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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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0552 vote 0 2011.11.16 (22:09:31)

 

왜 구조를 알아야 하는가?

 

구조론은 지극히 단순한 사실들로부터 공통분모를 찾아 보편적인 원리를 뽑아낸다. 지하철을 타든 버스를 타든, 먼저 내릴 사람이 내리고 난 다음에 타야 한다. 언제라도 마이너스가 먼저고 플러스가 나중이다.

 

이때 마이너스가 플러스를 통제할 수 있다. 내릴 사람이 안 내리면 탈 사람이 못 탄다. 의자에 앉은 사람이 좌석을 양보하지 않으면 서 있는 사람이 좌석에 앉을 수 없다. 골탕먹이려면 얼마든지 골탕먹일 수 있다.

 

반면 플러스는 마이너스를 통제할 수 없다. 탈 승객이 안 타고 버티면 버스가 언제까지고 기다려줄까? 천만에. 버스 떠난 다음에 손 흔들기다. 실패하고 만다. 그런데 한국의 지식인들이 이런 멍청한 짓을 하고 있다.

 

한국의 문제가 무엇일까? 한 마디로 ‘지식인이 썩었다’는 거다. 진아무개 부류의 쓰레기들은 30년대 독일 수준에 머무르는 한국의 대중이 문제라고 헛소리 씨부리고 있지만, 구조론은 곧 죽어도 상부구조를 친다.

 

윗물을 정화하는게 정답이다. 하부구조는 원래 답이 없다. 대중이 어떻든 그 쪽은 안 건드리는게 맞다. 상부구조에서 마이너스가 일어나고 하부구조에서 플러스가 일어난다. 무조건 상부구조의 지식인을 쳐야 한다.

 

30년대 독일 역시 방향을 잡아줄 제대로 된 지식인이 없었던 거다. 위의 지식인이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여 멍청한 소리나 하고 있으니 밑의 대중들도 갈피를 못 잡는 거다. 꼬리가 아닌 머리를 쳐야 한다.

 

2011년 이 시대 한국사회에 제대로 된 스승이 있느냐? 생각있는 지성인이 있느냐? 없다. 왜인가? 스승은 그냥 나고 지성은 그냥 나냐? 아니다. 스승은 스승의 자궁에서 나고, 지성은 반드시 지성의 자궁에서 난다.

 

문제는 자궁이 없다는 거다. 제법 아는 사람이 없는게 아니라 그 사람을 키울 시스템이 원초적으로 없다는 거다. 이유는? 한국의 모든 지식은 외부에서 들여온 거다. 오리지날이 아닌 짝퉁인 거다. 지식이 가짜다.

 

죽은 씨앗에 물 준다고 싹 트는거 봤나? 내부에 에너지 순환의 완전성을 갖춘 지식의 자궁이 세팅되어야 한다. 외부의 자궁에서 들여오면 가짜다. 낳는 자궁이 상부구조다. 지식의 자궁을 장악해야 이야기가 된다.

 

지식의 상부구조가 통제되지 않는 외부에 있는 것이 구조적 모순이다.

 

원초적으로 자궁이 없으니 한국에서 제대로 된 지식인이, 제대로 된 스승이 발생할 가능성은 없다. 지금 없고 앞으로도 계속 없다. 유럽은 다르다. 거의 죽었지만 그래도 그쪽은 약간의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

 

언제든 지성이 일어날 수 있는 구조가 세팅되어 있다. 미국은? 전혀 가망이 없다. 촘스키가 혼자 뭐라고 떠든다고 지성이 되나? 천만에. 지성은 시스템이다. 개인의 인격은 소용없다. 안 쳐준다. 그쪽도 자궁은 없다.

 

자기를 복제할 수 있어야 진짜다. 그런데 상부구조가 없으니 복제가 안 된다. 공자, 맹자, 주자를 세트로 갖다놔도 미국은 안 된다. 구조론으로 말하면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포지션이 갖춰져야 한다.

 

미국은 그게 없다. 왜? 고립되어 있으니까. 대중이 UFO 찾고 외계인 찾으면 끝난 거다. 위에서 안다는 촘스키가 멍청한 소리나 하고 있으니, 대중이 부끄러운줄 모르고 그 수준에서 헤헤거리며 논다. 얼 빠졌다.

