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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0397 vote 0 2007.12.18 (22:37:12)

인간

인간(人間)의 간(間)은 ‘사이’다. 인간 개념은 본래 인간사회를 의미했다. 포유류강, 영장목, 인과에 속하는 종(種) 개념의 인간이 아니라 대사회적인 인격개념으로서의 인간인 것이다.

인격 개념으로서의 인간은 신(神)과 구분되고, 동물과 구분되고, 물질과 구분되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인격이란 무엇인가?’,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왜 인간이 만유의 영장인가?’가 질문되어야 한다.

신(神)적인 것은 완전함이며, 동물적인 것은 본능적인 것이며, 물질적인 것은 허무한 것이다. 인간은 신과 달리 불완전한 존재이며, 동물과 달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을 지향하며, 물질과 달리 허무하지 않은 것이다.

인간은 신의 어떤 속성을 복제하고 있으며, 거기에는 본래의 완전성으로 부터 유도된 가능성의 씨앗이 숨어 있다. 그 가능성은 문명의 발전과 역사의 진보로 나타난다. 인간은 그렇게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존재이다.

외계인은 인간 종이 아니지만 인간이다. 인간과 대화가 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인간은 인간이 상대할 파트너로 인정할 수 있는 존재를 의미한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개념이 여기서 비롯된다.

휴머니즘이다. 인간중심적 사고이다. 인간을 어떤 신성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낮추어 보는 신(神) 중심적 사고나 맹목적 존재로 보는 물질 중심적 사고가 아니라 인간 그 자체를 목적으로 보는 개념이다.

인간은 죽는다. 그러므로 목적이 될 수 없다. 인간의 죽음에 의해 그러한 의도는 실패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휴머니즘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죽지 않는 인격이 있어야 한다. 죽지않는 것은 인류 전체다.

휴머니즘은 인류전체와 그 문명을 하나의 통일된 존재로 보는 관점이다. 무엇인가? 인류의 어떤 계획이 설사 성공했다 할지라도 인간을 희생시키고 그 바탕 위에서의 성공이면 실패다. 인간의 자기부정이 되기 때문이다.

휴머니즘은 인류전체의 성공을 추구한다. 한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 다른 인간이 불행해야 한다면 실패다. 한 뛰어난 천재의 비범한 역량과 독재자의 지도에 의한 성공이면 역시 실패다. 그 경우는 인류의 성공이 아니다.

무엇인가? 진정한 성공의 모습은 지구 바깥에서 바라본 시선, 완전히 외부인의 시선으로 지구의 인간들을 봤을 때 경탄하고 존경심을 품을 만한 정경이어야 한다. 그 모습은 어떠한 것인가?

인간이 원래 뛰어나서 성공했다면 허무다. 세월이 흘러 인간이 조금 더 진화했다면 혹은 신이 인간을 더 뛰어난 존재로 창조했다면 쉽게 될 일이 아닌가? 인간은 그리 뛰어난 존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성공해야 진짜다.

지구에 많은 매장자원이 있어서 거저먹기로 성공했다면 역시 허무다. 그 성공이 자원을 약탈한 결과라면 물질의 성공이지 인간의 성공이 아니다. 일부가 타인을 착취하고 지배해서 성공했다면 역시 실패다.

히틀러처럼 독재자의 지시에 의해 성공해도 진짜가 아니다. 진정 인간이 위대해지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할까? 가장 약하고 가장 곤궁한 가운데 개개인이 강하고 그 강한 개인이 연대해서 함께 이루어 나가야 진짜다.

각자가 자기만의 성공모델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진짜다. 자원이 많아서 거저먹은 미국 모델은 아니다. 독재자가 명령에 개미처럼 움직여서 얻은 경제동물 일본의 모델은 아니다. 무지막지하게 동원하는 중국모델도 답은 아니다.

지나치게 시스템에 의존하여 개인을 황폐하게 만드는 서구의 모델도 진짜는 아니다. 제국주의 시절 주변국을 약탈하여 세운 유럽모델은 원초적으로 아니다. 주입식 교육에 의한 대량복제의 성공도 아니다.

