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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9075 vote 0 2008.06.18 (20:57:05)

구조주의 논리학

논리학은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사유를 일치시키고자 하는 학문이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다. 인간의 사유와 자연의 이치는 근본 일치한다. 그러나 총론에서 일치할 뿐 각론에서는 많은 불일치가 존재한다.

자연의 근본은 ‘작용/반작용의 법칙’에 따르는 대칭성 원리다. 인간의 판단 역시 yes/no의 대칭성의 원리를 따른다. 그러나 이러한 대칭성이 언어적 지식으로 변환될 경우 입체적 구조가 해체되어 선(線) 위에 전개된다.

자연은 그 대칭성이 모여 하나의 입체적 모형을 구축한다. 집적되고 세팅된다. 인간의 사유 역시 고도의 입체적 구조를 따르고 있다. 문제는 그러한 사실을 인간이 스스로 자각하지 못한다는데 있다.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자신이 뇌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통찰에 의해 본질을 꿰뚫고 영감을 얻었는지 스스로 자각하지 못한다. 영감이나 직관력, 통찰력은 입체적 구조인 자연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적 지식은 다르다. 인간은 직관력으로 통찰한 것을 먼저 자신이 납득하고 또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언어적 지식의 형태로 변환시켜야 한다. 이때 오류가 일어난다. 언어적 지식은 선(線)의 구조를 가지기 때문이다.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을 수 없다. 선은 흑백논리의 이분법을 담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식은 대부분 이원론을 따라간다. 상대성의 원리가 작용하는 자연의 입체적 구조는 언어적 지식이 담보할 수 없다.

이심전심으로 소통하지 않는 한 언어와 문자의 형태로 변환시켜야 타인에게 정보를 전할 수 있고 이때 입체적 구조가 해체되어 선(線) 위에 나열되며 이렇게 풀어서 펼쳐놓고 원상회복을 못하다.

컴퓨터가 정보를 전하더라도 소프트웨어 속에서 입체적 구조를 이루는 정보들이 네트워크를 따라 서버로 옮겨갈 때는 선(線)의 형태로 해체된다. 해체된 부품 형태로 다운받은 정보는 호환되는 소프트웨어에 의해 다시 복구되어야 한다.

한글파일은 한글소프트웨어로만 다운받은 데이터를 복구하여 실행할 수 있다. 인간은 깨달음이라는 소프트웨어로 복구하여 실행할 수 있다. 언어적 지식의 문제는 그 복구에 실패한다는데 있다.

큰 제품을 좁은 통로로 운송하기 위해서 분해한다. 분해된 제품을 목적지에서 다시 조립해야 하는데 그 조립을 가능하게 하는 소프트웨어가 없다는 것이 지식의 문제다. 설계도가 없다. 이에 구조주의 논리학이 필요하다.

지식은 반영(反映)된다

언어는 하나의 도구다. 결함이 있다. 거울이 좌우가 바뀌듯 반대로 비친다. 반영(反映)된다. 이를 원래의 형태로 환원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오류가 있다. 인간의 모든 오류가 여기서 출발한다.

오류는 자기 내부에서 하나의 지식을 다른 지식과 연계시켜 더 큰 지식을 만들거나 혹은 지식을 타인에게 전달할 때 생겨난다. 여기서 소통의 문제가 제기된다. 타인과의 소통이 문제될 뿐 아니라 자기 내부에서의 소통도 문제된다.

깨달음은 자기 내부에서의 소통을 성공시키고 이어 타인과의 소통을 성공시킨다. 그것은 단선적 구조인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기다. 인간이 언어로 생각하는 한 깨닫지 못한다. 뇌 속에 입체적 모형을 건설해야 한다.

인간의 순수한 사유 자체는 자연의 질서와 일치한다. 그러므로 이 원리를 활용하여 자연의 진리를 알아낼 수 있다. 깨달음은 인간의 사유구조를 탐구하는 방법으로 자연의 진리를 알아낸다. 곧 마음을 관찰하는 방법이다.

언어도 근본에서는 자연의 법칙과 일치한다. 문법이 그러하다. 문법이 자연과 일치하지 않으면 의사소통은 실패다. 인간이 의사소통에 성공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언어가 일정부분 진리를 반영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러나 언어는 많은 함축을 가진다. 인간이 언어를 함축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많은 오류가 일어난다. 자연의 사실과 일치하게 말하려면 일단 문장이 길어져야 한다. 문장이 길면 뇌의 메모리 용량이 감당하지 못하여 헛갈린다.

반면 문장이 짧으면 함축되어 다의적인 표현이 된다. 이때 문장 내의 대칭구조가 단어의 의미를 대신한다. 같은 단어가 포지션에 따라 다른 의미를 나타내게 된다. 여기서 온갖 해석의 오류가 일어난다.

그리고 언어는 진화한다. 모든 언어가 합리적으로 진화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대단히 결함있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서로 동문서답을 주고받으면서 눈치로 알아듣는 경우가 태반이다.

중국어라면 특히 노자의 글은 다의적이고 함축적이다. 김용옥과 그의 논적들이 노상 이것이 옳네 혹은 저것이 그르네 하며 따져보았자 헛될 뿐이다. 중국어의 묘미는 오히려 그 다의성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다의성이 오히려 노자의 의도일 수 있다. 모두 노자에게 낚인 것이다. 그렇다. 언어는 완벽하지 않다. 언어가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 자체가 오히려 긍정적인 요소일 수 있다. 포지션에 의해 보완되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자연은 입체적 구조를 가지는데 인간의 언어는 단선적 구조다. 노자는 단어에 다의성을 부여하여 다양한 해석가능성을 열어놓는 방법으로 오히려 그 언어의 병폐와 한계를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노자가 옳다. 언어는 불완전하다. 자연이 원전이다. 언어로 변환하지 말고 자연을 그대로 읽어야 한다. 언어의 개입은 최소화 되어야 한다. 노자의 견해를 특정한 해석의 틀에 가두려는 김용옥들의 시도가 노자를 해친다.

