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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5846 vote 0 2015.04.08 (00:14:08)

     

    통합적인 시선을 얻어라.


    동양인들은 5천년 동안 눈 뜨고 뻔히 보고도 눈앞의 소실점을 보지 못했다. 보면 보이는데 보지 않아서 보지 못한 것이다. 개별적으로 각각 바라보면 당연히 소실점이 보이지 않는다. 통합적으로 볼 마음이 있어야 보인다. 봉건인의 마음으로는 소실점을 볼 수 없고, 근대인의 마음이라야 소실점이 보인다.


    그림일기를 그릴 때 해를 그리면 안 된다고 배웠다. 해를 그린다는 것은 거기가 하늘이라는 표시를 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통합적 관점이 아니다. 그런 자세로는 소실점을 볼 수 없다. 왜 학교는 초등학생에게 그림을 그리라고 할까?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근대인의 관점을 얻어라는 것이다.


    이발소 그림은 그림이 아니다. 봉건인과 근대인이 갈라지는 지점이다.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지점이다. 이발소 그림이 그림이 아닌 이유는 거기에 통합적인 관점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저것 각각 주워섬기는 식의 열거형은 그림이 아니다.


    그것은 팀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늘과 산과 바람과 사람과 집이 어떻게 하나의 팀을 이루어 그렇게 한 공간에 공존할 수 있는지를 그려야 한다. 분별하려는 봉건인의 마음을 극복하고 타자와 공존의 가능성을 모색할 때 소실점은 자연히 도출된다.


    일기를 쓸 때 ‘나는 오늘’을 쓰면 안 된다. 그 경우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일기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이라고 쓰는 이유는 ‘너’를 의식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기가 아니라 보고서다. 나와 너를 분별하는 즉 이미 통합적 관점은 사라지고 만다. 그런 식이라면 근대인은 되지 못한다. 그것은 평민을 차별하는 귀족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볼테르의 친구는 되지 못한다.


    통합적 관점은 본능이다. 분별되어 있으면 어색하고 불편해진다. 가시처럼 걸린다.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면 이미 통합되어 있다. 산과 물은 어우러져서 하나의 산수가 되고, 꽃과 나비는 어우러져서 하나의 정취가 된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 이야기를 처음 배웠을 때 납득할 수 없었다. 분명히 토끼가 이겼는데 왜 거북이가 이긴다고 할까? ‘그렇게 우겨서 선생님의 기분이 좋아진다면 뭐 그런 걸로 해드릴께요.’ 하는 마음이 되었다.


    가시처럼 걸려 있었다. 하루는 동시를 배웠는데, ‘버들강아지 꿈을 꾸는’이라는 표현이 있었다. 선생님이 한 사람씩 지목하여 ‘꿈이 뭐냐?’고 물었는데, 나의 대답은 ‘사람이 밤에 잠을 잘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말을 마치기도 전에 손바닥을 맞았다.


    뒤늦게 누가 손을 들고 ‘꿈은 생각’이라고 말하자 선생님이 ‘그 말이 맞다’고 했다. 버들강아지는 식물인데 무슨 꿈을 꾼다는 거지? 이건 뭐 대놓고 어깃장을 놓는 거다. 한 번 해보자는 거냐? 그렇다. 해보자는 거다. 의도가 있다. 비로소 납득되었다.


    선생님과 문교부 일당이 작당한 것이 틀림없다. 보나마나 토끼가 이길텐데 거북이 이긴다고 해야 그들의 속이 편안하고 묵은 체증이 내려간다는 식이다. 그렇다면 받아들여야 한다. 나의 패배다. 인정할건 인정하자. 그래서 ‘라고 한다’의 법칙을 만들었다. 납득이 안 될 때는 문장 뒤에 ‘라고한다’를 붙이는 거다.


    ‘거북이가 토끼를 이기는 걸로 한다.’ ‘버들강아지가 꿈을 꾸는 걸로 한다.’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맥락의 문제다. 배후에 하나가 더 있고, 그 전체를 통합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게임의 의도가 있다. 덫이 있고 함정이 있고 낚시가 있다. 낚이지 말아야 한다.


    도서관의 국어사전을 나눠주고 사전을 찾아오게 하는 숙제가 있었다. ‘자지’를 찾아보니 ‘좆’이라고 되어 있었다. ‘좆’을 찾아보니 ‘자지’라고 되어 있었다. ‘보지’를 찾아보니 ‘씹’이라고 되어 있었다.


    ‘씹’을 찾아보니 보지라고 되어 있었다. 이건 뭐 치사한 돌려막기가 아닌가? 예전에 여러번 했던 이야기다. 이건 그동안 힘들게 배워온 통합적인 관점이 아니다. 이러기 있냐?


    분명 그림일기에 해를 그리면 안 된다고 했잖아. 분명 일기쓰기에 ‘나는 오늘’을 쓰지 말라고 했잖아.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를 하면 느림보 거북이가 이긴다며 말도 안되는 거짓부렁을 늘어놓아도 통 크게 동의해주기로 했잖아. 버들강아지가 꿈을 꾸는 걸로 치기로 했잖아.