 

일본은 다른가? 과거 일본이 유럽을 흠모할 때는 일본에도 제법 지성 비슷한 것이 있었다. 기특한 생각을 하는 인간이 더러 있어서 제법 명함 내밀고 다녔다. 아류지만 유럽과 비슷한게 있었고 자궁이 생길뻔 했다.

 

일본은 유럽이 그렇듯이 여러 개의 특색있는 봉건 소국으로 쪼개져서 서로 경쟁하고 있었기 때문에, 구조의 필수 포지션조합이 갖추어져서 미국처럼 획일화 되지 않고 제한적이나마 자궁의 기능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80년대 이후 일본도 배에 힘이 들어가며 지성이 사라졌을 뿐 아니라, 앞으로 지성이 생겨날 가망도 거의 없다. 봉건소국간의 내부경쟁은 옛날 이야기고 군국주의를 거치며 일본은 급속히 획일화 되었다.

 

백년 안에 일본에서 사람같은 사람이 나타날 가망은 거의 없다. 중국은? 논외다. 중국은 진시황때부터 획일화 되었다. 중국은 한자문화가 원초적으로 자유로운 사고를 제한한다. 지식의 자궁은 기능하기 어렵다.

 

결국 우리 밖에 없다. 우리가 스스로 답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안에서 지식의 자궁을 세팅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안에서 지식의 상부구조가 구축되어야 한다. 우리가 기승전결의 기에 서야 한다.

 

 

 

지식인의 비겁함이 문제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지’에 주목하자. 사실 이거 간단한 이야기 아니다. 중요한 거다. 소크라테스는 델포이 신전에서 ‘지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소크라테스이며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사람은 세상에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라는 대단한 신탁을 받았다. 이게 그의 운명을 바꾼 거.

 

친구가 신전에 가서 직접 물어봤는데 신이 그렇게 응답을 하더라는데 어쩔 것인가? 당시만 해도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이라면 알아주는 신전이었는데 말이다.

 

‘무지의 지’가 뭐지? 사실은 대강 둘러댄 거다. 소크라테스도 아는게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아는 것을 표현할 언어가 그에게 없었다. ‘무지의 지.’는 상당히 어색한 표현이다. 단어로 말할 것을 문장으로 말한다.

 

필자가 문과출신 및 이과출신과 각각 대화를 해 보고 느낀 점은, 문과출신들은 문장으로 말해야 할 것을 꼭 단어로 말하는 오류에 빠지더라는 거다. 좀 아는체 하는 먹물들이 ‘랑그’니 ‘빠롤’이니 ‘가로지르기’니 어쩌구 하며, 되도 않게 현학적인 표현 쓴다면, 혹은 들뢰즈니 푸코니 데리다니 라캉이니 하며 이름 들이대기 초식이나 구사한다면, ‘이 인간 쥐똥도 아는게 없다.’는 사실을 들키고 만 거다.

 

왜 문장으로 써야 할 것을 단어로 방패막이 하냐? 이런 자들은 1초만에 등신인증 한 거다. 아직도 이런 식으로 글 쓰는 쓰레기들 도처에 있다.

 

근데 이과출신도 막상막하다. 이쪽 사람들은 단어로 말해야 할 것을 꼭 문장으로 말하는 습관이 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도 상당히 잘못된 표현이다. ‘시간이 휘어진다’는둥 ‘공간이 어찌된다’는 둥 하는건 단어로 말해야 할 것을 문장으로 말해서 무수한 사람들을 헷갈리게 한 거다.

 

그러한 잘못된 언어구사가 무수한 사이비가 탄생할 토양이 되었다. 애초에 그런 식의 접근 자체가 잘못이다. 아인 슈타인은 국어공부를 했어야 했다.

 

예컨대 만유인력이라면 어떨까? 적어도 문장이 아닌 단어로 말하고 있다. 이건 조금 나은 거다. ‘인력’이라는 표현은 잡아당긴다는 건데 이것도 어색한 거다. ‘잡다, 당기다’ 두 단어로 된 문장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공간의 밀도’로 바꿔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표현이 잘못되면 논의가 엉뚱한 데로 가는 거다.

 

조선시대 문집을 읽어보면 뉴튼 이상으로 뭔가 알았던 분이 더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상당히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근데 이를 명사로 나타내지는 못한다. 그러니 발전이 없다. 일본에도 300년 전에 이미 근대적인 사고를 한 지식인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문장으로 기술하면 실패다.

