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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9019 vote 1 2013.11.18 (23:50:52)

 


    닥치고 모형을 내놓아봐.


    지금 새로운 과학운동이 필요하다. 힉스입자의 확인으로 표준모형이 완성되고 대통일이론과 초끈이론으로 나아가는 판이다. 힉스입자의 발견은 지대한 의미가 있다. 비유하여 말하면, 신이 밀가루를 반죽하여 세상을 만들었다 치고, 신이라는 요리사가 어떻게 밀가루를 반죽하여 면을 뽑고 이 세상을 일구었는지 그 요리과정이 만인이 지켜보는 눈앞에서 시연된 셈이다. 다만 그 밀가루가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는 아직 규명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모형이 나왔다는 사실이다. 모형은 복제된다. 신이 세상을 만드는 방법을 그대로 적용하여, 건축가는 집을 짓고, 음악가는 곡을 짓고, 작가는 책을 짓고, 정치가는 국민을 통합해낼 수 있다. 이제 모형이 나왔으므로 모두가 이를 본받아야 한다. 그러나 실정은 어떤가? 여전히 종교와 독재와 사이비가 판을 친다. 과학의 누부신 성과는 인류의 삶에 반영되고 있지 않다.


    이유는 무엇일까? 소통이 막혔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조차도 창조과학회니 뭐니 해서 엇길로 빠지기 다반사다. 구글에서 검색어로 ‘진화’를 입력하면 진화를 부정하는 텍스트 8개에 진화를 설명하는 텍스트 2개 꼴로 검색된다. ‘양자얽힘’을 검색해봐도 대부분의 텍스트가 초반에 잘 가다가 막판에 심령치료니 다중우주니 시간여행이니 하며 엉뚱한 길로 빠지고 있다. 헐리우드 영화가 막판에 반전을 때리듯이 검색되는 문서마다 상투적인 그런게 있다. 그게 아주 하나의 형식으로 굳어졌다. 이러니 과학자를 믿을 수가 없다.


    힉스메커니즘만 해도 힉스의 노벨상 수상 전후로 언론에서 워낙 많이 다뤄지고 있으니까 최근에야 이를 알아듣게 풀어서 설명해주는 사람이 나타난 정도다. 대부분의 문서들은 수학공식으로 도배를 해놓아서 읽기가 꺼려진다. 같은 과학자들끼리도 칸칸이 나누어져서 파티션 사이에 고개를 쳐박고 서로 교통하지 않는 판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소통할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인류는 발달한 과학을 반영할 언어를 갖고 있지 않다. 비유하면 숫자가 없이, 기호도 없고 공식도 없이 수학을 하는 것과 같다. 동양이 서양에 뒤처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양은 수학이 도제식으로 되어서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만 반복적인 수련을 통해 전수되는 형편이었다. 숫자와 기호와 공리와 정의와 공식이 나와줘야 비로소 보편성을 얻는 것인데 동양에는 그것이 없었다. 계산만 죽도록 하고 사유를 하지 않는게 동양수학의 전통이다. 수학책이 문제집 형태로 되어서 방정식 문제와 풀이법만 나와 있다. 과학과 수학이 겉돌게 된다.


    알파벳 없는 한자와 같다. 한자로 집을 뜻하는 글자는 家, 戶, 亭, 樓, 臺, 舍, 館, 閣, 堂, 軒, 屋, 室, 宅, 宇, 宙, 宮, 邸, 寺, 廳, 署, 院, 棟, 庫, 闕, 殿, 莊 등 수십여개나 된다. 이런 식이면 소통할 수 없다. 중복을 제거해야 한다. 표의문자에서 표음문자로 비약했듯이 인류는 한 번 더 비약해야 한다. ‘하나 더하기 둘’이라 하지 않고 ‘1+2’라고 표기하듯이 과학언어를 바꾸어야 한다.


    인류는 단어를 조직하여 문장을 만든다. 하나의 단어는 하나의 의미를 가진다. 이런 식이면 옳게 소통할 수 없다. 단어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5만 자나 되는 한자를 알파벳이 단 스물여섯자로 줄였듯이 줄여야 한다. 더 줄일 수 있다. 백과사전의 무수한 단어가 다섯가지 존재의 모형으로 압축된다. 구조론은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다섯 개 모형으로 모두 나타낸다.


