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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9326 vote 0 2007.12.31 (20:59:22)

    [이 글은 급하게 쓴 잠정적인 글이며 나중 대폭 고칩니다.]

[인식론 25개념]

[이다] ● 신(神), 존재, 생명, 자연, 물질 - 진리, 세계, 진보, 역사, 문명
[있다] ● 인간, 실존, 자아, 일상, 인생 - 공동체, 국가, 권력, 투쟁, 사회
[낫다] ● 정신, 깨달음, 가치, 의미, 마음 - 윤리, 이상, 미학, 규범, 도덕
[하다] ● 이성, 존엄, 사랑, 자유, 욕망 - 사상, 지혜, 소통, 지식, 언어
[남다] ● 생존, 소유, 이익, 쾌락, 행복 - 생산, 자본, 신뢰, 효율, 문화

● 진리

진리는 참(眞)된 리(理)다. 리(理)는 결이다. 결은 나이테다. 나이테를 한자어로 목리(木理)라 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모든 사물은 내부에 결을 가지며, 나이테를 가지며, 리를 가진다. 그리고 그 결은 근본 진리에서 유도된 것이다.

처음 진리가 있었고 진리는 결을 가졌으며 그것이 낱낱의 사물에 모두 반영되었다. 나이테는 나무 자신의 내적 정합성에 맞는 조형적 질서다. 그 질서는 근원의 질서로 부터 온 것이다. 진리로 부터 온 것이다.

모든 존재는 내부에 내적 정합성이라는 조형적 질서를 가진다. 진리는 존재의 나이테다. 완전성의 나이테다. 존재 자신의 내적 정합성을 성립시키는 조형적 질서다. 그것이 모든 사물에 반영되어 있다.   

어원으로 보면 리(理)는 옥(玉)+리(里)다. 리(里)는 분리(分離)되는 것이다. 마을은 400미터 단위로 분리되니 곧 동리(洞里)다. 옥은 결따라 분리되니 리(理)는 보석세공사가 옥을 갈아내는 결이다.

옥은 결대로 커트해야 한다. 결대로 커트하지 않으면 약간의 충격에도 깨지고 만다. 일은 실패로 돌아간다. 그것이 질서다. 규칙을 어기면 일은 실패로 된다. 그러므로 당연히 지켜야만 한다. 그것이 합리성이다.  

리(理)는 외부에서 충격을 가했을 때 금이 가는 방향, 쪼개지는 방향이다. 리는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 성립하고 전개하는 방향이다. 거기에 일정한 방향성이 있다. 우선순위가 있다. 먼저와 나중의 구분이 있다.

리는 작용 반작용이 성립하는 지점이다. 인체의 관절 부분이다. 건물의 구조다. 힘이 꺾어지는 지점이다. 정보전달의 접점이다. 안테나다. 스위치다. 관절과 구조가 기계의 메커니즘을 이룬다. 리는 메커니즘이다.

메커니즘은 일정한 방향성을 가진다. 태엽을 풀어서 시계바늘을 돌릴 수는 있어도 그 역의 경우는 없다. 시계바늘을 돌려서 태엽을 도로 감을 수는 없다. 태엽과 바늘 사이에 진자가 있기 때문이다.

진자는 공간이 아니라 시간을 통제하기 때문이다. 공간은 되물릴 수 있지만 시간을 되물릴 수는 없다. 시간은 항상 과거에서 미래로만 이동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존재의 비반복, 불연속, 비가역, 비분할, 비순환성이 성립한다.

그러므로 진리는 질서를 의미하며 질서는 결코 거역할 수 없는, 어길 수 없는, 뒤집을 수 없는, 전복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의 방향성이다. 곧 비가역성이다. 물은 항상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비가역성이다.

법(法)은 수(水)+거(去)로 물이 가는 방향이다. 물은 항상 바다로 간다. 그것이 질서다. 도(道)는 길이다. 결은 길이다. 바위의 결은 절리(節理)다. 절리는 바위가 깨지는 길이요 나이테는 목수가 톱질하는 길이다.

리(理)와 도(道)와 법(法)이 일방향성을 강조하는데 비해 학(學)이나 예(藝)나 술(術)은 그렇지 않다. 학(學)은 축적하는 것이고 예(藝)는 궁극을 추구하는 것이고 술(術)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술(術)은 가장 낮은 개념으로 다른 방법으로 대체할 수 있다. 칼로 자를 수 있지만 톱으로 썰수도 있다. 기술이나 요술, 방술, 주술 따위를 들 수 있다. 예술(藝術)은 술(術) 중에서 궁극의 술(術)을 추구한다.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 단 하나의 방법을 찾는 것이 예술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술을 극복한다. 예술이나 기술이 특별히 재주있는 소수 전문가의 영역이데 비해 학(學)은 누구나 접근할 수 있다.    

예술이나 기술에 진리가 가진 질서의 속성을 부여하여 체계화시킨 것이 학(學)이다. 보편성을 부여한 것이다. 학이 전문화 되면 예술이고 예술이 보편화 되면 학문이 된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진리다.

   

진리의 의미는 보편성과 일반성에 있다. 보편성은 어디가나 다 통하는 하나의 바타이다. 일반성은 여러 갈래가 결국 하나로 귀일하는 성질이다. 결은 어디에나 있다. 결은 그것이 만들어진 원리이므로 만들어져 있는 것은 모두 결이 있다.

나무의 나이테는 나무가 만들어진 원리다. 돌의 결은 돌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용암이 식으면서 온도차에 따라 결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만들어진 모든 것은 결이 있다. 따라서 보편성이 있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만들어져 있으며 만들어진 모든 것은 만들어질 당시의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결이다. 거기서 보편성이 얻어진다. 그 보편성은 절대성과 상대성을 동시에 성립시키는 작용 반작용의 접점이다.