● 진리- 자연의 질서는 입체적 구조를 가진다. 일의 진행은 입체적 모형의 높은 질서에서 단선구조의 낮은 질서로 연역된다.

● 사유- 인간의 사유도 직관력에 의해 입체적 모형의 높은 질서를 가진다. 인간의 판단은 높은 질서에서 낮은 질서로 연역된다.

● 지식- 언어적 지식은 낮은 질서의 단선구조를 가진다. 거울처럼 뒤집어져 반영된다. 본래의 높은 질서로 되돌려지는 것이 귀납추론이다.

지식은 반영된다. 자연은 높은 질서에서 낮은 질서로 연역되는데 인간이 조직한 단어와 개념은 귀납된다. 그 자연을 반영(反映)한다. 반대로 비친다. 낮은 질서에서 높은 질서로 뒤집어 나타낸다.

그러나 문장구조를 통하여 보완할 수 있다. 문장 안에서 포지션이 의미를 가진다. 이로써 단어와 개념의 결함이 보완된다. 문법 자체가 자연의 입체적 성질을 나타낸다. 이 점을 규명한 것이 구조주의 논리학이다.

존재론과 인식론

자연의 질서에서 인간의 지식을 유도한다. 그 가운데에서 양자를 잇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통찰력과 직관력을 가진 인간의 뇌기능이다. 그리고 그 뇌기능과 지식 사이에 문법이 있다. 포지션이 있다.

● 자연≫질서(패턴)≫통찰력(마음)≫문법(포지션)≫지식(개념)

불교의 이심전심에서 심(心)은 감정이 아니다. 그냥 마음이 아니다. 중심 혹은 핵심을 의미한다. 그것은 뇌기능이다. 위빠사나 명상법은 마음을 관찰한다. 정확하게는 뇌기능의 심층구조에 따른 감정의 변화를 관찰한다.

어떤 사건에 밀도가 걸려 있으면 인간은 긴장한다. 입체는 떳떳함을, 각은 아름다움을, 선은 자연스러움을, 점은 시원함을 느끼게 한다. 감정을 통해서 계에 걸려있는 질서의 수를 알 수 있다. 집적도를 알 수 있다.

인간의 문법은 뇌의 이러한 기능을 반영하여 전제와 진술, 주어와 술어, 명사와 동사로 단계적인 대칭구조를 이룬다. 인간의 지식은 근본 자연에서 유도되는 것이며 자연≫질서≫마음≫문법을 거쳐서 성립하는 것이다.

언어는 전제부와 진술부, 주어와 술어, 명사와 동사로 대칭된다. 여기서 후자가 계에 걸려있는 질서의 수를 나타낸다. 하나의 단어에 어떤 술어가 따르는가에 따라 다섯가지 다른 의미로 쓰이는 것이다.

일상적으로 쓰는 단어는 포지션을 알 수 없다. 문장을 성립시켜야 정확한 의미가 드러난다. 그러므로 인식론이 필요하다. 존재론은 자연그대로의 입체적 모형이고 인식론은 이를 따르는 개념의 포지셔닝이다.

● 존재론- 자연의 질서와 일치하는 깨달음의 연역논리

● 인식론- 자연의 질서를 뒤집어 반영(反映)하는 지식의 귀납추론

여기서 연역과 귀납의 문제가 제시된다. 인식론이 귀납추론을 전개하여 자연의 본래에 도달하고자 하지만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자연에서 모든 운행은 높은 질서에서 낮은 질서를 향하기 때문이다.

엎어진 물을 주워담는 것과 같다. 주워담을 수 있지만 완벽하지 않다. 인간의 귀납은 언제라도 2프로가 부족하다. 완벽하게 자연을 재현했다고 믿지만 항상 스위치가 빠져 있다. 부분을 조립하여 전체의 완전성에 도달하지 못한다.

● 연역- 자연의 질서를 따르는 인간의 문법적 판단

● 귀납- 자연의 질서와 상반되는 단어와 개념의 인위적 조직  

자연은 연역되는데 인간이 인위적으로 조직한 단어와 개념은 귀납된다. 진리를 반영(反映)한다. 거꾸로 나타낸다. 그러므로 문장구조를 통하여 보완되어야 한다. 문장 안에서 포지션이 의미를 가지므로 보완될 수 있다.

자연의 질서 그대로가 존재론이다. 자연은 배경≫실체≫연관≫이행≫귀결로 간다. 이를 뒤집은 지각≫수용≫분석≫종합≫응용이 인식론이다. 여기서 연역되고 귀납되는 것은 순서다.

● 존재론의 연역 : (전체≫부분) 배경≫실체≫연관≫이행≫귀결

● 인식론의 귀납 : (부분≫전체) 지각≫수용≫분석≫종합≫응용

   

인식론을 존재론과 일치시키려면 응용≫종합≫분석≫수용≫지각의 순서여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모르기 때문이다. 알아야 응용을 할 것인데 몰라서 응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직관력이 있다. 영감이 있다. 뇌의 작동이 존재론을 반영하므로 뇌의 감성적 신호를 따라 연역할 수 있다. 계에 물려있는 질서의 수에 따라 긴장, 떳떳함, 아름다움, 자연스러움, 시원함이 느껴진다.

