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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神)

모든 존재는 불완전하다. 불완전한 이유는 본래의 완전함으로 부터 연역하여 전개되어 왔기 때문이다. 고이 접혀 있던 완전한 것이 펼쳐지면서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세상과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관계의 상대성 때문이다. 모든 관계맺는 것은 상대적이며, 모든 상대적인 것은 불완전하다. 관계맺기 이전의 절대성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펼쳐지고 노출되기 이전의 온전한 상태로 되물리지 않으면 안 된다.

아기는 완전하다. 세상과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상대성이 아닌 절대성의 세계다. 그러나 나이를 먹는 만큼 불완전해진다. 세상과 관계를 맺으면서 세상이 그 아기 속으로 침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관계의 그물 속에 존재한다. 관계맺으므로 불완전하다. 이쪽과 관계를 맺으면서 동시에 저쪽과 관계를 맺으므로 불완전하다. 이쪽 저쪽에 양다리를 걸쳤으므로 불완전하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불안정하다. 흔들린다. 관계의 그물 속에서 이리저리 떠밀린다. 휘청대고 허둥대면서 그 불안정을 극복하기 위하여 더 많은 불완전의 바다 속을 항해한다. 넘어지고 일어나며 또 비틀대며 나아간다.

신(神)은 세상의 모든 관계가 성립하기 이전 본래의 순수한 상태이다. 그것은 완전성의 세계다. 완성된 세계다. 전일한 세계다. 관계를 끊은 세계다. 절대성의 세계다. 신(神)은 모든 것을 품어안는 모든 것의 자궁이다.

기독교나 여타 종교의 신(神) 개념에 붙잡힌다면 실패다. 인간에게는 본래 자연의 신성(神聖)을 직관하는 능력이 있다. 종교가 묘사하는 인격신과 무관하게 자연의 완전성 그 자체를 인식하는 능력이 인간에게 있다.  

인간의 사유는 그로부터 연역하는 것이다. 그것이 직관이다. 어떤 사건이나 사물을 인식하고 판단할 때 머리 속에 가상의 완전한 형태를 그려놓고 그 완전의 경지와 비교하여 그 사물의 현위치를 판단하는 것이 직관이다.

인간의 일상적인 판단의 90프로는 직관이다. 문제는 직관적 판단을 타인에게 설명하고 전달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인간은 지식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직관으로 판단한 것을 지식을 동원하여 이야기를 짜맞춘다.

이야기가 성립되어야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직관적 판단을 믿지 않고 어설픈 논리를 끌어들여 핀잔받지 않도록 설득력 있는 이야기구조를 조직하려다가 잘못된 판단을 내리게 된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 길이 옳다는 확신이 드는 때가 있다. 그것이 직관이다. 그럴 때 당신은 마음 속에 완전성을 그리고 있으며 그 완전한 세계와 비교하여 판단한 것이다. 그러한 자신의 직관을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철학의 50개념은 연역하여 펼쳐진 것이다. 자동차를 분해하여 부품을 따로따로 구분해 놓은 것이다. 이를 모두 조립하여 본래의 완전한 자동차의 모습으로 환원시키면 바로 그것이 신(神)이다. 신성(神聖)이다.

인간의 삶에 시시콜콜 개입하여 잔소리를 늘어놓는 종교의 인격신을 부정할 수는 있지만 직관력의 원천인 신성(神聖) 개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인간의 모든 판단은 본래 직관이며 직관은 신성의 나침반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 물질

존재의 기본은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 하나로 한줄에 꿰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물질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 전부 설명할 수 있다. 정상에서 전모를 볼 수 있다. 대통일이론을 얻을 수 있다.

작용했을 때 반작용 정도에 차이가 있다. 이는 밀도차에 기인한다. 존재는 밀도차에 따라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다섯 모습을 가진다. 질이 가장 빼꼭하게 쌓여 밀도가 높은 상태이고 양은 흩어져서 밀도가 낮은 상태이다.