작용 반작용은 둘이므로 상대성이요 둘의 접점이 하나이므로 절대성이다. 모든 존재는 관계 속에 존재하므로 상대적이요 모든 상대적인 것은 접촉하면서 접점을 성립시키므로 절대성을 가진다.

절대성과 상대성을 동시에 성립시키면서 작용 반작용의 YES와 NO를 판정하는 저울이 있다. 모든 존재의 내부에는 내적 정합성을 성립시키는 저울이 있다. 만약 그것에서 어긋나면 둘라 나뉘어지고 만다.

만약 그것이 하나이면 반드시 내부에 저울이 있다. 볼펜이면 촉이 있고 칼이면 날이 있고 송곳이면 침이 있고 망치면 머리가 있고 바늘이면 귀가 있다. 접촉점이 있다. 보편성이 있다.

모든 존재는 심과 날을 가진다. 심이 내부를 통일하고 날이 외부와 연결한다. 날은 연결하므로 갈라진다. 하나에서 둘로 갈라졌으므로 본래의 하나로 환원될 수 있다. 그것이 일반성이다.

진리의 속성은 보편성과 일반성이다. 그것으로 세상 모두를 크게 아우른다. 보편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통할 수 있고 일반성이 있기 때문에 언제라도 손잡고 어우러져 하나가 될 수 있다.

하나의 종이 울면 공명하여 모든 종이 소리를 토해낸다. 공명하는 이유는 통하기 때문이다. 보편성이 있기 때문이다. 내부에 안테나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나무의 가지는 결국 하나의 줄기를 통해 뿌리와 이어진다. 일반성이다.

60억 인류는 결국 하나의 근본에서 나왔으므로 일반성을 가지고 서로 대화할 수 있기 때문에 보편성을 가진다. 내가 양심이 있으면 네게도 양심이 있다. 그러므로 보편된다. 통한다. 통해서 하나가 된다. 그것이 진리의 의미다.

● 세계

세계는 가장 큰 울타리다. 크게 동그라미를 그려 인간의 인식과 행동이 미치는 최대한의 범위를 제안한 것이다. 그것은 으뜸이다. 으뜸은 원(元)이다. 1원론이냐 2원론이냐 하는 문제가 제시된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은 모두 이원론의 세계이다. 우리는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으로 사물을 인식한다. 눈으로 보는 것은 밝거나 어둡다. 귀로 듣는 것은 시끄럽거나 조용하다.

혀로 느끼는 것, 몸으로 느끼는 것이 모두 그러하다. 강약과 장단과 고저와 상하와 심원이 있다. 전후와 좌우와 밤낮과 남녀와 음양과 산수와 천지가 있다. 우뚝한 산과 깊은 물, 높은 하늘과 낮은 땅이 있다. 마주보고 있다.

이것이 이원론의 세계다. 인간의 인식은 이원론으로 부터 시작된다. 존재론은 모두 일원론이고 인식론은 모두 이원론이다. 그러므로 어떤 하나의 이론이 탄생한다는 것은 처음 둘을 목격하고 그 원인에서 하나를 찾는 것이다.

그것이 진리의 일반성이다. 그리고 모든 2는 알고보면 1로 되어 있다. 밤낮은 하루를 만들고 남녀는 사람을 이루고 산과 물은 자연을 이루고 하늘과 땅은 지구를 이룬다. 이 세상의 모든 2는 1의 앞면과 뒷면이다.

어떤 1이 관계를 맺으면 곧 2가 된다. 어떤 절대성의 1이 누군가와 만나 접촉하여 작용반작용을 성립시키면 곧 2가 된다. 인간이 사물을 인식하는 방법은 작용반작용이므로 2다. 즉 인간은 2원론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존재론과 인식론이 있다. 50개념에서 왼편의 신, 존재, 생명, 자연, 물질은 모두 1이다. 존재론의 세계다. 그것이 사물에 반영되면 오른편의 진리, 세계, 진보, 역사, 문명의 2가 된다. 인식론의 세계다.

그러므로 학문은 이원론으로 시작하며 1원론에서 완성된다. 그러므로 모든 학문과 사상의 창안자는 1원론자였다. 모든 사상과 철학은 1원론이어야 한다. 학문의 목적이 근원의 보편성을 찾는데 있고 그것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제자들은 모두 이원론자로 타락한다.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칼로 잘래내고 톱으로 썰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담장을 둘러치고 성벽을 쌓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자는 이원론자가 되었다.

기독교는 원래 일원론이지만 아랍의 조로아스터교에서 사탄 개념을 도입하여 이원론이 되었다. 소승불교도 이원론의 입장에 가깝다. 대승은 일원론으로 되돌린 것이다. 어떤 사상이든 가만 두면 저절로 2원론이 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질서가 있어야 하고 질서는 전후, 상하, 고저, 장단, 내외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계급이론도 이원론적 관점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일원론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질료와 형상을 나눈 것은 이원론이다. 대부분의 사상이 1원론에서 출발하여 2원론을 거쳐 다시 일원론으로 복귀하는 패턴을 보이고 있다.

인간의 인식은 기본적으로 2원론이지만 체계가 없으므로 사상의 뼈대가 없다. 뼈대는 존재론에서 얻어진다. 완전성의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 그러므로 일원론이 된다. 그러나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다시 2원론이 된다.

2원론이 차별과 투쟁을 낳으므로 다시 1원론으로 복귀된다. 한국의 유교주의가 율곡의 1.5원론(2원론적 일원론)을 거쳐 혜강 최한기의 기 일원론으로 완성된 것과 같다. 이와 기는 곧 존재론과 인식론을 의미한다.

우리가 세계를 바라봄은 거울에 비추어 보는 것이다. 스크린에 영상이 떴다면 어딘가에 필림이 숨어 있다. 그 필름 뒤에 광원이 있다. 근원의 일자를 찾아야 한다. 제 1원인을 찾아야 하다. 그로부터 연역해야 한다.