    숫자는 0에서 시작하여 9로 끝낸다. 이는 십진법이고 이진법으로는 0과 1로 충분하다. 최대한 줄이면 어떻게 될까? 수학은 크기를 나타내는 숫자, 가감승제의 연산기호, 연산순서를 정하는 포지션, 등호, 집합기호의 다섯가지 수학언어로 구성된다. 많은 수학기호가 있지만 대별하면 이 다섯 안에 다 들어간다.


    구조론으로 보면 질은 집합기호 ( ), 입자는 등호 =, 힘은 연산포지션 /, 운동은 가감승제 +, 양은 숫자 1이라고 할 수 있다. 1/2와 2/1은 둘 다 1, 2, /로 구성되지만 다르다. 어느 쪽이 어느 쪽을 나누느냐다. 이는 방향을 정하므로 구조론의 힘에 해당한다. 수학이 다섯가지 기호로 전부 해결하듯이 구조론은 다섯가지 대칭의 모형으로 전부 해결한다. 충분하다.


    자연계의 모든 힘이 전자기력, 약력, 중력, 강력 넷으로 환원되듯이 공간이 점, 선, 면, 입체 넷만으로 설명되듯이, 구조론은 다섯으로 전부 설명한다. 방대한 수학의 세계가 다섯가지 수학언어 안에 모두 들어가는 이유는 수학이 오직 크기와 그 변화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크기와 크기가 변하는 과정이 합쳐서 다섯이다. 마찬가지로 구조의 모형은 다섯이다. 이 논리를 확장하면 자연계의 힘도 구조론적으로는 전자기력, 약력, 중력, 강력에 하나가 추가되어 다섯이 되고, 차원도 점, 선, 각, 입체, 밀도의 다섯이 된다. 언어도 한글은 성대소리인 모음과, 혓소리, 입술소리, 잇소리, 목구멍소리로 다섯으로 분류된다. 뭐든 다섯이다. 모형을 만드는 대칭이 다섯 뿐이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단어는 의미를 담는다. 구조론은 의사결정모형을 담는다. 수학이 크기와 그 변화를 담아내듯이 언어는 의미와 그 변화를 담아낸다. 인간의 언어에 단어가 많은 것은 숫자 하나하나에 각각 이름을 붙여놓은 것과 같다. 집은 다 같은 집인데 家, 戶, 亭, 樓, 臺, 舍, 館, 閣, 堂, 軒, 屋, 室, 宅, 宇, 宙, 宮, 邸, 寺, 廳, 署, 院, 棟, 庫, 闕, 殿, 莊으로 각각 다른 이름을 붙여놓아서 공연히 번거롭게 된 것이다. 누가 그러랬냐고?


    중복을 배제하면 의사와 의사결정모형으로 끝난다. 아무리 많은 개념들도 그것을 그것이게 결정하는 모형으로 보면 같다. 인간 언어에 의사결정구조를 통과하지 않은 것은 없다. 어떤 것이든 그것은 그렇게 되도록 결정된 것이며 그것을 결정하는 결정구조라는 자궁을 거쳐서 나온 것이며, 자궁이 없이 태어난 것은 우주 안에 없다. 누구도 피할 수 없다.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관문이다.


    우주 안의 모든 존재는 결정모듈을 거쳤으며 그 결정모형은 다섯 뿐이다. 현재의 과학은 입자개념과 인과율개념으로 모두 설명한다. 그런데 입자는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결정된 것이다. 결정된 결과측이 아니라 결정하는 원인측을 봐야 한다. 결정된 자녀가 백명이라도 결정하는 부모는 하나다. 번거로움을 없애려면 결과측이 아닌 원인측을 봐야 한다. 예컨대 색깔의 종류는 모두 몇 개일까? 빨주노초파남보에 흑백회? RGB 색상코드는 무한히 많은 색깔을 나타낼 수 있다. 입자개념은 색상코드의 색깔과 같아서 자연의 본래가 아니다. 만들어진 색깔이 아니라 만드는 자궁으로 나타내야 한다. RGB 셋에 흑백 둘을 합쳐서 다섯으로 모두 나타낼 수 있다. 기존의 과학언어인 입자개념과 인과개념은 만드는 소스가 아니라 만들어진 작품으로 논하므로 대상이 무한히 많아져서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것을 만드는 자궁은 의사결정이다. 의사결정으로 보면 다섯가지 대칭의 모형으로 모두 나타낼 수 있으므로 간편하다.


