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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0744 vote 0 2014.01.13 (01:46:23)

 

    인류와의 약속


    문제의식이 있어야 한다. 왕조시대로 돌아가 보자. 세상은 원래 이런 것이라고 여길 수 있다. 임금은 임금답게, 귀족은 귀족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각자 자기 분수에 맞게 사는 것이 인류의 본래 모습이고, 달리 뾰족한 수는 없다고 여길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시대가 별 수 없는 봉건시대니까.


    지금도 마찬가지다. 학문은 원래 이런 것이라고 여길 수 있다. 다만 소수이지만 남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당연하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각별한 문제의식을 가진 특별한 사람들이 있다. 왜냐하면 지금 시대는 별 수 있는 특별한 시대니까. 그들이 있기에 이 사이트가 있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한국인이 봉건사회의 미몽에서 벗어나 문명사회로 진입한 역사는 얼마 되지 않는다. 시카고에 100층짜리 마천루가 올라가고 있을 때 한국은 동학농민항쟁을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꿈속의 꿈속이었다. 따지고보면 한국의 산업화는 70년대 들어서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거대한 변화의 시대였다. 아침 저녁으로 도시의 모습이 달라졌다. 확실히 세상은 변하고 있었다. 필자가 어렸을 때만 해도 짚신을 신고 다니는 사람을 볼 수 있었다. 봄이면 보릿고개가 있었다. 필자가 피죽을 먹어본 마지막 세대에 속한다. 요즘 사람들은 피죽이 뭔지, 송기가 무엇인지 모른다.


    72년 무렵에 마을에 전기가 들어왔다. 기술자들이 초가집 처마밑에 애자를 달고 전선을 연결하던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정말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런데 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어제도 바뀌고 오늘도 바뀌었으니, 내일도 바뀌고 모레도 바뀌어야 하는데 그걸로 끝이라니 황당하다.


    필자가 소년시절에 50년 후를 상상한대로라면 지금쯤 일은 로봇이 하고 인간은 달나라로 이주해 있어야 한다. 그다지 달라진게 없다. 눈부신 과학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종교를 신앙하고 있다. 여전히 낡아빠진 이념전쟁을 벌이고 있다. 여전히 테러와 범죄가 난무한다. 이게 첨단 과학문명이 맞아? 과학이 원래 이런거였냐고? 달라진게 없잖아. 뭔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 온통 뒤틀려 있다.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20세기를 규정짓는 네 가지 학문은 마르크스의 사회학, 프로이드의 심리학, 다윈의 진화론, 아담스미스의 경제학이다. 이들은 모두 변화를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시대의 학문과 다르다. 새로운 파도가 들이닥친 것이다. 완전히 다른 세계다. 여기에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추가할 수 있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흐르는 물결을 타고 가며 변화하는 물질을 논하고 있다.


    뉴턴시대의 기계론적 세계관과 다르다. 그렇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그릇에 담아내야 한다. 20세기를 뒤흔든 다섯 가지 학문, 물리학의 양자론을 필두로 경제학, 사회학, 진화론, 심리학이 모두 뉴턴시대의 입자중심 세계관을 깨뜨릴 것을 요구하고 있다. 공통분모가 있다. 유기적인 변화를 담아내고 있다.


    ◎ 뉴턴 시대의 입자 – 소승적 관점.. 금이 은보다 낫다.
    ◎ 새 시대의 양자 – 대승적 관점.. 팀이 개인보다 낫다.


    그런데도 철학은 여전히 바뀐게 없다면? 여전히 인류는 뉴턴시대에나 통하던 입자중심의 낡은 세계관에 사로잡혀 있다면? 무엇이 다른가? 비유하면 소승과 대승의 차이와 같다. 소승은 어떤 개체를 논한다. 입자의 세계관이다. 대승은 시스템을 논한다. 세계관이 다르다. 철학이 다르다.


    입자의 세계관이라면 사유의 모형이 필요없다. 왜? 입자는 복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설탕은 달고 소금은 짜다. 이는 입자의 고유한 속성이다. 입자의 숫자만큼 성질이 있다. 철은 철의 성질을 가지고 구리는 구리의 성질을 가진다. 고유한 성질에서 답을 찾으면 된다. 그러므로 모형이 필요없다. 도표를 펼칠 필요가 없이 그냥 각각의 성질을 암기하면 된다.


