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읽기
헤겔은 역사를 세계정신의 자기실현 과정으로 보았다. 구체적으로는 인간의 자유가 점차 확대되는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군주 일인의 자유(제정)에서 몇몇 특권층의 자유(귀족정)로,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자유(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것이며.. 그것이 곧 세계정신이라고 말했다.

그는 나폴레옹군의 행렬을 보고 “보라! 저기 말을 탄 세계정신이 온다.”고 외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보기좋게 무산되었다. 나폴레옹의 정신은 세계정신이 아니라 프랑스정신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나폴레옹이 잠들어 있던 독일정신을 일깨웠다는 점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보라 저기 세계정신이 온다’고 외치는 사람이 있다. 그 말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저쪽의 좌파들은 북구의 사민주의를 두고 그렇게 말하고 있다. 다른 쪽의 수구들은 미국풍, 혹은 일본풍을 두고 그렇게 외치고 있다.

공허할 뿐이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 내부에서 만들어지는 한국정신은 그러한 외풍의 부대낌 속에서 얻어지고 단련된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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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은 세계정신의 구현자(?)로 기대되었던 나폴레옹을 위해 영웅교향곡을 작곡하기도 했지만 그 영광은 황제가 된 나폴레옹 스스로에 의해 버려지고 말았다.

베토벤의 음악적 성취에 의한 영광은 결국 나폴레옹이 아닌 독일정신의 구현자들에게로 돌아갔다. 언제나 이런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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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카이사르, 나폴레옹의 공통점은? 일종의 세계정부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그들은 동서의 소통을 위한 메신저로 학자와 예술가를 존중하였다. 그러나 과연 그들에 의해 세계정신은 구현되었는가?

알렉산더는 그리스정신을, 카이사르는 로마정신을, 나폴레옹은 프랑스정신을 구현한 것에 불과한 것 아닌가?

아니 그것도 많이 쳐준 것이고.. 나폴레옹의 행각은 프랑스정신의 구현에도 실패한.. 역사의 반동이자 독재자의 탐욕에 불과한 것 아닌가? 의심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기서 일정한 패턴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안의 진짜인 한국정신의 구현을 위해서 말이다. 헤겔이 말한 세계정신의 개념은 일정부분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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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음악사에 비유한다면.. 헤겔이 말한 바, 역사가 세계정신의 자기실현 과정이라면.. 음악사 역시 음악적 세계정신의 자기실현 과정이 아니겠는가?

18세기 이후 고전파, 낭만파, 국민악파로 발전하여 가는 패턴은 헤겔이 말한 자유의 확대과정과 유사하다.

최초 극소수 엘리트가 참여하던 단계에서 고전파가 성립되어 하나의 핵을 만들었으며, 점차 문호가 개방되어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여 그 핵에다 살을 붙인 것이 낭만파라면.. 그렇게 늘어난 살에다 주변에 또다른 핵을 만든 것이 국민악파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표면의 패턴을 읽는 즉.. 하나의 비유에 불과하며, 그것도 일정한 시대, 일정한 범위 안에서나 적용되는 것일 수 있다.

음악은 고전파의 논리적인 형식미 위주에서.. 낭만파의 감정의 흐름을 중요시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점차 살을 찌웠고.. 그렇게 찌워진 살에 의해 국민악파라는 변방의 새로운 핵의 등장이 가능한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이러한 발전 패턴은 물리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과 더 넓은 문화권의 참여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발전패턴은 음악 뿐 아니라 모든 예술 장르 혹은 문화 분야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고전파라는 것은 오스트리아의 ‘비인’이라는 하나의 도시가 중심이 된 것이며, 낭만파는 몇몇 유럽의 도시로 더 확대된 것이며, 국민악파는 더 여러 국가로 확대된 것이다.