개인이 자기의 개성과 자존심을 포기하지 않고 인간과 인간이 너무 밀집하지 않고 양팔간격으로 자유롭게 공간을 벌린 가운데 수평적 소통에 의한 성공이 진짜다. 배려와 협력과 관용과 창의와 독립에 의한 성공이 진짜다.

개인이 강해야 진짜다. 집단이 강하면 가짜다. 집단을 위해 개인이 희생하면 가짜다. 뛰어난 한 명의 천재에 의존하면 가짜다. 시스템이나 전쟁이나 착취나 자원에 의존하면 가짜다. 인간이 인간을 차별하면 가짜다.

아기는 백지상태에서 새로 출발한다. 백지상태에서 새로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물려받은 것, 빌린 것, 뺏은 것, 노른자위를 차지한 것, 행운에 의한 것은 가짜다. 진정한 인류의 성공을 추구하는 것이 휴머니즘이다.

일상

만약 인간에게 잠이라는 것이 없다면 어떨까? 사람이 잠을 자지 않는다면? 오늘과 내일이 하루 단위로 끊어지지 않고 끝없이 이어진다면? 허무한 거다. 휴식이 있어야 한다. 끊어줌이 있어야 한다.  

아침에 계획한 일을 저녁에 마무리하고 오늘 하루를 완성하고 다시 하루를 새로이 시작하므로 설레임이 있는 것이다. 어제 뿌린 씨앗은 오늘 싹이 나야 한다. 봄에 심은 곡식은 가을에 수확되어야 한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어야 한다.

인간은 희망 때문에 죽는다. 인간은 계획 때문에 속는다. 인간은 미래 때문에 죽는다. 철학함에 있어서 일상성의 의미는 중요하다. 일상성의 개념은 인간이 언제라도 지금 이 순간의 완전성을 추구할 수 있느냐이다.

희망을 가지고, 계획을 가지고, 야심을 가지고 먼 미래의 성공을 위하여 오늘을 희생하기 때문에 인간이 피폐해지는 것이다. 집단을 위하여 개인을 희생하고 자녀를 위하여 부모가 헌신하기 때문에 인간성이 망가지는 것이다.

누군가를 위하여 대리하는 삶은 모조품 인생이다. 그것은 노예의 삶과 같다. 지금 이 순간에 깨달아야 하고 지금 이 순간에 완성되어야 한다. 만약 그러할 수 있다면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않아도 충분히 성공한 거다.

인간의 성공은 재화를 획득하고, 명성을 얻고, 평판을 얻고,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기 때문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부에 그러한 잠재적인 가능성을 갖추기 때문에 성공인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나서지 못해도 좋다. 명성도, 평판도, 재화도 불필요하다. 지금 이 순간에 완성되어 있어야 한다. 오늘 하루를 멋드러지게 완성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일을 즐겨야 한다.

공자의 논어에 ‘지지자(知之者)는 불여호지자(不如好之者)요, 호지자(好之者)는 불여낙지자(不如樂之者)라는 말이 있다.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

아는 것은 미래를 위한 대비다. 진짜가 아니다. 좋아하는 것 역시 앞을 내다보고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완성할 수 있는 미학을 품음으로써 진짜다. 즐길 수 있어야 진짜다.  

룻소는 ‘자연으로 돌아가라’ 했다. 무엇인가? 자연은 지금 이 순간 완성되어 있다. 인간 역시 그러하다. 지금 이 순간 완성되면 그 뿐, 내가 만족하면 그뿐, 나중에 사회로부터 인정받을 필요는 전혀 없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짐승처럼 숲속에서 살라는 뜻은 아니다. 희망을 버리고 야심을 버리고 계획을 버리고 모두 버리고 지금 이 순간 완전해져야 한다. 그것은 깨달음의 경지와 통한다.

일상성의 진정한 의미는 희망을 버리고 절망을 선택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하루를 완성하고 지금 이 순간을 완성하며 그 작은 완성을 밑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아올려 진정한 희망을 건설하라는 메시지다.