    금은 금이고, 은은 은이다. 쇠는 쇠고, 구리는 구리다. 임금은 임금이고, 귀족은 귀족이다. 평민은 평민이고, 노예는 노예다. 남자는 남자고, 여자는 여자다. 흑인은 흑인이고, 백인은 백인이다. 그것은 개체의 내재적인 속성에 따라 분별되는 것이며 그 속성은 고유한 것이다.


    입자를 넘어 완전성의 세계관으로 오면 달라진다. 입자는 개체지만 완전성은 팀이다. 팀이면 속성이 없다. 고유한 것은 없으며 대신 보편성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 설탕 속에 단 것이 없고 소금 속에 짠 것이 없다. 금 속에 금이 없고, 은 속에 은이 없다. 그것은 모두 팀 안에서 관계가 만든 허상이다. 각각의 성질을 암기할 것이 아니라 좌표 안에서 포지션을 찾아야 한다. 도표를 펼쳐야 한다. 원초적인 접근방식이 다르다.


    ◎ 입자의 관점 – 각각의 고유한 속성을 암기한다.
    ◎ 완전성 관점 – 좌표 안에서 자기 포지션을 찾는다.


    팀은 포지션을 가진다. 달고 쓰고 짜고 매운 것은 타고 나는 고유한 속성이 아니라 팀 안에서 포지션에 따라 상대적으로 정해진다. 오늘 투수가 내일 타자로 바꿀 수 있다. 오늘 노예가 내일 주인으로 바뀔 수 있다. 오늘 평민이 내일 귀족으로 올라설 수도 있다. 팀 안에서 각자의 역할은 바뀔 수 있다. 그러므로 속성을 암기할 필요가 없다. 원소번호를 외울 이유가 없다. 좌표 안에서 방향만 찾으면 된다. 경도와 위도만 파악하면 위치를 알 수 있다.


    입자라면 선수 개개인이 중요하다. 류현진은 완봉을 하고 이대호는 홈런을 친다. 그러나 완전성이면 팀이 중요하다. 작전이 중요하다. 전략이 중요하고 팀플레이가 중요하고 포메이션이 중요하다. 코치와 감독이 중요하고 프런트의 역할이 중요하다. 배우가 노래를 부르고, 관객은 박수나 치는게 아니라 배우가 관객과 함께 무대를 만들어간다. 열린 무대가 된다.


    입자는 선수를 본다. 선수로 보면 선수마다 다르다. 왕선수, 귀족선수, 평민선수, 노예선수가 있다. 남자선수 여자선수 있고, 호남선수 영남선수 있다. 완전성이면 팀이 중요하다. 노무현 감독의 작전이 중요하고 프런트가 중요하다. 상부구조가 중요하다. 감독의 지시에 따라 왕선수도 되고 귀족선수도 된다. 선수의 시대는 19세기다. 20세기는 전환기다. 21세기는 팀의 시대다. 축구를 해도 지금은 단독드리블보다 유기적인 패스플레이가 중요하다. 펠레의 개인기는 가고 지금은 토탈 사커가 지배한다. 완전성이 입자를 대체한다. 입자는 개체로 있지만 완전성은 모형으로 존재한다. 그 모형은 팀에 대한 모형이다. 입자는 모형이 없다. 그냥 금은 금이고 은은 은이고 동은 동이며, 모형은 필요없다. 좌표는 필요없다. 나침반도 필요없다. 전략은 필요없다. 개체의 성질을 하나씩 외우면 된다.


    21세기에 모형이 아니면 과학이 아니다. 복제시스템의 원본이 아니면 가치가 없다. 시스템이 아니면 학문이 아니다. 이발소 그림은 그림이 아니다. 인류의 협동작업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 의미나 가치는 그냥 있는게 아니라 시스템 안에서 작동한다. 그러므로 소승은 가치없고 대승이 필요하다.


    시스템을 벗어나면 인간의 가치는 많이 쳐서 600원에 불과하다. 비트코인의 가치는 컴퓨터에 찍혀 있는 숫자에 있는게 아니라 작동하는 시스템에 있다. 시스템이 붕괴하면 비트코인의 가치는 0이 된다. 남태평양 야프섬의 돌화폐와 같다. 돌화폐의 가치는 기억을 공유하는 시스템에 있다.


    모두가 기억을 잊어버리면 돌화폐의 가치는 0이 된다. 거래하여 새로 돌화폐를 소유하게 된 사람은 구태여 무거운 돌화폐를 자기 집으로 옮겨가지 않는다. 두 사람이 만나 기억을 바꾸는 것으로 거래를 성립시킨다. 반대로 우리가 기억을 널리 공유할 수 있다면 가치는 무한히 복제될 수 있다.