    ◎ 구과학 : 결정된 결과측의 입자
    ◎ 신과학 : 결정하는 원인측 대칭


    모든 것은 의사결정이라는 자궁에 의해 이루어지며, 그것은 모형이며, 모형은 대칭에 의해 성립한다. 모형은 널리 복제되므로 보편성을 가진다. 그러므로 복제된 입자측이 아니라 복제하는 모형측을 보는 방법으로 과학의 번거로움을 제거하고 난삽함을 해결할 수 있다. 비로소 소통할 수 있다.


    모든 존재는 결정된 존재다. 어떤 것이 결정되려면 작용반작용의 법칙에 따라 대칭구조를 거쳐야 한다. 대칭은 명과 암, 음과 양, 남과 여, 여와 야, 강과 약, 고와 저, 장과 단, 원과 근, 완과 급, 경과 중, 농과 담처럼 짝을 짓고 있으며 반드시 이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거쳐야 할 관문은 질, 입자, 힘, 운동, 량 뿐이므로 구조론은 쉽다.


    대칭이 결정한다. 대칭은 축을 가진다. 그런데 축이 구조체 내부에 있지 않은 경우가 있다. 축이 구조 안에 있으면 입자이고 구조 밖에 있으면 계系다. 혹은 장場이다. 어떤 나라에서 두 사람이 황금을 찾으러 갔는데 아직 황금을 찾지 못했다면 어떨까? 황금을 찾을 때 까지는 서로 협력해야 한다. 이때 두 사람을 하나로 묶어주는 축은 황금이다. 그런데 그 황금은 두 사람 밖에 있다. 이는 질이다. 묶어주는 것이 결정하는 것이다. 묶거나 풀면서 스위치가 된다.


    그런데 이미 황금을 이미 찾았다면 어떨까? 두 사람은 헤어진다. 다만 황금을 나눠갖지 못했다면? 상대방이 황금을 들고 도망칠까봐 감시하며 서로에게 붙잡혀 있는 것이 입자다. 질은 대칭축이 대칭을 이룬 두 사람 바깥에 있고, 입자는 대칭축이 두 사람 내부에 있다. 월드컵이라 치자. 브라질팀과 한국팀은 모두 월드컵이라는 하나의 축에 잡혀 있다. 이때 월드컵은 브라질팀과 한국팀 바깥에 있다. 이는 질이다. 먼저 탈락하는 팀은 그대로 보따리 싸서 집으로 간다. 그러나 같은 한국팀 안에서는 해단식을 하기 전 까지 선수들은 마음대로 팀을 이탈할 수 없다. 감독이라는 축에 잡혀있기 때문이다. 커플은 의견이 일치할 때만 붙어있지만 부부는 의견이 달라도 붙어있어야 한다. 커플은 질이고 부부는 입자다.


    과학은 원인측이 아닌 결과측을 본다. 커플이 아닌 부부만을 본다. 바깥쪽이 아닌 안쪽만을 본다. 틀렸다. 이런 식이면 의사결정의 핵심을 찾지 못한다. 인간으로 하여금 행동하게 하는 원인은 욕망처럼 인간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엄처럼 인간 바깥에 있는 것이다. 아마존의 부족민들은 출세나 돈이나 섹스나 신분에 관심이 없다. 인간은 존엄을 원하며 출세나 돈이나 명성은 존엄을 나타내는 기호들에 불과하다. 존엄을 얻는다면 목숨도 초개처럼 버리는 존재가 인간이다. 그렇다. 우리는 인류를 오해하고 있다. 진짜는 따로 있다.