뇌가 자연의 질서를 읽어들이는 이유는 인간 행동의 상대성 때문이다. 학습은 귀납되지만 행동은 연역된다. 갑자기 호랑이가 덤벼든다면? 인식은 나중이고 행동이 먼저다. 행동은 자연의 연역법칙을 따른다.

행동은 상대와 나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호랑이가 가만이 있으면 나도 가만이 있어야 한다. 호랑이의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해서다. 호랑이가 덤비면 맞서거나 도망가야 한다. 이런 행동의 판단은 굳이 학습이 필요하지 않다.

내가 인식하지 않아도 상대가 알려주기 때문이다. 내가 멈추면 호랑이도 멈춘다. 내가 움직이면 호랑이도 움직인다. 내가 어떻게 해야할지 호랑이가 알려준다. 그러므로 행동은 언제라도 연역이다.

귀납은 부분에서 전체로 간다. 연역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간다. 인간의 행동은 절대적으로 전체가 먼저다. 부분에 집착하다가는 호랑이의 밥이 될 뿐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감정이 전체를 보도록 충동질한다는 것이다.

긴장이 그것이다. 호랑이 앞에서는 긴장한다. 긴장하면 전체를 본다. 뇌의 특정 부위가 활성화 된다. 긴장과 불안≫떳떳함과 부끄러움≫아름다움과 역겨움≫자연스러움과 어색함≫시원함과 답답함의 순으로 신호를 보내온다.

감정의 신호를 포착하여 계에 걸려있는 질서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무수히 실패한다. 감정의 신호들에도 많은 해석의 오류가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창의는 온갖 시행착오 끝에 무수한 오류시정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다.

이는 과학의 방법론과 다르다. 과학은 무오류주의를 신봉한다. 문제는 과학자들이 실제로는 과학의 방법론을 사용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과학의 방법은 자신의 성취를 객관화 하여 타인에게 전달하고 증명할 때 쓰일 뿐이다.

과학자들도 실제로는 영감에 의존한다. 영감은 행동에서 얻어진다. 연구실에서의 추론이 아니라 자연과의 정직한 대면에서 얻어진다. 과학의 방법론은 그렇게 얻은 영감을 개별사실에 적용하여 객관화 시키는 과정이다.

천재들의 발명은 연구실 밖에서의 우연한 착상에서 아이디어가 얻어졌다. 모르면서 일단 연역한 것이다. 예술분야에서는 천재들의 ‘모르면서 무턱대고 연역해보기’가 성공을 거두곤 한다.

과학적 방법론이 적용되지 않은 연역은 실패하지만 시행착오에 따르는 오류시정을 거쳐 실험을 반복하다 보면 우연히 성공하게도 된다. 그 성공의 원인을 분석하여 귀납논리에 따라 객관적 지식을 유도하는 방법을 쓴다.

전제와 진술

인간이 결함 투성이 언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이유는 눈치가 있기 때문이다. 눈치는 포지션이다. 상대성이 작용하는 대칭구조를 읽는다. 상황을 읽는다. 같은 단어라도 상황에 따라 의미가 다르다.

언어는 전제와 진술, 주어와 술어, 명사와 동사로 조직된다. 이들은 각각 대칭구조를 이룬다. 전제와 진술의 대칭 속에 주어와 술어의 대칭이 있고 그 속에 또 명사와 동사의 대칭이 있다.

언어는 콜더의 모빌처럼 단계적인 대칭구조를 만든다. 의미는 단어 내에 고유한 것이 아니라 일정부분 포지션 속에 숨어있다. 단어가 지시하는 개념에는 오류가 있지만 포지션에는 오류가 없다.  

포지션은 쓰인다. 쓰임새에는 오류가 없다. 쓰임새는 행동을 촉발하기 때문이다. 행동은 상대적이다. 쓰임새에 오류가 있다면 그 행동과정에서 상대에게 타격받는다. 인간의 행위는 실패로 돌아간다. 그리하여 퇴출된다.

인간이 쓰는 언어들은 그러한 검증과정을 거쳐 살아남은 것이다. 그러므로 오류가 없다. 쓰임새를 결정하는 포지션은 전제에 대해 진술, 주어에 대해 술어, 명사에 대해 동사다. 이 부분은 오류가 없다.

언어의 오류는 주로 그 반대편의 전제와 주어와 명사에서 일어난다. 속임수들은 항상 전제가 지시하는 게임의 규칙 속에 있고 주어가 지시하는 개념 속에 있고 그리고 명사가 나타내는 고도의 함축 속에 있다.

문제는 인간의 관심이 그 반대편에 있는 진술과 술어와 동사로 쏠린다는데 있다.

구조론에 따라 자연의 운행은 높은 질서에서 낮은 질서로 이행한다. 인간의 관심 역시 낮은 질서의 진술, 술어, 동사를 주목한다.

마술사들은 관객이 자신의 손을 주목하게 하는 수법을 쓴다. 마술사의 손끝에서 무언가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속임수는 다른 곳에서 진행된다. 속이기 위해 시선을 다른 곳으로 유도하는 것이다.

영어는 주어 다음에 오는 동사가 문장 전체를 규정하고 한국어는 맨 끝에 붙는 동사가 문장 전체를 일괄적으로 규정한다. 인간의 관심이 항상 동사로 쏠리기 때문에 주목되지 않은 전제와 주어와 명사로 속이는 것이다.   

