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게시판
프로필 이미지
[레벨:21]챠우
read 1823 vote 0 2019.06.14 (18:25:04)

20대였다. 어느날 엄마가 니 옷은 빨아서 햇빛에 말려야 한다고 박박 우겼다. 겉으로 보기에 깨끗하다며 따졌지만 엄마는 막무가내다. 그때까지 나에게 특유의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몰랐다. 이후로 가끔 겉옷을 세탁기에 두번 돌리곤 한다. 땀을 많이 흘리지 않는 친구들 중에는 빨래를 자주 하지 않는 놈도 있었다. 지하철 한쪽 노인석 근처에 가면 할배 냄새가 난다. 어쩔 땐 저게 죽음의 냄새인가 싶기도 하다. 


택시 운전을 하면 뒷좌석 손님의 지위를 냄새로 알 수 있다. 논현동에서 탄 손님들은 향수가 범벅이다. 그런데 의외로 커플들은 향수를 쓰지 않더라. 남자들과 함께 어울려 다니는 여자들도 향수를 쓰지 않는다. 여자측의 배려일듯 싶다. 애기 엄마한테는 애기 똥냄새가 난다. 아재들은 담배 쩐 냄새가 난다. 강남역 뒷거리에서 탄 사람들은 찌개 냄새가 난다. 아마 마늘향인듯.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일할 사람이 없어 흑인난민을 쓰는 것도 이유가 있다. 거꾸로 할배 택시를 타면 할배 냄새가 난다. 슬며시 창문을 내려본다. 


당신은 모르는데 남들은 아는 치부를 들킨 적이 있는가? 냄새는 이 문제이다. 차라리 시각/청각적인 건 잘 보인다. 물론 이것도 오랫동안 신경써야 보인다. 인간은 365일 맡고있는 나의 냄새에서 벗어나지 못하므로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시각/청각은 상대가 가릴 수 있다. 하지만 냄새는 가릴 수가 없다. 숨을 쉬어야 하기 때문이다. 냄새를 가리는 방법은 그 공간을 벗어나는 방법뿐이다. 치명적이다. 상대가 날 배려하고 있다는 걸 느끼는 순간 살인의 충동이 일어나는게 당연하다. 왜? 들켰기 때문이다. 이걸 상대도 잘 안다. 그래서 더더욱 말하지 않는다. 당신이 눈치채지 못하게 슬며시 피할 뿐이다. 


인간의 시각이 대상이라면 후각/청각은 배경이다. 대중문화는 모니터와 스피커를 쓰기 때문에 시각과 청각이 주류를 이룬다. 학습할 자료가 넘친다. 어릴 때는 냄새를 잘 모른다. 남자들은 사춘기를 지나면서 냄새가 고약해지는 경향이 있다. 호르몬이 바뀌기 때문이다. 얼굴에 여드름이 나고 겨털이 나는게 다가 아니다. 털은 반드시 냄새를 수반한다. 하지만 남자들은 냄새가 가지는 사회적 의미를 학습하기엔 아직 너무 어리다. 보통 남자들은 결혼하고 깨닫는다. 개갈굼을 당하기 때문이다.


좀 과하긴 했지만 영화 '향수'에서는 이런 향기의 의미를 좀 더 극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절대향수 같은 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당신의 무의식에는 향기가 영향을 미친다. 영화에서는 딸을 죽여 그녀의 향기를 가진 남자 앞에 무릎꿇는 아버지를 묘사한다. 올리버색스의 책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는 시각인식 장애를 가진 남자가 아내를 모자로 착각하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그는 시각적 맥락을 인지하는 우뇌부위가 망가졌다. 인간의 무의식은 언제라도 사건을 파악하고 있다. 사건의 중핵은 편이다. 판단이다. 적이냐 아군이냐다. 


송강호가 상대를 찌른 이유는 들켰기 때문이다. 자신이 거지이고 상대가 부자인 건 그에게 아무 느낌이 없다. 그냥 뜯어먹을 생각만 한다. 권력에 순응한다. 하지만 원초적 권력 문제가 붉거지자 그는 태도가 달라졌다. 영화에서는 개연성 때문에 딸을 사용하지만 딸은 별 상관이 없다. 시작은 냄새였다. 결정적인 장면은 수풀 뒤에 쪼그리고 있을 때였다. 내가 선을 넘는 것을 상대가 참고 있었다는 걸 직접 폭로 당한 것이다. 인간은 상대에게 직접적으로 치부가 폭로되면 흥분한다. 알아도 내가 알아내야 하고, 제3자에게 듣는 것은 괜찮다. 권력 문제를 비끼기 때문이다. 


맥락을 건드리면 화내는 게 인간이다. 인신공격이 의미를 가지는 이유다. 눈앞의 대상이 중요하다고 여기지만 인간은 별 감흥이 없다. 하지만 맥락을 건드리면 살인자로 돌변한다. 에너지가 맥락에 있기 때문이다. 확실하게 동기부여 한다. 영화는 마당의 송강호 씬에서 끝났어도 좋을 뻔했다. 괜히 질질 끌었다. 그럼 카뮈의 이방인이 되었을듯. 이는 진중권과 조영남류가 잘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깐 욕먹지. 


List of Articles
No.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sort
4972 복희씨와 dna image 2 카르마 2012-06-12 9296
4971 축하드리며...또. 온새미로 2005-09-30 9261
4970 구렁이 7 곱슬이 2010-06-28 9253
4969 for 와 to 의 차이는 뭘까요?(수정) 15 차우 2014-02-07 9145
4968 구조적으로 보시길(징그러워서요...) image 18 삼백 2014-04-09 9139
4967 나홀로 중국배낭여행기(동남아 추가) - 에움길 image 1 꼬레아 2010-04-24 9136
4966 손학규 코스프레 image 5 김동렬 2011-11-07 9105
4965 (주의) 윤서인 조이라이드 중 이상한 이미지 발견 image 6 오세 2015-01-15 9092
4964 자위녀 유세현장을 보면 박원순 100 % 당선이군요 ^^ image 4 꼬레아 2011-10-21 9071
4963 남극 심해어 '메로(mero)' 아시나요? image 12 정나 2011-04-20 8984
4962 이외수와 박남철 image 3 김동렬 2013-06-21 8962
4961 포기안해도 되는 일 1- 실리콘코킹검정곰팡이청소 3 곱슬이 2010-07-11 8956
4960 둘째 아이들에 대한 단상. 5 이상우 2012-03-24 8954
4959 새로와서 낯설긴 하지만 훨 좋네요 우리보리 2005-10-01 8923
4958 번지점프를 하다 image 7 15門 2013-02-20 8902
4957 한미fta 관련 6 愼獨 2006-07-07 8844
4956 홈페이지 개편 축하드립니다. EUROBEAT 2005-10-01 8815
4955 이란인들의 대칭구조 image 6 김동렬 2014-06-17 8803
4954 WM7과 WWE 그리고 한국 프로레슬링 image 5 양을 쫓는 모험 2010-09-12 8794
4953 잠자리 날개 - 천의무봉 image 4 다원이 2013-06-24 87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