    질은 스스로 에너지를 만들어내고, 입자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에너지를 내부에서 처리하며, 힘은 그 에너지의 처리과정에서 내부구조를 다시 외부로 복제한다. 월드컵 경기라는 팀과 팀의 대칭구조가 질이면, 한국팀이라는 공격수와 수비수의 대칭구조가 입자다. 이때 질의 모형이 입자의 모형으로 복제된다. 이 구조는 다시 한번 복제되어 한국팀 공격수 손흥민과 상대팀 수비수 아무개의 대칭구조로 전개되는 것이 힘이다. 같은 방식으로 공간의 대칭성이 시간적 대칭성으로 전개하면 운동이고, 최종적으로 외부에 전달되면 양이다.


    존재는 일 회의 사건에서 다섯 번 의사결정을 한다. 이때 상부구조를 하부구조로 복제한다. 존재는 딱딱한 알갱이로 이루어진 입자가 아니라 다섯 번 의사결정을 거치는 부드러운 하나의 사건이다. 노자는 유柔가  강剛을 이긴다고 했다. 사건이 사물을 이긴다. 사건은 부드럽고 사물은 딱딱하다. 존재는 사물이 아니라 사건이다. 존재는 낳아진 딱딱한 알갱이가 아니라 나아내는 부드러운 자궁이다. 거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세상은 낳아진 아기들의 집합이 아니라 낳는 어미들의 집합이다. 무엇이 다른가? 의사결정이 다르다. 아기들은 의사결정을 못한다. 딱딱한 입자는 의사결정을 못한다. 엄마는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 부드러운 사건은 의사결정을 해낸다.


    노자는 어떤 개별적 사실이 아니라 만유에 공통되는 하나의 보편모형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다. 탈레스가 물일원론을 주장했을 때 그 물이 설마 먹고 마시는 물이겠는가?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모형을 말한 것이며 탈레스는 흐르는 물처럼 살아서 움직이는 역동적인 모형을 제시한 것이다. 노자와 탈레스가 정답을 말했다. 그러나 과학은 딱딱하게 죽어버린 입자의 모형으로 퇴행했다. 인과율로 죽은 것과 죽은 것을 이어붙여 세상을 구축하려 했지만 시간으로 붙을 뿐 공간으로는 붙지 않아서 실패다.


    세상은 입자들의 집합이 아니라 의사결정의 집합이다. 입자들을 연결하는 과학의 논리로 인과율이며 인과율은 시간적 선후관계를 연결할 뿐이다. 양자얽힘과 같은 공간의 연결은 일의성에 의해 가능하다. 일의성은 질에서 계가 대칭을 붙잡듯이, 입자에서 축이 대칭을 붙잡듯이 남녀, 상하, 좌우, 전후, 고저, 장단, 원근, 미추, 광협, 경중, 농담처럼 짝지어져 연결된 대칭을 붙잡는다.


    입자들의 인과율은 강자와 약자, 부자와 빈자, 승자와 패자처럼 차별되는 것을 잘 설명한다. 주로 강자가 원인이 되고 약자는 결과가 되며, 부자가 원인이 되고 빈자는 결과가 된다. 승자가 원인이 되고 패자는 결과가 되며, 다수자가 원인이 되고 소수자는 결과가 된다. 강자와 부자와 승자와 다수자는 에너지가 있고 그 에너지가 사건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반면 약자와 빈자와 패자와 소수자는 에너지가 없기 때문에 무시되고 소외된다. 그러므로 인과율은 온갖 차별과 분리와 배척과 불화의 원인이 된다.


    대칭들의 일의성은 이러한 차별이 없다. 일의성은 시간적 순서가 아니라 공간적 방향이기 때문이다. 남과 여, 좌와 우, 앞과 뒤, 음과 양, 수요와 공급,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은 스포츠 경기를 하는 두 팀처럼 동시에 작용한다. 일의성은 하나가 둘을 동시에 결정하는 원리다. 스포츠 경기에서 승자와 패자는 동시에 결정된다. 승자가 결정되었을 때 패자도 결정된 것이다. 신호등에 파란불이 들어왔다면 빨간불은 꺼진 것이다. 파란불이 이미 들어왔는데도 빨간불이 아직 꺼지지 않았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일의성에 진정한 희망이 있다.