● 높은 질서 - 전제, 주어, 명사

● 낮은 질서 - 진술, 술어, 동사

인간이 구축한 지식이나 개념들은 높은 질서에 속한다. 전제로 주어로 명사로 기능한다. 그 부분에 생략과 함축이 있다. 모든 속임수들은 잘못된 전제를 가진다. 이쪽은 인간의 관심에서 벗어나므로 속임수가 있다.

“유령을 봤다”고 하면 ‘봤다’에 주목할 뿐 ‘유령’에 주목하지 않는다. 뭔가를 본 것은 사실인데 그것이 유령은 아니다. 그러나 듣는 사람은 오직 ‘봤는지’만 논박하려고 하므로 속아넘어간다.

대표적인 것이 UFO다. ‘UFO를 봤다’고 하면 사람들은 ‘봤다’에 주목한다. 봤는지만 따지려 든다. 미확인비행물체는 출현한 바 없다. 우선 그것이 물체라는 증거가 없다. 물체인지를 확인하려면 부품 일부를 뜯어와야 한다.

또 비행체라는 증거가 없다. 사진에 찍혔다는 것이 비행의 증거는 아니다. 비행은 시각적 현상이 아니고 연기나 소리를 남기는 물리현상이다. 비행은 작용반작용의 법칙을 벗어날 수 없으므로 반드시 흔적이 남는다.

    

역설의 논리학

논리학은 자연의 질서가 인간의 인식에 반영되는 과정에서 순서가 뒤집혀져 입력된 언어적 지식을 본래대로 환원시켜 자연의 질서와 일치시키려는 학문이다. 그러므로 논리학은 통째로 역설이다.

지식의 귀납이 자연의 질서를 잘못 해석하므로 바로잡는 것이 역설이다. 역설은 패러독스다. 패러독스는 ‘사실이 아닌데 사실이다’이다. 이 명제는 모순처럼 보여지지만 전혀 모순이 아니다.

왜냐하면 언어는 포지션이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전제부의 ‘사실이 아닌데’에서 쓰인 ‘사실’과 진술부의 ‘사실이다’가 말하는 ‘사실’의 의미가 다르다. 같은 단어라도 포지션에 따라 의미가 다르다.

포지션의 문법적 성질을 무시하고 액면대로 해석하면 이 명제는 틀렸다. 그러나 언어는 전제와 진술, 주어와 술어, 명사와 동사의 단계적 대칭구조를 이루고 그 대칭구조 내의 포지션에 따라 2차적 의미를 가진다.

언어는 포지션에 따라 상대적 의미를 가지므로 명제 ‘사실이 아닌데 사실이다’는 부분에서 틀렸지만 전체에서 맞다. 단선구조로 보면 틀렸지만 입체모형으로 보면 옳다. 틀렸는데 옳다? 벌써 혼선이 시작된다.

이러한 혼선을 막기 위하여 구조주의 분류이론에서는 구분지 ‘이다/아니다, 있다/없다, 같다/다르다, 옳다/그르다, 맞다/틀리다’를 둔다. 이때 ‘틀렸는데 맞다’가 되면 상위단계의 옳다/그르다 판단으로 이행한다.

● 사건에서 - 이다/아니다

● 주체에서 - 있다/없다

● 방향에서 - 같다/다르다

● 운동에서 - 옳다/그르다

● 정보에서 - 맞다/틀리다

틀렸는데 맞으면 옳다로, 옳은데 그르면 같다로, 같은데 다르면 있다로, 있는데 없으면 이다로 판정된다. 이순신 장군은 있는데 없다. 책에도 있고 광화문에도 있는데 만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다’가 된다. 이순신장군이다.

이러한 구분이 필요한 이유는 많은 진술들이 하나의 독립적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파리가 서울에서 부산까지 갔다. 과연 파리는 갔을까? 가기는 갔는데 황소의 잔등에 붙어갔다면?

파리의 부산행은 독립적 사건이 아니다. 실제로 간 것은 황소이지 파리가 아니다. ‘파리가 부산에 갔다’고 표현할 수 있지만 엄정한 과학적 기준을 들이댔을 때 옳지는 않다. 이 부분을 엄밀하게 진술하면 문장이 길어진다.

인간은 흔히 편의주의에 따라 옳지 않은 표현을 쓴다. 이를 구태여 문제삼는 사람도 없다. 눈치로 대충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을 그렇게 했다가는 지구가 돌지 않는 사태가 일어난다.  

어쨌든 파리는 부산에 갔다. 갔는데 빌붙어 갔다. 파리는 독립적 존재이지만 파리의 이동은 독립적 사건이 아니다. 착오는 여기서 일어난다. 파리가 독립적 존재이므로 파리의 이동도 독립적 사건인 것으로 여긴다.

예의 구분지 다섯 중 이다/아니다 판정에서 ‘이다’가 독립적 사건이며 그 이하의 있다, 같다, 옳다, 맞다는 독립적 사건이 아니라 어떤 하나의 사건을 구성하는 일부다. 인간의 모든 오류는 여기서 일어난다.

‘앞을 쳐라’고 지시했는데 앞을 치기 위하여 팔을 뒤로 빼는 사전동작을 하면 그만큼 뒤를 쳤으므로 분명 틀렸지만 이는 부분이 틀린 것이고 전체로는 맞다. 부분을 보면 항상 착시현상이 일어난다. 이것이 역설이다.

앞으로 가려고 노를 저으면 노를 뒤로 보냈으므로 분명 뒤로 간 것이다. 이 지점에서 오류로 판정하면 착오다. 그 결과 배가 앞으로 갔으므로 옳다. 사건 전체를 보아야 한다. 이러한 혼선을 방지하기 위해 구분지 5가 있다.  

