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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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6872 vote 0 2012.05.29 (00:42:31)

 

전편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묻고 싶다. 진정한 깨달음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는가? 대부분 그렇지 않다. 의도가 있다. 자신의 행동을 정해놓고 필요한 인식을 조달하려 한다. ‘내게 필요한 말을 해줘!’ 하는 식이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다. 자신의 수요를 정해놓고 필요한 공급을 요청한다면 사절이다. 대개 고통의 짐을 덜어내는데 관심이 있다. 그렇다면 이미 환자다. 환자와는 정상적인 대화가 어렵다.

 

‘인생은 고(苦)’라고 정해놓고 ‘나의 고통을 덜어줘’ 하는 식은 곤란하다. 고통을 덜어내려면 병원을 알아보는게 낫다. 석가가 ‘인생은 고’라고 한 것은 그때만 해도 병원시설이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행위에 맞추어 인식을 조달한다. 그러므로 행위를 정해주면 좋아한다. 그것이 쉬운 목표이면 더욱 좋다.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마라!’고 행동을 명령해주면 책이 100만 부나 팔려나간다.

 

행동에 옮기기 쉽기 때문이다. 갓바위 부처님 앞에서 3천배를 해라고 하면 다들 좋아한다. 부적을 갖고 다녀라고 하면 얼씨구나다. 사이비 집단은 당장 실천하기 쉬운 행동강령을 내놓는다.

 

그따위 난삽한거 말고 진정한 깨달음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다면 계속 읽어도 좋다. 나는 여러분에게 깨달음을 권한다. 여기서 ‘깨달음’이라는 말을 종교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종교인들은 깨달음을 무슨 초능력 슈퍼파워로 여기는 까닭이다. 깨달음은 철학 개념이다. 다만 그것을 안다고 하지 않고 깨닫는다고 하는게 다를 뿐이다. 앎은 인식의 세팅이고 깨달음은 작동이다.

 

◎ 앎 – 세팅, 인식
◎ 깨달음 – 작동, 행동

 

앎과 깨달음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피아노를 안다는 것과 피아노를 친다는 것은 다르다. 자동차를 안다는 것과 자동차를 운전한다는 것은 다르다. 아는 것은 다른 것과 구분할줄 아는 것이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구분할줄 안다는 것이다. 자동차와 비행기를 구분할줄 안다는 것이다. 연주할 수 있어야 진짜다. 운전할 수 있어야 깨달음이다. 대상을 물리적으로 통제할 수 있어야 진짜다.

 

인간은 망원경으로 관찰하여 별을 알 수 있지만 통제할 수는 없다. 다룰 수는 없다. 바깥을 맴돌 뿐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자신의 뇌와 마음은 알 수도 있고 다룰 수도 있다. 들어갈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낙담하는 사람이 많다. 깨달음이 너무 쉽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고고한 에베레스트가 아니라 가까운 동네 뒷산이었다는 거다. 환상 깨진다. 그러나 오히려 희망을 가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누구든 쉽게 깨달음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태여 깨닫고자 애쓸 필요도 없다. 내가 이미 깨달았으므로 여러분은 깨닫지 않아도 무방하다. 운전자가 있으면 승객이라도 무방하다.

 

앞서간 사람이 이미 바둑을 발명했는데 여러분이 또다른 바둑을 발명할 필요는 없다. 여러분은 그저 바둑을 두기만 하면 된다. 내가 이미 피아노를 만들었으므로 그저 피아노를 연주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깨달음의 세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 안에서는 누구나 이미 깨달은 거다. 단지 구조론적인 사고방식과 스타일만 얻으면 된다. 단지 세상을 구조로 보는 눈을 얻기만 하면 된다.

 

세상을 바라보되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아니라 좋은 포지션과 나쁜 포지션으로 보는 것이다. 세상을 포지션으로 본다는 것은 재벌회장이 높다 해도 야구장 안에서는 감독이 더 높다는 것이다.

 

정치인이 높다해도 투표할 때는 유권자가 갑이라는 거다. 대통령도 수술받을 때는 의사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 스티브 잡스라고 해서 순순히 의사의 명령을 듣지 않다가는 죽음을 맞을 뿐이다.

 

이런 것을 알면 막연한 두려움이 사라진다. 어떤 강한 상대도 제압할 찬스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두둑한 배짱과 자신감을 얻게 된다. 이길 수 있다. 제 풀에 쫄지 않는다. 그것이 존엄이다.

 

세상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간다. 작동에서 세팅으로 간다. 알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을 통해서 얻은 시행착오를 통하여 앎을 채워넣는다. 행함이 먼저다. 깨달음은 전체를 본다. 완전성을 본다.

 

그럴 때 마음의 불안에서 치유된다. 존엄을 얻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행동의 시발점인 전체를 잘못 구획한데 따른 것이다. 포지션은 공동체 전체에서 얻어지는 바 포지션 상실 때문이다.