 

뉴튼이 단어로 압축하여 말했기 때문에 혁명이 일어났다. 근대를 열어젖힌 것이다. 단어가 개념을 잡아줬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가? FTA.. 이런 이야기 나오면 지식인은 팩트로 도피하는 비겁함을 보인다. 항상 그렇듯이 사기꾼은 팩트로 속인다. 부분은 맞는데 전체적인 방향이 틀리고 마는게 3류 지식인의 ‘팩트로의 도피’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 소크라테스가 말한 ‘무지의 지’는 소피스트들을 비판하기 위해 생각해낸 개념이다. 그들 소피스트들은 ‘아는게 없다’고 소크라테스는 주장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필자는 이 시대의 지식인들이 ‘아는게 없다’고 말한다. 사실이지 그들은 도무지 아는게 없다.

 

아는 사람은 단어로 말할 것을 문장으로 말하거나, 혹은 문장으로 말할 것을 단어로 말하지 않는다. 아는 사람은 팩트로 도망치는 수법으로 전체의 규모와 방향에 대한 판단을 흐려놓지 않는다.

 

이 시대의 무지한 먹물 소피스트들을 비판하자는 거다. 뭔가? ‘참새가 날았다.’ 어떤 사람이 이런 지식을 말했다고 치자. 이건 지식이 아니다. 팩트는 결코 지식이 아니다. 소피스트들의 잡소리일 뿐이다.

 

또 어떤 사람이 ‘장미꽃이 피었다’고 말했다고 치자. 이건 팩트다. 팩트는 지식이 아니다. 이건 그냥 헛소리일 뿐이다. 무지의 지! 아는게 없다는걸 인정하라. 너희가 구조를 아느냐? 모른다. 구조를 모르면 무지다.

 

그렇다면 뭐가 지식인가? ‘참새가 날면 장미가 핀다.’ 이게 지식이다. 지식은 반드시 ‘A면 B다’의 구조를 가져야 한다. 내부에 구조가 없으면 무지다. 소크라테스는 이것을 깨닫고 무지한 소피스트들을 비판한 것이다.

 

◎ 참새가 난다-지식아님
◎ 장미가 핀다-지식아님

 

◎ 참새가 날면 장미가 핀다-지식맞음

 

문제는 이러한 지식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이다. ‘참새가 날면 장미가 핀다’는 문장을 다시 한 단어로 압축해야 한다. 참새와 장미 사이에는 대칭의 축이 존재하며 그 축의 작동을 명사로 나타내야 진짜다.

 

‘참새가 난다’는 명사가 아니므로 지식이 아니며, ‘참새가 날면 장미가 핀다’는 내부에 명사로 압축할 수 있는 구조가 있으므로 상당히 지식에 근접하고 있으나 확실히 명사로 압축하지 못했으므로 여전히 부족하다.

 

문과출신들은 단어만 주워섬긴다. 그 단어는 참새 아니면 장미다. 참새가 어떻구 장미가 어떻구 이거 지식 아니다. 헛소리다. 노동자를 탄압하고, 재벌이 착취하고 뭐가 어쩌구 저쩌구 주워섬기기는 지식 아니다.

 

이과출신들은 문장으로 말할 뿐 개념을 압축할 줄 모른다. ‘참새가 날면 장미가 핀다’ 이건 상당히 지식이지만 뉴튼의 만유인력처럼 한 단어로 압축해서 나타내야 제대로 개념을 잡아주고 보편성을 획득하게 된다.

 

탈레스가 ‘만유는 물로 되어 있다’고 말했다면 이게 하나의 문장인데, 문장으로 진술하면 멍청한 이야기다. 딱봐도 세상이 물로 되었을 리가 없잖은가? 말이나 되나? 단어로 말하면 탈레스의 핵심은 일원론이다.

 

‘세상은 하나의 원인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한 줄에 꿰어서 일관되게 설명되어야 한다’고 그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다. 탈레스는 다분히 이과출신이었다. 그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현명했으나 부족했다.

 

니체가 ‘권력의지’ 한 단어로 말했지만, 여기에는 메커니즘이 숨어 있다. 이 말은 ‘주도와 종속’ 곧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상호작용’이 세상을 이해하는 근원의 키워드라는 의미가 있다. 그런데 니체는 문과였다.

