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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5848 vote 1 2014.12.03 (19:40:10)

     

    구조론 요약


    세상은 에너지와 일로 되어 있다. 물질이나 원자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구조론의 요체는 세상을 물질이나 원자로 보는 관점을 버리고, 에너지와 일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획득하는 것이다.


    ◎ 바른 이해 - 세상은 에너지와 일로 되어 있다.
    ◎ 틀린 생각 - 세상은 물질과 원자로 되어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자연 그대로를 따르는 방법과 인간의 신체감관에 의지하는 방법이다. 전자는 컴퓨터의 프로그램을 보는 것과 같고 후자는 모니터를 보는 것과 같다.


    ◎ 바른 이해 – 자연 그대로를 본다.
    ◎ 틀린 방법 – 인간의 신체감관을 따른다.


    스티브 잡스가 퍼스널 컴퓨터를 만들기 전에도 컴퓨터는 널리고 쓰이고 있었다. 단지 개인 이용자가 쓸 수 없었을 뿐이다. 잡스가 일하던 비디오게임사 아타리만 해도 두뇌는 컴퓨터를 썼다.


    이용자는 모니터에 출력된 내용만 볼 수 있다. 잡스의 친구 워즈니악이 개발자의 편의를 위해 컴퓨터 내부의 작동과정을 지켜볼 수 있게 한 것이 PC의 시작이다. 진행과정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는 혁명적인 사건이다. 워즈니악은 단지 자기 편하려고 그런 장치를 만들었지만 잡스는 이것이 거대한 혁명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잡스의 혁명을 모르고 있다.


    ◎ 잡스혁명 - 컴퓨터의 작업과정을 보여줘야 일체감을 느낀다.


    정치든 경제든 문화든 다 마찬가지다. ‘나를 따르라’는 식의 독선은 곤란하다. 의사결정과정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권력과의 일체감을 느낀다. 일방적으로 결과를 통보하는 식은 곤란하다.


    과정을 보여줘야 구조가 복제되기 때문이다. 위에서 하는 방법을 아래에서도 따라하려고 하는 것이며 그러려면 납득해야 한다. 시위와 토론을 허용하고, 표현의 자유도 존중해야 납득하게 된다.


    자연의 근본은 에너지다. 에너지는 일을 한다. 일은 시공간에 펼쳐진다. 인간은 그 일이 끝나야만 볼 수 있다. 일의 전모를 볼 수는 없고 일이 끝나는 시공간의 한 지점만 인간이 볼 수 있다.


    일이 현재 진행 중인 동안은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다. 컴퓨터의 작업과정은 볼 수 없다. 일이 끝나고 모니터에 출력된 결과물만 볼 수 있다. 밀실에서 벌어지는 권력의 작동과정을 볼 수 없다.


    ◎ 인식의 딜레마 – 자연은 일하고 인간은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


    영화를 보더라도 촬영이 끝나야 관객이 극장에서 영화를 볼 수 있는 것과 같다. 일의 진행과정을 볼 수 없으므로 인간은 추론의 방법을 쓴다. 추론방법에는 연역추론과 귀납추론이 있다.


    연역추론은 자연이 일하듯이 인간도 일을 해보는 것이다. 연역이 올바른 인식의 방법이다. 귀납추론은 추측하는 것이다. 이는 틀린 방법이다. 물질이나 원자개념은 잘못된 귀납추론의 결과다.


    자연의 일이 끝난 다음 눈, 코, 입, 귀, 피부의 신체감관에 전달된 정보를 단서로 추측한다. 장님이 길을 가다가 어딘가에 부딪혔을 때 ‘아 이곳에 무엇이 있구나.’ 하고 짐작하는 것과 같다.


    38.jpg


    우주를 촬영한 사진은 배경이 검지만 사실 우주는 희다. 우주는 빛으로 가득차 있다. 빛이 카메라에 찍히지 않을 뿐이다. 자연은 일이다. 빛은 일이다. 인간은 일하는 빛을 볼 수 없다.


    빛이 죽어야 인간에게 빛이 보인다. 빛이 죽으면 열이나 다른 무언가로 변형된다. 우리가 빛을 보았다면 그 빛이 죽은 흔적을 본 것이다. 단풍잎이 붉다면 잎을 붉은 빛을 내다버린 거다.