● 사건에서 - 이다/아니다 : 전제부와 진술부의 연결 판정.. A면 B다.

● 주체에서 - 있다/없다 : 작용과 수용에서 심과 날 판정.. A는 B다.

● 방향에서 - 같다/다르다 : 공간적 방향에서 대칭성 판정.. A≫B다.

● 순서에서 - 옳다/그르다 : 시간적 순서에서 변화를 판정.. A→B다.

● 정보에서 - 맞다/틀리다 : 개별 정보의 사실성 판정..  A와 B다.

명사들은 독립되어 있다. 파리나 황소는 독립적 존재다. 사람과 자동차는 독립되어 있다. 그러나 사건은 전혀 독립되어 있지 않다. 파리는 황소 등에 붙어 있고 사람은 자동차 속에 타고 있다. 포함되어 있다.

논리학에서의 모든 오류는 사건의 불완전성을 무시한 채 논리를 전개하기 대문에 일어난다. 독립된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어떤 사건의 일부를 구성하는 과정인데 그 점을 무시하고 논리를 전개하므로 궤변이 가능하다.

인간의 언어사용은 대개 투박하다. 사람들은 yes/no로 판정하려 한다. 청문회의 패널들은 ‘예/아니오로 답하시오’ 하고 증인을 윽박지른다. 무리하다. 역설은 이 부분을 투박하게 다루는데 따른 오류의 시정이다.

뉴턴의 고전역학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으로 검증하면 안 맞는다. 그러나 뉴턴이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뉴턴은 거시세계를 다루었기 때문이다. 뉴턴은 구분지 ‘이다-있다’의 세계를 다룬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미시세계에서는 상대성이 작용한다. 양자물리학은 거대한 역설의 세계다. 미시세계의 상대성이론이 거시세계의 고전역학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상대성-양자론이 더 엄밀할 뿐이다.

뉴턴은 ‘이다-있다’로 대충 말했는데 아인슈타인이 그 내부를 들여다 보니 ‘같다, 옳다, 맞다’가 들어있었던 것이다. 뉴턴이 크게 구획한 바운더리 안에서 상대성이론과 양자론의 사건이 세부적으로 진행된 것이다.

우주는 통째로 역설이다. 우주는 입체적 모형이다. 물리학은 아직 그 모형에 도달하지 못했다. 뉴턴의 ‘이다-있다’에서 아인슈타인의 ‘같다’, 양자론의 ‘옳다’를 거쳐 ‘맞다’의 통일장이론에 도달할 때 까지 반전은 거듭된다.

제논의 역설

논리학에서 쓰는 ‘참/거짓’의 판정은 틀렸다. 입체공간에서 일어난 일을 무리하게 선(線)의 논리로 환원시켜 설명한다. 우주공간에서 일어난 고도의 복잡한 움직임을 기차궤도에 올려놓고 앞과 뒤만 가지고 설명한다.

기차는 선(線)을 달린다. 선은 앞과 뒤를 가진다. 둘 중 하나가 옳으면 하나는 그르다. yes 아니면 no다. 선은 흑백논리의 이분법이 적용되는 세계다. 그러나 입체의 세계는 다르다.

새는 오른쪽 날개와 왼쪽 날개를 동시에 저어서 앞으로 간다. 오른쪽과 왼쪽 중 하나를 택일하지 않고 양자를 통일하는 더 높은 차원의 새로운 지평을 연다. 역설은 흑백논리의 이분법을 초월하는 입체적 사고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파리가 날아갔다. 버스 속에서 날아간 것이다. 이때 희랍의 궤변가 제논이 나타나서 ‘날아간 파리는 날아가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참인가 거짓인가? 앞의 날아감과 뒤의 날아감이 포지션이 다르고 뜻이 다르다.

제논의 궤변대로다. 발이 빠른 아킬레스도 한 걸음 앞서 가는 거북이를 추월할 수 없다. 쏜 화살은 날아가지 않았다. 쏜 화살은 가속도를 가지지 않는 한 이동공간 위에 정지해 있다. 과학적으로 엄밀하게 보면 그렇다.

쏜 화살은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파리처럼 진행하는 매 공간단위에서 정지해 있다. 제논의 궤변이 옳다. 그러나 받아들일 수 없다. 뭔가 이상하다. 이 지점에서 사실이 곧 진실이라는 믿음은 처절하게 깨부숴져야 한다.

제논이 속임수를 쓴 것이 아니라 언어가 엄밀하지 않은 것이다. 언어를 신뢰하므로 착오에 빠진다. 논리학은 사실을 규명하는 학문이 아니라 거꾸로 그 사실을 비추어보는 거울인 언어의 결함을 규명하는 학문이다.

쏜 화살은 날아가지 않으므로 지구는 태양을 돌지 않는다. 지구는 태양주변 궤도 상에 정지해 있다.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지구는 태양주변궤도라는 버스 위에 무임승차하고 있다. 실제로 간 것은 버스지 지구가 아니다.

‘지구는 태양을 돈다’라고 말하려면 지구가 자체 추진력을 가져야 한다. 지구는 태양주변공전궤도라는 버스를 타고 있고 그 버스의 주인은 태양이다.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이 아니라 태양이 지구를 돌린다.

갈릴레이가 틀린 것은 아니다. 언어는 함축되므로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말해도 된다. 쑥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먹어야 한다. 언어가 원래 결함이 있기 때문에 해석의 오류 가능성을 전제로 할 때 갈릴레이는 옳다.