 

문장으로 풀어줘야 할 것을 그러지 못하고 무슨 선문답 하듯이 알듯모를듯한 단어로 숨어버린 것이다. 권력의지란 ‘인간의 삶에 동기를 부여하는 원천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그것은 구조론의 기승전결 전개에서 탑 포지션을 차지하려는 사회적 경쟁행동’이라고 말한 것이다.

 

인간은 탑 포지션을 차지할 수 있다면 목숨을 쉽게 걸어버리는 존재다. ‘자네는 영웅이 될 수 있어!’ 하고 장군이 어깨를 툭툭 쳐주면 당장 폭탄 들고 적의 토치카로 달려드는 존재가 인간이다. 인간은 무모하다.

 

부부가 결혼을 하는 것도 실은 가족구조 안에서 탑 포지션을 차지하려는 경쟁행동에 따른 것이며, 사장이 회사를 꾸려가는 것도, 산적이 두목이 되려는 것도, 작가가 작품을 쓰려는 것도, 가수가 노래하는 것도 알고 보면 구조론의 ‘질, 입자, 힘, 운동, 량’ 중에서 질의 포지션을 차지하려는 것이다.

 

탑 포지션을 차지하면 다음에 이어지는 기승전결의 전개는 일사천리로 일어나고 그 안에 에너지의 결이 있으며, 그것은 에너지의 빠른 길을 가는 원리, 곧 효율성 원리다. 이것이 존재를 추동하는 근원의 힘이다.

 

세상을 작동시키는 근원의 엔진, 인간 존재의 삶을 추동하는 근원의 엔진이 바로 그것이다. 공자는 ‘인의’가 탑 포지션이라 했고, 노자는 ‘도(道)’가 탑 포지션이라 했고, 석가는 ‘열반’이 탑 포지션이라 했고, 소크라테스는 ‘지(知)’가 탑 포지션이라 했고, 예수는 ‘사랑’이 탑 포지션이라고 말했지만, 어쨌거나 탑 포지션의 차지가 인생의 정답이다.

 

니체는 지(知)와, 도(道)와, 인의와, 열반과, 사랑의 공통분모를 권력의지 한 단어로 압축하여 낸 것이다. 결론은 문과는 문장으로 풀어 말할줄 모르고, 이과는 단어로 압축하여 말할줄 모른다는 거다. 지식인의 병폐다.

 

왜 지식인의 말은 항상 틀릴까? 며칠 전에 썼지만 10여년 전 한국에서 한창 중국붐이 일었을 때의 한겨레 주장을 돌이켜 보자. 과연 한겨레에 지식인이 한 명도 없어서 그들의 말이 모두 오판으로 된 것일까?

 

왜 한겨레는 오판을 저질렀을까? 만약 그때 한겨레가 오판을 아니했다면 어떻게 될까? 그때 한겨레가 ‘우리 모두 중국으로 달려가서 대박을 맞으세!’ 하고 황당한 사설을 써야만 했던 것일까? 이건 아니다.

 

한겨레는 운명적으로 그 포지션을 잡은 것이다. 필자가 전에 쓴, ‘나쁜 길로 가라’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누군가 본보기로 오판해 주어야만 제대로 방향을 잡아 돌아가는 시스템을 쓰고 있고 그게 민주주의다.

 

단 판구조가 작은 바닥에서 이 방법은 매우 위험하다. 큰 바닥에서는 앞서가는 자의 오류가 상호작용의 밀도를 높여 전체를 이롭게 하지만 좁은 바닥에서는 거꾸로 길목을 막아서 병폐가 된다. 오판은 안 된다.

 

전쟁이 장기전이고 집단이 많을 때는 오판을 잘 하는 인간, 이하늘과 김창렬처럼 헛소리나 하고 다니고 사고나 치고다니는 인간들이 도리어 도움이 된다. 그들 덕분에 집단이 바른 길을 잡아가는 것이다. 소수자의 허튼소리가 다수를 이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겨레 같은 헛소리팀이 있어야 한다.

 

자신이 잔소리꾼 포지션에 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잔소리를 하더라도 해야 한다. 비판을 위한 비판도 좋다. 그러나 자신이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있어야 한다.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라.

