수를 퇴장시킬 권력을 가진다.

권력은 공동체의 자아다. 한 개인 안에서는 그 개인이 정체성이 권력이다. 정체성은 일관성을 필요로 하고 일관성은 동일성과 연속성을 필요로 한다. 개인의 행동이 동일성과 연속성을 잃을 때 인격적 파탄이 일어난다.

개인이 일관성 없는 행동으로 앞뒤가 맞지 않은 일을 저지른다면 정체성의 혼란에 빠지게 된다. 개인의 마음 안에도 저울이 있다. 자아(自我)는 개인의 삶에서 일관된 행동으로 정체성을 얻는다.

개인이 정체성을 얻을 때 타자는 그 사람을 신뢰하게 된다. 이때 개인은 커다란 이익을 얻는다. 더 많은 친구를 얻게 되고 더 많은 사람의 협력을 얻게 된다. 반면 정체성을 잃는다면 정신이상자로 몰리게 될 것이다.

국가에도 자아가 있다. 국가의 정체성이 있다. 국가 정책의 일관성에 의해 그 정체성은 얻어진다. 일관성은 자기 연속성과 자기 동일성에서 얻어진다. 신호등이 언제나 약속을 지키듯이 국가도 약속을 지켜야 한다.

무리가 갈림길 앞에서 리더에게 결정을 위임하는 것은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 리더가 무리의 정체성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일관되기 때문이다. 리더는 일관된 의사결정으로 대중의 신뢰에 부합해야 한다.

권력의 존재를 부정해서 안 되며 권력을 맹신해서 안 된다. 권력은 부단히 의심되고 검증되어야 한다. 역사는 흐르고 환경은 부단히 변화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에 자아라는 저울이 있고 공동체에는 권력이라는 저울이 있다.

권력은 개인의 마음에도 있고, 가정에도 있고, 동호인 모임에도 있고, 주식회사에도 있고, 교통신호등에게도 있고, 폭력배에게도 있고 거지에게도 있다. 거지에게도 최소한 자영업자의 영업을 방해할 정도의 힘은 있다.

계량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저울에게 화를 내서는 안 된다. 잘못은 저울을 잘못 사용한 자신에게 있다. 그러나 혹시 저울이 고장나지는 않았는지 확인할 필요는 있다. 모든 권력은 감시되고 견제되어야 한다.    

● 사상 [사상-지혜-소통-지식-언어]

세상은 커다란 하나의 저울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무수한 작은 저울들의 집합이기도 하다. 모든 존재가 저울이다. 외부에서의 작용에 대해 반작용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모든 존재가 다 저울이다.

존재는 일을 한다. 역할을 가지고 기능을 가진다. 그 하는 일과 맡은 역할과 기능에 의해 비로소 하나의 존재자로 인정되는 것이다. 그 하는 일은 결정이다. 그 결정을 내리는 것은 저울이다.

길 모퉁이의 이름없는 돌멩이 하나도 중력을 가지고 버티고 서서 작용에 대해 자신이 가진 질량의 크기만큼 반작용을 결정한다. 그렇게 외부의 작용에 맞서 당당하게 반작용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다.

존재의 저울은 생명이다. 문명의 저울은 진보다. 내면의 저울은 자아다. 공동체의 저울은 권력이다. 의미의 저울은 가치다. 규범의 저울은 미학이다. 욕망의 저울은 사랑이다. 지식의 저울은 소통이다.

저울은 천칭저울처럼 가운데서 중심을 잡고 좌우의 평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철학의 50개념을 구성하는 나란히 선 다섯 이름들 중 가운데 있는 이름이 저울이다. 문제는 그 저울을 누가 통제할 것인가이다.   

저울은 심판관이다. 축구시합의 저울은 주심이다. 시장의 주심은 가격이다. 정치의 저울은 투표다. 그런데 주심이 편파판정을 일삼는다면 누가 나서서 해결할 것인가? 저울이 고장났다면 어떻게 대응하는가?

시장기능이 만능이 아니다. 투표만 하면 저절로 민주주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주심을 존중한다고 시합이 공정한 것은 아니다. 저울을 감시하고 통제할 장치가 있어야 한다. 시장기능을 감시할 장치가 있어야 한다.

세상에는 진리가 있고 인간에게는 이성이 있고 공동체에게는 사상이 있다. 진보라는 저울은 진리가 감시하고, 사랑이라는 저울은 이성이 통제하고, 소통이라는 저울은 사상이 제어한다. 그렇게 심판을 감시한다.

