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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0083 vote 0 2013.12.31 (14:54:09)

     영화 미스트의 암울한 풍경은 1983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윌리엄 골딩의 소설 파리대왕을 연상하게 한다. 통신이 두절된 채 슈퍼마켓에 고립되어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미스트의 상황이나, 무인도에 고립되어 언제 구조될지 모르는 파리대왕의 상황이나 인간 무의식의 깊은 곳에서 야만한 본능을 끌어낸다는 점이 같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인간을 분열시키는 나쁜 결정을 내린다. 협력보다 경쟁을 선택한다. 충격적인 인간보고서라 할 만 하다.


    파리대왕에서 비행기의 추락으로 무인도에 표착한 소년들은 랠프를 중심으로 한 문명파와 잭을 중심으로 한 야만파로 나누어 서로 대립한다. 미스트에서 사이비 광신도의 농간에 의해 소수자로 몰려 슈퍼마켓에서 쫓겨나다시피하며 탈출하는 설정과 같다. 제한된 공간에서 단기적으로는 야만이 승리한다. 랠프와 잭의 대결이 야만파의 승리로 끝나려는 찰나 구조대가 도착한다. 문명의 승리는 장기전으로 가능하며 열린 공간에서만 가능하다.


    닫힌공간, 단기전에서는 야만이 이긴다는 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윌리엄 골딩은 허위로 가득한 15소년의 표류기를 보고 이에 대한 반감으로 파리대왕을 썼다고 한다. 그렇다면 다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떠올릴 수도 있다. 로빈슨 크루소 역시 때려주고 싶은 작품이다. 무인도까지 가서 기껏 한다는 짓이 빌어먹을 노예제도의 전파라니. 제정신있는 작가라면 점차 식인종에 동화되어 가는 모습을 그렸을텐데. 진정한 인간보고서가 필요한 시점이다.


    미스트의 사람을 고립시키는 안개나 파리대왕의 고립된 섬은 모두 의사결정을 요구하는 뒤뚱대는 공간이다. 김기덕 감독의 섬처럼.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는 소통이 막힌 지점이 있다. 혼자의 힘으로 결단을 내려야 한다.


    필자의 의도는 야만한 부족민을 차별하자는 것이 아니라 문명사회에도 많은 야만인들이 숨어 있다는 점을 폭로하고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자는 거다. 가엾은 피기를 때려죽인 잭과 로저는 남태평양의 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다. 일베충들 속에 있다. 군중심리, 집단히스테리, 편가르기다. 무엇이든 둘로 나누고 대립시켜 긴장을 끌어내는 일체의 대칭행동이 야만이다.


    지식인들조차 야만인과 다를 바 없다는 점에 충격받아야 한다. 미스트의 흑인 변호사 브렌트 노튼은 교양있는 지식인으로 설정되어 있다. 재난을 당하자 돌변하여 사람들을 의심하고 적으로 간주한다. 재난 앞에서 지식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 깨달아야 한다. 진보의 패거리 행동이나 보수의 패거리 행동이나 같다. 뚜렷한 방향과 합리적인 설계를 가지고 가야 한다.


    재앙은 손에 확실한 무기를 쥘때까지 계속된다. 지식인이 상대적으로 협력을 잘하는 것도 지식이라는 협력수단이 있기 때문이다. 지식이라는 총을 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수들도 경험이라는 협력수단이 있다. 경험이 공감을 낳을 때 그들의 선동은 잘 먹힌다. 조선족이 사람을 죽인다고 써놓으면 많은 리플과 추천이 쏟아진다. 그들은 모두 조선족을 두려워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이방인들 앞에서 당황한 경험이 있다. 겁쟁이처럼 속으로 벌벌 떨었던 경험이 있다. 겁쟁이 경험이 조선족타령을 만든다.


    지식인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은 철학자들이다. 철학자들이야말로 협력보다 방해가 더 손쉬운 책략임을 잘 알고 있다. 수학계에서는 문제를 푸는 사람이 승리자가 되지만 철학계에서는 문제풀이를 방해하는 자가 승리자가 된다. 그들은 절대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제출하기를 좋아하며, 그것은 언어의 파괴로 달성된다. 그들은 언어에서 의미를 지운다. 뜻도 없는 어휘들을 생산해낸다.


    그들은 언어를 산만하게 조직하여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덫과 수렁을 설치하고 그것으로 인류를 위협하며 거기서 자신의 역할과 포지션을 찾아낸다. 그러한 행동은 성범죄자의 행동과 심리적으로 같다. 그들은 사회를 위협하는 방법으로 사회에 어쩌면 있을지도 모르는 위험요소에 관심을 갖도록 유도한다. 그러면서 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방해한다. 미스트는 정답을 회피하는 지식인의 찌푸린 얼굴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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