 

무엇인가? 지식인은 사회적 발언 그 자체가 발언의 진짜 목적이다. 안건이 있어서 발언하는 것이 아니라, 할 말이 있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직업이 사회적 발언이므로 그냥 발언하는 것이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

 

그러므로 계속 발언할 수 있는 포지션을 잡으려고 한다. 그 포지션은 상대의 반응을 끌어낼 수 있는 포지션이다. 그 포지션은 나쁜 길이다. 그 포지션을 잡는 것이 한겨레의 권력의지다. 그 길로 가야 그 동아리 안에서 자신이 탑이 된다.

 

소피스트 지식인은 운명적으로 나쁜 길로 갈 수 밖에 없다. 어쩌면 그것이 3류 지식인의 당연한 사회적 기능이다. 한겨레는 그렇게 사는 것이 맞다. 평생 그러고 살아라. 기로에 섰을 때 맞는 말 하는 거 본 적이 없다.

 

정리하자. 지식인은 지식이 있어도 그것을 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지’도 이것이 문장이다. 알고보면 소크라테스도 이과출신이었던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 이렇게 길게 말하면 실패다.

 

공자의 ‘인의’와 ‘왕도’, 노자의 도(道)와 무위, 석가의 ‘열반’과 ‘인연’, 예수의 ‘사랑’과 ‘구원’처럼 한 단어로 압축해주는 맛이 있어야 한다. 지식인은 언어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나면 알아도 답변을 회피한다.

 

어차피 말해줘봤자 더 헷갈릴 것이니 포기하고 마는 거다. 그게 비겁한 거다. 어차피 혼자 힘으로는 안 되고, 여럿이 힘을 합치려하니 ‘집단은 결정하기 쉬운 것만 결정한다’는 구조론의 의사결정법칙에 묶여서 의사결정을 거꾸로 하게 되고, 노무현 대통령과 같은 결단력있는 지도자 밑으로 숙이고 들어가기는 자존심 상하고 결국 아무 것도 안 된다. 그래서 이 나라에 지식인이 없다.

 

과연 10여년 전 한겨레신문사에 기우에 지나지 않는 ‘중국투자 비판’이 헛짓거리임을 간파한 지식인이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일까? 아니다. 있어도 그들은 침묵했다. 왜? 비겁하니까. 왜? 그 길로 가서는 그 동아리 안에서 탑 포지션을 차지할 수 없으니까. 왜? 권력의지와 맞지 않으니까. 왜? 기승전결의 기에 설 수 없으니까.

 

왜? 진실된 길로 가서도 탑을 유지하기에는 표현력 부족으로 말이 딸리니까. 왜? 문과출신답게 문장으로 풀어야 할 것을 단어로 말해버리는 오류에 빠지니까. ‘자본’이라는 단어를 뱉어버리고 나면, ‘신자유주의’라는 단어 뱉어버리면 그때부터 콱 막혀서 숨이 가빠지고 허둥지둥해서 말이 안 나오니까.

 

자본, 신자유주의 - 문장으로 말해야 할 것을 단어로 말해버리는 소피스트들이 항상 앞세우는 단어. 이 단어 나오면 소통은 끝났다. 탐구는 끝났다. 수구꼴통들 입에서 ‘빨갱이’라는 단어가 나와버린 것과 완전히 같다.

 

참된 지식인이라면 문장으로 풀어서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 국민의 역량을 믿고 일단 판을 흔들어 놓는게 정답이다. 상호작용의 밀도를 높여가면 시장의 결에 의해서 답은 저절로 찾아진다. 이것이 진실이며, 이러한 진실을 용기있게 말하는 사람이 한국에 단 한 명도 없다는게 문제다.

 

인간이 길을 만들면 가짜다. 노자 선생의 무위자연을 써먹어야 한다. 에너지에 발동만 걸어놓고 인간은 빠져주기가 맞다. 에너지가 제 결을 따라 스스로 길을 열어가도록 해야 한다. 상호작용의 밀도를 높이는 거다.

 

왜 그들은 말하지 않을까? 왜 이과들은 단어로 압축해주지 않고, 문과들은 문장으로 풀어주지 않을까? 구조를 모르기 때문이다. 지의 구조를 알아야 지를 말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지를 모르므로 무지다.