소통은 언어와 지식과 지혜를 다루는 저울이다. 그 소통의 저울을 통제하는 원리가 사상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상은 결국 소통의 사상이다. 사상한다는 것은 누구와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를 사상하는 것이다.

구한말 개화기 상황이다. 문을 열고 외부세계와 소통할 것인가 아니면 문을 걸어닫고 소통하지 아니할 것인가? 결정해야 한다. 그것이 사상이다. 기독교는 불교와 소통할 것인가 아니면 전쟁할 것인가? 그것이 사상이다.

인간의 삶은 환경과의 맞섬이다. 어떻게 맞서는가? 인식과 판단과 행동으로 맞선다. 인간이 가만 있어도 환경이 인간을 통제하려 한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구체적인 행동으로 맞서야 한다.

그러므로 판단이 필요하고 그 판단을 성공시키기 위해 인식이 필요하다. 즉 인간의 판단은 행동을 위한 판단이며 인간의 인식은 판단을 위한 인식인 것이다. 인간이 가만있어도 굶주림과 질병과 죽음이 인간을 통제하려 들기 때문이다.

밤낮이 바뀌고 계절이 바뀌고 날씨가 바뀐다. 이 모든 변화가 인간을 통제하려 든다. 인간은 인식하기 때문에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행동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인식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환경이 인간을 자극하여 행동을 촉발한다. 행동은 판단을 요구하고 판단은 인식을 요구한다. 판단이 인식과 행동 사이에서 결정하는 저울이다. 모든 인식은 행동하기 위한 인식이며 행동하지 않는 지식은 죽은 지식이다.

인간의 언어는 불완전하다. 거기에 실천이 더해질 때 지식이 되고 소통이 더해질 때 지혜가 된다. 그렇게 지혜를 얻은 언어가 사상이다. 그러므로 사상은 행동하기 위한 사상이며 소통의 지혜를 담은 지식이다.

환경의 통제에 맞서 인간은 인식≫판단≫행동의 순으로 대응의 수위를 높여간다. 인식이 철학이면 판단은 사상이고 행동은 이념이다. 개인은 철학을 가지고 집단은 이념을 가지며 그 사이에서 개인과 집단의 소통이 사상이다.   

무리가 길을 가다가 갈림길을 만나면 행진을 멈춘다. 어느 길로 가야할지 판단해야 한다. 무리는 많아도 결정은 하나여야 한다. 그러므로 체계가 필요하다. 지혜와 소통과 지식과 언어를 하나로 통일해야 한다.

판단은 입장에서 얻어진다. 언어와 지식과 소통과 지혜는 보조에 불과하다. 궁극적으로 인간의 행동은 입장이 결정한다. 동물의 입장에 서면 동물의 결정을 내리고 인간의 입장에 서면 인간의 결정을 내린다.

입장은 곧 포지션을 가지는 것이며 목표를 바라보는 것이다. 주인의 입장이 다르고 노예의 입장이 다르다. 포지션이 다르고 목표가 다르다. 사상은 입장을 가지는 것이며 그 입장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지혜가 얻어진다.

사상이 중요한 이유는 천가지 지혜도 만가지 지식도 그 입장의 변화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이다. 목표가 바뀌고 눈높이가 바뀌고 주객이 전도되면 달라진다. 지혜도 지식도 소용없게 된다.

하나의 사상은 하나의 주의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주의는 입장을 가지는 것이다. 갈림길 앞에서 우리가 왜 이 길을 가는가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 길을 가는 목적에 따라 결정은 바뀐다. 사상 앞에서 지혜도 지식도 무력하다.

막연히 어떤 것을 안다는 것은 참되게 아는 것이 아니다. 환경의 통제에 맞서 정면으로 대응해야 한다. 신 앞에서 단독자로 서야 한다. 죽음을 직시해야 한다. 그렇게 행동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안다는 것은 죽음과 맞서고, 세상과 맞서고, 운명과 맞서고, 환경과 맞서는 자신의 포지션을 잡고, 그 입장에서, 그 위치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며 대응할줄 안다는 것이다. 그러한 실천적 개념이 없는 지식은 쓰레기다.

왜 사상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행동하지 않는 지식은 쓰레기이기 때문이다. 소통하지 않고는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통의 지혜를 담은 실천적 지식이 필요하다. 그렇게 환경의 도전에 맞서 지금 이 순간 나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

● 언어

언어는 문법이 낳고 문법은 상황이 낳는다. 갓난아기도 상황을 포착하고 언어를 알아듣는 때가 있다. 상황은 배가 고프거나 부른 상황이다. 그 상황에서 부모가 어떤 말을 하든 아기는 자신이 처한 상황과의 일치만 기대할 뿐이다.