지구는 태양주변공전궤도에 잡혀서 정지해 있다. 이런 복잡구조를 무시하고 참/거짓, 혹은 yes/no로 판명하려고 한다면 무리다. 독단이다. 잘못은 언어에 있다. 참/거짓의 이분법 잣대를 들이대는 자체로 잘못이다.

[어떤 그레데인이 (그레데인은 항상 거짓말쟁이다)]’라고 말했다면 이 명제는 참인가 거짓인가? 포지션 개념을 적용하면 쉽게 풀린다. 연산규칙에 따라 먼저[대괄호]를 판정하고 다음 (소괄호)를 판정해야 한다.

구조론에 따르면 하위단계가 상위단계를 판정할 수 없다. 후건이 전건을 결정할 수 없다. 부분이 전체를 침범할 수 없다. 항상 상위단계≫하위단계로 일방향으로만 진행된다. 연역된다. 범위는 점점 좁혀질 뿐이다.

(소괄호)의 ‘그레데인은 항상 거짓말쟁이다’는 표현은 대괄호의 어떤 그레데인에 적용되지 않는다. 포지션 개념을 적용하면 생략되고 함축된 부분이 드러난다. 위 명제가 참이려면 (소괄호) 앞에 ‘어떤’을 집어넣어야 한다.

[어떤 그레데인이 (어떤 그레데인은 항상 거짓말쟁이다)]로 말한 것이다. 참된 논리학은 잘못된 진술을 가지고 참/거짓을 다투는 것이 아니라 포지션 개념을 적용하여 생략된 부분을 위와 같이 보완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적인 언어사용에 있어서 이렇듯 명석하게 말하지 않는다. 이다/아니다, 있다/없다, 같다/다르다, 옳다/그르다, 맞다/틀리다로 세분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장 속의 대칭구조를 분석하면 포지션을 알 수 있다.

다섯가지 세부 연산규칙들

역설은 속임수가 아니다. 실제로 일어나는 자연의 법칙인데 인간의 언어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빚어진 혼선일 뿐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다섯 구분지로 된 세부연산규칙이 필요하다.

구조론에 따르면 점에서 점을 칠 수 없고, 선에서 선을 칠 수 없다. 항상 입체에서 각을 치고 각에서 선을 친다. 작용과 수용 중에서 작용쪽이 높은 포지션을 차지하고 낮은 포지션의 상대를 친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하기 전에 먼저 상위단계의 포지션으로 이행하는데 이 과정은 인간의 눈에 잘 포착되지 않는다. 권투선수가 오른손 혹을 치기 위해서는 먼저 내밀었던 왼손잽을 당기면서 그 반동으로 쳐야 한다.

이때 몸통은 왼팔과 오른팔을 동시에 통일하는 상부구조다. 펀치는 팔이 아니라 몸통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동작은 항상 몸통을 거쳐 나아간다. 이 과정은 잘 이해되지 않는다. 그래서 역설이 있는 것이다.

점, 선, 각, 입체, 밀도의 다섯 포지션이 있다. 표적은 항상 부분에 있으며 부분으로 이행하기 전에 전체를 거쳐간다. 점은 선을 거쳐가고, 선은 각을 거쳐가고, 각은 입체를 거쳐가고, 입체는 밀도를 거쳐간다.

앞으로 가기 위해서는 항상 먼저 뒤로 가야 한다. 벽에 등을 딱 붙여서는 움직일 수 조차 없다. 조금이라도 뒤로 가야 한다. 그러므로 역설이다. 논리학은 존재의 근본원리인 역설을 해명하기 위해 존재한다.

역설은 포지션 변경이다. 모든 운동은 높은 포지션에서 낮은 포지션을 친다. 그러므로 사건은 높은 포지션에서 시작되는데 인간의 지식은 귀납논리를 따르므로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포착하지 못한다.

● 배중률의 밀도 포지션. 이다/아니다(A면 B다) 전제와 진술의 연결 판정

● 동일률의 입체 포지션. 있다/없다(A는 B다) 작용, 수용에서 심과 날 판정

● 모순률의 각 포지션..  같다/다르다(A≫B다) 공간적 대칭에서 방향성 판정

● 인과율의 선 포지션..  옳다/그르다(A→B다) 시간적 변화에서 순서판정

● 한정률의 점 포지션..  맞다/틀리다(A와 B다) 개별 정보의 사실성 판정

기존의 논리학에서는 배중률, 동일률, 모순률, 인과율이 알려져 있다. 구조주의 논리학은 여기에 한정률을 추가하여 5를 완성한다. 한정률은 의미를 한정하여 사건을 완결시키는 역할을 맡는다. 한정률이 없으면 사건은 끝나지 않는다.

날아가는 화살은 매 시간단위 내에서 정지해있다. 무한소와 무한대 역시 계속 작아지거나 커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한을 성립시키는 비례관계 속에 정지해있다. 무한도 하나의 포지션에 불과하다. 이것이 한정률이다.  

● 배중률- 이다/아니다.. 하나의 독립적 사건인지 여부를 판정한다. 하나의 전제부와 진술부 사이의 대칭구조가 성립하고 있다.

※ A면 B다. ⇒ A(사과는)이면 B(빨갛다)이다. 전제부와 진술부를 단순 연결한다. 이때 링크는 하나여야 한다. 전제와 진술이 통합되어 하나의 독립적 사건을 이룬다. 순환성을 판정한다.

● 동일률- 있다/없다.. 사건을 일으키는 작용측의 심과 구분지로 맞서는 수용측 날 사이의 대칭구조를 판정한다. 이때 심 1에 날 2가 대칭을 이룬다. 심이 날에 앞선다는 점이 중요하다.