 

축구는 팀을 갖추어야 포지션을 얻고, 야구라도 아홉명을 모아야 포지션이 생긴다. 항상 전체가 먼저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잘못된 포지션 설정에 따라 일의 출발점을 잘못 찍은데 따른 것이다.

 

그것은 안티하려는 태도이다. 인간은 포지션을 얻기 위하여 안티를 저지른다. 상대방이 자신의 도발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지켜본 다음 거기서 정보를 얻어 2차적으로 자기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다.

 

사건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는데 전체를 파악하지 못하므로 자신이 일의 출발점을 찍지 못하기 때문이다. 항상 시작은 상대방이 해줘야 한다. 선제공격은 못하고 되치기만 노리게 된다.

 

그러나 안티하면 종속되고 종속되면 존엄하지 않다. 불행해진다. 전체가 가는 방향을 읽으면 포지션은 저절로 얻어진다. 그럴 때 불행은 없다. 결따라 가는 것이다. 완전성의 이해로 가능하다.

 

왜 깨달음을 권하는가? 깨달음은 중독성이 있다. 깨달음은 난삽한 언어로 사유하지 않고 계에 걸린 스트레스의 총량을 읽는다. 에너지 총량을 읽는다. 그냥 보고 안다. 팽팽한 긴장이 걸려있다.

 

깨달음은 마약과 같다. 뇌를 활성화 시킨다. 상쾌한 마음을 얻는다. 집단의 스트레스를 느끼고 유머로 조율한다. 집단에 떠넘기는 어리광의 마음을 버리고 집단을 대표하는 존엄의 마음을 얻는다.

 

부분이 아닌 전체 포지션에 서기 때문이다. 개인전체, 가족전체, 집단전체, 국가전체, 인류전체, 우주전체의 마음, 대표자로서의 마음, 신의 마음을 얻는다. 전체의 마음을 얻어야 편안해진다.

 

행동이 먼저다. 행동은 전체에서 나온다. 개인의 이기적인 행동도 전체 안에서의 자기 포지션을 따른다. 내가 10원을 더 챙기려고 이기적인 행동을 해도 실제로는 가족의 존재를 의식한 거다.

 

내가 10원을 챙기지 못하면 가족이 곤란하다. 가족 안에서 내 포지션이 정해지므로 불행하다. 전체 포지션에 서면 기승전결의 전략이 선다. 가족은 많다. 첫째 아니라도 둘째가 있다. 편안하다.

 

운전이 서투른 사람도 자신이 핸들을 잡아야 편안해 한다. 인간의 불행은 고난 때문이 아니라 고난에 대응할 다음 단계의 행동계획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핸들을 잡음으로써 고난은 극복된다.

 

그냥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마약주사 한번 맞은 것과 다르지 않다. 중요한건 양식이다. 깨달음의 스타일과 문화 안에서 실천해야 한다. 깨달음은 작동이므로 작동시켜야 한다.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마라!’처럼 가장 쉬운 행동목표를 정해주면 사람들이 좋아한다. 그런데 가짜다. 깨달음이 요구하는 행동은 진리가 가는, 역사가 가는, 인류가 가는 방향에 서는 것이다.

 

깨달음을 논하면 ‘그러는 너는 깨달았느냐?’ 하는 질문이 있을법하다. 잘못된 질문이다. 깨달음은 명사다. ‘깨닫다’ 하는 동사와 다른 개념이다. ‘깨닫다’는 동사이므로 반드시 앞에 주어가 있다.

 

무언가를 깨닫는 것이다. 이미 틀렸다. 깨달음은 세팅에서 작동으로, 부분에서 전체로, 인식에서 행동으로의 방향전환이다. 명사로 이해해야 하고 철학개념으로 이해해여 한다. 동사는 곤란하다.

 

깨달은 사람이 ‘나는 깨달았소’ 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면 그것보다 한심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깨달은 사람이 할 일이 없어서 불편하게 방문객 앞에서 그런 얼굴을 전시하여 놓고 있겠는가?

 

‘깨달았느냐?’고 묻는다거나 혹은 깨달은 사람의 행동이나 포즈를 기대한다면 이미 사이비 집단을 찾는 거다. 피아노를 칠 수 있으면 피아니스트다. 그런데 어린아이도 피아노를 칠 수 있다.

 

심지어 강아지도 피아노를 칠 때가 있다. 피아니스트 자격증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피아노를 친다는 것과 건반을 누른다는 것은 다르다. 음과 음들 사이에서 어떤 통일성을 담아내야 한다.

 

깨달음은 누가 인가를 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런게 있다면 잘못된 것이다. 등단을 해야 시인이 되고 신춘문예를 통과해야 소설가도 되고 한국기원 인가를 받아야 바둑기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인상주의 그림을 그리면 인상파다. 자신은 인상파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인상파 화가도 있다. 상관없다. 강아지라도 말을 한다면 사람 대접을 받는다. 농부라도 글자를 안다면 선비 대접을 받는다.