 

그들은 축을 공유한 채 맞선 대칭이 세상을 움직여가는 근본임을 모른다. 대칭축을 지배하여 양 날개를 조정하는 제어를 모른다. 제어를 모르니 탑 포지션에서 조정하려 하지 않고 이쪽 아니면 저쪽에 올인한다.

 

도박을 하는 거다. 좌파든 우파든 전부 도박이다. 그들은 자신의 주장이 틀려도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왜? 어차피 저쪽도 도박이니 저쪽도 주사위를 계속 던지면 한 번은 빠다리가 날 것이고, 그때 가서 ‘거 봐! 내 말이 맞았잖어.’ 하고 ‘에헴’하면 되는 거다. 어차피 정치는 자살골 넣기 시합!

 

내가 틀리면 저쪽에 서브권 넘겨주면 되고, 저쪽도 언젠가는 자살골 넣게 되어 있다. 그때 응징하면 된다. 그러므로 바른말을 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 이들도 실은 구조론의 마이너스법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득점보다 상대방의 실점을 유도하기.

 

진짜 아는 사람은 좌든 우든 올인하지 않는다. 중간에서 어물쩡대며 눈치보지도 않는다. 상부구조로 올라가서 축을 장악한 후, 계에 강력한 긴장을 걸어주고 암초를 피해가며 미세조정을 거듭한다. 노무현 대통령처럼.

 

구조를 알아야 한다. 외부에서 에너지를 넣어주면 내부의 대칭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의 세계를 알아야 한다.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고 점차 발전하여 가는 시스템의 세계를 알아야 한다. 세상이 한 방향으로 모두 풀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상부구조가 하부구조를 지배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일의 우선순위를 알아야 한다. 에너지의 결을 알아야 한다. 순서와 방향으로 조직되는 일머리를 알아야 한다. 선방향 후속도, 선공간공격 후시간공격대로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처음 어디서 왔으며, 지금 우리가 어디까지 와 있고, 또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왜 구조를 알아야 하는가? 구조를 모르기 때문이다. 문과는 유식한 척 하면서 현학적인 단어만 계속 주워섬기고 있고, 유명인 이름이나 주워섬기고 있고, 이과는 압축하여 개념을 잡아줄줄을 모르고 길게 문장으로 말해서 가뜩 모르는 사람 더 헷갈리게 하기 때문이다. 구조를 알아야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알고 떠드는지 모르고 떠드는지 일초만에 들킨다. 문장으로 말할 것을 단어로 말하는 자, 단어로 말할 것을 문장으로 말하는 자.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한 거. 스티브 잡스처럼 문과적 소양과 이과적 메커니즘에 두루 통달한 진짜배기는 드물다. 그러나 반드시 광채가 난다.

 

   ###

 

타자는 두어명 남는데 팀에 마무리 투수가 없다. 쓸만한 타자 두 명 내주고 그럭저럭 하는 마무리 투수 한 명 받으면 손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손해보는 트레이드를 안 할 것인가? 트레이드 하면 손해니까 안 한다면 그 놈이 미친 놈이다. 작은 이익에 집착하는 플러스적 사고.

 

무조건 필수 포지션 조합을 갖추는게 중요하다. 전력손실은 아무러나 상관없다. 중요한건 상부구조다. 상부구조가 팀의 자궁이다. 자궁이 갖춰지면 그 다음은 저절로 풀린다. 자궁에서 낳는다. 저절로 신인이 크고, 저절로 후배 올라오고, 저절로 팀워크 갖춰진다. 맞추어야 할 필수 포지션 조합에서 하나가 빵꾸가 나니 자궁이 죽어서 전부 틀어진 거다.

 

지식인의 비겁함은 이때 손해보더라도 마무리 투수 들여올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욕 먹을 각오하고 결단을 내릴 수 있느냐다. 손해보고 마이너스 하는 거다. 그걸 못하니까 비겁한 거다. 그들은 익숙한 역할게임으로 도피한다. 전체의 나아가는 방향성은 무시하고 오직 자기 동아리 안에서 갑을 잡는데만 몰두한다. 비겁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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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이미지 [레벨:3]sunbee7

2011.11.17 (03: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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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게 하는 글입니다.

문장으로 말할 것을 단어로 말하고, 단어로 말할 것을 문장으로 말하여 무지함을 감추려 들지 않았는지.

분명 그런적이 많았을 듯 합니다.

 

늦은 새벽에 좋은 글 새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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