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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0614 vote 0 2008.02.20 (23:07:04)

달마실이 가는 길


공동체의 나아가는 방향성을 일러줄 종지(宗旨)가 있을 법하다. 달마실의 주장함은 교종의 이론과 선종의 ‘나’에 대한 관심을 넘어서 진일보 하되, 너른 소통과 미학의 세계로 나아가기다. 그 핵심은 ‘완전성에 대한 이해’다.


교종의 이론이 흙이면 선종의 ‘나’는 씨앗이며 소통과 미학은 그 씨앗이 자라서 꽃 피우고 열매맺음이다. 흙에서 씨앗과 꽃과 열매로 전개되는 1 사이클 전체과정의 통일이 달마실이 말하는 완전성이다. 달 하나 띄운다.


이는 깨닫고 난 다음의 문제에 답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여러 견해들과 다르다. 깨달아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고 또 깨달아 개인의 번뇌를 해결하고 난 다음은?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히기다. 무엇인가? 이상주의다.

 

◎ 교종의 질서(이론)≫선종의 가치(나)≫달마실의 완전성(질서와 가치의 통일)


달마실은 이상주의를 실천하는 각성된 개인의 공동체를 추구한다. 필요한 것은 개인의 가치, 공동체의 소통, 삶의 미학이다. 배후에서 그 모든 것을 담보하는 빛이 되어주는 것은 진리의 완전성이다.


하늘의 완전한 진리에서, 개인의 완전한 가치를 유도하고, 다시 이웃과의 완전한 소통으로 전개하며, 이를 각자의 삶에 반영하여 미학적 일관성을 담보하고, 널리 전파하여 공동체적 이상주의를 완성하는 것이다.


◎ 진리≫가치≫소통≫미학≫이상주의

 

진리의 완전성에서≫개인의 완전성 곧 가치를 유도하고≫타자와의 완전한 소통으로 전개하며≫이를 각자의 완전한 삶의 미학으로 승화시키고≫마침내 완전한 공동체적 이상주의로 일 사이클의 전개를 완성한다.


철학의 역사는 질서와 가치라는 두 강조점이 대결하는 역사다. 교종이 탐구하는 우주의 진리가 질서라면 선종이 강조하는 개인의 마음은 가치다. 달마실의 주장함은 그 둘 사이의 대화다. 그리고 그 결실을 사회로 전파하기다.


우주의 진리가 흙이면 개인의 마음은 씨앗이다. 씨앗이 흙을 만나 교감할 때 소통의 싹은 자라고 미학의 꽃은 피고 이상주의로 열매맺는다. 각자가 이러한 완전성의 모형을 가슴에 품을 때 그것으로 매개삼아 소통할 수 있다.


내가 달을 바라볼 때 그대도 달을 바라본다면 그 달을 매개삼아 소통할 수 있다. 세상을 바라보되 어떤 모형으로 바라볼 것인가이다. 달마실이 주는 것은 세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모형이다. 이상주의를 품어야 한다.



이상주의로 나아가라


교종의 이론편향과 선종의 나에 대한 관심을 넘어서야 한다. 진도나가야 한다. 수행에 대한 집착을 넘어야 한다. 무엇을 내려놓으라든가, 비우라든가, 무(無)라든가, nothing이라든가 그것이 다 ego에 대한 집착이다.


나를 버린다면서, 무거운 짐 내려놓는다면서 그러한 언설을 반복하면서 여전히 붙들고 있다면 곤란하다. 그것을 버렸다면 마땅히 다음 단계가 보여져야 한다. 부단히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힐 수 있어야 한다.


깨달음은 연역이며 연역은 창조의 도리다. 하늘의 질서를 내려받아 내 마음의 뜰에 심는다. 소통과 미학과 이상주의로 자라난다. 그 과정은 창조의 과정이다. 연역이란 창조의 첫 걸음에서 그 길의 완성을 바라보는 것이다.


출발점에서 도착지를 바라보기다. 전체과정의 일관성을 담보할 나침반 같고 등대 같은 것이 있어야 한다. 차차로 줄기와 가지를 쳐나가게 하는 등뼈 같은 것이 있어야 한다.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을 무게중심이 찾아져야 한다.


설계도가 있어야 하고, 토대와 상부구조가 있어야 하고, 에너지원이 있어야 하고, 뻗어나가는 도로가 있어야 한다. 일관성과 통일성을 부여하는 컨셉이 있어야 한다. 내 인생을 관통하는 테마가 있어야 한다. 이야기를 품어야 한다.