    맥락을 아는게 중요하다. 삶의 의미, 진리의 의미 역시 시스템 안에서 기능한다. 시스템은 모형을 복제하고 에너지를 순환시키며 전체가 한 방향으로 성장한다. 개별적인 의사결정 단위를 모아 더 큰 단위로 의사결정의 층위를 꾸린다.


    이러한 맥락 안에서 필자는 강신주의 소승놀이를 비판한 거다. 개인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강단학계 전체를 비판하는데, 인류문명 전체를 비판하는데 개인 강신주가 뭘 잘못했느냐는 식이면 곤란하다. 당연히 강신주의 잘못은 아니다. 김동길, 이어령, 김용옥, 황수관의 잘못은 아니다. 어릿광대의 잘못은 아니다. 인류의 20세기가 통째로 잘못한 것이다.


    소승적 사고에 사로잡혀 마르크스, 다윈, 프로이드, 아인슈타인, 아담 스미스를 담아낼 새로운 문명의 그릇을 제공하지 못한 인류 모두의 잘못이다. 뉴턴시대는 끝내야 한다. 뉴턴의 어떤 이론이 틀렸다는게 아니라, 관점이 틀리고, 사고가 틀리고, 시야가 틀렸다. 뉴턴시대의 시스템이 틀렸다.


    뉴턴은 입자중심의 세계관에 빠져 있으며 변화를 설명하지 못한다. 변화를 보아내지도 못한다. 지금은 양자시대다. 양자는 입자와 달리 그 자체에 시간적 변화를 담고 있다. 입자는 시간개념 없어도 성립한다. 시간의 흐름과 상관없이 그 공간의 장소에 뭔가 있으면 그것이 입자다.


    왕과 귀족과 평민과 노예와 흑인과 백인과 남자와 여자는 그냥 공간에 있다. 여기 있거나 아니면 저기에 있다. 그러나 팀은 시간 속에만 있다. 시합이 끝나면 팀은 사라진다. 사건은 시간 속에 살아있다. 약속은 시간 속에서 호흡한다. 사회도, 진화도, 마음도, 경제도, 양자도 시간 속에서 숨을 쉬는 사건적 존재이며 시간이 멈추면 죽는다. 경제도 죽고, 양자도 죽고, 마음도 죽고, 진화도 죽고, 사회도 죽고, 우리의 21세기도 죽는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전시대의 금이나 은이라면 시간이 흘러도 금이고 은이다. 남자는 시간이 흘러도 남자고, 여자는 시간이 흘러도 여자다. 이건 옛날 방식이다. 이제는 변화와 사건을 논해야 한다. 주의해야 한다. 공간의 입자도 있고, 별도로 시간의 사건도 추가로 있는게 아니다.


    시간의 사건만 있고 공간의 입자는 없다. 금이나 은도 양자단위로 쪼개고 들어가면 돌연 모습을 감춘다. 그것은 인간의 착각속에 피어난 환영이다. 소승은 입자를 보는 관점이다. 대승은 팀을 보는 관점이다. 입자는 색즉시색이다. 팀은 색즉시공이다. 보는 방향이 다르다. 바야흐로 스마트 시대다. 이제는 눈을 떠야 한다. 입자를 버려야 한다.


    부지런한 강신주의 소통은 입자개념이다. 낡은 시대의 구닥다리다. 스님이나 목사도 강신주처럼 강연은 많이 한다. 그들은 대중이 원하는 말을 하므로 진짜가 아니다. 이발소 그림과 같다. 대중이 원하는 그림은 그림이 아니다. 성철은 끝내 그 산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전두환의 면담요청은 거절되었다.


    그리하여 큰 소통을 이루었다. 러셀의 무신론은 맞는 말이지만 힘이 없다. 왜? 믿음은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지구상에 진정으로 종교를 믿는 사람은 없다. 믿는 사람이 없는데, 믿음을 버리라는 말이 먹히겠는가? 바보냐? 믿음은 집단에 가치판단을 위임한다는 뜻이다. 인간은 원래 집단에 의지하여 가치판단을 위임하는 사회적 동물이다. 그 위임하는 집단을 종교로 선택했을 뿐이다. 종교만이 순수하게 집단에 의지하는 인간의 본능 자체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정치집단인 국가나 정당, 그리고 혈연집단인 가족에, 영리집단인 회사도 있지만 그런 집단은 고유한 목적이 있다. 종교만이 집단화를 목적으로 집단한다. 그러므로 과학이 신앙을 비판할 수 없다. 애초에 그들에게 신앙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믿는 대신 위임한다. 그것은 공과 같고 허와 같다. 믿음에 대한 비판은 허공에 대고 주먹질하는 격이다.