    단풍잎이 가져간 색깔은 초록이다. 우리는 정반대로 본다. 그러므로 사실 흰 것은 검은 것이며, 검은 것은 흰 것이다. 거울의 좌우가 바뀌듯이 세상이 통째로 뒤집어져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부터 검은 돌을 흰돌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해가 뜨는게 아니라 사실은 지구가 뜨는 거지만 ‘지구가 뜬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편하니까 그렇게 할 뿐 과학의 답은 아니다.


    달에 우주인을 보내려면? 그때는 지구가 뜬다고 말해야 한다. 의사소통은 편의를 따르지만 일할 때는 진실을 따라야 한다. 그냥 말할 때는 천동설을 써도 과학할 때는 지동설을 써야 한다.


    ◎ 바른 존재론 – 자연의 일로 세상을 바라본다.
    ◎ 틀린 인식론 – 인간의 감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존재론과 인식론이 있다. 존재론은 자연의 일을 따르는 연역법이요 인식론은 인간의 감각을 따르는 귀납법이다. 존재론이 맞고 연역법이 맞다. 그러나 쉽지 않다. 인간의 소통은 귀납법이다.


    인간의 눈, 코, 입, 귀, 피부가 귀납법이므로 의사소통에는 연역법을 쓸 수 없다. 그것은 무리다. 일단 해당되는 단어가 없다. 자연의 연역법은 전부 방정식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 깨달음 - 자연은 일하고 일은 방정식이므로 인간의 의사소통은 존재론의 연역법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방정식을 쓰는 깨달음이 필요하다.


    자연은 존재하고 인간은 인식한다. 존재와 인식은 방향이 반대이므로 상대성이 성립한다. 거울의 좌우가 바뀌는 것처럼 오류가 있다. 일은 진행중에 알 수 없으며, 일이 끝나면 부서진다.


    ◎ 연역법 – 살아있는 자연 그대로를 본다.
    ◎ 귀납법 – 죽은 것을 보고 산 것을 추측한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빛은 부서져서 죽은 빛이다. 우주는 살아있는 빛으로 가득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없다. 빛이 진행하는 동안은 파동이므로 주변과 반응하지 않으니 볼 수 없다.


    신체감관에 의지하는 인간의 귀납은 실패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제법 문명을 일군 것은 일을 통하여 오류를 걸러내기 때문이다. 지식은 속임수가 있어도 일은 속임수가 없다.


    오류를 걸러내는 방법은 죽은 것을 보고 산 것을 짐작하여 일에 태웠다가 실패하면 이를 뒤집는 ‘시행착오≫오류시정’의 방법이다. 가설을 세우고 이를 실험으로 검증하는 과학의 방법이다.


    ◎ 과학의 방법 - ‘가정≫실험≫검증’의 형태로 귀납으로 얻은 데이터를 일에 태워 검증한다. 죽은 것을 보고 산 것을 짐작하며, 이를 일에 적용해보고 틀리면 오류를 시정하는 패턴을 반복한다.


    자연이 일을 쓰므로 인간도 일에 태워서 지식을 획득하는 것이 과학이다. 사회에 진보와 보수의 갈등이 존재하는 이유는 진보의 아이디어들이 사실은 일에 적용해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보진영에 검증되지 않은 가설이 너무 많다. 시행착오는 보수도 마찬가지로 저지른다. 진보와 보수가 번갈아 가며 뻘짓을 하고 정권을 교체한다. 심판자인 유권자도 뻘짓을 하는게 문제다.


    유권자는 수명이 다해야 교체가 되는데 기성세대가 대략 20년 정도를 버티므로 세상이 잘 안 바뀌는 거다. 시행착오 과정에 쓸데없이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으려면 바른 가설이 필요하다.


    보통은 그냥 직관을 쓰면서 이를 논리로 위장한다. 많은 과학의 성과들이 그냥 이렇게 저렇게 해보는 ‘소발에 쥐잡기 방법’으로 성공한다. 합리적인 방법은 없는가? 자연의 연역법을 쓰면 된다.


    연역은 모형을 쓴다. 모형은 일의 모형이다. 자연은 방정식을 쓰는데 방정식은 A와 B 그리고 둘이 공유하는 C로 되어 있으며 이 셋은 분리가 안 된다. 그러므로 모형을 이루는 것이다.


    연역은 절대로 맞다. 모형은 복제되기 때문이다. 모형이 틀렸다면 인간이 오늘날의 모습으로 진화할 수가 없다. 무엇인가? 소프트웨어도 계속 잘게 쪼개면 최종적으로는 하드웨어가 된다.


