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게시판

올리신 글을 몇번을 읽어 보았으나...뭔가 논점이 비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사이를 좀 더 캐고 들어가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자기를 배제하고 깨달음에 대한 것을 보아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이 부분에서는.

자연발화적인 것을 자꾸 인위적으로 뭔가 하려고 하기 때문에 얘기가 서로 아주 조금씩 핀트가 안맞아 지는 것이라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깨달음이 욕심과 등치될 수 없다는 말은, 이것은 인간의 상승(도약)욕구이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은 상승하고자 하고, 깨달음은 하심하고자 합니다.

서로 반비례 하지요.

그러나, 전자의 깨달음과 후자의 깨달음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반비례 하느냐...?

이 상승의 욕구가 존엄적인 성격을 갖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깨달으면 지위가 높아집니다.

하심은 스스로 내려온 것입니다. 이는 실행기제와 같은데, 왜, 지위가 높아졌는데, 다시 내려올까...?

낮아져야 눈높이를 맞추기 때문입니다. 낮아져야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타인에게도 전달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낮아져야 어울림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낮아져야 관계가 생성되기 때문입니다. 낮아져야 대화의 상대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낮아진 목적은 타인의 지위를 올리기 위해서입니다. 타인을 끌어 올려야 깨달음을 현실에 실현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좌절하는 경우들은 많습니다. 성공한 케이스도 많습니다. 낮아져서 죽음으로 보상 받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낮아져서 세를 형성하여 열망을 발화시킨 예는 허다 합니다. 모든 이야기의 스토리는 다 이런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심은 낮아져서 집단의 수준을 끌어 올리는 실행기제와 같습니다. 그런데, 낮아진다는 것은 높아져야 낮아질 수 있는 것이지, 낮은데 낮아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먼저 높아지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자신이 높아져야 낮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대중과 똑같은데, 대중보다 낮아져서는 뭔가를 할 수가 없습니다. 대중보다 높은데를 다녀와야 대중에게 되돌아와서 해 줄 얘기가 있는 것이니까요.

깨달음은 일상에서도 깨닫지만, 좀 더 개념화 할 수 있는 것을 깨닫는 것도 있습니다.

일상에서의 깨달음은 삶을 변화 시키고, 삶의 지혜를 상승시킨다면, 개념화 할 수 있는 깨달음은 어떤 틀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이 틀을 만들어 개념을 담아냅니다. 즉 그릇을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마도 이론을 만들어 낸다는 것과 같은 것이기도 하고, 사상과 이념도 포함됩니다. 전자는 개인에게 국한된다면, 후자는 집단을 만들어 낸다는 크기의 차이가 있습니다. 하심은 일상에서도 자신의 관계를 만들어 가는데에도 필요하지만, 하심의 근본적 쓰임은 집단을 만들때 더 필요합니다. 하심과 겸손은 차이가 있습니다. 하심은 결코 겸손함을 의미하는게 아닙니다. 하심은 자신이 높지만, 내려와서 대중과 눈을 마주친다.라는 의미가 더 적절합니다. 여기서 지위는 사회적 지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적 지위는 결과입니다. 그 이전에 인간이 깨달음으로서 얻은 정신적 지위를 의미합니다 조재로서 존재적 지위인 것입니다. 범위가 커진 것이지요. 자신을 확장시켰으므로 그만큼 지위가 높아진 것입니다. 이것을 제도적 직업이나 사회적 신분으로 당연시 받아 들이면 곤란합니다. 사회적 지위는 후차적인 것이니까요.

 

깨달음과 하심은 같은 것이나, A이면 B이다.라는 관계를 형성합니다. 대칭을 이루고 있지요. 그러나 깨달음이 상승(도약)인데 하심도 도약이면 대칭을 이루어서 별 쓸모가 없어집니다. 소거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대체로 우리나라 대중이 지식인들을 등한시 하는 이유가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상승과 상승이어서 소거되어 버리니, 별 필요를 못 느끼는 것이지요. 그러나 깨달음과 하심이 비대칭을 이루면, 즉 상승과 낮아짐이 있게 되면, 쓸모가 발생합니다. 같은 공간에 있기 때문인 것이지요. 지식인이 쓸모가 있어지려면, 대중의 지위가 높아져야 합니다.

 

하여, 깨달음이면 하심이다. 인데, 여기에 욕심이 낄 자리가 없는 이유는, 상승(도약)의 욕구는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장착되어 있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이를 억누른다고 욕심 부리지 않는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인 것이며, 하심에 욕심이 낄 자리가 없는 이유는, 욕심을 가지고 하심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인 것이지요. 만약에 그러하다면 반드시 꼼수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속이는 것이니까요. 이것으로 진실과 거짓을 판별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는 절대적으로 그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개입 시키지 않아도, 역사적으로 인간이 흘러온 시간들만 살펴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깨달음을 어떻게 활용하고, 하심을 어떻게 실행기제로 사용하여 왔는지, 절실하게 그것을 열망해 왔는지를 받아 들인다면, 이것이 욕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된다고 여겨집니다.

 

 깨닫지도 않고, 혹은 깨달음에 대한 열망도 없으면서, 혹은 깨달음에 대한 것을 뜬구름 잡듯이 여기면서, 그리고 하심이란 것을 어떻게 사용하여 뭔가 이득을 얻어볼까? 이익을 챙겨볼까? 한 자리 얻어볼까? 하는 것들이 욕심인 것이지요.

즉, 기본적인 것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뭔가 얻어갈 궁리만 하는 것이 욕심인 것이지요. 깨닫음에 대한 상승욕구나 하심하는 행위를 하는 것 자체를 지향하는 그 상태에 욕심이 낄 자리는 없는 것이지요. 이는 열망이 있어야 해낼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지요. 그 어디서도 깨달음에 대한 열망을 욕심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깨달으라고 권할지언정. 그러다보니 깨달음이 너무 또 어려운 형이상학적으로 치부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지만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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