    분명 무리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받아들이기로 했잖아. 그런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 치기 있나? 말이 안 되지만 통합적 관점으로 보면 그게 또 한 편으로는 말이 되는 건데, 이건 통합적 관점이 아니다. 용납할 수 없는 폭거다. 반란군의 짓이다.


    자석으로 쇠를 잡아당기는 실험을 했다. 한 명씩 발표를 하는데 모두 틀렸다고 한다. 나는 ‘자석과 쇠 사이에 일정한 힘의 방향성이 있는..’하고 대답하는 중에 이미 선생님은 틀렸다고 선언해 버렸다.


    선생님이 최후에 내놓은 대답은 ‘자석이 쇠를 당긴다.’였다. 이건 통합적 관점이 아니다. 자석과 쇠를 넘는 법칙을 말해야 한다. 개별적으로 말하는건 과학의 관점이 아니다. 납득할 수 없다. 배신이다.


    학이 강물에서 한쪽다리를 들고 서 있는 이유는? 체온을 절약하기 위해서란다. 그럴 리가 있나? 그럼 닭이나 비둘기는 왜 한쪽다리로 서는데? 통합적 관점은 내부에서 답을 찾는게 아니라 외부에서 답을 찾는다. 소실점은 길을 가운데 두고 양옆의 두 건물을 연결하는 뼈대다.


    건물 바깥에 뼈대가 있다. 그래야 거북이가 토끼를 이길 수 있고 비로소 버들강아지 꿈을 꿀 수 있다. 이발소그림은 해나 산이나 폭포나 초가집이나 호수를 각각 그린다. 그건 그림이 아니다. 그 외부가 없기 때문이다.


    이태임이니 예원이니 하며 연예인의 사생활에 대한 시비가 분주하다. 네티즌의 댓글 중에서 상당수는 누가 먼저 빌미를 주었냐를 논하는 거다. 이는 먼저 빌미를 주는 자에게 전적으로 책임이 돌아가게 하는 룰이 존재한다는 거다.


    이게 초딩논리다. 초딩 두 명이 싸우면 선생님은 둘을 불러놓고 무조건 둘 다 잘못했다고 선언한다. 초딩은 절대 납득하지 못한다. 아니 쟤가 먼저 눈을 흘겼는데 어째서 둘 다 잘못일까? 선생님은 통합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던 거다. 리더의 마음을 가지고 사건 전체를 책임지는 자세를 가지기를 바라는 거다. 초딩수준 극복하자.


    최근 유교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한다. 유교를 충효로 알아듣는 사람은 반발한다. ‘유교 때문에 조선이 망했는데’ 하는 식이다. 그러나 근래에 제대로 돌아가는 곳은 유교문화권 뿐이다. 통합적 관점으로 봐야 한다. 그런데 뭐가 유교지?


    충효라든가 인의라든가 이런건 내세우는 구호에 불과하다. 진보가 복지를 표방하나 당면한 선거에서의 전술일 뿐이다. 진짜는 역사 자체의 맥박이다. 마찬가지로 유교의 본질은 따로 있다.


    통합적 관점으로 보지 않는 독자는 필자의 글을 이해할 수 없다. 환생이니 까르마니 하는건 석가와 전혀 관련이 없다. 마녀니 사탄이니 하는건 예수와 전혀 관련이 없다. 소크라테스는 별로 주장한 것이 없다. 그럼에도 많은 것이 소크라테스 이후에 이루어졌다. 본바탕을 봐야 하는 것이다.


    공자는 통합적 시선을 제안한 거다. 소크라테스도 마찬가지다. 예수도 마찬가지다. 성경구절 조목조목 따지는 자는 예수를 배반한 거다. 그들은 예수를 갈기갈기 찢어발기고 있다.


    예수가 통합적 관점을 제안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분별하여 예수를 쇠고기 등급 분류하듯 낱낱이 해체하여 갈비살과 등심과 채끝살을 논하며 자기 입맛에 맞는 것을 취하고 있다.


    공자는 부모의 야합한 결과로 태어난 사람이다. 혼외자에 해당하는 셈이다. 공자는 이혼했을 뿐 아니라, 공자 아들이 이혼했을 뿐 아니라, 공자 손자도 이혼했다. 공자 가문은 4대가 결손가정이다.


    반 유교적 가문이다. 그런데 공자가 유교라고?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 말이다. 통합적 관점으로 봐야 공자가 보인다. 근본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향이 뒤틀려 있으면 대화가 안 된다. 말해줘봤자 도루묵이 된다. 입만 아픈 거다.


    통합적 관점은 자연스러움을 따른다. 내부가 아닌 외부를 본다. 나와 타자의 무리없는 공존을 꾀한다. 세상은 너와 나의 대결하는 전쟁터가 아니다. 하나의 팀에 필요한 다양한 포지션들로 세상은 이루어져 있다. 전체를 볼 의도가 있어야 한다. 보려고 마음을 먹어야 소실점이 보인다. 대칭은 바깥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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