아기는 단지 YES와 NO만을 판단한다. 엄마와 아빠의 입에서 어떤 발음이 나오든 배가 고픈 자신의 상황과 일치할 확률을 50프로로 놓고 도박을 하는 것이다. 아기의 이해는 높은 확률로 맞는다.

지능이 낮은 동물도 길들여져서 인간의 명령을 따를 때가 있다. 동물은 인간이 명령하는 말소리를 듣고 그 의미를 알아채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맞닥들인 상황을 유추하여 이해한 것이다.

동물의 기대는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거나 둘 중에 하나다. 그러므로 인간이 입으로 어떤 발음을 내뱉든 ‘오라’ 아니면 ‘가라’다. 사람이 먹이를 갖고 있다면 ‘먹어라’ 아니면 ‘먹지마라’ 둘 중에 하나다.

언어는 의미를 가지지만 그 의미가 인간들 사이의 약속에서 유래하는 것은 아니다. 약속으로서의 언어의 의미는 언어가 창안한 이후에 사회적으로 부여되고 해석된 것이지 언어가 탄생한 원인은 아니다.

기존의 언어학 이론에 따르면 언어는 최초 그 단어의 창안자가 대중들과 약속한 결과라는 것이다. 이른바 자의성설(arbitrary)이다. 틀렸다. 언어는 보디랭귀지에서 자연히 진화한 것이다.

인간에게는 혀와 구강과 턱으로 동작을 모방하는 본능이 있다. 기쁠때 웃는 동작은 얼굴근육을 자기 자신에게로 당겨 상대방을 자기 쪽으로 끄는 것이며 화날 때 입술을 삐죽이 내미는 것은 그 반대의 동작이다.

you는 입술을 삐죽이 내밀어 상대방을 가리키는 동작이다. my는 you의 동작을 반대로 뒤집은 것이다. ‘나’는 혀를 입천장에 닿은 채 자기 쪽으로 당겨 자신을 가리키는 동작이고 ‘너’는 그 반대동작이다.

만나다는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만나는 동작이고, 맞다는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맞추는 동작이다. 호(呼)는 뜨거운 것을 식힐 때 입으로 호~ 하고 부는 동작이요 흡(吸)은 공기를 들이마시는 동작이다.

짬, 참, 뜸, 띄엄, 드문, 때움, 때, 토막, 도마, 돔, 때문, 두메, 뜨다, 떼다, 덜다, 땀(바늘 한 땀), 뜸(공중에 뜸) 때(몸의 때) 등은 모두 혀를 입천장에서 떼는 동작이다. 모두 떼어진 간격, 떼어진 토막의 의미다.

이렇듯 하나의 보디랭귀지에서 수십어가 탄생하므로 100여개의 보디랭귀지 기본동작에서 수천단어가 만들어진다. 파생어를 포함하면 우리가 쓰는 수만 단어가 몇 백의 보디랭귀지 원시어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

꼭>촉>혹으로 변하는 법칙이 있다. 물체의 꼭지가 볼펜의 촉으로 바뀌고 다시 혹으로 바뀌면서 C>CH>H로 변하는 것이다. 어원은 같다. 이 법칙은 영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cap>chapter>high로 변한다.

굳혔다credit>딱딱하게 굳다hard로 변하고, 칸을 갈랐어class>새가 주둥이로 쪼아서choose로 변한다. 이 외에도 C>S, D>T>J, T>S, G>W 등 많은 언어진화의 패턴들이 있다.

갠지스강을 힌두어로 ‘강가’라 하는데 한자로 번역되면 ‘항하’가 되어 갠지스강의 모래알만큼 많다는 항하사(恒河沙)로 전개된다. 이 법칙은 우리말 ‘고을, 골’이 고구려어 홀(忽)로 전개되어 미추홀을 낳음과 같다.

이탈리아어 camera(작은 집)가 영어 home으로 변함과 같다. 카메라가 처음 발명되었을 때 크기가 작은 집과 같았으므로 home의 의미로 쓴 것이다. 세계적으로 남쪽의 C가 북쪽으로 가면 H로 발음되는 경향이 있다.

우리말과 영어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이러한 언어진화의 패턴과 원리를 규명하면 우리가 쓰는 수만개의 단어가 궁극적으로 100여개의 보디랭귀지와 자연의 소리를 흉내낸 의성어에서 나왔음을 알게 된다.