삶의 일관성과 완결성을 담보하는 그것이 미학이다. 미학의 의미는 전파된다는데 있다. 피어난 한 떨기 완성된 꽃이 벌과 나비를 초대하듯이 널리 공유된다는 데 있다. 그 미학의 결론은 공동체적 이상주의다.


완성된 종은 소리를 토하고 피어난 꽃은 향기를 내고 완성된 자유는 사랑으로 결실한다. 그렇게 미학은 삶으로 드러내고 증명한다. 그 가운데 전율함이 있다. 그럴 때 전파된다. 공명된다. 절로 닮아간다. 다 함께 어우러진다.



달 하나 띄워라

 

완전성을 이해하라. 그것을 얻고, 그것을 품고, 그것을 공처럼 가지고 놀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세상을 보되 어떤 모형으로 바라볼 것인가이다. 그 완성형을 마음의 화폭에 그려놓기다. 고요한 뜰에 달 하나 띄우기다.


그것은 진리의 완전성으로 부터 비롯하며 명상에 의하여 내 마음 안에서 재발견된다. 자연은 본래 완전하다. 나 역시 자연의 일부이므로 완전성을 감추고 있다. 완전할 때 소통한다. 그 완전성을 품어야 한다.


그것은 가리키는 손가락 끝을 보는 것이 아니요 가리켜지는 달을 보는 것도 아니요 그 관계를 보는 것이다. 보여지는 것과 보게하는 것 사이에서 돌고 도는 순환성을 보는 것이다. 더 높은 차원에서 보아야 한다.


그대가 발 디디고 선 지구와, 그대 자신과, 그대 앞에서 가리키는 손가락과, 가리켜지는 달이 직결로 연결되어, 커다란 순환의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꿰뚫어보아야 한다. 정상에서 전모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역할극에서 벗어나라


상대가 무어라고 말하면 곧 대꾸하려 드는 자신을 보라. 상대를 이기려 들고, 상대와 맞서려 들고 그리하여 상대와 나 사이에 팽팽한 긴장의 균형을 만들려는 무의식적인 본능의 몸짓을 보라.


내가 화를 내는 것, 내가 일을 맡는 것, 내가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되고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되는 것, 세상의 이목을 의식하여 행동하는 것이 모두 연극임을 보라. 그 과정에서 나의 종속되고 차단되고 제한됨을 보라.


의심할 수 있어야 한다. 내 행동을 내가 아닌 상대방이 결정하고 있지 않은지를. 자기도 모르게 꼭두각시처럼 조종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진정한 내 마음의 주인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주도권을 깨우치라


진정한 나는 무엇일까? 그것은 나다운 것이다. 내 인생의 테마를 따라 일관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내 마음 속에 등대 갖고 나침반 같은 것이 있어야 한다. 차차로 가지를 쳐 나가며 전개하는 등뼈 같은 것이 있어야 한다.


상대가 이렇게 나오면 나는 이렇게 한다는 전략을 버려야 한다. 세상이 나를 이렇게 대접하므로 나는 이렇게 대응한다는 오기와 복수심을 버려야 한다. 그 무대 안에서 나의 의도대로 나 자신에 의해 설계된 게임을 만들어 가기다.


상대가 어떻게 나오든 상관없이 나는 이렇게 한다는 그것이 사전에 정해져 있어야 한다. 자기다움을 찾아야 한다. 내 스타일을 얻어야 한다. 그것을 등뼈로 삼아야 한다. 모든 리듬과 호흡이 그 주도권에서 따라나오는 것이다.

 


깨달음은 돈오돈수다


먼저 균형잡는 방법을 배운 다음에 자전거의 페달을 밟겠다거나 혹은 먼저 물에 뜨는 방법을 배운 다음에야 헤엄쳐 나가겠다는 식이라면 영원히 배우지 못한다. 신(神)의 분신인 그대 겁없이 페달을 밟고 서슴없이 물을 헤쳐라.


이론을 배운 다음에 명상하고, 명상한 다음에 깨닫고, 깨달은 다음에 소통과 미학의 세계로 나아감이 아니다. 거꾸로다. 굳세게 나아갈 때 걸림이 발견되고 부단한 나아감에 의해서 그러한 걸림들이 낱낱이 격파되는 것이다.


나의 뒤에 가족이 있고, 가족 뒤에 사회가 있고 또 국가가 있고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저 높은 곳에 우러러볼 진리가 있고 그 아래에 깨달음이 있고 말단에 내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한 계단씩 올라가는 따위는 없다.


