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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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2246 vote 1 2011.08.08 (23:22:04)

 

인간은 존엄한가?

 

팽팽하게 당겨진 활. 겨누어진 총, 조율된 악기. 살짝 건드려도 소리가 난다. 그 반향은 크다.

 

1311889515_1005.jpg <전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반응한다. 그러므로 존엄하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인간은 존엄한 존재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일상적인 삶의 장면들에서 존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하네.’ 하고 다들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영화나 소설에서는 명대사이지만 현실에서는 부자연스럽고 낯 간지러운 거. 그런거 있다. 누구나 독도를 사랑하지만, 이재오가 괜히 울릉도 가서 깝치거나 과거 박찬종이 독도를 전세낸 것처럼 오바했던 것 보면 꽤나 어색하듯이 말이다.

 

그렇다. 한국인들에게 존엄은 어색하고 부자연스럽다.

 

노무현 대통령이 ‘부끄러운줄 알아야지!’ 하고 호통을 치면 감동이 전해오지만, 만약 이명박이 그런 소리 하면 입을 때려주고 싶을 거. 이명박에게는 어색한 거다.

 

존엄이 어색한 이유는 스스로 존엄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하긴 사랑도 어색한 것이어서 옛날에는 춘향전에나 묘사되는 정도였다.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들은 평생 사랑이란 단어를 입 밖에 내지 않고 살았다. 그래서 어색하다.

 

요즘 젊은이들이라면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면서도 쑥스러워 하지 않을거다. 어색하지 않을 거다. 사랑에 익숙한 거다. 마찬가지다. 우리 존엄에 익숙해져야 한다. 우리는 존중받아야 한다. 그럴 자격이 있다.

 

아직도 군대에서 존엄을 유린하는 폭력이 존재하고, 교실에서도 곽노현 교육감이 개혁하기 전에는 폭력이 온존했듯이 한국인은 그다지 존중받지 못하고 살아왔지만 말이다. 부끄러운 과거는 세월따라 흘려보내고 우리는 서로 존중하고 존중받는 법을 배워야 한다.

 

존엄은 21세기의 화두가 되어야 한다. 특히 존중받지 못하고 살아온 한국인들에게는 그렇다. 요즘 정치권에서는 복지가 중요한 의제로 떠오르고 있지만 진짜 복지는 존엄에서 시작된다.

 

국민을 행복하게 해주는게 복지다. 그러나 행복은 성취의 결과다. 성취하면 누구나 행복해진다. 성취는 사랑의 결과다. 사랑해야 성취할 수 있다. 사랑은 자유의 결과다. 자유로워야 사랑할 수 있다. 자유는 존엄의 결과다. 존엄을 얻어야 자유롭다. 존엄을 잃으면 자유도, 사랑도, 성취도, 행복도 실패다.

 

‘존엄≫자유≫사랑≫성취≫행복’의 코스를 밟지 않고, 역주행을 시도하거나 혹은 중간단계를 건너뛰고 복지만을 추구하면 시혜성 복지가 된다. 오른손이 사방에 떠벌리고 왼손에게 주는 복지. 받는 사람은 한대화 감독처럼 공손하게 두 손을 벌리고 받고, 주는 사람은 뻣뻣히 서서 김승연처럼 한 손으로 건네주는 복지, 조선일보식 복지가 된다.(조선일보 요즘 생뚱 복지타령 중.)

 

과연 인간은 존엄한 존재인가? 막연한 구호로는 곤란하다. 존엄의 의미를 철두철미하게 알아채지 않으면 안 된다. ‘자유’라고 간판 내걸고 자유를 억압하는 한나라당 안 되려면 말이다.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70억 인류가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처럼, 정확하게 겨누어진 총처럼, 잘 조율된 악기처럼, 제로백 짧은 슈퍼카처럼 즉각 반응하기 때문이다. 바로 퉁겨져 나가기 때문이다. 황소의 울음처럼 큰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 전부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어야 한다.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는 순간 총알처럼 튕겨져 나가야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과연 반응들은 하고 사는가? 과연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는가? 과연 정신들 바짝 차리고 있는가? 만만하게 보고 우습게 보고 늘어져 있지 않은가?

 

세상이 시끄러운 것을 보면 뭔가 반응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과연 세상이 마땅히 반응할 것에 반응하고 있는가? 공연한 잡음이나 넣고 다니는 것은 아닌가? 다들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손끝은 보고 있는가?

