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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2686 vote 0 2006.02.01 (22:27:08)

“백남준의 유혹”

‘학습하려는 이는 가짜, 재현하려는 이가 진짜다.’

서점가에서 인기있는 작가는 ‘연금술사’의 파울로 코엘료와 ‘살인자의 건강법’으로 잘 알려진 아멜리 노통이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깨달음’을 주제로 하거나(코엘료) 혹은 기법(노통)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이들은 자기류의 고유한 미학적 ‘동그라미’들을 확보하고 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끝까지 밀어붙인다는 점에서의 자기 일관성이 있고, 자체적으로 기승전결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의 자기 완결성이 있다.

그러나 한국의 많은 글쟁이들은 이런 식으로 쓰지 않는다. 그 따위(?)로 쓰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논술요령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서점에서 실제로 책을 구입해 주는 독자들은 그것을 원하는 데도 말이다.

인터넷에서의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리플족과 눈팅족이 있다. 실제로 서점가에서 책을 사주는 독서인구는 어느 쪽인가를 살펴야 한다. 리플족은 논쟁하려는 이다. 이들은 아직도 ‘학습의 단계’를 떼지 못하고 있다.

진짜는 눈팅족에 많다. 이들은 학습이 아니라 공감을 원한다. 그들은 분명한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작가와 자신의 생각이 일치하는 지점에서 전율하기 원하고 공감하기 원한다.  

최악은 조중동 사설을 모범으로 삼는 논술형 글쓰기를 원하는 독자다. 이들은 진짜가 아니다. 이들은 코엘료나 노통의 책을 제 돈 내고 구입하지 않는다. 물론 필자는 논술을 타파하기 위해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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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욕구가 있다. 하나는 ‘학습에의 욕구’이고 하나는 ‘재현에의 욕구’이다. 둘 중 어느 욕구에 응답할 것인가이다.

속이 비어 있는 그릇은 학습의 방법으로 채울 수 있고, 속이 가득 차 있는 그릇은 그것을 토해내는 방법으로 재현할 수 있다.

학습을 원하면 진보누리로 가야 하고 재현을 원하면 서프로 와야 한다. 물론 이건 나의 개인적인 견해다.

학습형 독자 - 논술족과 리플족.. 아직 가치관이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논쟁하고 학습하기를 원한다. 진보누리에 많다.  

재현형 독자 - 눈팅족과 독서족.. 자신의 가치관을 정립한 상태에서 공감하기를 원한다. 서프라이즈에 많다.

물론 다 그렇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눈팅과 리플을 겸하는 이도 있고 리플을 열심히 달지만 정신의 바탕은 눈팅체질인 독자도 있다. 필자가 굳이 구분하여 비교하는 의도를 헤아려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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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예술이 아닌 것은.. 예컨대 여행이라도 갔다 와서 동네방네 자랑하는 것이다. 이는 아홉 살 꼬마가 그날 하룻동안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엄마에게 모두 이야기 하려고 기를 쓰는 것과 같다.

반면 예술인 것은.. 여행지에서 몽땅 풀어놓고 오는 것이다. 내 속엣 것을 완전히 비우고 와야 한다. 무언가 얻어오려고 해서는 안 된다. 부디 이르노니 빈 손으로 돌아오라.

왜 여행지에서 본 것을 자랑할까? 자기 자신에게 학습 시키려는 욕구 때문이다. 친구에게 이야기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가르치는 거다. 담임선생님이 늘 강조하는 복습을 실천하는 것이다.

학습하고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만의 고유한 미학적 동그라미를 완성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동그라미를 가져야 한다. 정상에서 본 풍경에 대한 이미지를 얻어야 한다. 나만의 이상주의를 얻어야 한다.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 철학이 있어야 한다. 자기류의 세상을 보는 관점이 열려야 한다. 심미안을 얻어야 한다. 미추를 구분하는 눈을 얻고,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 그래야지만 관광객이 아닌 순례자가 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백남준의 퍼포먼스를 보고 화를 내는 이유는 백남준이 자신의 학습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본 것을 엄마에게도 친구에게도 자랑할 수 없다. 집에 가서 복습할 수 없다.

진짜는 무엇인가? 재현하려는 사람이다. 이들은 진짜다. 그들은 자신의 추억 속에 있는 이상주의의 동그라미를 현실에서 재현하려 한다. 그들은 공감하고 또 동감하고 또 호응하고 또 소통하고 동의하려 한다.

자기 내면 깊은 곳에서의 울림과 떨림을 전파하려 한다. 내 안에 목구멍 까지 가득 들어차 있는 것을 한 바탕 쏟아내려고 한다. 울컥 토해내려고 한다. 이들이야말로 진짜다. 당신의 내부에 쌓인 것이 있어야 한다.

나의 꿈은?
나의 사랑 방정식은?
나의 가치관은?
나의 철학은?
나의 동기부여는?
나의 이상주의는?
나의 세상을 바라보는 눈높이는?

묻노니 나라는 존재는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배우인가 관객인가? 구경온 관광객인가 아니면 영혼의 순례자인가? 자기 관점이 있는가?

있다면.. 꿈이 있고, 가치관이 정립되어 있고, 동기부여가 되어 있고, 이상주의가 심어져 있고, 세상을 보는 관점이 확립되어 있다면? 비로소 재현할 수 있다. 당신의 안에 가득 들어찬 것을 토해낼 수 있다.