모든 관계의 상대성은 존재의 절대성으로 부터 비롯한다. 모든 이원론은 일원론으로 되돌아간다. 정상에서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그래야 울림과 떨림이 있다. 모든 이원론은 아랫돌 빼서 윗돌 고이는 것이다.

● 진보

진보는 인류의 집단지능의 진보이다. 그 인류의 집단지능을 구성하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있다. 하드웨어는 생산력-생산관계의 시스템이며 소프트웨어는 계급과 문화로 나타나는 의사소통 구조의 진보이다.

◎ 하드웨어 - 시스템 질서 : 생산력≫생산관계(기술, 자본, 제도)

◎ 소프트웨어 - 인간다운 가치 : 의사소통 구조(종교, 철학, 문화)

진보는 인간 내부에 잠재한 무한한 가능성을 드러내고 실현하고 증명하는 것이다. 사회 시스템의 근간이 진보할 뿐 아니라 인간 자체가 진보하는 것이다. 여기서 질서의 진보와 가치의 진보가 있다.

◎ 질서의 진보 : 생산력의 변화를 반영하는 제도

◎ 가치의 진보 : 그 제도를 소화할 수 있는 인격

정치적으로는 진보와 보수의 대립이 있지만 가짜다. 문명의 관점에서 보면 진보가 있을 뿐이며 보수는 이념적 실체가 없다. 보수는 자체 엔진이 없고 동력이 없다. 보수는 단지 진보의 그림자일 뿐이다.

질서의 진보와 가치의 진보가 있다. 질서의 진보는 하부구조에서 시스템의 진보이고 가치의 진보는 상부구조에서 인간 그 자체의 진보이다. 각각 문명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구성한다.

모든 변화의 자궁은 생산력이다. 그것은 과학과 기술이다. 발견과 발명에 의해 진보는 촉발된다. 이 밑바닥 하부구조의 변화가 반영되어 상부구조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 두 진보가 엇나갈 때 보수가 나타난다.  

시스템의 진보에 의존해서 안 된다. 효율적인 시스템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을 왜곡하고 억압한다. 적나라한 인간의 본성 그 자체를 숨기거나 변질시키는 시스템의 변혁은 오히려 퇴보일 수 있다.

인간의 길들여지지 않은 본래의 모습이야말로 진보의 소중한 자산이다. 야생마같고 잡초같은 본래의 눈빛이 살아있어야 한다. 거기서 문명의 본질을 통찰하게 하는 거룩한 분노가 얻어지는 것이다.

시스템의 진보가 인간을 약화시킨다. 인간의 본성을 억압한다. 인간은 길들여지고 만다. 이에 문명의 주인인 인간이 문명을 통제할 수 있게 하는 가치의 진보가 주장된다. 기계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

정치에서 진보와 보수의 대립은 질서의 진보와 가치의 진보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현상이다. 진보가 본래 내부에 모순을 안고 있으며 스스로 해답을 내지 못하기 때문에 보수가 나타난다.

보수는 진보가 자체모순으로 교착될 때 사회가 정체되는 현상이다. 시스템의 진보가 인간의 본성에서 멀어져서 공허해 졌거나, 혹은 시스템의 진보를 따라갈만큼 인지가 개발되지 않았거나다.

기존의 마르크스주의 담론들은 이 문제에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기존의 혁명이론, 계급투쟁이론은 시스템의 혁신에 주목할 뿐 인간다운 가치에 소홀하다. 인간의 본성과 맞지 않는 시스템이 강요되었다.

보수는 정체성이 없으므로 오히려 유연성이 있다. 때로 시스템 위주의 변혁에 의해 개인의 가치가 무너짐을 반대한다. 때로는 개인의 가치를 주장하는 목소리에 의해 자본 위주의 시스템 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반대한다.

보수는 질서와 가치라는 진보의 두 날개 사이에서 이중플레이를 한다. 좌파의 제도집착이 사회를 획일화 시킨다며 반대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개인의 존엄을 주장하는 환경운동이 산업을 방해한다며 반대한다.

표면에서는 진보와 보수의 대립으로 보이지만 하부구조와 상부구조의 부조화라는 진보의 본질적인 딜렘마가 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속도조절이 있는 것이다. 보수는 그 진보의 모순에 끼어든 허깨비에 불과하다.

진보는 생산력의 변화로 최초로 촉발되고, 그 생산력의 변화를 반영하는 최적화된 사회적 의사소통구조의 완성으로 완결된다. 그 둘 사이에서 밀고당기기가 있다. 궁극적으로는 그 의사소통구조를 완성하는 철학이 해결한다.    

사회는 기계가 아니라 생명이다. 인간 개개인의 발전이 없이 시스템을 개량한다는 주장은 공허할 뿐이다. 진정한 혁명은 인간 내부에서 일어나야 한다. 개인이 깨달아야 한다. 더 높은 가치를 바라보아야 한다.

진보가 변혁의 동기로 제시하는 착취, 모순, 부조리, 비합리 들은 인간 내부에서의 동기가 아니다. 그것은 못생긴 사람에게 거울을 보여주며 화를 돋구어 동기유발 시키려는 것이다. 진짜가 아니다.

인간 내부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이상주의다. 이상주의가 없고 깨달음이 없고 미학이 없는 진보는 가짜다. 마르크스가 공상론적 사회주의라 비판한 그것 말이다. 과학적 사회주의란 시스템 위주의 변혁에 불과하다.

진보는 과학 찾다가 인간을 희생시켜 망가졌다. 인간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개인이 강해져야 한다. 조직과 집단과 강령과 교리와 제도에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 개인이 더 높은 세계를 바라보아야 한다.

개인이 상승해야 한다. 그 상승한 개인이 추구하는 가치의 총합이 피드백 되어 시스템의 변화로 나타나야 진짜다. 깨달음에서 앞서가고 인식에서 앞서가고 의사소통 구조에서 길을 열지 않으면 안 된다.

