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읽기

깨달음은 실로 대단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회에 받아들여지는가 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핵융합 발전과 같다. 모든 문제를 해결할 듯한 비전을 던져주었지만 아직은 아무것도 아니다. 더 전개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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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은 의사소통 수단이다. 이러한 본질에 천착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의사소통 수단은 언어와 문자다. 그리고 미디어와 인터넷이 역시 의사소통의 수단이 된다. 문화와 예술이 역시 의사소통 수단이다.

깨닫는다는 것의 의미가 문자를 깨쳤다는 자랑에서 끝나지 않고 그 문자로 편지를 쓸 수 있어야 한다. 언어와 문자가 소통의 수단이라면 그 언어와 문자를 사용한 문화와 예술로 발전해야 하는 것이다.

콘텐츠가 있어야 한다. 그 언어와 문자로 된 작품이 나와주어야 하고 그 작품을 소비하는 독자층이 형성되어야 하고 그 독자층을 노리는 작가군이 등장해서 시장이 형성되어야 한다. 저절로 돌아가는 시스템으로 발전해야 한다.

한국이 독일보다 먼저 금속활자를 만들었지만 그것으로 시장의 수요를 창출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 문자로 보급해야할 성서가 없었기 때문이다. 구텐베르그는 성서보급이라는 새로운 시장을 발굴했기 때문이 금속활자를 보급할 수 있었고 나아가 산업화의 방아쇠를 당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글자를 깨쳤다고 깨친 것이 아니고 그 글자로 시를 쓰고 소설을 쓰고 그렇게 문화를 일구어야 한다. 시장에서 수요를 창출해야 한다. 언어와 문자는 소통의 수단이다. 그 언어와 문자로 무언가를 소통시켜야 한다.

그런데 무엇을 소통시키지?

구조론을 쓰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핵융합이 가능하다고 이론적으로 증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핵융합로를 건설해서 거기서 전기를 뽑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인류에게 이득이 되어야 한다.

한글이 500년 전에 만들어 졌지만 이 나라에서 제대로 사용된 역사는 50년이 채 되지 않는다. 왜 한글은 사용되지 않았나? 한글은 백성의 언어다. 백성의 시대가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사용되지 않은 것이다.

깨달음은 미학의 언어다. 미학의 시대가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깨달음은 사용되지 않는다. 깨달음의 편에 서는 인구가 절대적으로 늘어나야 한다. 깨달음으로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어야 한다. 콘텐츠를 생산해야 한다.

지금 깨달음이라는 문자를 해독할 사람은 있는데 그 문자로 편지 쓸 사람도 없고 그 편지를 받을 사람도 없으며 그 편지를 주고받을 우편체계도 없다. 그러니 산 중에서 혼자 우두커니 앉아 중얼거릴 뿐이다. 소통되지 않는다.

깨달음을 이해시킨다는 것은 조선시대 유림들에게 산업화를 이해시키는 것 만큼 어렵다. 그들은 글 배운 지식인이었지만 산업화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이 나라에 산업화 시대가 열렸지만 실로 마음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그 위력에 굴복한 것 뿐이다.

유클리드 기하학이 중국에 전해진 것은 수백년이나 되었지만 청나라 지식인들은 반응하지 않았다. 좋은 것이 있고 그것을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인간은 결코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

서구문명의 출발점이 유클리드 기하학일진대 그것이 왜 중국에서는 아무런 반응을 낳지 않았을까? 그것을 보급한 사람이 있고 배운 사람이 있었는데도? 소통은 옷과 같아서 한복이든 양복이든 일정한 양식이 있다. 양식은 바꾸지 못한다.

오늘날 한복에서 양복으로 바뀐 것은 삶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생각이 바뀌어도 삶이 바뀌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깨달음이 몇몇 사람의 생각을 바꿀 수는 있으나 모든 사람의 삶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다.

구조론은 세상을 해석하는 경로다. 익스프롤러가 웹을 해석하는 경로이듯이. 그 세계를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하다. 받아들이게 하려면 그것이 이익이 된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여 한다. 시스템을 돌려야 한다.

인류학 서적을 읽었다면 비문명권의 부족민들에게 문명의 효용성을 납득시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하게 된다. 백인 선교사가 돌도끼를 쓰는 부족민에게 쇠도끼를 나눠주어도 그들은 사용하지 않는다. 이런 사례는 무수히 많다.

깨달음을 말함은 문자를 모르는 비문명권 부족민들에게 문자의 효용성을 이야기함과 같고 컴맹에게 컴퓨터의 효용성을 이야기함과 같다. 그들을 이해시키기는 어렵지만 굴복시키기는 오히려 쉽다.

굴복시키려면 충분한 숫자가 있어야 한다. 작가군과 독자군이 등장해야 한다. 시장에서 수요를 창출해야 한다. 콘텐츠를 생산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깨달음이라는 새로운 의사소통 형태를 받아들이지 않을 태세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굴복할 것이다. 이익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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