    무신론은 개인을 설득하는 말이다. 입자의 관점에 서 있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때 집단으로 도피하여 정치적인 기동을 한다. 종교는 집단에 가치판단을 위임하므로 종교인에게 신앙은 없다. 믿음이 없다. 단지 그것을 표방할 뿐이다. 그것은 인간의 사회적 본능에 따른 것이다. 강신주의 소통개념은 러셀의 무신론과 같아서 공허하다. 아무 것도 판단하지 않겠다는 사람들에게 사리분별을 논하면 그것이 말이 되는가?


    믿음은 사회적 시스템이다. 시스템으로만이 시스템을 깰 수 있다. 믿음은 대승이다. 대승으로만이 대승을 깰 수 있다. 믿음은 사실의 영역이 아니라 에너지의 영역이다. 에너지로만 에너지를 깰 수 있다. 믿음은 팀플레이다. 팀플레이로만 팀플레이를 깰 수 있다. 오직 완전성으로만 불완전성을 이길 수 있다.


    성철처럼 산에서 절대 내려오지 않는 사람, 수준이하를 고집하는 대중들과는 절대 말하지 않는 사람, 입을 꽉 닫아거는 사람이 필요하다. 대중이 원하는 그림은 절대 그리지 않겠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대중이 원하는 뽕짝은 절대 연주하지 않겠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편한 옷은 츄리닝이다. 좋은 옷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팀플레이 안에서 호흡하는 것이다. 자신을 만족시키는 옷을 선택할 것이 아니라, 동료의 패스를 잘 받는 옷을 선택해야 한다. 내가 원하는 색깔의 차를 선택할 것이 아니라 한국의 도로를 멋지게 디자인하는 차를 선택해야 한다. 이것이 시스템적 사유다.


    지금은 성철 할배가 온다해도 사람들이 눈도 꿈쩍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때는 왜 삼천배를 하면서까지 그 높은 곳으로 성철을 찾아갔을까? 왜 그때는 입을 꽉 다물고 있었는데도 저절로 소통이 되었을까? 왜 지금은 강신주가 매일 강연을 뛰는데도 사방으로 소통이 꽉 막혔을까?


    그때는 봤기 때문이고 지금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엇을 보았는가? TV를 보았다. 이전에는 TV가 없었다. 무엇을 보았는가? 전등을 보았다. 이전에는 전깃불을 본 적이 없다. 호롱불 켜놓고 숙제하곤 했다. 세상이 바뀌자 사람들이 문득 정신을 차리고 성철을 다시 보게 된 것이다.


    보이는 것의 이면에서 작동하는 거대한 힘의 존재를 깨닫고 세상과 팀플레이를 할 맘을 먹은 것이다. 변화가 중단되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교만해졌다. 대승을 버리고 소승으로 도망갔다. 요즘은 위빠사나와 사마타를 넘어 아주 힌두교로 퇴행하는 판이다. 팀플레이 깨고 개인플레이 하는 시대다.


    왜? 큰 변화가 거기서 그쳤기 때문이다. 더 이상 신통한 것이 나와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리어 지금쯤 진짜배기가 나와야 한다. 한 동안 막혔던 물이 다시 세차게 흐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진짜 큰 변화가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껏 단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꼴찌 한국이 갑자기 일등이 되어버린 것이다. 한국인에게 그것은 불편한 것이다. 그래서 새누리당 찍고, 2등 아니 3등 아니, 원래의 꼴등으로 되돌아가려 한다.


    그렇다. 한국은 70년대까지만 해도 세계 백여국 중에서 꼴찌였다. 지금은 갑자기 1등으로 올라서려 하고 있다.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길이다. 당황해서 뒷걸음질 친다. 미국 뒤에 숨고 일본 뒤에 숨는다. 이해한다. 꼴등만 하던 녀석이 갑자기 1등하면 무섭다. 갑자기 주목 받으면 무섭다. 그러나 다 도망칠 수는 없다. 99퍼센트의 한국인들이 도망치더라도 우리는 남아서 무대를 지켜야 한다.