생산력의 발전 이전에 그 생산을 필요로 하는 동기 자체가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진보는 더 나아지는 것이다. 왜? 왜 더 나아지려고 하지? 답은 이상주의다.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이상주의가 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 역사

역사는 살아있다. 자연이 생명을 품어 호흡하듯이 역사는 진보를 품고 호흡한다. 그러므로 역사는 진보의 역사이다. 역사는 오직 진보를 기록할 뿐이다. 진보만이 유일하게 가치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거울을 보는 것은 유리를 관찰함이 아니라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 보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의 이름으로 과거를 읽음은 미래를 헤아리는 것이다. 과거는 미래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그 거울에 역사의 맥박과 호흡과 패턴이 비치기 때문이다. 사마천이 연대기에 더하여 열전을 쓴 것은 역사의 거친 호흡과 맥박과 숨결을 기록하기에는 열전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흥망성쇠는 한 인물이 생로병사를 닮아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패턴이다. 한 인물의 삶에 있는 것이 한 왕조의 출범과 몰락에도 나타나 있고 한 국가의 흥망에도 나타나 있다. 그 본질을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역사의 본질은 변방에서 중심을 치는 것이다. 중심이 있고 변방이 있다. 변방에 그 변방의 중심이 있다. 중심은 하나의 완성된 모델이며 변방은 다양한 새로운 모델의 시험장이다. 역사의 승부는 모델과 모델이 싸움이다.

한국모델과 일본모델이 있다. 조선모델과 고려모델이 있다. 고구려모델과 백제모델이 있다. 하나의 모델이 완성되면 중심이 변방을 장악한다. 인구가 증가하고 문명의 지평이 확대되어 외부에서 유입되면 점차 한계가 드러난다.  

모델과 모델이 경쟁하며 새로움이 낡은 것을 극복한다. 새로움은 항상 변방에서 온다. 들불처럼 온다. 거침없이 온다. 내부에서의 자가발전은 없다. 지배집단은 언제나 그 지배를 정당화 하기 위한 차별의 수단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모든 혁신은 반드시 자기부정의 과정을 거치며, 내부에서의 자기부정은 기왕의 정당화된 지배의 근거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변혁은 변바의 대중이 중심의 엘리트를 치는 것이다.

엘리트는 지배시스템을 영속화 하기 위하여 폐쇄적인 의사소통구조로 된 상부구조를 건설한다. 대중이 이해하기 어려운 한자를 활용하듯이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의사소통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 문명

개미는 홀로 살 수 없다. 군집 전체가 마치 한 마리의 개체처럼 행동한다. 한 마리의 개미는 군집 안에서 마치 하나의 세포처럼 기능한다. 기능한다는 것은 고유한 목적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개미는 군집을 의해 희생한다. 우리가 머리를 자르고 손톱을 깎아도 그 머리칼을 구성하는 세포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개미의 삶도 그러하다.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독자적인 동기와 목적과 의도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느 면에서 인간의 삶 역시 개미와 같다. 한 사람의 삶 안에서는 실존적 의미가 완성되지 않는다. 고립된 삶은 허무하다. 개인의 목적과 의도는 인류 전체의 목적과 의도와 소통할 때 한하여 참된 가치를 이룬다.  

고립된 개인의 삶은 허무할 뿐이다. 자기 존재의 가능성의 절반도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개인은 단지 욕망에 추동될 뿐이며 그것은 인간의 잠재한 가능성 중의 지극이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욕망을 추구하지만 거기에 더하여 자유와 사랑과 존엄과 이성을 바라본다. 자유와 사랑과 존엄과 이성은 사회 안에서 의미를 가진다. 고립된 개인의 욕망은 그 자유, 사랑, 존엄, 이성으로 나아가는 단서일 뿐이다.

개인의 욕망이 사회 안에서 전개되지 않을 때 허무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배가 부르면 만족하지만 그 먹은 밥으로 기운내어 일하지 않으면, 그 일로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그 욕구의 충족은 의미없다.

욕망을 달성하지만 실존으로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허무해지고 마는 것이 비참이다. 그 의미의 링크가 끊어지지 말아야 한다. 욕망은 자유로, 사랑으로, 존엄으로, 이성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그 링크의 끝에 문명이 있다.

문명의 의미는 인류 집단지능의 완성에 있다. 인간은 개인이 하나의 생명체이지만 동시에 인류전체가 만드는 집단지능이 하나의 생명체이며 개인은 그 60억개의 세포로 이루어진 생명체 안에서 하나의 세포인 것이다.

인류 전체가 하나의 생명체임을 알아야 한다. 물질문명은 그 생명체의 육체이며 정신문며은 그 생명체의 영혼이다. 인류가 가진 지혜의 총합이다. 그 생명체는 살아있다. 그리고 호흡한다.

● 공동체

공동체의 의미는 ‘내가 곧 너’이고, ‘네가 곧 나’라는 사실을 깨닫는데 있다. 그 법으로 세상과 하나가 되고, 우주와 하나가 되고, 신과 하나가 되는데 있다. 그것을 깨달을 때 죽음을 극복하고 삶의 참다운 지평을 얻을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죽음을 인식하기 때문에 삶의 동기와 목표와 방향을 얻을 수 있다. 죽음에 의해 오히려 삶의 밀도가 높아지는 것이다. 죽음이야 말로 삶의 동력을 제공하는 엔진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이 영원히 산다면? 하루하루의 매듭이 없이 하루가 영원히 이어진다면? 밤도 없고 낮도 없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하루 24시간의 매듭이 없고, 일주일과 한 달과 1년 열두달이 없고 계속 이어진다면?

유년기,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의 매듭이 없다면? 입학에 졸업의 시기에 제한이 없고 결혼과 취업의 관문이 없고, 월급날이 없고 휴식일이 없다면? 봄여름가을겨울의 순환이 없다면? 그냥 무한정 펼쳐져 있다면?