없다면? 투덜거릴 뿐이다. 이런 저런 논쟁이나 붙을 뿐이다. 그런 식으로는 세상이라는 무대 위에서 주인공이 될 수 없다. 소극적인 관객으로 물러앉을 수 밖에.

무엇인가? 당신이 지금 이 글을 읽는 목적, 혹은 당신이 한 곡의 음악을 감상하는 목적, 혹은 당신이 전람회에 다녀가는 목적이.. 그것을 학습하려고 하는가 아니면 재현하려고 하는가이다.

내 안의 것이 완성되어 있고 무르익은 이는 재현하려 하고 그것이 빈곤한 이는 학습하려 한다.

학습하려 드는 이는 가짜다. 그들은 백남준의 퍼포먼스를 보고 화를 낸다. 배운 것이 없기 때문이다. 재현하려고 하는 이는 기뻐한다. 자신이 상상 속에서 늘 하던 것을 백남준이 재현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공감한다.

필자가 칼럼을 쓰는 목적은 코엘료와 노통의 독자들을 얻으려는 것이다 이들은 진짜다. 자신의 체험한 바를 두고 다른 사람과 공감하려 하고 동감하려 한다. 그것은 체험의 공유에서 비롯한다. 그 울림과 떨림의 지점에서 전율한다.  

한 번 정상에 서 본 이가.. 그 정상에서 얻은 느낌을 현실의 공간에서 재현하려는 것이다. 그것이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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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과 팝이 있다. 클래식 관객은 학습하려 하고 팝의 관객은 재현하려 한다. 클래식은 연주자와 청중으로 주체와 대상이 분리되어 있고 팝은 그 경계가 종종 허물어진다.

클래식은 작곡가와 연주자에 의하여 미학적으로 완성된 기성품을 소비하지만 팝은 현장에서의 열기가 더하여 함께 무대를 만들어간다.

무엇인가? 그들은 삶의 현장에서 실제로 느끼고 체험한 것을 그 무대 위에서 함께 재현해 보려는 것이다.(물론 클래식 관객이 전부 그렇다는건 아니다. 관객도 관객 나름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클래식은 질서가 있고 팝은 질서가 없다. 클래식은 그 질서를 학습할 수 있고 팝은 질서가 없으므로 학습할 수 없다. 팝을 즐기기 위해서는, 혹은 재즈를 즐기기 위해서는 체험이라는 준비물이 필요하다.

내가 체험한 만큼, 내 안에 들어찬 만큼, 내가 반응한다. 체험이 없다면, 내 안이 텅 비어 있다면 내 몸이 반응하지 않는다. 그 현장에서 내 영혼이 울음을 토하지 않는다. 내 안에 준비되어 있는가이다.

외국인이 한국의 풍물을 듣는다면 어떨까? 시끄러운 소음으로 느끼는 사람이 많다. 필자 역시 어렸을 때는 그랬다. 대보름날 지신밟기 팀이 마을을 돌면 귀를 틀어막아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내 안에 축적된 체험에 의하여 지금은 내 몸이 먼저 반응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체험한 만큼 반응하는 것이다.  

클래식은 질서가 있다. 그 질서는 자연의 질서이며 자연의 질서는 근본에서 신의 질서를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팝은 그 질서를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무엇인가? 팝은, 그리고 재즈는 자기 자신을 악기로 삼아 연주하려는 태도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몸뚱이를 연주할 수 있다. 내 안 깊은 곳에서의 신음소리를 끌어낼 수 있다.

우리는 술에는 취하는 방법으로도 연주할 수 있지만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하는 방법으로 더 많이 그것을 끌어낼 수 있다. 우리는 육체의 접촉으로도 그것을 끌어낼 수 있지만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서도 더 많이 끌어낼 수 있다.

우리는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서도 끌어낼 수 있지만 고요한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서도 끌어낼 수 있다.

진짜는 신과의 대화, 그리고 신의 완전성과의 대화다. 그때 당신은 완전히 취할 것이다. 당신의 몸이 노래할 뿐만 아니라 당신의 영혼도 노래할 것이다. 정상에서 본 풍경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이가 그리 할 수 있다.

내 몸에서 소리가 나지 않으면, 감탄사가 나오지 않으면, 울컥 하고 쏟아지는 것이 없다면, 내 영혼이 울부짖는 소리를 듣지 못하면 아직은 진짜가 아니다.

꿈이 없고, 바램이 없고, 한이 없고, 눈물이 없고, 체험이 없고, 정서가 없고, 가치관이 없고, 관점이 없고, 희망이 없고, 분노가 없고, 철학이 없고, 이상주의가 없는 자는.. 그래서 아무 것도 토해낼 것이 없는 자는.. 그 몸도 반응하지 않고 그 영혼도 반응하지 않는다.

묻노니 당신은 내면의 울림통을 열어놓고 있는가? 내면의 울림통을 열어 놓은 모든 인간에게는 그것이 의미가 있게 되고 그 순간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울림통이 열려 있다면, 자연이 그대를 연주할 수 있도록 온전히 맡길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이 자신의 힘으로, 당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의 당신의 진짜 소리를 끌어내는데 약간의 도움을 줄 수도 있다.

그때 당신은 인간의 언어를 잃고 신의 미소를 얻을 것이다.

참된 예술에는 논리조차가 필요하지 않다. 몸이 먼저 알고 영혼이 먼저 반응한다. 울컥 하고 쏟아져 나온다. 동감한다. 동감을 원하는 이가 진짜다.


[레벨:10]mensura

2020.01.02 (12:05:34)

지금보다는 투박(?!)하지만 평이라면서도 예리합니다
명문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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