그리고 이들 다섯 가지 단계의 사이에 질량보존의 법칙과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 성립한다. 작용 반작용 법칙에 따라 물질에 작용시켰을 때 그 작용을 수용하는가 아니면 반작용하는가의 YES와 NO가 판정된다.

YES 판정의 반복성, 연속성, 가역성, 분할성, 순환성이 질량보존의 법칙을 성립시키고 그 반대편에서 NO 판정의 비반복, 불연속, 비가역, 비분할, 비순환성이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을 성립시킨다.

이들의 구성이 전자제품 회로기판의 복잡한 회로처럼 종횡으로 조직되며 존재의 메커니즘을 구성한다. 여기서 메커니즘을 어떻게 이해하는냐에 따라 기계론, 결정론적 관점과 상대론, 양자역학적 관점을 얻을 수 있다.

기계-결정론적 관점은 시계가 태엽에서 바늘까지 일직선으로 힘의 전달이 일어나듯 단일구조를 가진다. 그러나 이는 작용 반작용에서 수용과 반작용의 YES와 NO가 판정된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뉴튼 이래의 기계-결정론적 사고는 존재의 메커니즘에서 NO 판정을 받은 비반복, 불연속, 비가역, 비분할, 비순환성의 영역 곧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 작용하는 세계를 간과한 것이다. 이는 존재의 절반만 본 것이다.

투수가 던진 공이 타자의 방망이와 대결한다. 이때 작용과 반작용의 힘이 50 대 50으로 팽팽하면 공의 운동은 0이 되어야 한다. 공은 타자의 방망이에 맞는 순간 그 자리에 멈추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타자의 방망이가 뒤로 밀려 파울볼이 되거나 아니면 투수의 힘과 타자의 힘이 합쳐져서 두 배로 멀리 날아가는 홈런이 된다. 50 대 50의 교착은 0으로 상쇄되는 것이 아니라 100으로 합쳐지는 것이다.

완전히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 상대론과 양자역학의 세계이다. 이는 우리가 물질을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달의 뒷면을 보지 못하듯이 물질의 이면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전자기판의 회로를 이동하는 전류는 정류기를 통과한 직류다. 기존의 기계-결정론이 지배하는 인과율-원자론-요소환원주의 세계는 직류가 아니라 교류다.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은 존재가 직류임을 설명한다.

태엽이 바늘을 움직일 뿐 바늘이 태엽을 움직일 수는 없다. 바늘을 거꾸로 돌리면 태엽이 감겨질까? 천만에! 태엽과 바늘 사이에 진자가 있기 때문에 태엽을 풀어 바늘을 돌릴 수는 있어도 바늘을 감아 태엽을 도로 감을 수는 없다.

상대-양자역학의 세계는 기계-결정론이 간과한 시계 속 진자의 역할 곧 존재의 일방향성을 수용하고 있다. 상대성이라는 표현이 오해를 낳는다. 상대성 이론은 실로 광속의 절대성을 주장하고 있다.

광속의 절대성이 바로 시계의 진자인 것이다. 시계 태엽을 세게 감으면 시계바늘이 빨리 움직일까? 천만에! 진자가 빨리 움직이지만 대신 더 많은 거리를 움직여서 도로 원위치 시킨다. 속도는 일정하다.

상대성이론은 존재의 이면에 절대상수가 있음을 해명한다. 전자를 광속 이상으로 가속시키려 하면 추가로 투입된 에너지가 전자의 스핀 속에 숨어버린다. 질량이 증가하면서 대신 속도는 제자리다.

상대성은 이러한 존재의 절대성을 해명하고 있으며 그 절대성이 시계의 진자가 움직이는 거리의 상대성 속에 숨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양자역학은 이러한 에너지의 갇힘 현상을 해명하고 있다.

물질을 이해함은 존재가 질, 입자, 힘, 운동, 량이라는 다섯가지 밀도차를 유발하는 구성에 따라 상대성과 절대성, 쌍방향성과 일방향성, 교류와 직류, 질량보존의 법칙과 엔트로피의 법칙이 성립하는 메커니즘을을 이해하는 것이다.