삶의 무게 또한 가벼워지고 만다. 끝이 있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한 것이다. 통과해야 할 관문이 있기 때문에 지금 긴장하는 것이다. 이 순간이 절절한 것이다. 마땅함이 있고 짜릿함이 있는 것이다.  

인간이 영원히 산다면 모든 계획은 미루어진다. 그 일을 하필이면 오늘 해치워야하는 이유가 없다. 옳고 그름의 판단은 필요가 없다. 모든 판단은 동기와 목적에 의해 성립하는데 그 동기와 목적이 소멸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 나의 존재는 바래어지고 만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보이지 않는 채찍에 의해 자신의 나아갈 길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조종된다. 길들여진다. 죽음의 채찍을 피하려다 저렴해진다.

정면으로 맞서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이 결혼하여 가족을 일군다는 것은 죽음을 극복하는 심리적인 방법의 하나이다. 그것은 심리적인 위안을 주는 하나의 장치일 뿐 존재의 진실이 아니다.

생일을 크게 기념하여 친구를 모두 초대한다 해서, 결혼식을 성대하게 치른다고 해서 내 삶의 농도가 진해지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인간은 그 방법으로 죽음의 두려움을 피하고 내가 지금 살아있음을 느낀다.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고 부모가 있고 자식이 있음으로 해서 죽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존재가 영속하는 느낌을 얻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아리가 있고 모임이 있고 국가가 있음으로 해서 인간은 죽음의 두려움을 덜어내는 것이다.

인간은 죽어도 공동체는 죽지 않는다. 공동체의 영속에 자신의 존재를 투사함으로써 죽음을 극복하려 한다. 그 공동체 안에서 역할을 가짐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생생하게 느껴낸다. 그러나 가짜다.

깨달음에 의해 극복되어야 한다. 심리적인 위안장치를 넘어서야 한다. 내가 네고, 네가 내임을 이해해야 한다. 어제의 나 또한 너임을 깨달아야 한다. 지나간 어제의 내가 타인임을 알아야 한다.

내가 죽어서 사라진다는 것은 오늘이 어제가 됨과 다르지 않다. 인간은 매일 죽는다. 매순간 죽는다. 매순간 새로 시작한다. 매일 자신은 타인이 된다. 그러므로 내가 네인 것이다. 너는 단지 어제의 나일 뿐이다.

너는 나의 다른 버전일 뿐이다. 어제의 나 또한 나의 여러 버전들 중 하나일 뿐이다. 내가 너를 미워함은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를 미워함과 같다. 존재와 부재의 차이는 고작 그 정도다. 그러므로 죽음은 두렵지 않다.

기억을 상실한 사람은 남편, 혹은 아내를 타인으로 느낀다. 어제의 나는 기억속의 나이며 그것은 타인과 같다. 마찬가지로 타인은 어제의 나 혹은 내일의 나와 같다. 진정 나는 너고 너는 나다.

어제의 나와 내일의 나를 같은 나로 여기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이 자기정체성이다. 그 정체성의 빈곤 때문에, 그 정체성을 찾으려는 부단한 노력 때문에 나와 타인 사이에 거대한 간격이 생기는 것이다.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은 자기 일관성이며 공간에서의 일관성은 동일성과 시간에서의 연속성이다. 일관될 수 있다면 네가 내고 내가 네다. 그러한 나의 확대는 개인에서 가족, 부족, 민족, 국가, 세계인류로 전개된다.

자아가 미숙한 사람은 너를 의식하고 너를 적대하는 데서 겨우 나의 존재를 깨닫는다. 자기 정체성을 인식한다. 그것은 죽음을 두려워 하기 때문에 삶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과 같다. 직시하지 못하고 반사하는 것이다.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할 때 나의 존재를 실감한다. 그러므로 인격이 미성숙한 사람은 항상 누군가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야만 자신의 살아있음이 분명하게 자각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항상 불만을 터뜨리며 악플을 단다. 그리고 리플을 기다린다. 그 리플에 자기를 비난하는 내용이 있기를 기대한다.

그들은 매저키스터처럼 비난받았을 때, 공격당했을 때 짜릿한 존재감을 느끼는 것이다. 자신이 지금 해야할 일을 깨닫고 전율하는 것이다. 흥분하고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게 의존적이 된다.

인격이 미성숙한 자가 이 항상 불안해 하며 분노에 차 있는 것은 그 방법이 지금 이 순간 자기 존재를 느끼고, 삶의 무게중심을 확인하고 미래를 위하여 계획을 세우는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가족에 의존하면서 자기 존재를 느낀다. 그 안에서 포지션을 찾을 때 안정감을 느낀다. 자기 존재가 희미해졌을 때, 계획을 세울 수 없고 희망이 사라지고 보람이 없어졌을 때, 가족 안에서의 역할로 극복하는 것이다.

어려서 가족을 잃었다면? 적대하는 방법으로 자기 존재를 느끼려 하는 시도가 많아진다. 타인을 모두 적으로 설정하고 자신을 피해자로 규정하며 그 잠재한 적에 대항함으로써 계획을 얻고 가치를 얻고 보람을 얻으려 한다.

인간이 가정을 일구는 이유는 가정 안에서 역할을 가짐으로써 나의 존재가 뚜렷해지기 때문이다. 국가에 애국하려는 이유는 국가 안에서 역할을 가짐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느끼려는 것이다.

포지션을 잃을 때 역할을 잃고 역할을 잃을때 계획을 잃는다. 한국과 일본의 축구시합이 벌어져도 그것이 나와 상관없는 일로 된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된다해도 나와 상관없으므로 기쁨을 느낄 수 없다.

이런 식이면 모든게 허무 뿐이다. 존재의 본질을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상의 적을 만들어 적대하는 방법으로, 혹은 공동체 안에서 포지션을 얻는 방법으로 얻는 정체성은 진짜가 아니다. 그것은 동물적인 것이다.