 

연예인 헛소동 따위에는 잘도 반응하지만, 낮은 곳에서의 간절한 목소리에는 잘 반응하지 않는다. 고개를 돌려 외면한다. 양철깡통소리 잘도 내지만 산사의 범종소리 같은, 전쟁터의 북소리 같은 위엄있는 소리는 잘 내지 않는다.

 

반응해야 한다. 중국의 어느 도시 뒷골목에서 사산된 태아를 약재건조기로 쪄서 그것을 가루내어 알약으로 만들어 파는데도 그런가보다 하고 있는 중국인들처럼 맹한 채로 살아서는 안 된다. 무뚝뚝하지 말아야 한다. 즉각 반응해야 한다.

 

바로 신고 들어가야 하고, 체포 들어가야 하고, 징벌 들어가야 한다. 인간의 존엄을 유린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존엄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거다. 한 아기의 시신을 유린하는 것이 모두를 유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첫째 인간이 만든 문명 안에 ‘팽팽하게 당겨져서 전부 연결되는’ 존엄의 속성이 숨어 있기 때문이고, 둘째 인간의 유전자 안에 역시 그러한 존엄의 속성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인류문명은 전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통짜덩어리다. 그리고 반응한다. 인간의 삶도 전부 연결되어 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삶의 일관성을 추구한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 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 살버릇이 여든까지 간다. 왜? 팽팽하게 당겨진 채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응하는 것이다. 유년기에 한 번 울린 종소리는 그 맥놀이가 노년까지 계속 간다. 무덤까지 간다. 맥놀이가 끊이지 않는 에밀레종 소리처럼 계속 이어진다. 인생 전체가 하나의 통짜 덩어리가 된다. 그래서 존엄하다. 하나의 작은 포즈에도 인생 전체의 무게와 밀도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사라예보에서 한 발의 총성이 제 1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왜? 전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팽팽하게 당겨진 채 긴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세계가 반응했기 때문이다. 한 청년 전태일이 한국의 역사를 바꾸었다. 왜? 그렇게 전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이 반응했기 때문이다.

 

오사마 빈 라덴이 가니까 네이비실 요원들의 헬기가 피격당했다. 유시민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나니까 문재인이 두 걸음 앞으로 툭 나왔다. ‘이게 이렇게 되면 저게 저렇게 된다’는 대응논리에 의해 전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전부 연결되어 있을 때, 결이 있고 결따라 급소가 있다. 급소를 치면 소리가 난다. 반응이 일어난다. 팽팽하게 긴장된 곳, 그러므로 정신 바짝 차려야 하는 곳이 있다. 한 사람의 인생에도 그것이 있고 인류 전체의 문명에도 그것이 있다.

 

총알은 반드시 뇌관을 때려야 반응한다. 아무데나 때린다고 총알이 반응하는 것은 아니다. 피리를 거꾸로 불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 깡통은 소리가 나지만 물통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 반드시 결이 있고 결따라 급소가 있다. 갈라지고 모이는 네거리가 있다. 바로 그곳이 급소다. 그곳에서 소리가 난다.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은 인간 안에 그러한 급소가 있고, 결이 있고, 건드리면 소리가 나며 반응하는 지점이 있다는 말이다. 그 인간의 집합인 인간의 공동체, 더 나아가 인류문명 전체에도 그러한 결이 있고, 급소가 있고, 당점이 있고, 리드가 있고, 피크가 있다는 말이다. 공간의 급소가 있고 시간의 타이밍이 있고 둘을 통일하는 존엄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다.

 

진보는 존엄하지만 보수는 존엄하지 않다. 결혼은 존엄하지만 이혼은 존엄하지 않다. 사랑은 존엄하지만 이별은 존엄하지 않다. 식사는 끼니때를 맞춰야 하지만 화장실은 아무 때나 가도 된다. 분명히 차별이 있다.

 

인간은 존엄하다. 그러나 우리 존엄에 익숙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당점이 아닌 곳을 쳐놓고 삑사리가 났다고 투덜대고, 급소가 아닌 데를 쳐놓고 상대가 자빠지지 않는다고 투덜대고, 북채를 거꾸로 잡고 쳐놓고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투덜대고, 줄이 늘어진 기타를 연주해놓고 소리가 좋지 않다고 투덜댄다.