※ A는 B다. A(사과는)는 B(껍질이+빨갛다)다. 사과는 심 1, 껍질+빨갛다는 날 2다. 껍질+빨갛다 둘을 판정하는 기준이 심의 포지션을 차지한 사과다. 전제부의 심이 진술부의 두 날을 규정하는 룰러가 된다. 분할성을 판정한다.

● 모순률- 하나의 공간적 방향에서 전제부의 전체≫진술부의 부분의 집합으로 이행한다. 높은 질서에 낮은 질서가 종속된다. 주어부에 종속된 술어부 내의 대칭구조를 판정한다.

※ A≫B다. A(사과는)에 B(껍질이+빨갛다)가 포함된다. 그 역은 성립되지 않는다. 껍질이 빨간 특정한 그것은 사과에 포함되지만 모든 사과가 껍질이 빨간 것은 전혀 아니다. 가역성을 판정한다.

● 인과율- 하나의 시간적 순서에서 전제⇒진술로 이행한다. 낮은 질서가 사건의 시간적 진행을 따라 전제의 높은 질서를 대체하고 완전히 분리된 독립적 진술인지를 판정한다.

※ A→B다. A(사과는)였었는데 B(껍질이+빨갛다)가 되었다. 사과는 사과대로 있고 껍질+빨간 것은 그것대로 공존하면 안 된다. 사과를 소거시키고 껍질+빨간 것으로 완전히 대체되어야 한다. 연속성을 판정한다.

● 한정률.. 하나의 결말을 남기고 사건이 종결되어야 한다. 사건이 연장되어서 안 된다. 낮은 질서를 구성하는 내용이 각각 최종적으로 결말을 짓는 팩트인지를 판정한다.

※ A와 B다. A(사과는)와 B(껍질이+빨갛다)다. 껍질과 빨갛다는 사과가 정한 바운더리를 벗어날 수 없다. ‘사과는 빨갛다. 빨간 것은 토마토다.’로 의미가 확장되어서 안 된다. 반복성을 판정한다.

배중률과 동일률은 전제부 위주로 판정한다. 모순률은 전제부에서 진술부로 전환된다. 인과율과 한정률은 진술부 위주로 판정한다. 그리고 항상 1을 따라간다. 논리학은 모든 국면에서 1이어야 하는 조건을 충족하는지를 판정한다.

배중률은 하나의 사건인지를 판정한다. 동일률은 사건을 일으키는 작용측의 심이 하나인지를 판정한다. 주어가 하나여야 하는 것이다. 모순율은 공간적 방향성에서 하나의 방향으로 진행되는지를 판정한다.

인과율은 시간적 순서에서 진행이 하나인지를 판정한다. 진술부가 전제부를 완전히 대체해야 하는 것이다. 한정률은 최종적으로 진술되는 정보가 하나인지를 판정한다. 거기서 또 무언가를 남긴다면 오류다.

단계적으로 전개되는 구분지 다섯 중 어디라도 둘이면 오류다. 이 부분이 중요한 이유는 문장에서 의미가 함축되기 때문이다. 하나의 단어가 포지션에 따라 여러 의미로 쓰이기 때문에 의미가 확장되어 혼선이 있다.

● 배중률 - 언제/어디서.. 하나의 시공간에서 알리바이를 구성한다.

● 동일률 - 누가/무엇을.. 하나의 가해하는 작용측에서 범인을 특정한다.

● 모순율 -  왜/어떤..   하나의 범인에서 피해자로 방향전환된다.

● 인과율 - 어떻게/하여지게.. 하나의 수용측 피해자에서 사건을 추론한다.

● 한정률 - 하였나/되었나.. 하나의 결과로 제한되는 데서 단서를 얻는다.

다섯 구분지는 통합되어 하나의 사건을 구성한다. 사건은 연역적으로 일어나므로 배중률부터 시작되지만 인간의 인식은 귀납논리를 따르므로 다섯째 한정률에서부터 거꾸로 추론을 시작한다.

● 추론의 순서 - 한정률≫인과율≫모순율≫동일률≫배중률

한정률은 사건을 정지시켜 단서를 확보한다. 버스가 달리고 있다면 단서를 얻을 수 없다. 화살이 날아가고 있다면 단서를 얻을 수 없다. 현장에서 단서를 얻을 수 있는 이유는 사건이 어떤 형태로든 종결되기 때문이다.

범인이 현장에 꽁초를 남겼다면 꽁초는 그곳에 머물러 있다. 꽁초투척사건은 종결된 것이다. 그러므로 단서를 얻을 수 있다. 한정률에서 확보된 단서에 인과율을 적용하여 피해사실을 확보할 수 있다.

인과율로 피해사실을 확보하고, 모순율로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방향을 틀고, 동일율로 범인을 특정하고 배중률로 알리바이를 깨뜨린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추론은 완결된다. 모든 과학의 탐구는 이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인과율은 결과가 원인을 대체한다는 것이다. 범인이 흉기로 찔렀다면 범인의 찌르기는 원인이가 피해자의 상처는 결과다. 범인의 찌르기가 완전히 소멸하고 피해자의 상처가 남는다. 원인이 100퍼센트 결과로 대체된 것이다.

모순율은 원인에서 결과로 방향을 트는 것이다. 그것은 흉기다. 흉기가 범인의 찌르기를 피해자의 상처로 방향전환 시킨 것이다. 이러한 방향전환을 절대적으로 일어난다. 그 방향은 항상 일방향적이다.