생은 쭉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도리어 그것을 끊었을 때 진정한 의미가 드러난다. 2억원의 연봉을 받는 은행원이 파산하고 노숙자가 되어서야 진정한 행복을 맛보았다는 언론의 보도도 있다.

희망과 계획과 야심을 버렸을 때 모든 족쇄가 풀어졌다. 그 이후에 백지 상태에서 다시 건설된 희망이 진짜다. 철학가가 일상에서의 탈출을 이야기하는 의미다. 주위의 기대, 눈치, 평판에 신경쓰는 희망은 가짜다.

나 자신의 미학을 위한 희망이 진짜다. 나의 내부에서 넘쳐나온 희망이 진짜다.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려는 희망은 가짜다. 이기적이어야 한다. 오만해야 한다. 나를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 뿐임을 깨달아야 한다.

고흐의 그림도 모짜르트의 음악도, 분위기 있는 까페도 이성친구와의 멋진 데이트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 순간을 완성시키는 나만의 미학을 발견하지 못하면, 본래의 나다움에 도달하지 못하면 철학도 지식도 소용이 없다.

의미

의미는 가치를 배달한다. 가치는 의미의 밀도를 높인다. 의미가 없다는 것은 본부와의 연결이 끊어졌다는 것이다. 고립된 내가 세상의 중심과 정밀하게 맞물려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엇인가? 본부와 연결이 되어야 한다. 진리는 저 높은 곳에 있고 완전은 더 높은 곳에 있다. 나는 이곳에 있다. 그 둘을 연결하는 끈이 의미다. 내 나온 곳, 근본과의 연결이 유지되어야 한다.

의미는 자가발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와 연결되고 세계와 연결되고 진보와 역사와 문명과 연결되어야 한다. 이차대전이 끝난줄 모르고 정글에 고립된 채 혼자 훈련하는 일본군 병사처럼 되어서 안 된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처음 하나의 근원으로부터 유래된 것이며 존재는 그 원래의 하나와 연결하는 안테나를 가진다. 언제라도 접속되어 있다. 단지 깨닫지 못할 뿐이다. 그 잃어버린 링크를 회복하기다.

의미가 없을 때 존재는 없다. 존재는 메커니즘이다.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은 명목이 있다는 것이며 역할이 있다는 것이다. 그 명목이 내게는 없기 때문에 그 명목을 가진 근원의 완전성과 연결되어야 한다.

대지와 맞물리지 못할 때 바퀴는 헛돌 뿐이다. 단단히 맞물려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내가 역할할 수 있다. 나는 주어진 역할을 하는 존재이며 세계와의 연결로 하여 명목을 얻을 때 그 역할은 의미를 가진다.

나 한 사람의 삶은 의미없다. 고립된 개인은 비참 뿐이다. 본부와의 연결이 살아있다는 전제 하에 나의 모든 성취가 정당화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삶은 지푸라기 같을 터이다.

세상과 만나고, 세상과 맞물리고, 세상과 맞서고, 세상과 하나되고 세상과 소통함에 의해 내 존재는 의미있어진다. 그 세상의 중심으로 치고들어가는 것이 가치다. 그 세상과의 연결을 유지하는 것이 의미다.

뜻은 덧붙여 업혀 간다는 뜻이다. 무엇이 업혀가는가? 역할이라는 수레는 명목이라는 짐을 실어간다. 운반한다. 뜻이 있다는 것은 운반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실어나르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스포츠를 즐겨도, 음악을 들어도, 춤을 추어도 그러한 행동이 부지불식간에 무언가를 운반하고 있는 것이다. 운반하는 수레가 역할이면 운반되는 화물이 명목이다. 우리네 인생은 무언가를 운반하고 있다.

부모로 부터 받아서 자손에게로 전하고 가는 무언가가 있다. 개인의 그 무언가가 모여서 운반되어진 결과가 진리고 세계이고 진보이고 역사이고 문명이다. 우리는 바로 그것을 운반하고 있는 것이다.

