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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2887 vote 0 2019.06.10 (19:38:03)

    자성은 없고 연기는 있다     

   
    우리는 세상이 물질의 집합으로 되어 있고 물질은 제각기 고유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여긴다. 설탕은 달고 소금은 짜다는 식이다. 그 성질은 고유하다. 원래 그렇다는 말이다. 알루미늄은 원래 가볍고 납은 원래 무겁다. 과연 그럴까? 원래 그런 것은 원래 없다. 그것은 인간의 관측한계를 낮게 잡은 것이다.


    옛날에는 그랬다. 소금과 설탕을 더 작은 단위로 분해할 기술이 없었다. 과학의 발달로 소립자 단위까지 분해할 수 있게 되자 물질의 고유한 성질은 사라졌다. 모든 성질은 이차적으로 획득한 것이며 물질의 고유한 성질은 없고 다만 이렇게 될 수도 있고 저렇게 될 수도 있는 계의 통제가능성이 있을 뿐이다.


    불교의 용어로 말하자면 ‘연기緣起’가 있을 뿐이며 ‘자성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나고,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이 소멸한다. 불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본 이야기일 것이다. 만유는 상대적인 관계로만 존재한다.


    이것이 이렇게 되면 저것이 저렇게 된다는 조건이 있을 뿐이다. 저것은 이것의 복제다. 복제는 반복이다. 복제본은 원본의 반복이므로 자체의 성질을 가질 수 없다. 원본과의 상대적인 관계에 의해 규정된다. 원본과의 상대적인 거리만 존재한다. 엄지가 1이면 검지는 2, 중지는 3, 무명지는 4, 약지는 5다. 


    엄지를 규정하면 다른 손가락들의 입장은 엄지로부터 복제되어 동시에 정해진다. A면 B다. 일정한 조건에서 일정하게 반응한다. 이것은 수학이다. 세상은 사건이며 사건은 수학으로 전개한다. 사물의 수학은 있어도 사건의 수학은 없다. 구조론은 사건의 수학이다.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공간 속에 있다. 


    사물이 공간에 머물러 있다면 사건은 시간에서 진행된다는 점이 각별하다. 완전히 다른 수학이 요구된다. 공간이 열역학 1법칙에 지배된다면 시간은 열역학 2법칙에 지배된다. 공간은 뒤집어도 같은 모양이 되지만 시간을 뒤집으면 완전히 다른 모양이 된다. 화살의 좌우는 공간을 반영하므로 모양이 같다. 


    화살의 앞뒤는 시간을 반영하므로 모양이 다르다. 오른팔과 왼팔이 공간의 대칭이면 머리와 꼬리는 시간의 호응이다. 인체의 좌우는 같아야 하지만 머리와 꼬리는 달라야 한다. 기관차와 객차가 같을 수는 없다. 투수와 타자가 같을 수는 없다. 공격수와 수비수가 같을 수 없다. 수요와 공급은 입장이 다르다.


    공간의 대칭은 만유의 균형을 끌어내고 시간의 호응은 그것을 무너뜨려 사건을 진행시킨다. 세상은 균형에 의해 통제되지만 동시에 그 균형의 붕괴에 의해 통제된다. 만약 공간의 균형이 없다면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어 세상은 초토화된다. 생명력이 강한 바퀴벌레와 번식에 능한 쥐들만 살아남을 것이다.


    만약 시간의 호응이 없다면 세상은 도처에 교착되어 옴쭉달싹 못한다. 일대일로 맞서는 것이 대칭의 교착이라면 100대 50+50으로 풀어내는 것이 시간의 호응이다. 수학은 열역학 1법칙을 적용하여 100과 50+50이 완전히 같다고 치지만 구조로 보면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라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더 크다.


    100이 50+50을 이긴다. 실전에서는 50+50을 묶어주는데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에너지는 의사결정비용을 고려한다. 에너지는 사건을 움직이고 움직이면 외부와의 연결이 끊어진다. 닫힌계 안에서는 의사결정비용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열역학 제 1법칙은 의사결정에 드는 비용을 고려하지 않는다. 


    100의 일을 하는 노동자 한 명을 쓰겠는가, 50의 일을 하는 노동자 두 명을 쓰겠는가? 모두 100의 일을 하는 노동자 한 명을 고용할 것이다. 두 명을 관리하는 데는 관리비용이 추가되기 때문이다. 에너지는 가는 것이다. 멈추어 있는 것은 내부에서 가고 있다. 어원으로 보면 에너지는 안에서 일한다는 뜻이다. 


    겉으로 보면 물질은 멈추어 있지만 안에서는 맹렬히 진동하고 있다. 요동치고 있다. 시속 100킬로의 속도로 달리는 것이 있다. 옆에서 나란히 달리면 둘은 상대적으로 멈추어 있는 셈이 된다. 어떤 것이 제자리에 멈추어 있다는 것은 사실은 관측자가 옆에서 나란히 달려주고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대칭이다. 


    모든 멈춤은 상대적인 멈춤일 뿐 절대적인 멈춤은 없다. 멈추면 반응하지 않고 반응하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에너지는 공간의 대칭으로 교착되면 멈추고 시간의 호응으로 풀어내면 전진한다. 에너지의 통제가능성은 멈추고 풀어내기를 동시에 한다. 반도체는 전류를 흐르게도 하고 멈추게도 한다.


    우주는 에너지의 통제가능성 하나로 모두 설명된다. 에너지는 간다. 움직인다. 적절히 멈추게 하고 또 그 멈춤을 해제하는 방법으로 세상은 널리 통제된다. 소금이 짜고 설탕이 단 것이나 알루미늄이 가볍고 납이 무거운 것이나 마찬가지다. 적절히 멈추고 또 그 멈춤을 해제하는 방법으로 그 성질을 획득한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13]kilian

2019.06.11 (02:32:05)

"세상은 균형에 의해 통제되지만 동시에 그 균형의 붕괴에 의해 통제된다."

http://gujoron.com/xe/1096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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