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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아란도
read 2715 vote 0 2015.02.23 (19:36:33)

이 글을 쓰면서 윤동주의 '서시'가 생각났다.
내 인생의 차 한 잔 이란..., 내 인생을 바꾼 한 잔의 차란....
존재하는 이들...각자의 서시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차의세계 잡지에 기고한 원문>




내 인생의 차 한 잔 이란....? 사건복기 과정 이며, 지금도 계속 진행형이다.

차는 곧 삶이다.


혼자서 차를 마시며 인생을 복기해 왔다. 복기란 그저 지난 일을 되새김질을 하거나 회상하는 것이 아니다. 복기란, 구체적 사건을 다시 재구성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과 종결 지점을 결정해 주는 것이다. 이리 ‘시건복기’ 를 통하여 일의 기승전결 진행 경로를 추적하고, 그 추적으로 나는 그 사건에서 나만의 깨달음을 얻곤 했다. 그리고 이내 그 사건은 나에게서 떠나가곤 했다. 더 이상 복기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럴 때 마다 내 마음은 조금씩 평안해져 갔다. ‘놓는다’ 라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사람은 자신이 스스로 온 몸으로 이해가 되고 실존적 체험과 존재적 체험이 겹쳐질 때 놓아 버려야 할 것을 놓게 되고, 짐으로부터 가벼워진다. 그때 무엇인가를 진정으로 아는 상태가 된다. 그럴 때 편안해진다. 그 평안을 나는 나만의 시간을 활용하는 방향으로 점차로 사용할 수 있었다. 이 평안을 찾아내는 나만의 방식은 나를 근본적으로 움직이는 에너지이기도 했다.


또한, 여럿이서 함께 한 잔 의 차를 마시며, 사람의 욕망을 긍정하게 되었다. 그저 억누르기만 했던 나의 욕망도 긍정하게 되었다. 그러자 자유로워졌다. 나를 옥죄고 있던 쇠사슬에서 풀린 기분이었다. 무엇을 억누르고 있었는가...? 나의 잠재적 표현 능력과 실행 능력을 억누르고 있었다. 지나치게 사람들과의 조화를 신경 써 왔으며, 지나치게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먼저 생각하곤 했었다. 그러다보니 어느 날 내 글은 에너지가 없이, 나를 힘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부끄러웠다. 부끄러움을 넘어서야만 했다. 끝없이 부끄러워서 발가벗고 백주대낮에 네거리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나에겐 그때 나를 시선에서 가려줄 보호막이 필요했다. 그 보호막은 글쓰기였다. 무작정 싸야만 했다.

내가 접한 글쓰기는 처음에는 하소연과 상념이었고, 그 다음은 포장하기 였으며, 그 다음은 뭔가 있는 척 이었으며, 그 다음은 부끄러움 이었으며, 그 다음은 나를 죽이는 것이었으며, 그 다음은 나를 살리기 였으며, 그 다음은 글 자체에서 자유로워지기 였으며, 그 다음은 시선을 의식하지 않기 였으며, 그 다음은 글에 에너지를 실어내는 것이었다.


드러나고 표현되고 현재에 갈구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모두 미래라는 존엄을 필요로 한다. 내일이 있기에...오늘을 견뎌내는 것이 인간이다. 미래라는 존엄... 이 존엄을 얻기 위해 나는 많은 밤낮을 고독하고 또 외로웠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존엄의 메커니즘을 알게 되었다. 그때 나는 더 이상 부끄럽지 않게 되었다. 이 부끄러움은 근원적인 것이기도 하고, 생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뭔가에 대해서 어색해 질 때 지금도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곤 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한 부끄러움은 내 인생 전체와 내 삶 전체와 맞서는 부끄러움 이었다. 부끄러움의 크기가 달랐던 것이다. 그 부끄러움이 가려지자 나는 그때 살 것 같았다.