언어는 인위적으로 명명된 것이 아니라 자연히 진화한 것이다. 어휘의 발명자가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름을 약속한 것이 아니라 보디랭귀지에서 상황을 이해한 것이다. 그 상황 자체가 약속이다.

배고플 때 한 말은 보나마나 배고프다는 말이요 배부를 때 한 말은 보나마나 배부르다는 뜻이다. 고프다의 ‘곺’은 배가 꺼지는 모양을 혀로 흉내낸 동작이요 부르다의 ‘불’은 배가 불룩한 것을 입술로 흉내낸 동작이다.

그러므로 언어의 의미는 인위적인 약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진화원리가 반영되어 합리성을 얻은 문법에 있으며 맥락에 있고 그 이전에 자연에서의 상황에 있다. 주어진 상황 자체가 문법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외국어를 학습할 때는 단어를 암기하기 전에 외국인과 맞닥들인 상황 그 자체를 먼저 학습해야 한다. 교사가 상황을 연출해주고 학생이 상황을 체험하면 자연히 이해하게 된다. 그렇게 몸으로 이해하는 학습이 진짜다.

그 연출된 상황에서 문법이 반영된 문장이 말해지고 문장 안에서 단어가 쪼개진다. 단어가 조립되어 문법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문법이 해체되어 단어가 된다. 이것이 자연의 언어다.

그러므로 언어를 학습하려면 먼저 상황을 체험하고 문장을 통째 암기해야 한다. 갓난 아기가 발음한 언어는 설사 한 단어 뿐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는 문장의 맥락이 숨어 있고 상황의 요청이 숨어 있다.

언어는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금이 간 수도관에서 물이 새어나오듯 상황 그 자체에서 스르르 삐져나온다. 그러므로 언의의 참된 의미는 연동에 있다. 상황≫문법(합리성)≫문장≫단어가 연동되는 맥락에 있다.

‘A면 B다’의 연동원리가 적용된다. 자유라는 하나의 어휘가 어떤 뜻을 가지는지는 수십가지 설명이 있을 수 있다.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된다. 그러나 자유가 이런 의미라면 사랑은 이런 의미여야 한다는 연동원리가 있다.

문법을 만드는 것은 상황이 유도하는 자연의 합리성이다. 합리성은 진리에 기초한 자연법칙이다. ‘아빠’가 이런 뜻이면 ‘엄마’는 이런 뜻이어야 한다는 합법칙성이다. 아빠는 엄마를 뒤집어 발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아기가 입술을 오무려서 젖을 빠는 동작을 취한 것이고 아빠는 이를 뒤집어 반대로 입을 벌리는 동작을 취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엄마와 아빠의 의미는 서로 연동되는 것이다.

‘먹다’와 ‘뱉다’는 반대동작이다. ‘먹다’는 입을 오무려 삼키는 동작이고 ‘뱉다’는 입을 벌려 뱉는 동작이다. ‘들다’와 ‘나다’도 반대동작이다. ‘높다’와 ‘낮다’도 반대동작이다. ‘벌리다’와 ‘오무리다’도 반대동작이다.

입을 크게 벌리면 벌리다가 발음되고, 입술을 오무리면 오무리다가 발음된다. 이런 식으로 언어는 보디랭귀지에서 출발하여 연동되는 것이다. 언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연동의 구조를 파악한다는 것이다.

보디랭귀지가 먼저 동사를 낳았고 동사 ‘떼다’ 하나가 짬, 참, 뜸, 때, 토막, 도마, 돔, 두메, 땀, 등으로 전개하며 수십개의 명사를 파생시켰다. 하나의 동작이 무려 수백개의 명사를 파생시키기도 한다.

철학의 50개념이 말하는 의미가 그 단어에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단어가 아닌 맥락에 주목해야 한다. 세상은 커다란 그물과 같다. 인간은 그물의 이쪽 구역에 적용되는 원리를 끌어다가 저쪽에 끌어쓰는 방법으로 호환시킨다.

그러한 응용의 과정에도 연동의 원리는 그대로 적용된다. 존재가 이런 의미라면 생명은 마땅히 저런 의미여야 하고 자연은 당연히 그런 의미여야 한다는 규칙이 있다. 이성이 이쪽을 가리키면 욕망은 저쪽을 가리킨다는 원리가 있다.

하나의 무우를 칼로 토막냈다면 상황발생이다. 이때 토막난 두 조각은 서로 마주본다. 잘려진 무우의 두 토막이 주어와 술어를 이루고 한편으로 전제와 진술을 이루며 서로 마주본다.

