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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5478 vote 0 2009.01.14 (11:15:10)

자람의 성공과 이현세의 실패

구조론의 의의는 ‘직관력’을 기르는데 있다. 직관력은 깊이 생각할 거 없이 그냥 아는 것이다. 어떻게 아는가? 어색함과 자연스러움의 차이로 안다. 좋지 않은 것을 보면 불쾌한 느낌이 든다. 그 미세한 감정의 차이에 주목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감성을 연마해야 한다. 그런데 낯선 것은 원래 다 불쾌하게 여겨진다. 어린이들은 특히 냄새와 맛에 민감해서 ‘이것도 싫어. 저것도 싫어. 다 싫어.’ 한다. 그 때묻지 않은 신선한 감성을 존중할 일이다. 그러나 연마되지 않은 감성이다.

이것 저것 다 싫어 하다가는 끝내 진미를 맛볼 수 없게 된다. 그 감성을 계발해야 된다. 반면 마침내 그 감성이 무뎌져서 비위가 좋은 사람이 되어, 뻔뻔스러워지면, 아저씨가 되어버리면 미추를 구분할 수 있는 눈을 잃게 된다.  

동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일 수 있는 경지가 되면, 개고기도 서슴없이 먹고, 살아있는 사슴피도 꿀꺽 마시게 먹게 되면 인간다움을 잃고 만다. 그렇게 망가지지 말아야 한다. 예민해야 하고 섬세해야 한다. 즉각 반응해야 한다.

안테나가 살아있어야 한다. 자기 몸의 여러가지 반응신호들을 존중해야 한다. 내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 그 목소리에 두 가지가 있다. 신의 부르는 목소리와 야성의 부르는 목소리가 있다.

약자를 보면 왠지 밟아주고 싶고, 도망가는 것을 보면 왠지 추격하고 싶고, 왠지 못마땅하고, 웬지 이지메하고 왕따시키고 괴롭혀주고 싶은 야수의 본능도 있다. 그 또한 나름대로 존중할 일이다.

그러나 분별있어야 한다. 그 본능에 끌려다니지 말고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연주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진화과정에서 생겨난 그런 자기보호 본능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예술적으로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

어린이의 투정과 같이 ‘이것도 싫어. 저것도 싫어.’ 하는 까탈스러움을 미학적 감수성으로 착각해서 안 된다. 왕자병 공주병은 미학이 아니고 그냥 병이다. 두려움과 신경증, 강박증의 집착을 미학으로 착각해서 안 된다.

이것 저것 가리지 않고 먹을 수 있어야 한다. 진미는 언제나 교묘하게 숨어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진짜는 무질서 가운데 숨어 있는 법. 좋은 것만 가지런히 모아놓으면 좋지 않다. 각자 제 소리를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잘 차려진 호텔음식에는 진미가 없다. 어떤 좋은 요리도 자연에서 노동한 후에 발에 흙묻은 채로 털썩 주저앉아 먹는 맛에 비길 수 없다. 문제는 그 농부가 그 맛을 모르고 손이 여러번 간 호텔음식을 추종하는 가치전도다.

좋은 집에 살고, 좋은 것만 먹고, 좋은 것만 보고, 좋은 데만 여행하는 사람이 미추를 구분하는 눈을 얻게될 가능성은 없다. 그 안에는 에너지 순환의 1사이클이 없기 때문이다. 나쁜 것이 좋은 것으로 변하는 과정을 못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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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이 굵은 자람의 그림은 진짜다. 그 안에 과학성이 숨어 있다. 자기논리가 있다. 그러므로 연재되는 이야기의 줄거리를 모르면서 그냥 한 컷만 봐도 쾌감을 느낄 수 있다. 이 표정은 남자 만화가가 절대 그릴 수 없는 묘한 표정이다.

대부분의 남자 만화가들은 여자얼굴은 인형같은 한가지 타입으로 밖에 그리지 못한다. 기본적으로 관찰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얼굴에 점을 찍어서 구분하거나 안경을 올려주거나 따위의 시시한 수법을 쓴다.

선이 가는 이현세의 그림은 굉장히 못 그린 그림이다. 어떻게 이보다 더 못그릴 수 있다는 말인가? 문제는 안목없는 사람 눈에는 이 그림이 잘 그린 그림으로 보인다는 데 있다. 이 그림의 잘못된 점을 짚어낼 수 있겠는가?

흔히 사실주의를 말한다. 그런데 사실주의 관점으로만 보면 이 그림의 비과학성-비사실성을 제대로 짚어낼 수 없다. 물론 이 그림이 잘못된 이유는 사실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잘 보면 신체의 정면과 측면이 함부로 결합되어 있다.

귀, 눈, 코, 입, 팔, 다리, 가슴을 따로 그려서 합성해놓은 것이다. 그래서 신체의 각 부분이 다른 곳을 보고 있다. 눈만 시선이 있는게 아니라 팔다리도 동선이 있다. 그 동선과 시선과 몸선과 감정선이 일치하지 않는다. 게다가 목이 없다.

왜 선이 가는 그림을 그릴까? 선을 굵게 하면 그럴수록 그 불일치가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이때도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단순화 시키면 된다. 정밀하게 그리지 않고 박수동의 고인돌처럼 윤곽만 대략 그리는 것이다.

혹은 심슨가족처럼 기형적으로 캐릭터의 특징을 강조하는 방법도 있다. 그런데 이현세 만화는 극화이기 때문에 줄거리를 따라가므로 단순화 시킬 수 없다. 그러니 이렇게 망한 그림이 나오는 것이다.

깨달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미추를 알아보는 눈을 얻을 일이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추 속에 미가 숨어 있다.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자라고 있다. 숨 쉬고 있다. 꽃 피우고 있다. 그 꽃 마저 필때까지 믿음을 갖고 기다리려면 직관을 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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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평범함 속에 깊은 밀도의 세계가 있다. 그 두터움이, 그 깊은 울림이 느껴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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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거친 곳에서 색깔들이 제 목소리를 낸다. 노랑과 빨강과 파랑이 어울려 소리쳐 외치는 그 목소리가 들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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