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읽기
무릇 논객이라면 ‘글쓰기’와 ‘배설행위’를 구분할 줄 알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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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에 따르면 유아 성욕기 두 번째 단계로 ‘항문기 anal stage’라는 게 있다. 아이건 어른이건 간에 항문을 통한 시원한 배설은 일종의 쾌감을 안겨준다는 것을 알고 있다. 대변이 항문을 통과할 때 입구 근처에 퍼져 있는 어떤 점막들에 묵직한 자극을 안기게 되고 그 자극이 말초신경의 일부에 신호를 보내고 뇌는 그 신호를 ‘쾌감 신호’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쾌변’이라는 표현이 괜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쾌감은 ‘항문기’을 정상적으로 잘 넘겼을 때나 얻을 수 있는 배변의 쾌락이다. ‘항문기’ 때의 유아는 배변의 쾌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대변을 밖으로 배출하지 않고 쾌감자극을 느끼는 점막 부위에 머물게 하려는 잔머리를 굴리기 시작한다.

부모의 역할이 매우 중요해 지는 순간이다. 아이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가진 부모는 이때 아이의 자연스러운 배변을 유도하기 위해 배를 살살 문질러 주면서 칭찬과 격려를 해 주게 된다. 아이는 본능적으로 부모의 행위가 자기에게 배설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부모의 행동에 따라 배변을 하는 습관을 기르게 된다. 또한 부모와의 교감을 통해 배우는 정상적인 배변 과정은 아이가 경험하는 사회화의 최초의 단계이다.

반대로 부모가 배변을 하지 않는 아이에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짜증을 내거나 독촉을 하게 되면 아이는 정반대로 상황 판단을 하게 된다. 배변을 하면 더 야단을 맞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배변 행위를 더욱 뒤로 미룬다.

처음엔 쾌감을 위해서 배변을 참았지만 이젠 야단 맞지 않기 위해 참기 시작한다. 참는 것이 한계에 이르면 부모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배변을 해 버리게 되고, 특히 기저귀를 차도 되지 않을 만큼 큰 아이인 경우 옷에다 배변을 하게 되어 부모에게 더 많은 화풀이를 당하게 된다. 간혹 아이는 부모에게 복수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옷에다 배변을 보는 경우도 있다.

이때 아이가 받게 되는 스트레스는 매우 큰 것이어서 심리적인 위축을 자주 경험하게 되어 소심한 성격으로 진행되고 자신감 부족과 더불어 주체적인 결정을 잘 내리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성격의 사람이 된다. 뿐만 아니라 ‘교감’을 통한 사회화 과정이 생략되거나 거칠게 경험하게 되어 합리적 사고가 매우 부실한 사람이 된다.

이런 사람의 경우 자기의 희망 사항이 현실에 부딪쳐서 이룰 수 없는 상황이 되면 매우 신경질적으로 변하여 대책 없이 소심하게 되거나 또는 매우 공격적인 사람으로 변하게 된다. 정상적인 배출 과정을 통해 해소해야 할 문제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소통 부재 상태를 만들어 쾌감을 느낀다. 다른 이들의 접근을 배제함으로써 즐거움을 얻는 것이다. ‘꽉 막힘의 쾌락’이라고 이름해야 할 정도인 경우도 있다.

<2>
‘글쓰기’란 간혹 배설행위의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다. 글을 쓸 때 어떤 쾌감이 느낀다는 사람이 적지 않을 뿐만 아니라 소설가나 시인의 경우 글쓰기 자체를 두고 ‘욕구 배설 행위’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글쓰기’가 ‘똥누기’와 다른 것은 ‘소통’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소통’은 반드시 대상을 전제한다. 쓰는 이가 있으면 읽는 이도 있게 마련이고, 글은 똥이 아님으로 그에 대해 반응을 보이는 이도 당연히 있게 된다.