미래의 내 모습은 어떠해야 할까를 분명하게 인식할수록 사람은 존엄을 획득하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움직이게 된다. 여기에 바로 한 잔의 차가 필요하다. 이 한 잔 의 차에 모든 것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 차 한 잔이 또 다른 세상을 여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오늘 돈이 필요한 사람도, 오늘 일자리가 필요한 사람에게도, 오늘 친구가 필요한 사람에게도, 오늘 안식이 필요한 사람에게도... 모두 그 필요한 것을 획득하기 위해 그 이전의 포석을 깐다. 오늘 필요한 그것에 바로 미래라는 존엄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람이라는 객체가 각자의 존엄을 획득해가는 메커니즘이다.


모든 찻자리에는 욕망이 담겨 있다. 찻자리 자체가 이미 의도가 실린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체로 의도가 실리면 사람들은 그것을 일단 안 좋은 것이라고 여긴다. 의도가 실려야 뭔가 명확한 것을 행할 수 있다. 의도란, 인간에게 방향성을 제시하고 찾을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도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아야 사람은 자기 길을 갈 수 있다. 의도는 곧 욕망이기 때문이다. 욕망이란 무엇을 향하여 나아갈 것인가? 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많은 대상들이 나타나게 된다.


하나하나에 의도가 담겨있지 않은 물건은 없다. 찻잔은 찻물이 담기기를 바라는 욕망, 차는 맛보여 지기를 바라는 욕망, 책은 펼쳐져 보이기를 바라는 욕망, 도자기는 감상되어지기를 바라는 욕망... 벌이 꽃을 찾아오듯이... 모든 다실과 찻자리는 만나야 할 것들이 만나기를 바라는 소망이 피어나는 자리이다. 그렇다. 사람의 바램과 기원과 희망과 소망이 모두 담겨져 있다.


나는 그대가 만나기를 바라는 사람인가?

그대는 내가 만나기를 바라는 사람인가?

너는 그대가 - 내가 만나기를 바라는 사람인가...?

한 잔의 차를 앞에다 두고 냉철하게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정신 차려야 한다. 그럴 때 자신이 다스려지게 된다.


한 잔의 차 앞에서는.... 냉철해져야 한다. 차 맛을 보며 차 맛을 놓치지 않고 음미 하듯이, 차 한 잔 마시며 생각명상을 할 때는 자기도 모르게 자기만의 고도의 집중된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 거기서 자신을 만나고 나와야 한다.


찻자리의 즐거움은 서로 만나고자 하고, 만나 보고픈 이들이 모여들 때 그 때 풍성해진다.

그러자면 모두 평소에 그런 자기 매력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

그대의 매력은 무엇인가...?

무엇으로 그 자리에 빛나게 스며들 것인가?

스며들지 못하면 어색해진다. 그때 인간은 자기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초대 받지 못한 손님처럼 인생을 겉돌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이것은 곧 질문이다.


한 잔의 차는 아직도 계속하여 진행중이며, 너와 나에게 질문을 멈추지 않고 있다. 멈추지 않는 질문에 자신이 반드시 답을 내놓아야 한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질문을 세상에 던져야 한다. 차란 그런 것이다. 질문을 하고 답을 하고, 질문을 다시 던지고, 이렇게 화답을 하는 구조적 패턴으로 계속 가고 있다. 그 안에 너와 나의 차 한 잔을 나누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차의 화답 구조는 이런 메커니즘에서 깨달음으로 도약하게 된다, 나의 차 한 잔은 계속 멈춤 없이 아직 가고 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27]오리

2015.02.23 (23:48:59)

이번 글은 다른 글보다 읽기가 수월 하네요. 

잘 읽었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5.02.24 (00:24:17)

ㅎㅎ...감사해요..^^
[레벨:7]아바미스

2015.02.24 (09:05:55)

맞아요!!  차의 전문가이셔서 그런지~ 이번 글 너무 좋아요^^ 

감사합니다.

[레벨:4]계수나무

2015.02.24 (09:10:01)

지금까지 아란도님의  글 중에 가장 편안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14]곱슬이

2015.02.24 (11:29:18)

오 진짜 술술 읽히네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5.02.24 (15:03:51)

모두...감사해요^^

흠...원래...서시는 한번에 술술술 읽히는거 아닐까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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