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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4460 vote 0 2005.12.27 (15:59:31)

음모론 유감

루쉰(魯迅)의 글에 유언즉사실론(流言卽事實論)이라는 것이 있다. 세간에 유언비어로 알려져 있는 이야기들이 알고 보니 대개 사실이더라는 말이다. 그런데 알만한 지식인이 왜 이런 식의 황당한 글을 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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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5월은 오래도록 유언비어로 떠돌아 다녔다. 나는 그 유언비어들을 믿었지만 한편으로는 믿지 않았다. 무려 3천여명의 시민이 계엄군에 살해되었다면 그 열배인 3만여명이 부상을 당했을 터인데 이건 정말이지 믿기 어려운 거다.(전쟁에서 사상자와 사망자의 비율은 대략 10 대 1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이었다. 물론 전부 사실은 아니었지만 일정부분 사실이었다. 유언비어를 함부로 믿어서도 안되겠지만 함부로 배척해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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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음모론이 서프를 뒤덮고 있다. 만약에 말이다. 인터넷 실명제를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음모론은 발붙이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에 말이다. 인터넷 실명제를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브릭의 폭로는 상당부분 불가능했을 것이다.

저들은 ‘진실’을 주장하고 있다. 무엇이 진실이란 말인가? 저들의 무분별한 의혹제기는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정당한 활동이고.. 이쪽에서의 대응은 우매한 대중의 음모론인 것일까?

이쪽의 음모론이 저지되어야 한다면 저쪽의 무분별한 의혹제기도 역시 제지되어야 할 것이다.

무분별한 의혹제기는 딴나라당과 우리당 사이에 늘 있는 일이다. 딴나라의 의혹제기 중 일부는 사실로 드러났고 일부는 거짓으로 드러났다. 다 맞는 것도 아니고 다 틀린 것도 아니었다.

정치인이 정치적 목적으로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언론사가 그런 짓을 한다면.. 나는 그들의 의혹제기를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진 정치행위로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언론사가 무분별한 의혹제기의 방법으로 노림수를 숨기고 정치행동을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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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이란 무엇인가? 유언비어는 진실이 아니다. 저들이 주장하는 순결한 진실에 도달하려면 인터넷 실명제를 실시해서 무분별한 음모론과 유언비어가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브릭의 폭로는 불가능해졌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100프로의 순결한 진실을 주장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진실이 드러나버린 사건이 아닌가?

저들의 의혹제기가 낱낱이 쪼개진 팩트로서의 진실을 찾으려는 것이라면 그들의 의혹제기에 대응하는 이쪽의 음모론은 통째로 된 덩어리로서의 진실을 찾으려는 노력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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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서를 할 때는 반드시 실명으로 해야만 하며 익명의 투서를 돌리는 행위는 무고죄로 잡아넣는다는 법률 조항이 있었다. 그러나 이 제도는 곧 폐기되었다. 실명으로 고발하라고 하면 고발할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이건 조선왕조 하고도 초기 때의 이야기다. 조선왕조의 선비와 관료들이 수십년간 연구한 결과 결국은 세간의 유언비어를 허용하기로 한 것이다. 익명의 투서라도 의금부와 형조에서 공식적으로 취급하기로 법률은 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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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상업 신문은 선조임금 때 창간되었다. 조정에서 발행하는 ‘조지(朝紙)’라 불리는 승정원 관보에다 저자거리에서 수집한 소문을 덧붙여서 인쇄하여 돈을 받고 판매한 것이다.

그러나 선조임금은 유언비어를 퍼뜨려 민심을 흉흉하게 하고 조선의 군사기밀을 적국에 누설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신문발행을 금지시켰다.  

선조임금이 유언비어를 배척하는 바른 결정을 한 것일까? 군사기밀 운운했지만 실제로는 언론권력 혹은 민중의 담론이라는 새로운 권력이 만들어져서 왕권에 도전할까 두려웠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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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은 100프로의 순결한 진실을 주장하지만 나는 이것이 허구라고 생각한다. 그 진실에 다가서는 정보 접근권을 특정 세력이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과학적 진실과 유언비어와 민중의 담론이 자유경쟁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진실인가? 그 경쟁에서 끝까지 살아남는 말이 진실에 가깝다.

예컨대 성경의 창세기나 단군신화 따위가 진실이 아닌 즉 완벽한 날조의 허구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살아남은 데는, 팩트로서의 진실은 아닐지언정.. 그 이면에 숨은.. 결코 훼손할 수 없는 인간적 진실이 진정으로 가치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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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항쟁 때다. 일단의 시민들이 종로 3가의 어느 파출소를 공격하려 하고 있었다. 그때 대학생으로 보이는 한 청년이 어느 집 대문의 처마 밑에서 연설을 했다.

“여러분 방금 긴급한 소식이 전해져 왔습니다. 지금 광주는 완전히 뒤집어졌다고 합니다. 100만 시민이 충장로와 금남로를 가득 메웠습니다. 시민군이 도청과 방송국을 점령하고 광주를 해방구로 선포했다고 합니다. 경찰과 공무원들도 대거 시민군에 합류하고 있습니다. 광주 뿐만이 아닙니다. 전주, 이리, 나주, 목포 전부 넘어갔다고 합니다.”

군중들은 환호하며 만세를 불렀다. 나는 그 말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나는 그 거짓을 추궁하지 않았다. 광주 인구가 100만이 안 될터인데 어떻게 백만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올 수 있느냐고 따져묻지 않았다. 유언비어가 만들어지는 순간을 나는 목격한 것이다.

지식인 집단이, 혹은 왕조가 임의로 진실과 유언을 구분하되 유언을 배척하고 진실을 채택한다는건 지식에 대한 접근권을 가진 자기네의 지배권을 공고화 하겠다는 의지의 표출일 뿐이다.

진실은 분절된 낱낱의 팩트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 만들어지는 1사이클의 전체과정의 일부로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이 입으로 말하는 언어는 그 사건의 발단과 전개 그리고 반전과 종결로 이어지는 1 사이클의 서사구조 중에서 발단의 일부를 구성할 뿐이며.. 그 언어의 사실성 여부와 상관없이 그 1 사이클의 순환구조는 계속 굴러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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