  

● 실존

본래 실존은 ‘존재’ 개념을 메커니즘적으로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존재’ 개념에서 이미 다루었다. 현대철학에서 말하는 실존은 거기에 인간의 삶을 반영한 것이다. 의미가 달라졌다.

인간의 삶을 존재론의 관점에서 풀어낸 것이 실존이다. 인간의 삶을 메커니즘적으로 보는 것이다. 존재는 공(空), 존(存), 재(在), 사(事), 상(象)이 있다. 공(空)으로 갈수록 명목의 존재이며 상(象)으로 갈수록 역할의 존재이다.

존재는 명목의 존재와 역할의 존재로 구분된다. 명목의 존재는 역사, 진리처럼 분명히 있지만 ‘요거다’ 하고 구체적으로 적시하기 어렵고 역할의 존재는 그림자처럼 구체적으로 적시할 수 있지만 실체가 없는 것이다.

빛은 실제로 있지만 그림자는 실제로 없다. 그림자는 빛의 결핍을 의미할 뿐 빛이 사라지면 그림자도 사라진다. 존재는 양자역학을 연상시킨다. 명목을 추구하면 구체성이 떨어지고 구체성을 추구하면 명목이 약해진다.

존재를 하나로 통일하여 전체적으로 이해하려 하면 점점 추상화 되고 구체적으로 낱낱이 열거하면 허무해진다. 소리는 분명히 귀에 들리므로 적시하여 구체적으로 나타낼 수 있지만 소리를 붙잡아 현미경으로 볼 수는 없다.

그림자는 가둘 수 없다. 소리는 가둘 수 없다. 냄새나 맛 또하 배고플 때와 배부를 때가 달라서 믿을 수 없다. 반면 진리나 국가는 구체적으로 나타낼 수 있지만 분명히 있다. 확실한 것은 모호하고 모호한 것은 확실하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을 손과, 발과, 몸과, 머리들의 집합으로 설명하면 구체적이나 동물과 다름없으니 허무해진다. 이 경우 질문의 의도에서 벗어난다. 인간을 포유류 종으로 설명해서 안 된다. 그렇다면 외계인은 뭔가?

대신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보고,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할 수 있는 인격체로 보면 인간의 사회적 기능을 잘 설명할 수 있지만 대신 구체성이 떨어진다. 양자역학에서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은 인간의 실존에도 적용된다.

유물론적 관점으로 보면 인간의 인격성이 실종되어 허무해지고 유심론적 관점에서 보면 영혼개념이 등장하여 혼란을 초래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실존의 진정한 개념이다. 양자를 통일하는 끈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역할로 보는 것이며, 기능으로 보고, 일로 보고, 사건으로 보고, 테마로 보고 소통으로 보는 것이다. 인간은 소통의 일 단위다. 그러므로 소통할 때 나는 뚜렷해지고 소통하지 못할 때 나의 존재는 빛 바래어지고 만다.

소통할 수 있느냐다. 여기서 이성 개념과 인권 개념, 존엄성 개념, 영혼 개념이 유도된다. 소통할 수 있으므로 인간은 명목적 존재이다. 그럴 때 인간은 죽어도 죽지 않는다. 이름이 남아있는 한 인간은 살아있다.

우리가 2천년 전 예수의 의도대로 움직일 때 그 영혼과 소통하는 것이다. 여기서 영혼의 의미는 저급한 귀신이나 요정 따위의 차원이 아니라 시공을 초월한 소통의 의미다. 영혼이 있다는 것은 시공을 초월한 소통이 가능하다는 거다.

실존의 진정한 의미는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몸과 손과 발과 모아둔 재화에서 나의 존재를 찾으려 할 때 나의 존재는 도리어 희미해지며 나의 인생 전체를 통일하는 테마에서 찾으려 할 때 뚜렷해진다는 데 있다.