    ◎ 구조는 복잡을 제거하여 단순화 시킨다. 복잡은 반복된 중복과 뒤섞인 혼잡이다. 복잡을 제거하여 단순화된 지점에서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겹친다. 이 지점에서 자기복제가 일어난다. 일이 끝난 다음에 얻은 복제본이 일을 하기 전의 원본과 완전히 일치한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겹치는 지점이 있다. 원인과 결과가 겹치는 지점이 있다. 그것이 일의성이다. 모든 존재는 일을 계속 쪼개면 원자가 나오는게 아니라 일의성에 도달하게 된다.


    길 끝에는 집이 있고 집 사이에는 길이 있다. 길을 계속 잘게 쪼개면 최종적으로는 집과 겹친다. 탄광의 막장처럼 집이면서 길이고 길이면서 집인 지점이 있다. 이 지점에서 복제하면 된다.


    최종단계는 하드웨어가 곧 소프트웨어다. 생물이 진화를 촉발하기 전 원시단계는 유전자가 곧 생물이다. 잘게 쪼개면 그 지점에 도달하고 그 지점에서 의사결정은 자기복제에 의지한다.


    ◎ 일의성 - 구조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단계에서 원인과 결과, 입력과 출력, 원본과 복제본의 일치를 얻는다.


    일은 의사결정원리를 쓴다. 의사결정은 대칭원리를 쓴다. 궁극적인 단계의 대칭은 자기복제다. 자기 자신과의 대칭이다. 그 단계에 이른 다음 에너지를 투입해보면 올바른 답이 얻어진다.


    에너지가 스스로를 복제하여 자신과 대칭시킨 것이 일이다. 에너지가 일을 생성하는 과정을 재현해보면 된다. 그것은 자기복제이므로 비밀번호가 들어맞듯이 정확히 맞을 수 밖에 없다.


    연역은 무조건 맞다. 두 사람이 형제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방법은 두 사람의 부모가 유전자를 복제하여 정자와 난자가 수정하는 현장을 생중계해보면 된다. 복제과정은 백 퍼센트 들킨다.


    삼성이냐 현대의 제품이 짝퉁이 아님을 입증하는 방법은 용광로에서 주물을 찍어내는 복제과정을 검증하면 된다. 이곳에는 상대성이 적용되지 않는다. 일의 현재 진행 중에는 절대성이 성립한다.


    상대성은 일이 끝난 지점에서만 성립한다. 연역은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카피하므로 오류가 없다. 모든 존재는 ‘컨트롤 C’와 ‘컨트롤 V’를 한 번은 쓴다. 이 과정에 딱 걸린다.


    연역의 복제원리는 자연의 모두가 공유하는 절대법칙이다. 개나 소나 돼지도 이 방법을 쓴다. 원자나 소립자도 그러하고 정치나 예술도 그러하다. 단 언어로 전달이 안 되므로 깨쳐야 한다.


    언어로 전달되는 것은 거의 귀납이다. 귀납은 오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이 정도 해온 것은 일에 적용하여 실패한 것을 지속적으로 걸러냈기 때문이다. 인간은 금을 찾지 못한다.


    대신 이물질을 걸러내면 남는 것이 금이다. 인간은 지도자를 찾지 못하며 얼간이를 걸러내면 남는 자가 지도자다. 바보가 자꾸만 죽어버리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영웅이 떠오르는 것이다.


    지식을 일에 투입했을 때 성공하면 그 지식은 옳다. 실패하면 그 지식은 틀렸다. 어떤 지식이 확실히 틀렸다면 그 자체로 좋은 단서가 된다. 뒤집으면 정답이기 때문이다. 마이너스 법이다.


    ◎ 마이너스법 - 인간의 지식획득은 정답을 찾는게 아니라 오답을 거르는 마이너스법이다.


    연역만 해야 하는 상황이 있다. 이론 물리학의 영역이라면 현실적으로 실험이 불가능한 분야가 있다. 사고실험이 필요하다. 이 때는 모든 모형의 모형이 되는 근본모형 곧 구조론을 써야 한다.


    ◎ 자연은 일을 한다.
    ◎ 일은 시공간에 퍼져 있다.
    ◎ 인간은 신체감관으로 일과 접촉한다.
    ◎ 일의 끝단만 인간의 신체와 접촉하므로 알 수 없다.
    ◎ 틀린 인식을 일에 태워서 얻은 값을 뒤집어서 가설을 세운다.
    ◎ 가설과 검증, 시행착오≫오류시정의 마이너스 법으로 지식을 이룬다.
    ◎ 자연의 일은 모형을 복제하는 방법을 쓰므로 절대로 맞다.
    ◎ 모형이 복제되는 최초 탄생의 지점을 찾으면 된다.
    ◎ 모두가 공유하는 근본모형을 공유할 수 있다.