톱니바퀴는 힘을 업어 전달하고 네트워크는 정보를 업어 전달한다. 이렇듯 업어서 전달하는 것이 있다. 언어는 소리와 글씨에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것이 뜻이다. 인간의 삶도 그러하다. 무언가 전달한다.

나의 삶은 무언가를 전달하려는 것이다. 인간은 신(神), 존재, 생명, 자연, 물질에서 전달받아 진리, 세계, 진보, 역사, 문명로 전달한다. 하나의 인간의 삶은 둘 사이에서 중개자인 것이다. 메신저이고 사자이다.

마음

마음은 머금는 것이다. 마음먹기라고 한다. 마음은 머금어 먹는 것이다. 종이가 물을 빨아들이듯 속에 가득 머금고 품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긴장이다. 즉 마음의 본체는 긴장과 이완인 것이다.

긴장한다는 것은, 불안하다는 것은, 초조하다는 것은 지속적으로 자연스러운 호흡을 방해하고 가슴에 통증을 주어 그때마다 다시 ‘내게 어떤 임무가 주어져 있었지?’ 하고 생각의 메모지를 재확인하게 하는 것이다.

만약 긴장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많은 사실을 기억하고 있어도 그 기억을 다시 불러올 이유가 없다. 머리속에 기억은 하고 있지만 그 기억을 꺼내보지 않는다. 긴장은 간헐적으로 그 기억을 꺼내보게 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사랑에 빠지게 된다면 5분마다 당신의 기억창고에서 상대의 모습을 불러들여 되새김할 것이다. 그것이 마음 먹은 상태 곧 마음을 머금고 있는 상태이다. 긴장이다. 준비다. 주의하고 대비하는 것이다.

마음이란 그런 것이다. 하드디스크에 저장된 것을 메모리에 불러들이는 것. 포스트잇을 모니터 귀퉁이에 붙여놓듯이 지속적으로 반복확인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1분 단위로 그 사람을 떠올린다면 당신은 확실히 사랑에 빠져 있는 것이다.

마음은 평정을 원한다. 평정은 긴장하지 않는 것도 아니요 긴장하여 불안초조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긴장하면서 동시에 이완하는 것이다. 엄마 품의 아기처럼 엄마의 존재를 의식하면서 마음껏 평화로운 것이다.

이성

이성은 신성(神聖)에 대한 말이다. 신성은 완전성이다. 신은 완전하다. 신의 완전성이 인간에게도 반영되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언제라도 완전을 추구한다. 그 결과는 합리성으로 나타난다.

인간은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존재인 것이다. 합리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일한 것이다. 서울에서 부산가되 모로가도 되지만 가장 빠른 길은 하나 뿐이다. 그 길은 비행기 타고 가는 길이다.

이때 방법은 단 하나 뿐이므로 무수히 많은 인간들 사이에서 합의가 가능하다. 여러 개의 선택지들 중에서 단 하나를 선택해야만 할 떼 공동체의 성원 모두가 그 하나의 선택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원리가 합리성이다.

합리성은 최적화를 추구한다. 가장 빠른 길을 찾고 가장 이익이 되며, 가장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찾는다. 저마다 의견이 다르지만 모두에게 가장 이익이 되는 길은 하나 뿐이므로 합의할 수 있다. 그것이 이성이다.

인간에게 신의 어떤 속성이 있다. 그것이 이성이다. 이성은 진리의 완전성을 인식하는 능력이다. 진리를 파악하고 실천하는 능력이다. 그러한 능력이 있기 때문에 합의하여 60억이 하나처럼 행동한다.

그렇게 합의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진리, 그것은 세계, 그것은 진보, 그것은 역사, 그것은 문명이다. 인간은 오직 이 다섯가지에 합의하고 있다. 그 이하의 개념들인 국가, 권력, 사회, 언어, 지식, 도덕 등은 전혀 합의되지 않았다.  

인간은 진리에 합의한 결과로 과학을 낳았으며, 세계에 합의한 결과로 60억이 모두 만났으며, 진보에 합의한 결과로 발전하였으며, 역사에 합의한 결과로 현상이 유지되고 있고, 문명에 합의한 결과로 오늘을 살아내고 있다.