이야기를 품지 않은 삶은 죽은 삶이다. 나의 인생 전체를 꿰뚫어 통일하는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거기서 자기 동일성을 얻는 것이며 그것으로 나의 정체성을 삼을 수 있다. ‘왜 사는가?’ 하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김춘수 시인의 꽃을 연상할 수 있다. 아무도 그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을 때 그 존재는 빛 바래어지고 만다. 존재하지 않음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존재는 관계속의 존재이며 관계를 맺을 때 나의 존재는 뚜렷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파편화된 부스러기와 같은 나의 삶을 통일할 테마를 얻고, 일관성을 얻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근원의 분노가 있어야 한다. 내가 세상과 대척점을 세울 지점을 얻어야 한다. 그리고 완성해야 한다. 헛살지 않고 참살기 위하여.

● 인생

왜 사는가? 그리던 그림 마저 그리기 위해서다. 완성하기 위해서다. 태어날 때 붓을 쥐고 태어났다면 마땅히 화가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그리던 인생이라는 이름의 그림을 마침내 완성시켜야 한다.

왜 사는가? 벌여놓은 일 수습하기 위해서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일은 벌어져 있었다. 나는 신과 존재와 생명과 자연과 물질 위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진리와 세계와 진보와 역사와 문명의 현장을 목격했다.

내가 발을 디디고 선 그 자리에서 내가 목격한 그 현장으로 나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신(神), 존재, 생명, 자연, 물질은 내가 디디고 선 자리다. 진리, 세계, 진보, 역사, 문명은 내가 목격한 현장이다.

다가가야 한다. 그리고 증언해야 한다. 그 디디고 선 자리와 그 목격한 현장 사이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세계가 인생이라는 이름의 드라마다. 그것은 하나의 그림이다. 그 그림 완성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화가는 붓을 손에 쥐고 태어난다. 재벌은 돈을 입에 물고 태어난다. 그때 맨주먹으로 태어난 내 손에 쥐어져 있었던 것은 나다움이다. 태어날 때 나다움을 쥐고 태어났으므로 이제 나다움을 완성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왜 사는가 하는 질문은 왜 결혼 하는가? 왜 가족을 일구는가? 왜 친구를 사귀는가? 왜 출세를 꿈 꾸는가? 왜 승리를 바라는가? 왜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가? 하는 질문으로 확대될 수 있다.

모두 부질없다. 산만할 뿐이다. 인생에서는 진정한 친구 셋으로 충분하다. 하나는 파트너고 하나는 증언자고 하나는 계승자다. 세 친구와 더불어 멋진 그림 하나 그려놓고 끝내는 것이 인생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인생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자기다움을 안다는 것이다. 뻔뻔한 성격으로 태어났다면 그 기준에 맞추어 일관성을 얻어야 한다. 밀어붙여야 한다. 섬세한 성격으로 태어났다면 그 기준에 맞추어 그림을 그려야 한다.

인간은 부끄러움과 떳떳함, 어색함과 자연스러움이라는 나침반을 가진다. 이것은 내가 손에 쥐고 태어난 붓이다. 인간에게는 식욕과 성욕, 호기심과 호승심, 모험심과 탐구심을 가진다. 이것은 내가 가지고 태어난 물감이다.

인생은 하나의 그림이다. 왜 사는가? 그 그림 기어이 완성시키기 위해서. 인간 개념은 그 그림 그려낼 캔버스다. 실존 개념은 그 그림의 테마다. 자아 개념은 그 그림의 동기다. 일상 개념은 그 그림 그려낼 나날의 시간들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되게 사는 것인가? 나답게 사는 것이다. 내게 주어진 온갖 욕망이라는 재료를 활용하여 부끄러움과 떳떳함이라는 조리도구로 요리하기다. 그렇게 인생이라는 이름의 멋진 소설 한편 쓰고 가는 것이다.    

● 정신

정신은 차리는 것이다. 차례상 차리듯이 차려야 한다. 차렷! 구호에 맞추어 차려야 한다. 상 차리듯 차려내야 한다. 무엇을 차리는가? 정신차리고, 의식차리고, 의지차리고, 의사차리고, 감정차려야 한다.