진정한 자기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네가 내고 내가 네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어딘가에 소속되거나 혹은 누군가를 추종하는 방법을 버려야 한다. 누구를 적으로 설정하고 미워하는 방법도 버려야 한다.

가족도 이웃도 국가도 민족도 넘어서야 한다. 포지션과 역할을 버려야 한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진정으로 죽음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야 한다. 자기 안에서 그 모든 것을 갖추어야 한다.

공동체의 참된 의미는 타인에 의해 조종되지 않는 삶에 있다. 이념이나 강령이나 교리나 규범이나 제도나 시스템에 조종되지 말아야 한다. 죽음의 두려움이나 생존본능에 의해서도 조종되지 말아야 한다.

가족과 이웃들 사이에서의 편안함과 자연스러움에 의해서도 조종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들과 그들이 만들어낸 평판과 위신과 체면과 명성에 의해 길들여지지도 말아야 한다.

시류의 흐름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 우르르 몰려 다니는 나약한 군중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강한 개인이 되어야 한다. 강한 힘에 굴복하지 않고, 외부의 간섭에 맞서지 않고, 상대하지 않고, 의존하지 않아야 한다.

반대하지 않고 추종하지 않는 자기 삶을 가져야 한다. 진정한 공동체는 내 안에 있다. 네가 내고 내가 네임을 알아 죽음을 극복할 때 가능하다. 그럴 때 신과 하나가 되고 우주와 하나가 된다.

● 국가

국가는 정치적 의사결정의 한 단위다. 군대라면 위로 군단과 사단과 여단이 있는가 하면 아래로 대대와 중대와 소대가 있다. 독립군이라면 그 숫자가 백명이든 천명이든 독립적인 작전권을 가지는 자체로 하나의 군단이다.

군대의 계급은 병력의 숫자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작전의 단위에 의해 정해진다. 거느린 병사의 숫자와 관계없이 그 장이 최종적인 지휘권을 가진다면 곧 장군이다. 부하가 10명 뿐이라도 장군이다.  

그러므로 인구의 숫자와 무관하게 공동체의 의사결정의 단위로 국가의 정체성이 결정된다. 그런데 중국은 과연 하나의 국가일까? 서구에서 국가 개념은 나폴레옹 이후 근대에 도입된 개념이다.

그 이전에는 교황의 지배아래 기독교 문화권에 속해 있거나 공국이니 시국이니 자치국이니 연맹이니 하는 불안정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국왕의 여러 귀족들 중  한 명일 뿐이고 농노들은 자기의 소속이 어디인지 모르고 살았다.

국가에 세금을 내고 보호를 받는다면 곧 국가일텐데 그런 납세와 보호의 구조가 분명하지 않았다. 노예의 입장에서는 주인이 곧 국가이고 농노의 입장에서는 영주가 곧 국가다. 근대적인 관료제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동양에서도 진나라의 통일 이전에는 가문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았다. 김씨는 김국이고, 이씨는 이국이고, 박씨는 박국이다. 성씨별로 모여 살았으니까.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국가개념은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폴레옹의 정복 이후에 형성된 근대적인 국가개념을 무리하게 소급시켜 적용하곤 한다. 예컨대 고조선의 영토를 부풀려서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 영토를 무리하게 부풀릴수록 국가의 의미가 감소한다.

그 시대에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식의 국가 단위의 의사결정의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중국을 중국사 전체에 걸쳐 하나의 독립적인 국가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지 의심해야 한다.

지금 대륙을 지배하는 중국은 정복자 모택동이 일군 것이다. 청나라는 중국이 아니라 청나라일 뿐일 수 있다. 청나라의 중국지배는 일본의 조선침략과 같다. 모택동이 청나라의 정통성을 계승했다는 근거는 없다.

마찬가지로 청나라가 명나라를 계승했다는 근거도 없다. 실제로 청나라의 왕들은 그러한 정통성의 문제 때문에 두 번씩 즉위했다. 한번은 한족방식으로 왕이 죽으면 자동으로 아들이 계승한다.

그러나 이는 불완전한 즉위다. 청나라 왕들은 몽골의 초원에 족장들을 소집시켜 놓고 요식행위지만 민주적인 절차를 거쳐 지배자로 추인받는다. 청나라 왕은 고원의 족장들이 추인해야 비로소 왕이 되는 것이다.

이는 중국의 정치적 의사결정구조가 불안정했다는 의미다. 실제로 청나라와 러시아의 네르친스크조약은 족장 대 족장의 타협 방식으로 작성되었다. 이는 천자가 천하를 지배한다는 한족의 관념에는 없는 방식이다.

조선이 명에 사대했다거나 청에 복속되었다거나, 조공을 바쳤다 하는 것은 지금의 관념으로 해석해서 안 되는 우스꽝스러운 절차에 불과한 것이다. 민주의 삶과는 상관이 없는 권력자와 또다른 권력자의 거래일 뿐이다.

한국과 중국의 준엄한 조약이 아니라 봉건 지배자 인조 이종과 여진족 족장 누르하치의 우스꽝스런 행사일 뿐이다. 독재자들이 자신의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만들어놓은 속임수에 현혹되어서 안 된다.

봉건왕조의 민중의 동의절차 없이 임금은 즉위하면 자동으로 추인된다. 박정희도 쿠데타만 해놓고 자동으로 추인받고자 한다. 전두환도 쿠데타만 해놓고 자동으로 추인된 셈으로 치려고 한다.

속임수다. 연산군과 광해군이 폐출되었듯이 당연히 퇴출된다. 독재자 박정희와 전두환의 이름 뒤에 대통령 세글자를 쓴다면 역사에 대한 모독이다. 독재자라는 표현은 그 뒤에 대통령이라는 표현을 붙일 수 없다는 의미다.

그것은 개새끼 뒤에 선생님이라고 존호를 붙이는 일 만큼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태정태세문단세는 알아도 역대 조선 총독의 이름을 학습하지는 않듯이 그것은 제 얼굴에 침 뱉는 잘못된 관행인 거다.