존엄

존엄은 곧 인권을 의미한다. 휴머니즘이며 ‘인간이 곧 하늘이다’고 할 때의 인내천 사상, 천부인권 사상을 의미한다. 천부인권 곧 자연권은 인간의 사랑과 자유와 욕망이 존재의 근본법칙으로 부터 유래된다는 입장이다.

발명가에게 특허를 인정해 주지 않으면 발명하지 않는다.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으면 생산하지 않고 생존권을 인정하지 않으면 개인이 국가를 공격한다. 무엇인가? 인권의 부정은 인간의 자기부정이 되는 것이다.

자연에서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하는 필연의 법칙이 있으며 그것이 권이다. 존엄은 그러한 권의 법칙을 인간에게 적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엄성은 본질에서 자연법칙의 일부다.

물이 아래로 흐르듯이 순리가 있다. 권리를 인정해야 사회는 작동하게 되어 있다. 소유권, 생존권, 기득권 등 일체의 권이 그러하다. 권을 인간에 적용하면 존엄이다. 존엄을 인정해야 사회는 유지되게 되어 있다.

인류문명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시스템이며 그 시스템은 무수한 요소의 집적에 의해 구성되며 인간의 존엄성은 그 시스템의 상부구조를 형성한다. 존엄이 부정될 때 문명이라는 시스템은 붕괴하고 만다.

인권이 부정될 때 개인은 자살하고 집단은 전쟁하고 발명가는 좌절하고 작가는 쓰지 않고 노동자는 파업하고 기업가는 창업하지 않아서 사회는 파괴되고 공동체는 해체되고 문명은 붕괴된다.

권(權)은 결정권이다. 갈림길 앞에서 어느 길로 갈 것인지를 결정해야 비로소 그 길을 갈 수 있는 것이다. 결정이 진행에 우선한다. 결정이 진행에 앞서므로 일에 있어서 결정의 우선됨을 존중하는 권이다.

큰 길과 작은 길이 교차하고 있다. 신호등이나 수신호가 없는 교차로에서는 큰 길을 달리는 자동차에 우선권이 있다. 작은 길을 달리는 자동차에 우선권을 주면 사고가 나기 때문이다.

필연적으로 결정되어 있다. 자연법칙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논리가 권이다. 권을 존중하지 않으면 자연법칙을 거스른 결과로 사회는 비효율과 불합리에 빠져 그만 붕괴되고 만다.

소유권, 특허권, 행복추구권, 생존권, 선점권, 기득권 등 모든 권에 있어서 그러하다. 물론 이 논리를 무제한으로 해석해서도 안 된다. 권과 또다른 권이 충돌할 수도 있으며 더 상위의 권이 있을 수 있다.  

나중 집을 짓는 사람이 먼저 집을 지은 사람의 진입로를 가로막은 채로 집을 지으면 어떻게 될까? 먼저 지은 집은 출입로가 없어져서 그 집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이는 불합리한 것이다.  

공터에 처음 집을 짓는 사람은 아무곳에 집을 지어도 상관없다. 그러나 나중에 집을 짓는 사람은 먼저 지은 사람의 일조권을 침해하지 않는 형태로 지어야만 한다. 이러한 법칙이 선점권이다.

권의 의미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존엄은 궁극적으로 인간이 모든 결정의 주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인간은 인간을 파괴하는 결정을 할 수 없다. 이는 불합리이며 자연법칙에 어긋난다.

인간을 죽이는 결정은 자기모순이다. 자살과 같다. 그 결정은 순리가 아니라 무리다.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결정은 인간을 살리는 방향으로 되어야 한다. 그것이 인권이며 곧 존엄이다.

욕망

배가 고파서 먹는가 아니면 살기 위해서 먹는가? 이상이 있어야 한다. 인간의 진정한 밥은 이상주의다. 배고픔은 그것을 깨닫게 하는 하나의 장치일 뿐이다. 인간은 이상을 먹고 사는 존재이다.