    ◎ 구과학 : 인과율≫ 입자(시간의 순서는 원인이 결과를 차별한다.)
    ◎ 신과학 : 일의성≫ 대칭(공간의 방향은 양측이 동시에 결정된다.)


    하나의 사건은 다섯 번의 의사결정을 하며 차례로 전개한다. 이때 순서에서 앞선 쪽이 원인 뒤따르는 쪽이 결과다. 질이 입자를 낳고 입자가 힘을 낳고 힘이 운동을 낳고 운동이 양을 낳는다. 낳는 쪽이 원인이고 태어난 쪽이 결과이다. 이때 낳음은 양자론의 자발적 대칭성붕괴를 일으킨다. 대칭에서 비대칭으로 바뀐다. 대칭은 둘이다. 입자는 하나다. 하나가 둘을 담당하니 2에서 1로 바뀌며 남는 1만큼 에너지 효율을 낳아서 그 남는 힘으로 세상을 움직여간다. 비로소 세상은 널리 이루어졌다.


    대칭은 짝을 지어 쌍을 이루므로 2다. 질이 입자로 변하면 축이 작동하면서 대칭이 붕괴된다. 대칭에서 비대칭으로 바뀐다. 사람은 팔다리는 2로 대칭을 이룬다. 그러나 걸음을 걸을 때는 두 다리 중에 하나씩 교대로 사용한다. 2를 두고 1을 쓰므로 1이 남는다. 남는 만큼 이익이다. 거기서 얻은 효율성으로 세상을 움직여간다. 이때 남는 1은 나아가는 1을 뒤에서 밀어준다. 그래서 세상은 운행된다. 두 다리로 걷는다면 한 다리는 나아가고 다른 다리는 뒤에서 밀어준다. 모든 운동은 예외없이 2≫1의 구조를 사용한다.


    세상의 모든 움직임은 2≫1의 의사결정과정을 거친다. 그런데 팔이 하나 뿐이라면 어떨까? 다리가 하나 뿐이라면 움직일 수 없다. 뒤에서 밀어줄 남는 에너지 효율성이 없기 때문이다. 오뚝이는 다리가 하나 뿐이라서 움직이지 못한다. 눈사람도 다리가 하나라서 움직이지 못한다. 모든 움직이는 것은 반드시 다리가 둘이라야 한다. 화살은 다리가 하나 뿐이지 않느냐고? 아니다. 활과 시위가 대칭을 이루니 2다. 이때 둘을 동시에 놓으면 화살은 날아가지 않는다. 2에서 1로 바뀌어야 한다. 대칭에서 비대칭으로 도약해야 한다. 활은 놓지 않고 시위만 놓는다. 활과 시위 2에서 화살 1로 전개하는 것이다.


    다리가 하나 뿐인 사람은 다리를 앞뒤로 움직여서 걷는게 아니라 상하로 움츠렸다가 점프를 해야 한다. 이때 몸을 굽혀서 S자를 만들므로 상체와 하체가 대칭되어 역시 2를 이룬다. 뱀은 두 다리가 없어서 대칭을 이루지 못하므로 몸을 S자로 꼬아서 대칭을 이룬다. 모든 존재는 반드시 대칭 2를 거쳐 움직이며 여기에 예외는 없다. 소립자의 운동이나 전자의 스핀이나 핵융합이라도 역시 2≫1의 대칭성 붕괴과정을 거친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둘씩 짝을 이루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모형을 거치게 되어 있다. 그 과정에서 에너지를 처리하며 다섯가지 의사결정단계를 밟는다. 대칭 둘을 연결하는 일의성이 에너지 효율을 일으켜 세상을 뒷받침한다.


    ◎ 구과학 – 세상은 인과율이라는 접착제로 입자가 집합되었다.
    ◎ 신과학 – 세상은 일의성이라는 접착제로 사건이 대칭되었다.