황룡사 구층탑의 각 층은 우리나라를 위협하는 주변의 여러 오랑캐를 다스린다는 의미가 있다. 거기서 중화와 오월은 별개로 구분되어 있다. 당시만 해도 중국을 하나의 정치적 실체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대한민국의 정치적 실체를 백프로 인정할 필요가 없다. 한국과 일본의 지식인이 대화할 때 항상 대두되는 문제가 있다. 일본의 지식인들은 국가개념에 얽매이지 않고 코스모폴리탄의 포지션을 취하는 것이다.

일본은 자민당의 50년 독재에 오염되어 민주주의가 질식하고 있다. 이에 부끄러워진 일본인들은 스스로 일본인임을 부정하고 ‘촌스럽게 왜 이러셔? 나는 일본인이 아니라 세계인이라구’하며 반격하는 것이다.

그들은 세계인을 자처하는 방법으로 일본의 과거 책임에서 교묘하게 벗어나려 한다. 마찬가지로 수구의 삽질이 계속된다면 한국의 지식인들은 부끄러워진 나머지 ‘촌스럽게 왜이래. 난 코스모폴리탄이라구’ 하며 반격할 거다.

국가의 정체성은 그만치 허약한 거다. 국가에 대한 정신적 의존을 버려야 한다. 국가는 결코 당신이 가진 가능성의 전체를 담보할 수 없다. 당신은 국가를 초월할 때 오히려 당신의 잠재한 능력을 더 잘 발휘할 수 있다.

● 투쟁

투쟁은 생태계 환경 안에서 건강한 유전자를 남기고 약한 유전자를 도태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건강한 긴장을 조성하려는 것이다. 깨어있게 하는 것이다. 언제라도 준비된 상태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인간의 조상은 본래 원숭이였다. 그 나무 위에서 자신이 나무 위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원숭이는 모두 죽었다. 유전자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까불다가 추락하여 죽었다. 긴장하고 깨어있지 않으면 안 된다.

투쟁은 적을 패배시키고 내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극을 찾는 것이다. 극점과 비교하여 자신의 현재위치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투쟁에서의 패배를 슬퍼할 일이 아니요 승리를 뽐낼 일도 아니다.

투쟁은 다만 부단히 노를 저어서 혈액을 순환시키는 것이다. 상어는 허파가 없기 때문에 움직임을 멈출 때 죽는다. 호흡하지 못해서 죽는다. 그러므로 상어는 잠들지 않는다. 멈추지 않는다. 좁은 수족관에 가두면 죽는다.

비행기가 자신이 공중에 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면 엔진이 꺼질 때 죽는다. 새는 언제라도 자신이 공중을 날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투쟁은 사회의 긴장이며 건강한 깨어있음이다.

그러므로 진정 깨어있을 수 있다면 투쟁은 필요하지 않다. 경쟁은 필요하지 않다. 우리가 깨어있지 못하기 때문에, 내버려두면 곧 잠들고 말기 때문에, 생존본능의 작용에 의해 투쟁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투쟁은 생태계 원리에 의해 강요된 긴장이다. 인간은 이상에 의해 그 강요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온전히 깨어있다면 투쟁하지 않고 경쟁하지 않고도 그 투쟁과 경쟁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투쟁은 잠재된 위험을 증폭시켜 드러낸다. 위험의 존재를 공동체의 성원 모두가 인지하고 대응하게 한다. 인간이 투쟁을 회피한다면 문명의 치명적인 위험들은 간과될 것이다. 환경이 변화할 때 일제히 몰락할 수 있다.

이라크 전쟁의 발발은 단지 미국의 야만성이 폭로된 사실을 넘어 지구의 석유자원이 고갈되고 있다는 위험의 예고일 수 있다. 이라크전을 통해서 인류는 석유가 부족해졌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만약 평화주의자만 있다면, 아무도 투쟁하지 않는다면, 전혀 경쟁하려들지 않는다면 어떤 일의 중요한 정도를 판단하지 못한다. 치명적인 위험에 대한 경계보다는 사소한 일에 몰두하게 된다.

신변잡기적이고 지엽말단적인 일상의 관심에 몰두하는 쇄말주의에 빠지고 만다. 사소한 일에만 분노하게 된다. 존재의 본질을 놓치고 만다. 그러므로 거룩한 분노가 있어야 한다.

외부에서 침략자가 서성거린다. 성격이 날카로운 자가 싸움을 걸어 침입자의 존재를 알리고 공동대응하게 한다. 공연히 시비를 걸어서 문제를 악화시켰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의 거친 본성이 인류를 진화시킨 것이다.

인간이 화를 내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분노했을 때라야 문제의 본질을 직시하게 된다. 그 문제가 대충 덮어질 수 없는 문제임을 깨닫게 된다. 문제의 심각성을 알아채는 것이다. 때로는 분노가 사람을 구한다.

기업의 작은 환경파괴에도 크게 분노하여 가산을 탕진해 가며 소송을 불사하는 사람이 있다. 지율스님처럼 드러눕는 사람이 있다. 바로 그러한 고집쟁이의 용기가 인류를 구한다. 작은 환경파괴가 큰 환경파괴로 옮아가기 전에.

기업의 작은 불성실에 크게 분노한 소비자의 적극적인 고발이 기업의 불량률을 줄인다. 참된 기업이라면 과자에 이물질이 들었다고 폭로한 까다로운 소비자에게 보상해야 한다. 회사의 잠재적인 리스크를 줄여준 거다.

가장 까다로운 입맛을 가진 고객이 그 식당의 맛의 수준을 높인다. 주는 대로 먹는 고객은 진짜가 아니다. 가장 높은 목표를 가진 가장 까다롭고 고집센, 결코 타협하지 않는 한 명의 철학자가 인류의 지적 수준을 높인다.