인간은 돈을 원하는게 아니라 그 돈으로 문명을 건설하기 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만 돈을 추구할 뿐 정작 그 돈을 벌어서 무엇을 할지에 대해서는 계획이 없다. 결국 남 따라 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깨닫지 못한다. 타고난 본능과 체험한 잠재의식의 명령에 복종할 뿐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판단이 아니다. 자신의 진짜 판단이 아니다.

외모에 끌렸다 해도 진짜 원하는 것은 외모가 아니다. 성욕이나 식욕에 끌렸다 해도 진짜 원하는것은 섹스가 아니고 밥이 아니다. 처음에는 배가 고파 밥을 먹지만 실제로는 살기 위해 밥을 먹는다. 단지 깨닫지 못할 뿐이다.

처음에는 성욕 때문에 섹스에 관심을 갖지만 결국 그것은 사랑을 깨닫게 하는 수단에 불과함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성욕은 섹스의 욕구가 아니며 식욕은 밥을 먹으려는 욕구가 아니다. 착각하지 말라.

성욕과 섹스 사이에는 복잡한 과정의 절차가 있다. 성욕과 섹스를 직결시키는 사람은 성폭행 범죄자 뿐이다. 식욕과 식사를 직결시키는 사람은 비만 환자 뿐이다. 욕망은 단지 인간에게 계기를 제공할 뿐이다.   

인간은 우연한 계기에 의해 사건에 말려든다. 그것은 드라마의 소재다. 경험하고서야 깨닫게 된다.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을. 그것은 드라마의 주제다. 인간은 소재로 자극받아 계기를 얻어 주제의 달성을 원하게 되는 것이다.

식욕이나 성욕, 재화에 대한 욕심, 명성에 대한 욕심은 사건에 말려들게 되는 계기로 기능할 뿐이다. 진짜 욕심은 따로 있다. 완성시키려는 욕구가 진짜다. 미학이 진짜다. 성욕과 식욕과 호기심은 단지 자극할 뿐이다.

호기심과 모험심과 승부욕은 더 큰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계기일 뿐이다. 진짜는 진리의 발견을 토대로 한 문명의 완성이다. 처음에는 욕망에 자극받아 멋도 모르고 떠나지만 결국 알게 된다. 깨닫게 된다.

출세하려는 욕망, 성공하려는 욕망, 경쟁에서 이기고 싶은 욕망,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 자기 실현에의 욕망, 본능을 충족하려는 욕망들은 모두 진짜가 아니다. 진정한 것은 신의 완전성과 대면하는 것이다.

이성이 진정한 것이다. 이상을 깨닫게 하는 것이 이성이다. 욕망과 자유와 사랑과 존엄은 그 이상으로 가게 하는 중간 단계에서의 거쳐가는 정거장들일 뿐이다. 욕망은 그 정거장들 중에서 첫번째 정거장이다.

욕망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유로 나아가게 한다. 식욕과 성욕 뿐 아니라 모험심, 호기심, 호승심, 예술에 대한 욕구, 창조에 대한 욕구가 모두 그러하다. 그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유로 이끈다.

모든 욕망은 자유로 귀결되며, 모든 자유는 사랑으로 귀결되며, 모든 사랑은 존엄으로 귀결되며, 모든 존엄은 이성으로 귀결된다. 결국 욕망은 자유욕이며 자유는 사랑할 자유이며 사랑은 존엄으로 열매맺는다.

존엄은 이성으로 되돌아간다. 인간은 욕망을 추구하다가 자유를 발견하게 되고, 자유를 추구하다가 사랑을 깨닫게 되고, 사랑을 추구하다가 존엄을 깨닫게 되고, 존엄을 추구하다가 이성을 회복하게 된다.

자유를 발견하지 못하는 욕망은 실패다.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자유는 실패다. 존엄에 이르지 못하는 사랑은 실패다. 이성에 이르지 못한 존엄은 실패다. 이들은 궁극의 하나에 이르는 여정에서의 다양한 정거장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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