    세상은 입자의 집합이 아니라 구조의 대칭이다. 레고블럭은 요凹철凸 모양의 돌기가 있어서 집합될 수 있다. 벽돌은 모르타르를 쓰고 나무는 못을 쓴다. 우주는 무엇을 쓰는가? 과학은 우주를 입자의 집합으로 설명한다. 틀렸다. 집합시킬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 세상은 사건의 대칭이다. 의사결정구조들이 전방위로 대칭되어 우주라는 커다란 집을 건축한 것이다. 우주의 원리는 짝짓기 원리다. 레고블럭도 요철(凹凸)이 없으면 쓸모가 없다. 남녀도 그것이 없으면 구실하지 못한다. 그것은 대칭이다. 정치의 여야도 그러하고 경제의 수요와 공급도 그러하며 물질의 플러스와 마이너스도 그러하다.


    새로운 과학의 성과가 나오면 그때마다 철학자들은 한 마디 해줘야 한다. 양자역학의 발견으로 세상에 대한 근원의 의문은 대략 밝혀졌다. 과학은 발전할만큼 충분히 발전했다. 과학은 그다지 잘못이 없다. 과학은 충분히 제 역할을 했다. 문제는 언어다. 과학이 무엇을 밝혀내든 그것은 사회에 전달되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은 시공간이 휘어진다고 말한다. 휘어지는 시공간은 시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무엇이다. 그것을 용이하게 설명할 언어를 인류는 갖고 있지 않다. 과학자들은 그때마다 수학공식으로 도피한다. 양자역학은 우리가 머리에 떠올릴만한 모형을 그려주지 않는다. “Shut up and calculate it." 파인만의 말이라고 한다. ”닥치고 계산하란 말이다.“ 순순히 당하고 있으랴? “닥치고 모형을 내놔봐.” 라고는 왜 반격하지 못하는가? 모형은 대칭에서 얻어진다. 인간은 상하, 좌우, 원근, 고저, 장단, 음양, 명암, 전후, 안팎, 광협, 강유의 대칭모형을 통해서만 사물을 파악한다. 그러나 인류의 과학이 그러한 대칭을 활용하려는 노력은 없다. 우선 상하, 좌우, 원근, 명암, 고저, 장단 이런 대칭을 나타내는 말이 동양의 말이지 서양의 말은 아니다. 서양에는 아주 개념이 없다. 틀려 먹었다.


    서구가 발전한 것은 수학 덕분이다. 서구의 수학이 발전한 것은 기호 덕분이다. 그렇다. 그들은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낸 것이다. 아쉽게도 동양은 기호를 쓰지 않았다. 수학언어가 없었다. 마찬가지다. 인류는 대칭을 써야 한다. 대칭은 모형이다. 모형을 써야 한다. 모형은 계산으로 도망가지 않고 알아듣기 쉬운 모형을 그려준다. 대칭쌍의 모형으로 이루어진 신수학이 필요하고 신과학이 필요하다. 구조론이 필요하다.


    현대의 한계는 언어의 한계다. 숫자와 기호로 나타내는 수학언어는 있는데 대칭과 모형으로 나타내는 구조언어가 없기 때문에, 과학은 인류와 멀어지고 학자들은 자기들만의 좁은 담벼락 사이에 갇혀버렸다. 과학의 눈부신 성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여전히 석기시대를 살고 있다. 종교의 득세, 독재의 횡행, 사이비의 범람만 봐도 알만하다. 아주 거짓말공화국이 되었다. 뻔뻔스럽기는 어느 나라든 마찬가지다. 아랍세계는 여전히 노골적으로 성차별을 하고 있고, 미국은 대통령이 당선되면 특정 종교의 입장에서 선서를 한다. 우습게도 말이다. 마음껏 과학을 비웃으면서 말이다. 그렇게 당하면서 과학은 이의제기를 하지 않는다.