● 세계사의 추동력으로서의 세계정신
- 한 사람의 자유≫몇몇 사람의 자유≫모든 사람들의 자유

● 음악의 발전패턴
- 하나의 도시 ≫ 몇몇 도시 ≫ 여러 국가들

예컨대.. 오늘날 우리나라에 새로운 방식으로 등장하고 있는 민족주의 경향을 비판하기에 여념이 없는 강단좌파들이 말하는 세계주의라는 것도 겉으로는 보편을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도시, 혹은 극소수 엘리트집단을 중심으로 작은 하나의 핵을 형성한 것에 다름 아니며.. 그것이 점차 발전하여 살을 찌우는 과정에서 유시민류 자유주의자 낭만파 그룹이 자연스레 생겨나는 것이며..

더욱더 도시가 팽창하여 주변에 부도심들이 생겨날 때는.. 당연하게도 이념의 국민악파가 등장하는 것이다. 최근의 반일반미 민족주의 경향은 그러한 문명권의 확대와 관련이 있다.

이러한 전개는 역사의 필연이다. 고전파 음악이 ‘제시부, 전개부(발전부), 재현부’로 나뉘는 소나타 형식을.. 정치가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고전파가 제시부였다면 낭만파가 전개부였고 국민악파는 재현부가 된다.

● 소나타의 형식 - 제시부, 전개부, 재현부
● 세계주의 표방의 고전적 강단좌파 ≫ 유시민을 필두로 한 자유주의자 낭만파 세력 ≫ 월드컵의 길거리응원을 낳은 민족주의 경향의 네티즌세력.

강단좌파들이 네티즌의 주도를 탐탁치 않게 보는 것도.. 비유하자면 고전파에서 낭만파로, 혹은 국민악파로 전개하는 자연스런 발전패턴을 거부하고, 고전파의 형식미학을 지속하려는 의도와 같다.

사회주의란 본래 인류의 보편가치를 추구한 것이며, 최근에 등장하고 있는 진보진영 내의 민족주의는 그렇게 발굴된 보편가치를 우리 안에서 재발견 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국민악파가 등장한 심리적 배경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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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처음 광신도라고 불렀다. 그 다음엔 노빠라고 부르더니 이제는 유빠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제시부, 발전부, 재현부’로의 자연스러운 전개과정이라고 믿는다.

처음 제시부에서 DJ가 하나의 핵을 형성한 것이며.. 말하자면 컨셉을 제시한 것이며, 구체적으로는 북진통일에서 햇볕정책으로의 변화다.

다음 발전부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거기에 살을 붙였고 구체적으로는 탈권위주의와 분권형 국정운영으로 논리를 부여했고.

마지막 재현부에서 이해찬, 정동영, 김근태, 강금실, 유시민이 각각 하나의 부도심을 형성한 채로 각자 자기위치에서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자연스러운 도시의 발달과정과 흡사하다. 처음 제시부에서 하나의 중심가가 생기고, 다음 발전부에서 그 주변에 상가와 주택가와 유흥가, 문화의 거리 등이 각각 자리를 잡아 점차 살을 찌우고.. 도시가 어느 정도 팽창하면 거기에 여러개의 부도심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진보운동 역시 강단좌파의 고전파에서, 자유주의 경향의 낭만파로 그리고 민족주의 경향의 국민악파로 발전하여 가는 것이며.. 그 내용은 그 판구조에 뛰어든 참여자 숫자의 절대적인 증가와 관련이 있다.

고전파로는 극소수 엘리트를 수용할 뿐 더 많은 인간을 그 그릇에 담아내지 못한다. 대중은 거기서 역할이 없다. 세계주의 혹은 국제주의라는 입장은 독일이나 프랑스 등지로 유학을 다녀올 수 있는 특권계급에 한정된 것이다.

● 소수 엘리트(강단좌파).. 도시 중앙에 핵(도심)을 만든다.

● 다수 활동가들(자유주의자).. 도시 주변에 다양한 상업지구, 주택지구, 문화지구로 살을 찌운다.