    그것이 인류호의 팀플레이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류와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이태리도, 스페인도, 네덜란드도, 프랑스도, 영국도, 미국도, 일본도 돌아가며 다 한번씩 했던 역할이다. 돌아가며 한번씩 무대에 올라 마이크 한 번 잡는 거다. 그렇다면 지금 거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레벨:8]상동

2014.01.13 (09:42:49)

'변화가 중단되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교만해졌다.'
'종교만이 집단화를 목적으로 집단한다. 그러므로 과학이 신앙을 비판할 수 없다.'
친절한 설명 감사합니다. ^^
[레벨:2]수학의 눈

2014.01.13 (13:44:37)

 시스템을 벗어나면 인간의 가치도 0원....가치란 오로지 시스템에만 의미가 있으니까...

프로필 이미지 [레벨:1]불모지대

2014.01.13 (17:43:10)

"시간의 사건만 있고 공간의 입자는 없다."

입자는 개인이고, 시스템은 팀이고, 모형은 복제가능해야 하고, 복제품은 가치가 없다?

변화는 시간이고, 변화가 없으면 공간에 입자는 없다?


반대로 

입자만이 스스로 존재하고, 변화는 입자 내에 내재된 특징이며, 파동은 입자의 발현일 뿐이다.

각성한 입자만이 내재된 특징을 발현할 수 있으며, 팀은 발현된 입자들로 구성되어야 한다.

같은 팀을 이루는 입자들은 같은 진동주파수를 가지고 공진하며, 그 공진주파수로 피아를 구분한다.


사건은 이러한 팀 간의 충돌로 발생하고, 그 결과는 새로운 공진주파수로 두 팀이 융합하면서 끝난다.

사건의 결과로 입자들은 흩어지고 이 모든 주파수의 흔적은 각 입자에 그 특징으로 기록된다.

입자는 새로운 특징을 가지게 되고, 또 다른 계기를 만나면 다시 이러한 새로운 특징들로 각성한다.


사건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지지만 인간은, 즉 입자는 소멸할 때까지 존재한다.

그리고 소멸한 후에는 책이나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 후세의 입자들의 특징으로 그 특징을 이어간다.

특징은 전이되고, 발현되고, 새로운 특징으로 융합하고, 진화한다.


사건은 입자를 통해서 발현되어야 하고, 입자 없이는 발현될 수 없다.

따라서 팀은 같은 주파수로 발현하는 입자들의 모임이며, 

시스템은 주파수 간의 에너지 교환 전략이고, 복제는 특징의, 역사의, 진화의 방식이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4.01.13 (18:09:15)

입자는 없습니다.

왜 입자가 없는가 하면 


입자가 있다고 치고 누군가 그 입자를 봤겠죠?

자 이미 상황은 왜곡되었습니다.


조작이 들어갔다는 거죠.

입자를 보지 않았다면 역시 입자가 없죠.


사건의 원인측을 보느냐 결과측을 보느냐인데, 입자는 결과측을 보는 관점입니다.

그러므로 거짓인 거죠.


입자는 자기 존재를 입증할 수 없으므로 거짓입니다.

입자의 존재를 증언할 중매쟁이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예컨대 


숫자 1을 입자로 보면, 그것은 사과 한 개입니다. 

숫자 1을 사건으로 보면 그것은 가리키는 사람과 가리켜지는 사과 사이의 관계입니다.


초등학교 시험문제는 줄을 그어 양쪽을 연결시키는 문제가 많죠.

숫자 1이 그 연결된 선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선으로 연결시켜 지목된 대상을 가리키는지는 


겉으로 보면 같지만 실제로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를 대량 어물쩡 넘어가면 과학이 아니죠.


님은 굉장히 많은 가정과 숨은 전제를 남발하고 있습니다.

내재된 특징을 내재하는 절차가 필요한 거죠. 이미 입자를 벗어났죠.


발현하는 절차가 또 필요한 거죠.

입자는 숨은 전제와 가정을 깔고 들어가는 개념입니다. 


입자적 사고의 예 - 나는 종교를 믿는다. (거짓)

사건적 사고의 예 - 나는 교회에 다닌다. (참)


일상적으로는 같은 말이지만 과학의 영역에서는 구분이 됩니다.

교회에 다니는건 맞는데 종교를 믿는건 아닙니다.


단지 사회에서 통용되는 방식일 뿐이죠. 

예컨대 .. 아무개는 빨갱이다.. 이런 표현은 입자적 사고이므로 


법률적 판단에서는 배척되어야 합니다.

아무개는 어떤 집회에 참석했다.. 이런건 인정이 됩니다.


