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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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id: 15門15門
read 3429 vote 0 2013.07.02 (13:57:01)


만약 90kg이 넘게 살이 찐 사람에게 제가 뚱뚱하다고 

말한다면 어떨까요? 물론 뚱뚱하니까 뚱뚱하다고 말한 

건데 뭐가 잘못이냐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제가 한말은 언어폭력입니다.


언어폭력이란 타인에 대한 권리가 없는 개입입니다.

또한 권리가 없는 개입은 무책임한 가치판단을 낳습니다.


그것은 마치 위 동영상처럼 '비밀이야'라는 전제를 깔아놓고 

마음껏 타인에게 개입하며 '제 남자같지 않냐?'하는 식의

가치판단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널 위해서야'라는 전제를 깔아놓고

그 사람을 때리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널 위해서야'라는 전제에

전혀 공감하지 못합니다. 

때문에 이는 폭력이 됩니다.


앞서 말한 상황에서도 '비밀이야'라는 전제로서 그 사람을

때리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비밀이야'

라는 전제가 틀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비밀을 공유하는

학급친구들은 그 아이와 밀접한 상호작용을 할 수 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필연적으로 비밀이 될 수

없는 거죠. 그런데도 잘못된 전제를 공유한다는 것은

결국 타인에 대한 권리가 없는 개입인 것입니다.


아마도 이를 확대한다면 선생님의 체벌이 문제가 되는

것은 '학생들을 위해서'라는 사랑의 매의 전제를 학생들이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전제를 공감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랑의 매는

권리없는 개입이고 무책임한 가치판단으로 흐르게 됩니다.

즉 폭력이 되고 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제가 '니체와 히틀러' 게시물에 남겼던

'말하자면 깨달음에 이르고픈 욕심이 아닐까 합니다.'란

말은 언어폭력이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제 말에는 어떠한 잘못된 전제가 있는걸까요?

우습게도 저는 제 말의 전제를 지금도 잘 알지 못합니다.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듯 말입니다. 다만 제가 표현한

언어의 구조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이 힌트가 되었습니다.


바로 '욕심'이라는 언어입니다. 


저는 앞서 게시물에서 어떠한 상황을 바라보며 문제를

도출하고 답을 제시해보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답은 

언어로 표현되겠지만 어떠한 모형을 제시하든가 혹은 

표면은 다르지만 본질이 같은 똑같은 상황을 복제해 

그 편차로부터 에너지를 채취할 수 있는 언어 즉 

부조리를 표현했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발견이고 그것이 창조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언어는 목적지에 이르는 이정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죠.


하지만 저는 어떠한 모형도 어떠한 부조리도 아닌

욕심이란 언어로 답을 했습니다. 이는 마치 서울에서

대전가자고 제가 택시를 탔더니 고속도로를 타다가

'여기부터 대전입니다'라는 이정표를 보고는 그냥

그곳에 저를 내려두고 택시가 가버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마땅히 그 표지판을 본 택시기사는 '대전에 다 왔는데 

어디로 모시면 되냐'고 물었어야 했습니다. 즉 제가 

문제에 대한 답으로 제시한 언어표현이 또다른 문제로 

탈바꿈할 때 그 언어는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표현한 언어는 '욕심'이었고 그것은 또다른

문제로의 탈바꿈이 아닌 단절이자 무책임한 가치판단이었기에 

그 전에 반드시 권리가 없는 타인에 대한 개입이 이루어졌다고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즉 제 언어는 실패인 셈입니다.


때문에 저에게 있어

성공이란 결과가 아닌 새로운 시작이고

실패란 결과가 아닌 단절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아란도님이 일체유심조라는 화두와 구조론의

언어를 적절히 조화시키지 못해 연결이 아닌 단절을 

가져왔을 때 저는 권리없는 타인에 대한 개입을 하지

말았던가 아니면 개입했다면 그 단절된 과정을 이어줄

수 있는 문제를 제시하던지 혹은 모형을 제시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러지 못했으므로 이는

언어폭력이 맞는 것입니다.


니체의 사상에 히틀러가 권리없는 개입을 하여

결국 무책임한 가치판단 즉 유태인 학살이라는

사태를 낳았듯 언어폭력이란 언제고 실체적인

폭력을 낳을 수 있는 씨앗과도 갖기에 언제나

경계해야 된다고 생각됩니다.


아마도 구조론 사이트에서 동렬님이 관점 혹은

전제에 대해 무자비하리만치 냉철한 태도를

유지하시는 것도 아마 이러한 민감함을 느끼고

계셔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즉 자신의 아픔은 민감하게 느끼는 사람이

사회의 아픔에 대해선 둔감하게 느끼는 까닭은

자신의 권과 사회의 권이 불일치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우리는 일시적이라도

어떠한 현상을 다룰 때 자신의 권을 사회의

권으로 확장시킨 관점에서 모든 상황과 언어를

조망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이것이 제가 구조론을 대할 때 가져야할 태도가 아닐까

스스로 자문해보고 있는 맥락이기도 합니다.