하여 글을 쓰는 이는 자신의 글쓰기가 ‘소통’에 어떤 기여를 하게 되는지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여겨야 한다. 그것이 단순히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다른 이의 반응은 내가 상관할 바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는 여전히 유효하다. 글쓰기의 본질이 ‘소통’에 있기 때문이다. ‘소통’하고 싶지 않은 글이라면 공중에 유포시킬 이유가 없다. 그런 글이라면 그냥 자기 일기장에나 쓰면 될 일이다.

자칭이건 타칭이건 간에 ‘논객’이라면 더더욱 그리해야 한다. ‘논객’은 무릇 글로써, 혹은 말로써 논쟁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쓰는 글에 대해, 뱉어낸 말에 대해 책임을 질 줄도 알아야 하고 필요하다면 반응을 보이는 이들에 대해 정중하게 대응할 줄도 알아야 한다. 바로 ‘논객’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뿐만 아니라 어떻게 글을 쓰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다.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매도하거나 비난하는 글을 쓰는 이를 두고 논객이라 한다면 매우 곤혹스럽다. 비판을 위한 비판을 일삼는 경우 더욱 그렇다. 더군다나 자칭 논객이라는 이가 타인을 조롱하거나 인신공격성 딱지나 남발하면서 상대를 비하하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매우 한심하고 역겨운 일이다.

요며칠 이름쟁이님의 글이 그러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의 글이 전여옥의 글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는 지지하니 비판한다고 둘러대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명백하게 비판이 아니라 손가락질을 하면서 욕을 퍼붓는 수준이다.

‘지지한다’는 것이 손가락질 섞인 비난을 정당화시켜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를 테면, ‘너를 사랑하니까 때리는 거야’ 하면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폭력’을 사랑 표현의 하나의 방법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신병원에 보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마찬가지이다. ‘너를 지지하니까 욕도 할 수 있는 거야’라는 말은 언어도단이다. 그건 거짓말에 불과할 뿐이다. 욕질하는 것은 지지하는 행위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비판과 비난의 태생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비판은 ‘상생’을 전제로 하는 것이지만 ‘비난’은 ‘죽임’을 전제로 한다.

나는 이름쟁이님이 글쓰기는 배설행위와 같지 않다는 진실을 되돌아 보길 원한다. 그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글쓰기는 지지하는 글쓰기가 아니다. 물론 나는 그가 지지하는 글만 쓰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의 선택임으로 내 알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름쟁이님은 자기가 무슨 글을 쓰는지 좀 솔직하게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가령 그는 노 대통령과 그 지지자들에게 극언을 퍼붓고 난 뒤 “노 대통령은 현명하신 분이라는 기대”가 있다고 했는데, 나는 그가 퍼부은 극언과 그가 가진 기대 사이의 간극을 도저히 메울 방법이 없다. 그의 글을 읽은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러할 것이고, 심지어는 그 조차도 그러할 것이다.

나는 그가 노 대통령에 대해 어떤 정치적 스탠스를 취하고 있는지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다만 그가 소위 말하는 ‘논객’임으로 그가 취하고 있는 정치적 스탠스를 좀 솔직하게 드러낼 의무가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무릇 논객이라면, 자기의 정치적 스탠스와 자기가 뱉어내는 말을 일치시킬 윤리적 의무를 기꺼워 해야 한다.

그래야 본격적인 논쟁을 시작할 수 있는 때문이다. 편집권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해 소통 부재의 일방적인 비난만을 쏟아놓은 글을 대문에 걸어 놓은 후 황급히 문 뒤로 숨어 들어가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판과 비난들을 뻘쭘하게 지켜보는 것은 논객이 할 짓이 못 된다. 그리고 그것은 비겁하다.

이름쟁이님이 할 일은 너무도 간단하다. ‘소통의 장’으로 나와서 자기가 뱉어낸 말들에 대한 논쟁들에 기꺼운 마음으로 임하거나 혹은 ‘논객’이라는 타이틀을 버리는 것이 그것이다. 그의 정치적 스탠스가 서프라이즈와 맞지 않다면 이곳을 떠나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겠다. 이름쟁이님의 당당한 처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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