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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2772 vote 0 2008.09.20 (09:49:10)

신과 나 그리고 세계인격

혹자는 ‘나를 버리는 것이 깨달음’이라 말하고, 혹자는 ‘나를 찾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깨달음은 나를 버리는 것이면서 동시에 나를 찾는 것이다. ‘나’라는 것이 무엇일까?

‘나’는 소통의 일 단위다. 소통하게 하는 것은 문이다. 문은 열리고 또 닫혀진다. ‘나를 버리라’는 것은 그 닫힌 문을 열라는 것이고‘ 나를 찾으라는 것은 그 문을 지키라는 것이다.

그 문에서 판단하고 결정한다. 무엇을? 사실과 그 사실의 배후에서 작동하는 의미와 가치와 개념과 원리를. 이들은 모여서 일을 구성한다. 일은 혼자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회적인 포지션과 역할이 주어진다.

인간이 나를 알아가는 것은 그 포지션과 역할에 의해서이다. 그 역할과 포지션에 갇혀버린다. 독립적인 의사소통-가치판단-의사결정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정해진 포지션 안에서만 작동하는 기계의 부품으로 전락해 버린다.

내가 어떻게 하는가가.. 나의 소통-판단-결정에 따른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행동에 달려있게 된다. 상대와 나의 관계가 친구인가 적인가에 따라 친구면 무조건 모방하고 적이면 무조건 반대로 돈다.

결국 소통하지도 않고 판단하지도 않고 결정하지도 않게 된다. 대신 대본을 읽는다. 사회관계 속에서 규정된 나를 연기한다.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 의해 결정된다. 아기들은 그렇다. 노예들도 그렇다.

인간은 성장함에 따라 독자적인 소통-판단-결정의 영역을 얻는다. 자아(自我)를 얻는다. 그러한 독립적인 소통과 판단과 결정의 능력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데서 인간의 존엄성-인격성 개념이 성립된다.

그것은 동물에 없는 것이며, 아기에 불명한 것이며, 노예에게도 없는 것이며, 인격적으로 미성숙한 사람에게도 없는 것이다. 인격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깨달음이 필요하다. 그 소통-판단-결정의 수준을 한 차원 더 높이기 위해서. 무엇보다 ‘나’라는 것의 이해가 중요하다. 인격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소통과 판단과 결정의 1 단위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외계인은 인간 종이 아니지만 소통-판단-결정의 능력을 존중해서 인(人)자를 붙여준다. 돼지도 그것이 가능하면 인간 대접을 받고 인간도 그것이 되지 않으면 쥐로 취급된다.

추상할 수 있어야 한다. 추(抽)는 뒤로 뺀다. 왜 빼는가? 구조론에 따르면 양은 침투한다. 침투했으므로 빼서 원위치 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사실의 세계에 살고 있지만 그 사실은 침투된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우주라는, 우리 은하계라는, 우리 태양계라는, 우리 지구라는 주소지를 가지지만 이것은 침투된 세계다. 칼라를 입힌 것이다. 옷을 입힌 것이다. 알몸으로 돌아가야 한다. 본래를 회복해야 한다.

나를 감정으로 느끼려 하지 말아야 한다. 감정을 배제하고, 사회관계 속에서의 상대적인 규정도 배제하고, 생물학의 진화론 개념도 배제하고 순수한 추상의 나를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나를 버리라는 것은 그 정해진 대본을 버리고, 사회관계 속에서 규정된 역할을 버리고, 누구를 모방하지도 말고, 누구의 반대로 돌지도 말고, 순수하게 독립적으로 소통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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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추상으로 보아야 한다. 인간이 있기 전에 세계가 있기 전에 우주가 있기 전에 나가 존재했다. 소통-판단-결정-행동의 1단위로 존재했다. 스스로 복제하여 점점 숫자가 증가했다.

복제본은 원본의 주변에 자리잡고 원본과 일정한 관계를 맺는다. 그러면서 점점 성장한다. 네트워크를 이룬다. 신(神)은 그렇게 무수한 ‘나’들의 집적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신은 진보하고 성장한다.

신은 전지전능하다는 기독교의 개념은 원자론의 원자개념과 비슷하다. 그것은 일종의 불가지론이다. 원래부터 그렇다는 식이다. 성역이므로 그 내막을 건드릴 수 없다는 발상이다.

그러나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완전이 아니라 완전성 그 자체다. 북극의 위치는 일정하지 않지만 극성 자체는 절대적으로 존재한다. 북극의 위치가 불확정적이라 해서 북극이 불완전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불확정적이므로 변화까지 담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도리어 완전하다. 마찬가지다.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이 완전하다. 피드백 기능이 있는 것이 완전하다. 소통하는 것이 완전하다.

'신은 원래부터 전지전능하다.' ‘왜? 어째서?’ ‘묻지마! 다치는 수 있어.’ ‘신을 창조한 신의 신은 누구지?’ ‘죽을래?! 이게 겁대가리 없이!’ 이런 식이면 곤란하다. 원래부터 전지전능한 것은 없다. 구조론은 신도 피해갈 수 없다.  

인간의 지적-영적 성장은 신의 진보에 기여한다. 그것이 인류의 역할이다. 신은 완전하므로 고착되어 있고 더 이상 진보하지 않는다는 발상은 불완전하다. 그것은 신에 대한 모독이다.

완전한 것은 진보하는 것이며 성장하는 것이며 변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온갖 것을 낳아내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함께 하는 것이다. 머물러 있는 것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신은 세계를 창조하고 떠난 것이 아니다. 팔짱 끼고 관망하는 것도 아니다. 신은  이 세계를 주시하고 있다. 서로 소통하고 있다. 함께 성장하고 있다. 인류의 진보된 정도는 신의 진보한 정도를 반영한다.

하나의 존재는 하나의 인격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인격은 인격과 소통하여 더 큰 단위의 인격을 만든다. 지금 당신의 인격도 당신 내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회와 소통하여 2차적으로 얻어진 것이다.

인간에게는 세계인격이 필요하다. 그것은 인류의 집단지능-집단지성의 총합-총괄 개념이다. 구조론에 따르면 하나의 계가 외부와 맞설 때, 특정 지점에서 부분이 전체를 대표하는 성질을 가진다.

한 개인이 지구촌 인류의 집단지성의 총합을 대표할 수 있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자신이 인류의 대표자라는 설정에서의 눈높이를 가져야 한다. 그 위치에서 우주인격의 총합이라 할 신과 소통해야 한다.

인격은 하나의 독립적인 소통-판단-결정의 단위다. 깨달음은 한 개인이 세계인격으로 돌아가서 인류의 대표자로서 우주의 대표자인 신의 우주인격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 지점에서는 태어남도 없고 삶도 없고 죽음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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