오직 지금 이 자리에 내가 있을 뿐이다. 올라감도 없고 내려감도 없다. 바로 통해야 한다. 돈오돈수는 지금 이 순간의 완성에서 나아가 세계의 완성에 대한 비전을 보는 것이다. 완성되면 통한다. 전율한다. 공명한다.


 

머리에 힘 주지 마라


참된 명상은 깨달음의 기쁨에 겨워 몸이 뜨거워진 나머지 새벽 두 시에 웃통벗고 동네 한 바퀴 돌고오게 되는 그런 것이다. 가만있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까만 밤에 홀로 경주남산 순환도로를 종주하고 오게 되는 것이다.


명상은 그런 것이다. 명상 한다면서 머리에 힘 주고 부동자세로 앉아있어봤자 시간낭비일 뿐이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사람을 좁은 장소에 가둬놓고 호흡이니 뭐니 하면서 체조 비슷한 것을 시킨다면 얄궂은 거다.



깨어있으라


깨달음은 긴장과 이완 사이의 밸런스에 있다. 평상심은 완전한 긴장을 넘어서 온전한 이완의 오르가즘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인체의 모든 부분이 직결로 연결되어 뇌의 명령에 곧바로 반응하는 것이다.


그것은 스위치가 켜지고 방아쇠가 공이를 치는 한 순간의 완전한 각성 상태다. 그 긴장의 극한에서 정점을 통과하고라야 온전히 평화로워진다. 마음 속에 완전성의 달이 뜰 때 비로소 리듬을 탈 수 있다.


그렇게 무게중심이 찾아지고 등뼈같은 것이 얻어진다. 강약과 고저와 장단을 자유자재로 제어할 수 있게 된다. 신(神)과 대화하고, 자연과 감응하고, 진리와 소통하고, 세상과 공명하고, 미학으로 펼쳐보이게 된다.


눈 부릅뜨는 것도 아니고 나른하게 처지는 것도 아니다. 매 순간 그 상황에 맞는 테마를 발견하고 그 흐름에 몸을 실어서 춤 출 수 있는 것이다. 몸이 먼저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자연의 자연스러움에 몸을 싣는 것이다. 



오만하라


아기는 말을 배워서 사람과 소통하고, 소년은 글을 배워서 사회와 소통하고, 인간은 깨달음에 의해 진정으로 소통한다. 깨달음은 소통을 깨달음이다. 소통이 가능한 자와 꽉 막혀서 소통이 되지 않는 자로 차별한다.


깨달음은 인간으로 하여금 더 높고 더 나은 가치의 세계로 안내할 목적을 가진다. 곧 인간의 존엄성이다. 그러므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아니면 안 된다. 낮아져서 섬기면 안 된다. 겸손한 자는 사절이다.


물론 그 오만이 권력자의 오만, 지배자의 오만, 강자의 오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떤 한 가지 수단을 장악한 자가 다음 단계로의 상승을 포기하고 그 자리에 머무르려 하는 즉 게으름이다. 


  

놀라지 말라


위험하다. 니체의 권력의지가 위험하다. 인간을 상승하게 하려는 그 의도가 수상하다. 마르크스의 혁명이 위험하고, 예수의 해방이 위험하고 붓다의 해탈이 다 위험한 이야기다. 깨달음은 위험하다.


인간을 내면에서부터 변화시키고 인간의 삶을 바꿔놓고 기어이 세상을 바꿔놓는다. 깨달음은 위험한 이야기다. 그 완전성의 빛으로 하여 인간을 매혹시킨다. 그 안에 독이 있다. 놀랍고 서럽고 무섭다면 곤란하다. 동행하기 어렵다. 



말하라


깨달음을 인가받는다든가 하는 따위는 없다. 그러나 얻는 것이 있어야 한다. 입력이 있었다면 출력이 있어야 한다. 학자는 논문으로 증명하고, 화가는 작품으로 증명하고, 예술가는 연주회로 증명한다.


명상가는 무엇으로 증명하는가? 진정한 자유로 꽃 피우고, 온전한 사랑으로 열매맺는다. 그 가운데 울림과 떨림이 있다. 전율함이 있다. 터져나오는 것이 있다. 그렇다면 소리쳐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완전한 신을 말하고, 떳떳한 자연을 말하고, 막힘없는 진리를 말해야 한다. 그것을 내게로 가져와서 꽃 피우고 결실하되 거침없는 자유를 말하고, 극한의 사랑을 말하고, 진정한 소통을 말하고, 온전한 미학을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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