범인이 찔렀는데 범인이 찔리는 경우는 없다. 모순율에 따라 항상 피해자가 찔린다. 이 논리를 이용하여 피해자에서 상처에서 범인의 찌르기를 특정할 수 있고 그 매개인 흉기를 증거물로 제시할 수 있다.

동일률은 범인이 주장하는 ‘찔렀지만 나는 범인이 아니다’는 궤변을 깬다. 동일률에 따라 심 1이 날 2를 지배한다. 범인 1이 칼+찌르다의 2를 포괄한다. 칼+찌르다는 범인에 종속된다. 그러므로 범인이 특정된다.

배중률은 범인의 알리바이를 깬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를 연상할 수 있다. 만약 한 사람이 두 사람이거나 혹은 하나의 사건이 두 사건이라면 범인은 ‘내가 죽였지만 그래도 내가 죽이지 않았다’고 둘러댈 수 있다.

내가 죽인 것은 이 사건이고 그가 죽은 것은 저 사건이라 우길 수 있다. ‘내가 찔러죽인건 맞는데 그가 농약을 마시고 자살했다고 우길 수 있다. 그러나 배중률이 사건을 하나로 확정시키기 때문에 범인은 빠져나갈 수 없다.

논리학은 차례로 판정되는 다섯 구분지가 하나의 사건으로 통일되어 입체적인 모형으로 구축되며 모든 국면들에서 하나의 사건, 하나의 심, 하나의 방향, 하나의 순서, 하나의 결과인지를 규명하고 판정한다.  

 

논리의 오류들

논리는 1을 찾는다. 입체적 모형의 모든 국면에서 1이어야 한다. 아래 명제들에서 전제부와 진술부는 '그러므로'에 의해 연결되어 1을 이룬다. 검증결과 2라는 점이 밝혀져서 링크 그러므로가 깨지는 형태로 오류는 확인된다.

● 배중률 위반 - “사과는 빨갛다. 그러므로 사과는 빨갛지 않다.”

※ 사건이 하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건이 둘이다. 빨간사과 사건과 빨갛지 않은 사과 사건이 있다. 사건은 하나여야 한다. 사건이 둘이므로 둘을 잇는 링크 ‘그러므로’가 깨진다.   

● 동일률 위반 - “사과는 빨갛다. 그러므로 사과는 노랗다.”

※ 술어 하나에 주어가 둘이다. 빨간 사과와 노란 사과다. 사건은 작용과 수용으로 나눠지고 수용은 작용에 종속된다. 진술이 전제에 종속되지 않고 독립되었으므로 둘을 잇는 링크 ‘그러므로’가 깨진다.

● 모순율 위반 - “사과는 빨갛다. 그러므로 모든 빨간 것은 사과다.”

※ 주어와 술어가 구분되지 않는다. 후건이 전건을 칠 수 없다. 진술이 다시 전제가 될 수 없다.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될 수 없다. 전제부의 빨갛다와 진술부의 빨간 것은 의미가 다르다.

● 인과율 위반 - 사과는 사과다. 그러므로 빨간 것은 빨갛다.

※ 주어 하나에 술어가 둘이다. 원인과 결과가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 진술부가 전제부로부터 독립하여 있다. 원인의 사과는 시간 상에서 과거로 소거되고 현재는 결과의 빨간 것으로 완전히 대체되어야 한다.

● 한정률 위반 - “사과는 빨갛다. 그러므로 빨간 것은 토마토다.”

※ ‘사과는 빨갛다’에서 술어 빨갛다의 의미와 ‘빨간 것은 토마토다’에서 주어 빨갛다의 의미는 다르다. 전자는 사과 내부의 속성이고 후자는 사과 외적인 사건의 지시다. 의미가 함부로 확장되고 있다.

모순이라고 하면 창과 방패의 패러독스다. 창이 방패를 이긴다가 전제부를 이루고 방패가 창을 이긴다가 진술부를 이룬다. 창이 전건이고 방패가 후건이다. 이 명제에서는 후건이 전건을 치고 있다.

전제부에서 술어로 주어에 종속되었던 내용이 진술부에서 계급이 한 단계 상향되어 주어의 자격을 획득했다. 주어와 술어의 계급이 같아졌다. 구조론에서는 포지션이 의미를 가지므로 이 경우 충돌이 일어난다.

논리학은 하나의 사건을 입체적으로 구성한다. 하나의 사건 안에서 계급이 같은 둘이 공존할 수 없다. 토끼는 빠르다와 빠른 것은 토끼다가 같을 수 없다. 전자는 ‘모든 토끼는 빠르다’이고 후자는 ‘어떤 빠른 것은 토끼다’이다.

‘창이 방패를 이긴다’고 전제했다면 그 전제가 불가침의 룰이 되어 후건을 구속한다. ‘모든 창은 모든 경우에 어떤 방패를 이긴다. 어떤 방패는 어떤 경우에 어떤 창을 이긴다’가 된다. 언어의 포지션 자체가 이러한 의미를 부여한다.

거짓말하기 시합에서는 항상 나중에 말하는 사람이 이긴다. 앞사람이 어떤 거짓말을 했더라도 거기에 1을 추가하여 더 큰 거짓말을 탄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논리의 전개에서는 항상 전제가 진술을 이긴다.

창을 먼저 말했으므로 창이 이긴다. 전제부가 진술부를 규정한다. 진술부는 전제부를 규정할 수 없다. 기존의 논리학은 이러한 입체적 구조를 무시하고 선 위에 나열한다. 포지션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궤변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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