    일찍이 바이킹들이 신대륙을 발견했지만 그 소식이 아직 구대륙에 전해지지 않는 것과 같다. 발견하면 뭣하는가? 1천년 전에 일단의 중국인들이 원양항해의 끝에 아프리카를 거쳐 신대륙과 남극대륙을 발견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면 뭣하는가? 허무할 뿐이다. 소통되어야 의미가 있다. 과학계와 인류사회 사이에 거대한 장벽이 있다. 그렇다면 이제 언어를 바꿔야 한다.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대칭과 모형으로 말해야 한다. ‘계산하지 말란 말이야.’ ‘닥치고 모형을 내놓으란 말이야.’ 구조론은 세상을 의사결정구조로 본다. 대칭성이 의사결정모듈이다.


    빅뱅 이전 시간도 공간도 물질도 없었을 때의 우주의 처음은 어떤 것일까? 어떻게 무無에서 유有가 나올 수 있었을까? 논의를 산만하게 가져가면 안 된다. 세상은 무에서 유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죽은 것에서 산 것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아직도 사람들은 무에서 어떻게 유가 나왔을까 하고 답답한 논의를 한다. 그들은 무와 유라는 단어에 갇혀 있는 것이다. 잘못된 단어를 폐기하고 바른 언어를 얻어 진도를 나갈 수 있다.


    세상은 무에서 유로 전개한 것이 아니라 죽은 것에서 산 것으로 전개하였다. 왜? 존재는 입자가 아니라 사건이기 때문이다. 입자는 무와 유로 나타나지만 사건은 죽은 것과 산 것으로 나타난다. 존재는 사건이며, 사건은 주사위가 한 번 던져지는 것이고, 그 주사위가 던져질 때 죽은 것이 살아난 것이며, 그것은 무와 유로 나타낼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니다. 전혀 다른 거다. 아인슈타인의 사건적 시공간은 그대의 입자적 시공간과 다르다. 유와 무의 관점으로 보는 한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이해할 수 없다.


    ◎ 구과학 : 입자의 유와 무
    ◎ 신과학 : 사건의 생과 사


    아인슈타인이 백번 쯤 시공이 휘어진다고 말해도 당신은 여전히 입자의 유무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으므로 결코 알아듣지 못한다. 죽은 시간인지 산 시간인지, 죽은 공간인지 산 공간인지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그대는 비로소 아인슈타인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다. 머리 속에 하나의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모형을 얻을 수 있다. ‘닥치고 계산이나 해’가 아니라 대칭의 모형에 멋진 날개를 단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6]id: id: 우야산인

2013.11.19 (12:18:55)

백번 공감!!!
절대 공감!!!

[레벨:5]yhy

2013.11.19 (16:12:40)

구조론 위키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큰 그림은 이제 나왔으니 그것에 맞춰 해결할 구체적인 신과학신수학문제를 모아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만약 어떤 전문가가 그런 문제를 연구한다고 했을 때, 진짜 구조론적인 방향으로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지 확인이 계속 필요할테고, 그때 구조론 위키가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유튜브에 도는 구조론 모임 자기소개영상을 보니 아이티전문가분들이 꽤 있었습니다.

문제의 예 : 구조론이 반영된 프로그래밍 언어 개발

이런 문제는 구조론 커뮤니티 내부에서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또 어떤 문제가 가능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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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0 세상의 모형 3 김동렬 2014-03-02 7487
2799 프로이드의 의미 5 김동렬 2014-02-28 8706
2798 관점의 설정 1 김동렬 2014-02-26 7994
2797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라 3 김동렬 2014-02-18 17862
2796 자유란 무엇인가? image 1 김동렬 2014-02-18 9877
2795 이상과 천상 2 김동렬 2014-02-17 8023
2794 시간을 조직하라 image 6 김동렬 2014-02-13 11562
2793 창의방법 스무고개 9 김동렬 2014-02-12 8773
2792 블랙스완은 두 번 나타난다. image 김동렬 2014-02-11 8363
2791 경제예측은 가능한가? 9 김동렬 2014-02-10 8458
2790 종교와 광기 2 김동렬 2014-02-05 9425
2789 최후에 결정하는 자가 되라 김동렬 2014-02-05 9772
2788 정의란 무엇인가? 6 김동렬 2014-02-04 95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