주어와 술어가 핑퐁처럼 의미를 떠넘기며 문장을 유도한다. 우리말은 주어와 술어가 크게 공간을 벌리며 전개하여 펼쳐내는 방법을 쓰고 영어는 주어의 임자가 술어의 말뚝에서 차례로 빼내는 방법을 쓴다.

우리말은 쥘부채를 펼치듯 펼치고 영어는 휴지를 뽑듯이 뽑는다. 우리말의 벌리기와 영어의 빼내기 원리를 체득하면 문법은 자연히 얻어진다. 언어는 앞단어에 뒷단어를 달아매어 문장을 조립하는 것이 아니라 우르르 쏟아지는 것이다.

말을 할 때는 자신이 1초 후에 무슨 단어를 말할 것인지 자신도 모른다. 컨셉을 가지고 말하기 때문이다. 컨셉은 술어의 거울로 주어의 촛불을 비추는 것이며 거울의 반사처럼 단어가 반사되어 우르르 쏟아지기 때문이다.

말한다는 것은 칼로 자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어는 칼이다. 상황은 존재의 네트워크 안에서 복잡하게 얽혀 있다. 말은 그 자연의 상황을 토막내어 거기서 각별히 의미를 추출한다.

이때 주어와 술어는 동시에 성립하며 서로 연동된다. 주어가 이러면 술어는 저래야 한다. 언어는 이러한 연동의 원리에 의해 자연히 진화한 것이다. 언어는 인위적인 약속이 아니라 나무가 자라듯 점점 자라난 것이다.

언어에는 허어(虛語)가 있다. 비행접시나 귀신, 영혼 따위는 허어다. 종교인들은 ‘기도빨 잘 듣는다’거나 ‘복을 받는다’거나 ‘은혜를 입는다’거나 따위의 표현을 쓴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듣고 받고 입는 것인가?

UFO는 없다. UFO라 불리는 것은 ‘미확인 비행물체’가 아니라 미확인 소동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비행목격주장들 중에서 그것이 물체임을 증명하고 비행사실을 증명한 경우는 단 한건도 없다.

비행을 증명하려면 목격자가 공중에 떠야 하고 물체임을 증명하려면 만져서 질량을 확인해봐야 한다. 그 관측된 UFO 현상이 질량을 가진 물체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고 비행했다는 증거도 전혀 없다.

허어도 일정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주어로 쓰인 기도빨이나 복이나 은혜는 모호하지만 술어에는 분명한 것이 있다. 잘 듣는 것은 약이고, 넉넉히 받는 것은 돈이며, 몸에 입는 것은 옷이다.

명사는 허어지만 동사에 의해 맥락을 가지므로 일정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 기도하는 사람은 적어도 듣는 약과, 받는 돈과, 입는 옷을 필요로 하며 그와 비슷하게 작용하는 뭔가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비행접시는 의미가 없는 허어지만 뒤에 ‘목격했다’는 술어가 따라붙기 때문에 맥락에 따라 의미를 얻는다. 뭔가 목격한 것은 사실이고 그 목격대상에 비행접시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이름뿐인 명목적 존재로 된다.  

의미는 단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맥락에 있고 맥락은 주어와 술어의 상호작용으로 문법을 만들며, 문법은 자연의 상황을 해석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언어는 인간의 욕망이 아니라 자연의 존재 그 자체인 것이다.

언어야 말로 철학의 출발점이다. 진리가 존재의 나이테라면 언어는 소통의 나이테다. 언어의 궁극은 자연의 상황에 있다. 자연과 인간의 정직한 대면 그 자체가 언어다. 진정한 소통이 그 가운데 있다.

의미가 인간의 의사와 자연의 상황을 연결시킨다. 그리고 그 사이에 결이 있다. 결은 문법이다. 언어는 문법을 가지며 문법은 일정부분 자연의 합리성을 반영한다. 그 합리성 안에 진리의 속성이 숨어 있다.

언어가 합리성을 잃을 때 인간은 의사소통에 실패한다. 언어는 의사소통에 성공한 정도 만큼의 진리를 반영하고 있다. 인간의 언어는 여전히 불완전하다. 인간은 여전히 진리의 불빛을 직시하지 못한다.  

언어를 깨닫는 것이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불완전한 언어를 완전하게 하는 것이 완전한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다. 언어가 자연과 인간 사이를 중개한다. 언어를 깨달음으로써 자연의 합리성으로 나아가는 창구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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