 

깨달은 사람과 소통하는 사람이 깨달은 사람이다. 본인이 아니라고 주장해도 인상주의 안에서 활동하면 곧 인상파이듯이 깨달음의 문화와 그 바운더리 안에서 활동하면 그것이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양식이고 양식은 동조되기 때문이다. 근래에 와서 깨달음이 죽은 것은 깨달음의 문화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깨달음의 문화가 이 시대의 변화를 주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이 신통한 것을 새로 내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건을 내놓아야 한다. 인터넷을 아느냐고 묻지 않는다. 인터넷을 하느냐고 묻는다. 인터넷을 하는데 인터넷을 아느냐고 물을 이유가 없다.

 

깨달음이 구체적인 물건을 내놓을 때 깨달았느냐는 물음은 사라진다. ‘깨달았다’는 선언도 사라지고 ‘깨달았느냐’는 물음도 사라져야 진짜다. 그러자면 구체적인 물건을 내놓아야 한다.

 

건축과 음악과 회화와 패션에 깨달음이 반영되어야 한다. 조선시대의 건축과 의복과 삶의 양식은 그 시대의 깨달음이 반영된 것이다. 아이폰의 디자인은 스티브 잡스의 깨달음이 반영된 것이다.

 

산업의 시대가 가고 양식의 시대가 온다. 우리가 최고의 디자인을 내놓아야 하고 그것이 21세기의 정신과 맞아떨어져야 한다.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디자인은 전체를 총괄하기 때문이다.

 

삼성은 스마트폰 안의 기계만 보았고 애플은 그 스마트폰을 쓰는 사람의 행동까지 보았다. 애플이 전체를 들여다 볼 때 삼성은 부분을 본 것이다. 디자인은 반드시 전체를 꿰어야 이루어진다.

 

TV를 디자인한다면 TV시대의 삶의 양식은 어떠한가를 묻고 거기에 맏추어 디자인하는 것이다. 물론 몽구 아저씨는 모르고 마구잡이로 디자인하지만 원래 그렇다. 양식은 전체에서 출발한다.

 

전체는 행동이다. 인식에 행동이 따르는게 아니고 행동이 앞서가며 그 시행착오를 인식으로 메꾼다. 알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행한만큼 안다. 행은 내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로부터 촉발된다.

 

진리의 행동 안에 머물러 있을 때 인식은 저절로 채워진다. 나는 알고자 하지 않았다. 단지 분노했고 슬퍼했고 반응했을 뿐이다. 이에 커다란 낙차가 만들어졌고 필요한 것은 저절로 채워졌다.

 

인상주의 이전에도 인상주의는 있었지만 누가 인상주의라고 말해주기 전에는 그 의미를 몰랐다. 깨달음은 우리 주변 가까운 곳에 있지만 체계화 되어 있지 않을 뿐이다. 수학은 못되고 산술은 된다.

 

‘내가 깨달아야 한다’는건 소승적인 생각이다. 깨달음은 팀플레이다. 팀의 일원으로 가담하는 것이 대승이다. 이미 팀이 출범했으므로 가담하면 된다. 모르고 혼자 가던 길을 알고 함께 가는 거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깨달음을 권할 뿐 ‘수행하여 깨달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전체가 먼저다. 행동이 먼저다. 내가 이미 축구를 하고 있는데 여러분이 함께 하다보면 저절로 축구가 되는 거다.

 

행함이 먼저다. 한 사람이 시작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 다음은 일사천리다. 인상주의도 처음 한 사람이 하던 것을 나중 모두가 하게 된 것이며 처음 그것을 한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몰랐다.

 

하다보니 중독되고 길이 있으니 그 길로 계속가게 된 것이다. 그리로 미끄러져 들어간 것이다. 깨달음도 마찬가지다. 중독되어야 하고 미끌어져 들어가야 한다. 수행하여 깨닫겠다면 이미 틀렸다.

 

 

 0.JPG

 

깨달음은 되는게 아니고 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미션을 행할때 이미 깨달음의 세계 안에서 숨쉬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초대하는 세계는 깨달음의 세계입니다.

그 세계 안으로 들어오면 그 뿐 

수행하여 무엇을 깨닫고 따위없습니다.  

리얼리즘 문학의 개척자 발자크는 스스로 보수를 자처했고

살바드로 달리도 마찬가지이나 이는 개인의 성격일 뿐

그들은 강렬한 진보의 바운더리 안있었던 사람입니다.

시대의 호흡 안에서 격렬하게 반응했던 사람입니다.

마네는 인상주의를 부인하며 그들을 멀리했으나

젊은 추종자들이 몰려들어 떠받드는 괴상한 일도 있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세상이 가는 길에 들어서 버리기도 합니다.

모든 것은 행함에서 비롯되며 인식은 가짜입니다.

진보주의도 마찬가지로 행함이 먼저입니다.

인식으로 진보를 논한다면 가짜입니다.

무엇보다 깨달음의 길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http://gujoron.com




[레벨:2]주유천하

2012.05.29 (14:29:55)

yes si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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