정신은 의식과, 의지와, 의사와, 감정을, 차리는 상(床)이다. 마당이다. 장(場)이다. 영역이다. 공간이다. 그것들을 불러들여 띄워놓을 메모리다. 의식은 긴장이다. 긴장은 집중한다는 것이다.

의식은 의지와 의사와 감정이 하나의 중심을 보고 있도록 정렬시킨다. 그 방법으로 집중한다. 정신을 산만하게 하는 다른 잡다한 신호들을 무시하고 여기서 내려질 하나의 신호를 주목하게 한다.

의지는 정신의 지향성이다. 정신은 가만히 있어도 특정한 방향을 바라보도록 세팅되어 있다. 가만 있으면 심심해져서 뭔가 건수를 찾아내게 된다. 로보트는 할 일이 없으면 동작을 멈추지만 의지는 그래도 무언가 한다.

의사는 구체적인 진행이다. 스케줄에 맞추어 행동으로 옮기는 것의 의사다. 감정은 그 행동의 결과를 평가하는 피드백이다. 감정에 맞으면 잘 행동한 것이고 감정에 맞지 않으면 잘못 행동한 것이다.

정신의 의미는 이러한 마음 속의 메커니즘 구조를 일률에 통제할 수 있는가이다. 만약 정신을 차렸다면 통제할 수 있다. 그러나 얼빠졌다면 통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정신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정신차려야 한다. 정신차리지 않기 때문에 잠재의식이 억압하고, 본능이 조종하고, 습관이 따라붙고 진부한 편견과 고정관념과 타성이 방해하는 것이다. 정신차린다면 완벽하게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다.

버려야 한다. 타고난 본능을 끊어내야 한다. 과거의 체험에 따른 트라우마를 극복해야 한다. 열등감 버리고, 눈치도 버리고, 모두 버려야 한다. 그것은 정신차리지 않았을 때 과거에 했던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는 것이다.

마음에도 관성의 법칙이 있다. 인간의 뇌는 정신에서 특별히 새로운 명령이 내려오지 않으면 과거에 했던 짓을 반복하게 세팅되어 있다. 그것이 고정관념이고 잠재의식이고 습관이고 타성이고 콤플렉스다.

그러므로 부단히 정신을 리셋할 수 있어야 한다. 언제든지 ‘내가 지금 왜 이러고 있지?’,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지?’하고 각성하기다. 리셋을 눌러서 정신을 원위치 시키는 것,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이 깨달음이다.

모든 희망과, 야심과, 목적과, 계획과, 의도를 버리고 온전히 백지상태로 되물려야 한다. 무(無)로 되돌려야 한다. 순수해져야 한다. 그것이 정신차리는 것이다. 내 마음의 뜰에 하얀 원고지 한 장 펼치기다.

● 깨달음

깨달음은 완전성을 깨닫는 것이다. 조주선사가 말한 ‘뜰앞의 잣나무’는 존재의 완전성 그 자체를 의미한다. 그것은 정상에서 본 경지다. 정상에 서면 전모가 보인다. 깨달음은 내 안에 그러한 완전성을 구축하고 그로부터 연역하기다.

그것은 풀어내는 것이다. 밑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것이 아니라 실타래를 풀듯 위에서부터 차근차근 풀어내려오는 것이다. 육조 혜능(慧能)이 말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의 경지가 그러하다.

깨달음은 산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산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내리막길 걷듯 저절로 술술 풀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귀납이 아니라 연역이다. 큰 그물의 벼리를 잡아당기면 전부 따라오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고흐의 그림을 본다면, 혹은 모짜라트의 음악을 듣는다면 그런 느낌을 가질 것이다. 밑에서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큰 바위를 굴리듯 주르륵 풀어내리는 느낌.

요즘 가수들이 즐겨 부른다는 발라드 따위에는 그러한 느낌이 없다. 곡의 무게중심이 없다. 묵직하게 따라오는 것이 없다. 굳건한 버팀목이 없다. 그것은 순전히 나열식이다. 이것저것 차례로 줏어섬기는 것이다.