[레벨:15]오세

2013.07.02 (14:32:40)

아마도 이를 확대한다면 선생님의 체벌이 문제가 되는

것은 '학생들을 위해서'라는 사랑의 매의 전제를 학생들이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전제를 공감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랑의 매는

권리없는 개입이고 무책임한 가치판단으로 흐르게 됩니다.

즉 폭력이 되고 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

전제를 공감해도 사랑의 매는 문제입니다. 

내가 설령 선생님이 나를 때리는 이유에 대해 충분히 공감해도 사랑의 매는 애초부터 성립불가입니다. 

체벌은 근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리적 충격을 통해 문제 행동을 교정할 수 있다"

직접적인 물리적 충격을 가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상대방 신체에 접촉을 해야 하는데, 이 때 그 경게를 열고 닫을 권리는 선생이 아니라 학생에게 있습니다. 

근데, 여기서 학생이 자신이 맞을 짓을 했다고 스스로 신체의 경계를 개방하고 체벌을 감수한다면 그건 괜찮은걸까?

천만에요. 


선생-학생은 근본적으로 위계관계이고 위계관계에서는 학생이 자발적으로 체벌을 감수한다는 것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이미 근본적으로 비대칭관계이기 때문에 선생이 학생의 '자발적 체벌 감수'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함정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지금 당장 유치원 생들을 데리고 이런 저런 것들을 지적하여 아이들이 스스로 눈물을 흘리며 잘못을 인정하고 매나 체벌을 감수하게 하는 것은 어른들이라면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됩니다. 


왜? 존엄성을 해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험이 있으면 아이들의 머리 속에는

"내가 A만큼 잘못하면, A만큼 나의 신체적 권리를 내놓고 인신의 구속이나 폭력을 감당해야 하는구나"라는 도식이 자리잡습니다. 그리고 일단 이렇게 되면 사회가 이 아이를 조종하기는 누워서 떡먹기가 됩니다. 무슨 이유를 대서든, 잘못을 지적하고 그에 따라 너의 신체적, 정신적 자유를 제한하겠다고 하면 사람들은 너무나도 쉽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왜? 어려서부터 그랬으니까요. 나의 부모가, 선생님이 내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나의 신체를 침범해왔으니까요. 부모가, 선생이 그랬는데, 하물며 국가가 그런다는데.. 내가 어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근데 그게 바로 노예의 길입니다. 

주인은 설령 자신이 잘못을 했어도 사슬을 달게 받지 않습니다. 매를 달게 맞지 않습니다. 자신의 잘못에 책임을 지고 그것을 복구하려는 노력을 기울일지 몰라도, 그것에 대한 신체적, 정신적 폭력을 감수하진 않습니다. 왜? 적어도 자신의 신체와 정신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니까요. 


존엄의 교육을 하려면 우리는 사랑의 매 따위 낡은 관념은 저 멀리 벗어던져야 합니다. 

상대방이 납득하게 만드는 사랑의 매는 더더욱 최악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꼭 선의를 가장한채 폭력을 휘두릅니다. 

이게 다 널 위한 거야라고 하면서 사람을 패지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6]id: 15門15門

2013.07.02 (14:47:13)

오세님 말씀이 맞습니다. 

앞서 선생님의 사랑의 매가 문제가

되는 것이 학생들이 '널 위해서야'라는

전제에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죠.


덕분에 느낀 것이 언어가 갖는 한계성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공감이란 단어에 제 생각을 무책임하게 버려두고

있었다는 느낌입니다.


공감이란 억지로 할 수도 이해한다고 공감되는

것도 아니죠. 예를 들어 피치못할 살인에 대해

이해는 하지만 공감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공감이란 의식적인 태도가 아니라 무의식적인 태도

즉 타인의 권과 본인의 권을 일치시키는데 부터 발로

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처럼 선생님이 학생을 

자신과 대등한 입장으로 본다면 선생님이 학생을 

때리는 것은 결국 선생님이 스스로 자신을 때리는 것과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더구나 자학이 아닌 이상 

스스로 자신을 때리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봅니다.


결국 존엄이란 자신의 권 안에 세상의 권을 포함시키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인식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매란 공감을 전제로 형성된 것인데

공감한다면 당연히 때릴 수 없는 일이기에 이 자체가

모순이므로 잘못된 전제라고 봐야되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일이 벌어진 뒤 전제를 들먹이는 대개의 경우

이를테면 매를 때린 뒤 '다 너 잘 되라고 이러는거야'

혹은 '이거 비밀인데' 식으로 전제를 언급하는 것은 

사실상 전제가 아니라는 반증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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