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게시판

지난 주 금요일 병가 중 장염으로 이틀 째 집에 누워있는데 반 아이에게 전화가 왔다.

"선생님, 00이와 ㅁㅁ이가 싸워요"
(나도 예상했다, 그런데 왜 나한테..)

"옆반 선생님과 1반 부장선생님께 빨리 말씀드려"

잠시 후 다시 학년 부장선생님한테 전화가 왔다.

"ㅁㅁ이가 학폭을 열어 달라네요, 어쩌죠?"

흠... 얘가 학폭까지 열어달라고 할 아이는 아닌데...

월요일에 출근해서 다른 애들에게 자초지종을 물으니 00이가 먼저 '학폭 열거야!' 이랬다고 한다. 예방교육을 참 잘했나 보다. 나는 1년에 학폭이란 말을 3~4번 밖에 반 애들에게 사용하지 않는다. 가급적 갈등조정과 관계회복의 관점으로 접근했다. 정 심한 것은 따로 불러서 자신이 겪을 수 있는 불이익을 알려줬다. 그럼에도 늘 아이들에게 선생님은 학폭위가 아닌, 평화적인 방법으로, 대화로 풀어가겠다고 선언하고 그것을 지켰다.

00이가 학폭 열거라고 선언하니, ㅁㅁ이도 흥분해서 부장선생님께 학폭 열어달라고 한거다. 아픈 선생님께 온 전화가 이런 전화라니...

요즘 국어시간에 공감하며 말하기란 것을 배우고 있는데 비폭력대화 기법을 활용해서 나누고 있다. 두 아이를 따로 불러서 내 입장을 알려줘야 겠다. 상대방이 어떤 처지인지 알아보는 거다. 물론, 상대방의 처지를 알기 위해선 누군가가 자신의 처지를 공감해줬을 때 가능하다. 결국 내가 먼저 그 아이들을 공감해주는 수 밖에 없다. 다툼의 과정에서 자신들이 얼마나 억울하고 속상했는지 먼저 들어주고, 내가 너희들 입장이라도 그럴 수 있겠다고 고개를 끄덕여 주는 수 밖에... 자기가 먼저 배불러야 남에게 나눠줄 수 있으니 말이다.

이런 프로세스로 가능하긴 한데, 문제는 그럼 나는 누구에게 공감받아야 하나? 나도 에너지가 있어야 이것이 가능한데 말이다. 나도 평소에 조언같은거 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여 주는 옆반샘이나 위클래스 상담사 선생님께 상담을 받는다. 그래야 내 마음도 풀린다. 그런데 어쩌나? 오늘 그럴 시간이 없다. 오늘 두 아이를 풀어주지 않으면 조망간 2탄이 또 벌어진다. 그래서 아침에 급한대로 두 아이(한 아이는 월~화동안 가족체험학습 끝나고 오늘 옴)를 시간차를 두고 따로 불러서 그냥 먼저 위로를 해주고 잘해보자고 했다. 서로 조금씩 조심하자고 했다.

이제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다쳤을 때 하는 응급처치와 비슷한 자기 공감이다. 병가로 아픈데 전화받으면서 당황스럽고, 내 몸 추스리기도 힘들고 나도 어찌할 수 없는데 애들까지 챙겨야 한다니, 묘한 죄책감과 무력감, 당혹스러움, 걱정과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다행히 학교 와보니 아이들 표정도 괜찮고 학폭위를 연 것도 아니고 평소 신뢰가 있는 학부모들이라서 뭐라 하지도 않는다.

'나도 힘들었구나, 내가 그동안 쌓은 노력들이 무너지는 것 같아서 걱정스러웠구나. 가슴은 뛰고 또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 소진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구나. 내가 바랬던 것은 문제행동이 심한 아이의 학교생활 적응, 다른 한 아이의 친구에 대한 배려 였구나.'

이렇게 자기공감을 하고 나니 내 마음도 좀 풀린다. 내가 뭘 원하는지, 무엇이 만족되지 못해서 힘들었는지 알고 나니 지금 내가 무엇을 할지도 보인다. 그래, 나도 여기까지 잘해 왔다. 애들이 또 싸우면 어떤가? 두 아이 모두 나아지고 있고, 나 역시 올해 새학교에서 와서 더 능숙해지고, 작년보다 바쁘지만 심리적으로 더 여유가 생겼으며 전반적으로 아이들도 잘 따라와 주고 있지 않은가? 민원이 많은 학교라는 것을 학기초에 느꼈지만, 그래도 점점 신뢰해주셔서 방학날 저녁에 부모님들과 반모임까지 하지 않았던가? 관리자분들과 동료교사들도 나를 격려하고 충분히 도와주고 계시다. 학부모들의 신뢰도 높다.

글을 쓰다보니 정리가 된다. 시야가 넓어진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보이고,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가 단계적으로 그려진다. 다행히 힘든 과정 속에서 힘든 정도가 점점 줄어들고, 덕분에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으며, 어떻게 수업에 접목시킬지도 보인다. 비폭력대화 덕분이기도 하고, 페북에 수많은 글을 올리며 나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생각을 정리한 덕분이다. 일기장인지, 푸념인지 성찰인지도 모를 페북실록의 세계, 참 오묘하다. 덕분에 나도 그렇게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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