줏대가 없다. 중심과 주변의 구분이 없다. 조각배가 파도에 이리저리 떠밀리듯 공허할 뿐이다. 끝단을 보여주지 못한다. 정상 정복의 쾌감을 주지 못한다. 마침내 해냈구나 하는 오르가즘이 없다.

그것이 있어야 한다. 묵직하고 굳건하고 믿음직한 그것이 있어야 한다. 기둥줄이 있어야 한다. 테마가 있어야 한다. 스타일이 있어야 한다. 깨달음은 내 마음에 그것을 세팅하는 것이다. 프로그램 깔듯 깔아주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완전성이 있다. 뿌리에서 줄기와 가지와 잎을 거쳐 꽃과 열매까지 1 사이클이 있다. 탄생에서 죽음까지 입력에서 출력까지 인풋에서 아웃풋까지 존재의 1 사이클이 있다. 그것을 꿰뚫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하나의 작은 풀잎에도 있고, 우당탕 퉁탕 흐르는 계곡에서 지류를 거쳐 본류와 합쳐 마침내 큰 강이 되고 바다가 되는 물줄기에도 있다. 산에도 있고 들에도 있고 역사에도 있고 삶에도 있다.  

그것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 감응할 수 있다. 그래야 자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래야 직관할 수 있다. 그래야 자연스러울 수 있다. 그래야 비워낼 수 있다. 그래야 순수할 수 있다.

정신차리기 위해서다. 나답기 위해서다. 명목을 얻기 위해서다.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다. 조종되지 않기 위해서다. 자연스러워지기 위해서다. 그렇게 온전히 끊어낼 때 희망과 야심을 말소하고 하얗게 표백된 원고지 한장 얻는다.  

존재론과 인식론이 있다. 존재의 완전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가 인식론에서 학습한 사상, 지혜, 소통, 지식, 언어의 정보들에서 본래의 진리, 세계, 진보, 역사, 문명을 끌어내는 것이다.

모든 사상을 본래의 진리로 되돌리는 것, 모든 지혜를 근원의 세계로 되돌리는 것, 모든 소통을 인류의 진보와 통하게 하는 것, 모든 지식을 인류의 역사와 일치시키는 것, 모든 언어를 인간의 문명과 이어주는 것이다.

존재론에서는 인간 내부에서 촉발한 이성, 존엄, 사랑, 자유, 욕망이라는 동기들에서 본래의 신, 존재, 생명, 자연, 물질을 끌어내는 것이다. 본래 거기서 연역되어 나왔으므로 그 자리로 되돌려주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이성에서 신(神)의 완전성을 보고, 인간의 존엄에서 세계의 존재를 보고, 더 나아가 사랑에서 생명을 보고, 자유에서 자연을 보고, 욕망에서 물질의 보는 것이다. 말단에서 근본을 보는 것이다.

● 가치

가치는 의미의 밀도다. 의미가 수레에 실어 전달하는 것이라면 가치는 그것을 심층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그 심층에는 핵(核)이 있다. 심(心)이 있다. 연필심과 같은 심이다. 변재(邊材)가 아닌 심재(心材)의 그 심(心)이다.

심(心)은 변덕스런 마음이 아니라 핵심(核心)이고 중심(中心)이다. 흔들리지 않는 센터다. 충성 충(忠)자 속에 든 심이다. 거친 파도 뚫고 대양을 항해하는 거함의 바닥짐(ballast)과 같다. 밑에서 중심을 잡아준다.  

모든 존재는 심과 날을 가진다. 가치는 심이고 의미는 날이다. 날은 칼날과 같고 날개와도 같다. 센터가 있고 그 센터에서 사방으로 연결하는 링크가 있다. 센터가 심이고 링크가 날이다. 센터가 가치고 링크가 의미다.

어떻게 가치는 중심을 잡을 수 있을까? 둘 중 하나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몰아주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는 내부에 작은 저울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수준기가 있고 조속기가 있다. 평형계가 있다. 그것이 심이다.