숨은 전제와 가정이 들어간 말씀은

농담으로는 할 수 있으나 진지하게 말하면 안 됩니다. 


P.S.

이해가 어렵지 싶어서 추가한다면

버스가 서울에서 부산까지 갔을 때 파리가 묻어갔다 치고 


파리는 버스가 서울에서 부산까지 갔는지 알 수 없소.

안다면 파리는 반드시 버스 밖에 있어야 하오.


밖에 있다면 버스가 간 건지, 파리가 온건지 확정할 수 없소.

이걸 확정하려면 버스와 파리를 통일하는 제 3의 것이 전제되어 있다고 가정해야 하오.


이때 제 3의 것이 사건의 원인측이 됩니다.

왜냐하면 버스와 파리는 1이고 서로 떨어져 있는데 반해


제 3의 것은 버스와 파리를 통일하므로 붙어 있습니다.

즉 제 3의 것이 에너지를 제공하는 사건의 축이므로 버스는 사건의 원인측이 될 수 없습니다.


일상적으로 우리가 이것을 따지지 않는 이유는

그런거 시시콜콜 안 따져도 답이 맞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건 같은 사건이 반복되는 경우이고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면 이런 판단은 백퍼센트 빗나갑니다. 


홀짝을 하는데 눈감고 찍어도 50퍼센트 먹습니다.

근데 백번 찍으면 백번 다 오답이 나옵니다. 


또 추가.. 구조론식 표현에 익숙지 않은 분들을 위해 설명한다면

'입자가 없다'는 말은 입자가 온전히 독립적인 의사결정의 단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입자는 반드시 입자에 에너지를 주어 존재를 드러나게 하는 팀이 별도로 있습니다.

물고기가 물을 벗어나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입자의 존재는 입자 안에서 백퍼센트 설명이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집은 없는데 지붕은 있다'고 말하면 이상한 거지요. 

지붕은 집에 딸려 있는 것. 지붕없는 집은 있어도 집없는 지붕은 없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1]불모지대

2014.01.14 (14:09:31)

"입자는 자기 존재를 입증할 수 없으므로 거짓입니다.

입자의 존재를 증언할 중매쟁이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

빛은 입자이기도 하고 파동이기도 합니다. 

제가 내재하는 특징이라거나 특징이 발현된다거나 하는 표현을 사용하였는데요.

좀 다른 표현을 사용한다면, 그 특징은 "정보(Information)'을 말합니다. 이 정보는 인간이라는 입자에게는

일종의 에너지인데, 물리적 에너지는 물리적 동작을 만들어 내는 동력이지만, 이 정보는 인간의 정신에 작용하는

에너지로 새로운 정보가 들어와서 정보량이 커지거나 하면, 입자상태를 벗어나 파동 상태로 발현시키죠.

파동상태가 된 입자는, 다른 파동과 중첩하여 사건을 만들어냅니다. 비로써 시간이 만들어지죠.

입자상태에서는 엄밀하게 시간이 존재하지 않다가, 주기와 진폭을 가지는 파동으로 변하면서 시간으로 측정되는

사건이 됩니다. 입자는 사건의 원인입니다.

사건의 주기과 진폭이 변화하면서, 의사결정에 이르게 되는데, 의사결정은 새로운 '정보'를 만들어내고 소멸합니다.

새로운 정보는 사건에 참여한 입자들에게 재분배(Feedback) 됩니다.


다시말하면,

입자가 외부로부터 '정보'라는 에너지를 받아, 다른 입자와 상호작용을 시작하면 파동으로 변하면서

사건이라는 주파수 형태의 에너지로 변환되어 상호작용을 완결하고, 다시 '정보' 형태의 에너지로 변하면서

입자에 그 결과가 피드백되는 겁니다. 이 과정은 정보라는 에너지의 변환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죠.

결국, 상호작용(사건)은 에너지 변환및 재분배과정이라고 할 수 있죠.


제 생각에는 "입자만이 유일하게 존재하고, 그 입자의 궤적이 시간을 만들어내며, 

사건은 입자가 가진, 정보라는 에너지의 처리 과정에 불과하고, 그 결과 새로운 정보가 생성된다."라고 봅니다.


팀 플레이 얘기를 하셨는데요, 

제 생각에는 자연에는 감독자가 없죠. 감독은 인간이 만든 스포츠 경기에만 존재하죠.