● 수 많은 네티즌들(민족주의 성향).. 도시 외곽에 부도심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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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역사기록에 있어서 연대기와 더불어 열전을 쓰는 것과 같다. 어떤 지극한 경지를 탐하려면 반드시 끝을 보아야 한다. 끝을 보려면 목표를 좁혀야 한다.

그렇게 범위를 좁히다 보면... 그것은 한 민족, 한 국가, 한 동아리, 한 인물 안에서 더 잘 구현되곤 한다.

그러한 경향이 DJ광신도니 노빠니 유빠니 하는 식으로 비판되지만.. 그것은 역사가 큰 승부를 벌여 하나의 단계를 뛰어넘기 위해, 목표를 좁히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다.

DJ광신도도 없고 노빠도 없고 유빠도 없다. 민중은 태산처럼 존재한다. 노빠, 유빠 다음에 또다른 빠들이 등장할 것이다. 의미없다. 그것은 목표좁히기에 지나지 않는다.

개혁이라는 거대한 장정에서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다. DJ의 의미는 삼김청산 보다 햇볕정책이라는 역사적 대전환을 앞세운 것이다. 개혁의 목표는 많고 집중할 수 있는 일은 제한되어 있다. 그렇다면 선택은 필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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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든 경제든 음악이든 미술이든 문학이든 영화든 마찬가지다. 그렇게 하나의 민족 혹은 국가로 범위를 좁혔을 때.. 더 쉽게 미학적 목표들은 도달되는 것이다.

영화라도 그렇다. 최대 다수의 관객을 감동시키려는 것이 아카데미의 목표라면 특정 예술 장르에 기호가 있는 소수의 진정한 관객을 감동시키려는 것이 칸의 목표다.

다수를 감동시키려는 아카데미보다 몇몇 ‘아는 사람들’을 감동시키려는 칸이 더 극적으로 미학적 목표에 도달하곤 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영화는 액션, 에로, 멜로, 코미디, 호러 등으로 장르가 세분화 되는 것이다. 노빠와 유빠의 등장은 그러한 목표좁히기와 관련이 있다.

예컨대 비유로 말하자면.. 한국영화가 한 단계 더 성숙하기 위해서는.. 작품성이 떨어지는 조폭영화라도 좋으니까 일단 흥행하는 영화를 한번 만들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흥행을 시키다보면 투자가 몰리고, 우수한 인적자원이 몰려서 작품성 있는 영화도 만들어지는 것이다. 한국영화의 흥행과 작품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 잡기는 그렇게 가능했던 것이다.

선순환과 악순환이 있다. 먼저 흥행을 시켜 돈과 인재를 모은 다음 예술성을 추구하는 것이 선순환이고, 그 반대로 예술성만 쫓다가 토대가 무너져서 망한 일본방식이 악순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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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의미에서 보편이란..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유일한 하나가 아니라 거꾸로 세계 곳곳의 다양한 각각을.. 각자의 위치에서 각각 완성된 여러 것들에서.. 발견되는 어떤 하나의 공통요소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 전통적 의미의 보편가치.. 세계인 모두를 설득할 수 있는, 혹은 감동시킬 수 있는 하나의 미학적 장치.

● 새로운 의미의 보편가치.. 한국, 중국, 일본, 미국에서 각각 최고가 된 것들을 모아보았을 때 그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공통 요소.

항상 보편을 추구하지만 번번히 좌절하곤 한다. 어떤 벽 앞에서 한계를 보이고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일단은 그 벽을 뛰어넘어볼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택과 집중을 필요로 하고 DJ 광신도니 노빠니 유빠니 하는 이름들은 그 선택과 집중에 다름 아니다.

그들이 무슨 빠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우리는 스스로 흐름을 만들어가는 지구상에서 역동적인 집단이기 때문이다. 내부에 강한 핵을 가진다는 얘기다. 외연확대의 방법으로 가지를 쳐나간다. 결국은 모두를 아우르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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