그러므로 투쟁을 포기해서 안 된다. 경쟁을 포기해서 안 된다. 분노를 포기해서 안 된다. 각을 세우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요도를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깨어있어야 한다.  

분노하기 때문에, 결코 용서하지 않기 때문에, 미봉책이 아니라 근원적인 해결책을 요구하는 것이다. 노예가 참지 않기 때문에 해방되는 것이다. 소비자가 상품의 하자를 고발하기 때문에 경쟁력이 강화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사회의 가장 약하고 가장 힘없는 사람이 그 사회에 기여하는 방법은 참지 않고 요구하는 것이다. 가장 약하고 가장 힘없는 당신의 용기있는 저항이 우리 사회를 진보하게 한다. 전태일처럼.

사회의 모든 약자와 소수파는 단결하여 강한 물리력의 힘에 맞서지 않으면 안 된다. 인류의 진정한 소통은 힘이 대등할 때 한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서로가 대등할 때 진정한 평화가 얻어진다.

권력의 폭력에 지혜로 맞서고 자본의 금력에 문화로 맞서야 한다. 도처에서 교착을 유발하여야 한다. 다양성과 복잡성을 보존해야 한다. 사회가 획일화 되는 것이 인류의 진정한 위험이다.

가장 힘없고 가장 약하고 가장 낮은 당신이 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그것 뿐이다. 절대로 참지 않기, 절대로 포기하지 않기, 절대로 굴복하지 않기, 그럴 때 사회는 당신에게 진정 감사하게 된다.

● 사회

인간은 사회적 존재다. 인간이 미완성의 존재이며 가능성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완성되어야 할 나의 나머지 부분들은 사회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나의 정체성이며 그것은 자기동일성과 연속성이다.

그 나를 나로 여기게 하는 정체성의 근거인 자기동일성과 자기연속성을 펼쳐보일 무대가 곧 사회다. 동일성은 공간에서 가정에서의 나와 직장에서의 나를 통일함이며 연속성은 시간에서 어제와 나와 내일의 나를 통일함이다.

현재의 나만 나가 아니다. 어제의 나와 내일의 나로 전개되는 나가 진짜 나이다. 그것이 자기 연속성이다. 그 어제의 나와 내일의 나는 사회에 전개한다. 사회를 부정한다는 것은 어제의 나와 내일의 나를 부정한다는 것이다.

도시와 마을과 거리와 그 사이를 오고가는 인간들의 군집이 사회인 것은 아니다. 사회가 단순히 무리나 혹은 공동체만을 의미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사회성의 의미가 인간의 집단행동에 있다고 본다면 착각이다.

사회는 내가 태어나고 내가 만들어온 과정 그 자체이다. 인간은 자연환경에서 태어나 사회환경 속에서 성장한다.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나를 나로 인식하게 하는 나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많은 부분이 사회에서 비롯된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의식, 민족의식, 여자를 여자로 남자를 남자로 여기게 하는 성적 정체성은 모두 사회로부터 얻어진 것이다. 어른을 어른으로 여기고 아이를 아이로 여기고 아내를 아내로 남편을 남편으로 여기는 것이 정체성이다.

이러한 자기규정의 정체성은 공동체의 집단행동을 떠나서도 존재한다. 설사 무인도에 고립되어 있더라도 사회성은 존재한다. 이곳에서의 나와 저곳에서의 나를 통일하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통일하게 하는 정체성이 있기 때문이다.

물고기는 물을 부정할 수 없고, 새는 하늘을 부정할 수 없고, 원숭이는 나무를 부정할 수 없고 연기자는 무대를 부정할 수 없다. 인간의 삶의 목적은 이야기를 완성하는 것이며 사회는 그 이야기를 펼쳐보일 무대인 것이다.

사회는 나를 드러내고 나를 입증하고 나를 펼쳐내어 나를 완성시킬 무대이다. 사회의 부정은 방송국이 청취자를 부정하는 것이다. 자동차가 도로를 부정하는 것이며 기차가 레일을 부정하는 것이다.

내가 내 안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내 밖에 더 많은 내가 있다. 내 안의 나는 오히려 작은 것이며 내 밖의 내가 오히려 뚜렷하다. 정체성은 그 내 안의 나와 내 밖의 나를 연결하는 것이다.

내 안의 나는 기분에 따라 변덕을 부리는 불안정한 것이며 내 밖의 나는 직업과 평판에 따라 오히려 확고하다. 내 안의 나는 담배 한개비의 유혹, 음식 한 접시의 유혹에 무너지지만 내 밖의 나는 오히려 의연하다. 할 일을 해낸다.

그러므로 누구나 사회주의자이다. 사회주의의 본질적 의미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은 자기부정으로 되기 때문이다. 단지 그 사회라는 무대를 좁게 혹은 넓게 이용하는 차이에 따라 진보 혹은 보수의 태도로 나타날 뿐이다.

젊은이들은 자기 앞에 주어진 무한한 가능성 때문에 되도록 그 무대를 넓게 쓰려는 것이며, 다살은이들은 주어진 가능성을 모두 소진했기 때문에 그 무대를 좁게 쓰면서 이미 얻어놓은 작은 성과를 보호하려는 것이다.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이도 결국 사회적인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주의의 본질은 부정하지 못한다. 진정한 반사회적 인물이라면 범죄를 저지르거나 완벽한 은둔과 고립을 택할 것이다.

산 속의 은자도 그 안에 작은 사회를 건설해놓고 있다. 모든 자기표현은 결국 사회적 태도이다. 사회주의 반대는 반사회적 행동이며 그것은 범죄이거나 자폐증이며 그러한 자도 내면에는 사회적 표현의 열망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자나 혹은 자본주의 옹호자가 사회주의의 어떤 주장을 부정할 수는 있어도 본질을 부정할 수는 없다. 어떤 주의든 그것은 사회적 표현의 한가지 방식일 뿐이며 그런 표현들은 사회주의가 진보하는 과정의 일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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