누가, 누군가를 완벽하게 조정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강신주가 얘기하는 장자의 소통은 비어서 상대의 의견을 받아 들일 수 있을정도가 되어야 비로써 소통이 시작되고, 

그것 또한 시작일 뿐,

상호간에 완전한 이해는 불가능하다..는 주장입니다. 즉, 상대를 설득하거나, 내가 설득당하거나..가 아니라,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수준에서의 소통만이 가능할 뿐이다..라는 거죠.

그 만큼, 사람의 인식이라거나 판단은 일치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건 좁힐 수 없는 간극이죠.

마치 전제가 다른 얘기를 하고 있는 거죠. 하나의 전제를 일치시키면 또 다른 다른 전제가 존재하죠.

어찌보면 장자는 완전한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아주 비관적이죠.

그래서 초인적인 비유가 등장하는 겁니다. 도인 같은...ㅋ


입자들이 모이면 자연스럽게 그 정보의 양과 질에 따라, 상호작용을 하게되겠죠.

그 과정에서 위/아래, 또는 정/반/합이 생겨나고, 인력/척력이 작용하면서 정보 에너지가 교환되어서,

어떤 평형상태가 이루어지면 사건의 의사결정이 끝나겠지만, 그게 인간이 보는 사건의 시작과 끝은 아니겠죠.

지난 대선이 끝났다고, 그 사건의 의사결정이 끝난것은 아니고, 아직도 진행중이죠..에너지 측면에서..

제가 얘기하는 사건은 인간이 보는 관점에서의 사건이 아닙니다.

사람의 Mental에 작용하는 '정보'라는 에너지가 정확하게 어떤식으로 작용할지, 저장될지, 변환할지는

마치 정보화 경제가 어떻게 계량될 수 있고, 예측될 수 있을지와 비슷한 맥락의 문제입니다. 어려운 문제죠.


Information이 경제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Capitalism을 어떤식으로 변화시킬지..에 관한 책들이 있습니다.

제가 오늘 서점에서 우연히 봤는데요, 이런 책들도 요즘 나오고 있죠.

"How to think about INFORMATION"

http://www.amazon.com/How-Think-about-Information-Schiller/dp/0252077555/ref=sr_1_1?ie=UTF8&qid=1389675747&sr=8-1&keywords=how+to+think+about+information


제가 요즘 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해, 좀 주절거려본 거구요. 

뭐 딴지를 걸거나, 무슨 의도를 가지고 글을 쓰는 건 아닙니다. 40년의 연구에 비할 건 아니구요..

암튼, 답변을 달아 주셔서 고맙습니다.ㅋㅋ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4.01.14 (14:39:47)

제가 쓰는 용어들은 

구조론 안에서 정의된 것이므로 

구조론의 맥락을 모르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님의 용어들이 우연인지 몰라도 

구조론 용어들과 겹치므로 구조론의 표현으로 받아들였는데, 

지금 보아서는 구조론의 용어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구조론 밖에서 이 용어들은 즉시 뜻을 잃습니다.

용어의 의미를 알 수 없어서 대화가 안 되는 거구요.

대화 안 되는데 길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죠.


구조론 안에서 입자는 사건의 원인이 아닙니다.

입자는 계 안에서 에너지가 주어져 있다는 전제와 

기타 여러가지 가정을 깔고 가므로 과학적으로 엄밀한 표현이 아니죠.


자동차가 있다면 도로와 기름과 운전자가 있다는 전제를 깔고 들어가는 거고

기차가 있다면 궤도와 기차역과 기관사가 있다는 전제를 깔고 들어가는 거고

일상적으로 이 전제들을 생략해도 말은 되지만 그건 일상이구요.


그건 마치 '나는 있다'고 말하면 본인이 있다니깐 일단은 있는 거지만

사실은 언제, 어디에, 어떻게, 있다고 말해야 하는데 귀찮으니까 생략하는 거죠.

과학을 이런 식으로 게으르게 하면 곤란한 거죠.


있다 해서 있는줄 알았는데 그림자가 있다거나

있다 해서 있는줄 알았는데 사실은 권한이 없이 딸려 있다거나

'돈 있냐?' '돈 있어.' '줘 봐.' '집에 있는데'.. 이런 식으로 사람을 갖고 놀거나


이런 황당한 사태를 여러가지로 야기하므로 

과학적인 토론에서는 이걸 엄밀하게 따져야 하는 것이지요.

제가 봤을 때 님은 이런걸 따지고 싶지 않은 거에요.


왜냐하면 귀찮으니깐. 

하여간 이런 기초를 놓치면 피곤한 거구요.