가치는 갈림길에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는 것이다. 가치는 진위(眞僞) 중에서 진(眞)을 선택한다. 선악(善惡) 중에서 선(善)을, 미추(美醜) 중에서 미(美)를, 주종(主從) 중에서 주(主)를, 성속(聖俗) 중에서 성(聖)을 선택한다.

가치는 값이며 값은 ‘같이 선다’는 뜻이다. 물물교환을 할 때 사냥꾼의 모피 한장과 어부의 물고기 한 마리를 교환한다면 사냥꾼이 모피 한장을 바닥에 놓을 때마다 어부도 물고기 한 상자를 내려놓아야 한다.  

이때 사냥꾼이 모피를 탑처럼 쌓으면 어부도 생선상자를 쌓아야 한다. 그것이 선다는 뜻이다. 값이란 같이 서는 것이다. 사냥꾼의 모피상자와 어부의 생선상자가 점점 쌓여서 일어선다는 뜻이다. ‘A면 B다’의 교환조건 성립이다.

그것은 작용과 반작용이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의 내부에는 작은 저울이 있어서 그 밸런스의 평형여부를 판단한다. 이때 평형이 맞지 않고 어느 한쪽으로 기울면 몰아주기가 성립한다.

때리는 쪽과 맞는 쪽의 피해가 다르다. 때리는 주먹이 세면 맞는 호박만 깨지고 주먹은 아프지 않다. 반대로 때리는 주먹이 약하면 맞는 바위는 전혀 피해가 없고 때린 주먹만 깨져서 피가 난다.

작용과 반작용이 50 대 50이지만 자연에서는 가치의 몰아주기가 있으므로 하나만 선택되고 하나는 버려진다. 진위(眞僞) 중에서 진이 선택되고 위는 버려진다. 선악(善惡) 중에는 선이 선택되고 악은 버려진다.

자연은 절대로 공정하지 않다. 가치판단을 하기 때문이다. 미추(美醜) 중에는 미, 주종(主從) 중에는 주, 성속(聖俗) 중에는 성이 선택되고 나머지는 버려진다. 추와 종과 속은 사정없이 팽개쳐진다.

그러므로 가치를 따지지 않을 수 없다. 싱싱한 것은 선택되고 한물간 것은 버려진다. 추호의 용서가 없다. 금과 돌이 반반 섞이면 모두 금으로 취급되지만 밥과 흙이 반반씩 섞이면 모두 흙으로 취급된다.

가치의 판정 때문에 세상은 불공평하다. 똑같이 반반인데 금과 돌의 반반은 금으로 몰아주고 밥과 흙의 반반은 흙으로 몰아주는 것이다. 당신이라면 금과 돌이 반반일 때 조금이라도 버리겠는가? 금이 1프로만 섞여도 노다지다.    

그러므로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치가 제어한다. 모든 존재는 내부에 작은 저울을 숨기고 있어서 제어기능을 가진다. 돌은 무게로 제어한다. 흙은 굳기로 제어한다. 나무는 결로 제어한다. 칼은 예리함으로 제어한다.

구멍난 컵은 버린다. 이가 나간 컵은 쓸 수가 있지만 바닥이 뚫린 컵은 쓸수 없다. 건전지가 닳은 라디오는 바꿔쓸수 있지만 안테나가 망가진 라디오는 쓸 수 없다. 제어부분이 고장나면 버려야 한다.

몽당연필은 쓸수 있지만 심없는 연필은 쓸수 없다. 엔진없는 자동차는 쓸수없다. 제어부분이 존재의 생명이다. 그 한 부분이 그 전체의 가치를 결정한다. 나머지 99프로가 멀쩡해도 핵심이 나가면 전량 폐기된다.

가치가 의미를 통제한다. 의미가 마음을 통제한다. 그 어떤 의미있는 것도 가치의 경중을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버릴 것과 취할 것이 구분된다. 그렇게 모든 존재는 심과 날이 있다. 심은 가치고 날은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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