    존재와 인식이 있다. 존재는 연역되고 인식은 귀납된다. 연역은 복제되고 귀납은 추측된다. 에디슨은 될 때까지 실험을 반복하는 귀납을 쓰고, 테슬라는 이론에 맞추어 대량으로 찍어내는 연역을 쓴다.


    에디슨의 방법은 불완전하다. 에디슨도 실험을 계속해서 의미있는 데이터를 얻으면 다시 가설≫실험≫검증이라는 연역의 절차를 한 번 더 밟아야 하므로 모든 지식은 궁극적으로 연역에 의한다.


    1+1=2가 확실히 옳은 이유는 2가 1의 복제이기 때문이다. 자연수는 1진법으로 나타낼 수 있다. 1, 11, 111, 1111... 이런 식의 자기복제다. 복제는 자기자신이므로 오류가 없다.


    인간은 자연의 여러 사실들에서 개별적으로 지식을 수집한다고 생각한다. 틀렸다. 자연은 한 덩어리로 전부 연결되어 있다. 자연은 자기복제에 의해 본래 하나로부터 널리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 고정관념 – 물질을 쪼개면 원자가 나온다.
    ◎ 바른 깨달음 – 일을 쪼개면 일의성이 나온다.


    답은 복제원리다. 물질을 쪼개면 원자가 나온다는 생각은 틀렸다. 일을 쪼개면 복제의 원형이 되는 일의성이 나온다. 세상은 원자의 집합이 아니라 일의성의 자기복제에 의한 일의 전개다.


    ◎ 고정관념 – 세상은 레고블럭의 집합이다.
    ◎ 바른 깨달음 – 세상은 실을 길게 늘인 다음 뒤죽박죽으로 꼬았다.


    레고블럭은 낱낱의 존재다. 자연의 근본은 에너지와 일이므로 그렇게 분할이 되지 않는다. 숫자 1을 계속 쪼개면 계속 크기가 작아질 뿐 한도가 없다. 무한대 개념을 받아들여야 한다.


    일의성은 작은 점이 그러하듯이 원인과 결과가 붙어 있다. 이걸 잡아당기면 선이 되는데 이걸 복잡하게 꼬아놓으면 물질도 되고 세상도 된다. 그런데 풀어서 탁 놓아버리면 점으로 되돌아간다.


    ◎ 고정관념 – 세상은 여럿이 집합되었다.
    ◎ 바른 깨달음 – 세상은 하나가 꼬여 중첩되었다.


    그러므로 세상의 근본원리는 집합이 아니라 중첩이다. 집합은 서로 다른 것이 모인 것이고 중첩은 하나가 꼬인 것이다. 부대의 대장은 집합자가 아니라 중첩자이다. 위와 아래의 회의가 있다.


    간부회의와 사병회의라는 두 차례의 회의에 동시에 참여하는 사람이 중대장이나 소대장이다. 과장이든 부장이든 의사결정권자는 위와 아래의 두 그룹에 동시에 소속되어 있어야 한다.


    중첩되어 있으므로 복제할 수 있다. 인간의 일 역시 복제의 방법을 쓴다. 자연이 큰 나무라면 지식은 그 나무에서 떨어져 하나의 잎을 쥐고 그 나무에서 떨어진 위치를 찾아가는 것이다.


    가지나 잎에는 단서가 있을 뿐 핵심적인 정보가 없다. 바둑돌을 놓을 위치는 행마하여 뻗어가는 나뭇가지에 있다. 바둑돌을 열심히 들여다 본다고 해서 무언가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무를 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 인간은 언어로 소통한다. 언어는 잎이다. 나무는 중첩되어 있으며 방정식, 모형, 깨달음으로만 접근이 가능하다. 언어는 소통수단일 뿐 인식수단이 아니다.


    ◎ 인간은 신체감관과 언어에 의지하므로 오류를 저지른다.
    ◎ 에너지를 투입하여 일에 태워보면 오류가 검증된다.
    ◎ 일에 태워 성공해도 지속가능하지 않을 수 있다.
    ◎ 근본모형을 쓰면 지속가능한 성공을 얻는다.