제가 봤을 때 님은 진지한 대화를 할 수준이 안 됩니다. 


'돈 있냐?' '있지.' '줘 봐.' '은행에 있는데.' '인출해와'. '내돈 아니고 은행돈인데.'

이런 식으로 피곤하게 나오는 사람과는 대화할 수 없습니다. 

생략되고, 전제되고, 가정된 부분을 논해야 합니다.


자연에도 감독은 있습니다.

그걸 일일이 이야기하자면 피곤한 거구요.

사건이 일어나는 순간에 그것은 만들어집니다. 


단 이게 축구감독은 아니고 

구조론에서 일의성을 연출하는 사건의 축이라는 거죠.

이건 구조론 안에서 이해해야 하는 거구요.


강신주 장자 이야기는 그냥 머저리의 헛소리입니다.

고목나무도 속이 텅 비어있으니까 가서 소통해 보라죠.

일베충도 뇌가 텅 비어 있으니 소통이 잘 되겠군요.


이런 농담은 초딩 상대로 하는 겁니다.

하여간 진지한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어린애 어르듯 하면 안 됩니다.

강신주가 박그네에게 그런 말 한 것은 


아마 박그네 수준이 딱 어린애 수준이니까 어르고 뺨치느라고 그런 거겠죠. 

구조론의 입자는 전화기에서 코드를 뺀 것이고 

스마트폰에서 기지국을 뺀 거구요


라디오가 방송국의 출력범위를 떠난 거구요.

그러니까 전파가 안 잡혀서 사건의 원인이 될 수 없는 거죠.

입자가 원인이 된다는 말은 기지국도 있고, 방송국도 있고 


스마트폰이 잘 부팅되어 있다는 전제를 깔고 들어가는 겁니다.

근데 그 전제를 누가 언제 어떻게 깔아줬냐 말이지요. 

스마트폰도 배터리를 빼면 작동하지 않습니다.


제가 배터리 뺀 스마트폰을 입자로 정의했기 때문에 원인이 안 됩니다.

구조론에서는 제가 그렇게 개념을 정의했다니깐요. 

물론 님은 임의로 다르게 정의할 수 있죠.


님이 임의로 기지국도 있고 배터리도 있고 

다 부팅되어 있는 스마트폰만이 입자라고 정의해버리면

그건 님이 마음대로 언어를 바꾼 것이므로 대화할 의지가 없는 거죠. 


구조론에서 질, 입자, 힘, 운동, 량은 한 세트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이 연쇄고리 중에서 입자 하나를 별도로 분리해서 말할 수는 없다는 거구요.

님은 입자를 구조론 용어와 다르게 쓰는데 


굉장히 많은 정의되지 않은 부분들 때문에 대화가 의미없다는 거죠.

그거 정의할 필요없다 그냥 대충 넘어가자는 식은 제가 받아들이지 않는 거고.

구조론 밖에서는 이 부분을 연구한 학자가 없구요. 


입자[ Particle , 粒子 ]

일상적 용어로 입자란 아주 작고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작은 물체를 의미한다. 

그러나 물리학에서의 입자는 공간상 한 점에 위치하도록 

이상적으로 모형화된 실체이다.(두산백과)


여기 보면 입자가 정의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전에서 입자는 막연하고 모호한 추상개념인 거죠.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거리


일상용어로 입자는 작은 걸 말하는데 님은 상당히 큰 걸 말하니까 일단 아니구요.

물리학은 공간상의 한 점인데.. 물리학은 공간이라는게 뭔지 아직 규명하지도 못했고

암흑물질도 모르는데 공간을 어떻게 알어? 

점이 뭔지도 정의하지 않고 있구요.  


점은 따지자면 수학용어인데 

'한 점에 위치한다' 이런 표현은 양자론에서 해당사항 없음.

한 점에 위치하는게 어디 있냐고요. 그런게 일단 없구요.


님은 입자를 물리학 용어로 쓰는 것도 아니고

구조론 용어로 쓰는 것도 아니고

일상 용어로 쓰는 것도 아니고


님만이 알겠지만 

너무 많은 가정과 전제와 생략을 끌어들이면 

대화가 안 된다는 말을 저는 하는 겁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1]불모지대

2014.01.15 (01:01:32)

그렇군요. 제가 너무 추상적인 얘기를 했네요.

그저 넘의 구조론을 조금 읽어보고서 비슷한 논지에서 전개해본 겁니다.

그마저도 많이 빗나갔네요. 

답변 고맙습니다. 좀 더 다듬어 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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