    어떤 것이 옳은 것인가? 일에 성공하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 무조건 성공만 하면 장땡인가? 그건 아니다. 일시적 성공이 더 큰 실패를 부른다. 그렇다면 지속가능하고 완전한 성공은?


    근본모형을 쓰는 구조론으로만 가능하다. 일상의 지식은 일에 태워 검증해보고, 성공할 경우 그것이 지속가능한지 재검증을 해보면 된다. 두 번의 검증을 통과하면 백퍼센트 믿을 수 있다.


    ◎ 검증은 개인기와 팀플레이로 두 번에 걸쳐 진행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두 번의 역설이 필요하다. 한 번 깨달음이 아니라 두 번 깨달음이어야 진짜다. 첫 번째는 힘이 있는지를 검증한다. 두 번째는 그 힘이 외부에서 빌린 가짜 힘이 아닌지 검증한다.


    첫 번째 검증은 소승의 방법이고 개인기 방법이며 한 번 역설이다. 두 번째 검증은 대승의 방법이고 팀플레이 방법이며 두 번 역설이다. 힘이 있는지는 겨루기를 시켜보면 된다. 이기는 놈이 진짜다.


    ◎ 검증 1 – 힘으로 이기고, 공간으로 이기고, 개인기로 이기고, 소승으로 이기고, 실력으로 이기고, 단기전으로 이기고, 적의 힘을 역이용하는 손자병법으로 이기고, 속임수로 이긴다.
    ◎ 검증 2 – 진리로 이기고, 시간으로 이기고, 팀플레이로 이기고, 대승으로 이기고, 리더십으로 이기고, 장기전으로 이기고, 자신의 힘을 성장시키는 오자병법으로 이기고, 정공법으로 이긴다.


    1회만 검증하면 꼼수를 쓰는 자가 있다. 지속가능하지 않은 편법으로 이길 수 있다. 보수꼴통들은 인생의 승부를 대학 입시 한 방으로 끝내려 한다. 거기서 귀족과 평민으로 신분을 가르려 한다.


    왜냐하면 한 번만 검증해야 반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패자부활전이 주어져서 재도전의 기회가 생기면 이미 써먹은 반칙을 두 번 쓸 수는 없다. 들키기 때문이다. 진보는 여러차례 평가한다.


    인생은 두 번 검증된다. 속임수를 쓰는 지는 팀플레이를 시켜보면 된다. 소승의 방법과 대승의 방법으로 2회에 걸쳐 일에 태워보는 재검증방법이 있으므로 인간은 확실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이를 복제하여 지식을 대량생산할 수 있다. 인간의 뇌는 언제라도 자연을 거꾸로 보게 되어 있다. 인간은 원래 실패를 통해서 배우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핵무기로 실패하면 인류는 멸망한다.


    ◎ 원인과 결과가 중첩되어 있는 일의성을 확보하면 연역할 수 있다.


    이제는 시행착오와 오류시정이라는 번다한 코스를 버리고 지름길로 바로 가야 하는 시대이다. 애초에 정답을 바로 맞춰야 한다. 구조론으로 가능하다. 모든 존재는 반드시 처음 복제되는 한 지점을 거친다. 


    그 지점을 관측하면 원인과 결과가 하나로 겹쳐있는 일의성을 확보할 수 있다. 정답은 일의성이다. 일의성은 존재의 중첩을 나타낸다. 구조론의 질 개념이 그것이다. 원인이면서 결과인 지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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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큰바위

2014.12.04 (04:22:14)

사람들이 자꾸 헛갈리는 이유는 

존재론과 인식론을 섞어 놔서 그렇다고 봅니다. 


이야기를 하다보면 존재를 이야기하면서 자꾸 인식론을 들이댑니다. 

그리고 자신이 인식한 것을 맞다 틀리다로 우기면서 존재론으로 귀결시킵니다. 


일원론, 이분법이라야 맞는데, 

사람들은 자기 방식대로

이원론 이분법으로 봅니다. 

이원론, 일분법은 말이 안되는데도 자꾸 그렇게 고집을 부립니다. 


맨 마지막, 시행착오와 오류시정이라는 번다한 코스 버리고 지름길로 가는 시대.

= 일의성 늘 명문입니다. 


한방에 날려야 한다가 맞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4.12.04 (17:07:40)

내용이 상당히 추가되었습니다. 

[레벨:11]큰바위

2014.12.04 (18:08:05)

지난 번 모임에서 가져온 의사결정학을 차근 차근 읽고 있습니다. 

내용 추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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