 

존엄에 익숙해져야 한다. 급소를 알아내야 한다. 악기는 조율해야 한다. 야구공은 실밥을 채줘야 한다. 상대가 반응하는 곳에 부드러운 터치를 가해야 한다. 은근살짝 깨물어줘야 한다. 일단 조명부터 조절하고, 좋은 음악이라도 틀어놓고 와인 한 잔을 곁들여서 무드를 잡아놓고 말이다.

 

존엄은 인간이 가치를 창출하는 지점이다. 가치가 아무렇게나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냥 인구를 늘렸다고 그것이 좋은 것일까? 그냥 일을 열심히 한다고 그것이 좋은 것일까? 그냥 그림을 잘 그린다고 그것이 좋은 것일까? 그냥 돈을 많이 번다고 그것이 좋은 것일까? 그냥 노래를 잘 부른다고 그것이 좋은 것일까? 천만에. 그냥 잘 하기만 하면 된다? 아니다.

 

묵묵히 일만하면 된다거나 하는 시대는 지났다. 그저 윤리, 도덕 잘 지키고, 매사에 겸손하고, 항상 근면하고, 늘 성실하게 살다가 기러기아빠 되고 황혼이혼 당하는게 요즘 세상이다. 21세기는 존엄의 시대이다. 다르다.

 

존엄은.. 사랑하지만 속정이 싶을 뿐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를 끝끝내 안 하는 경상도 남자의 철지난 쌍팔년도 레파토리와 다르다. 그런 따위는 시대에 뒤쳐진 꼴통들 푸념에 불과하다.

 

나팔은 크지만 소리를 내는 리드는 작고 나머지는 그저 울림통에 불과하다. 리드는 얇은 갈대잎이다. 지극히 작은 0.1프로가 기능하고 나머지 99.9프로는 보조할 뿐이다. 다이아몬드가 빛이 난다지만 99프로는 빛을 모으고 1프로만 빛을 내보낸다. 많이 모아서 아주 작은 지점으로 내보내므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찢어진 북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 깨진 나팔은 엿장수에게 줘야 한다. 리드 없는 악기는 쓸모가 없다. 전부 팽팽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정신차리고 긴장되어 있어야 한다.

 

단지 노래만 잘하면 된다거나, 단지 그림만 잘그리면 된다거나, 단지 솜씨만 좋으면 된다거나, 단지 돈만 잘벌면 된다거나, 단지 1등만 하면 된다거나 하는 기능주의는 존엄을 해친다. 그것은 찢어진 북이요 깨진 나팔이다. 도무지 소리가 안 난다. 반응하지 않는다. 가짜다. 짝퉁이다.

 

존엄의 시대에 사막을 건너오지 않으면 진짜가 아니다. 기능주의는 존엄주의 반대편 대척점에 서 있다. 뭔가를 위하여 기능하는 소모품이 아니라 자체발광하는, 내 안에 드라마를 갖춘, 그러므로 존엄한 진짜배기라야 한다.

 

모든 가치의 창출은 오직 짝짓기에 의해 얻어진다. 그 외에는 전혀 없다. 짝짓기가 늘어진 피아노 줄을 팽팽하게 긴장시키기 때문이다. 짝짓기의 순간이 가장 취약한 급소이기 때문이다. 총과 총알의 짝짓기에 의해 총은 발사되고 피크와 현의 짝짓기에 의해 악기는 연주되고 종과 당목의 짝짓기에 의해 범종은 울려진다.

 

존엄은 짝짓기를 할 수 있는 조건이다. 짝짓기 하려면 두 가지를 갖추어져야 한다. 첫째는 존(尊)이다. 존은 무리 중에서 우뚝하여 드러나 보이는 것이다. 재주가 있는데 감추어져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면 존이 없는 것이며 따라서 짝짓기는 실패로 돌아간다. 코갓탤의 최성봉이 방송출연 기회를 잡지 못했다면? 존을 얻지 못한 것이다. 송곳처럼 튀어나와야 기회를 잡는다.

 

인간이 불행한 이유는 하나다.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누구든 기회를 얻는다면 성취할 수 있다. 기회가 주어져야 하며 그 기회는 만남의 기회이다. 만나야 할 사람이 만날 수 있도록 사회가 세팅되어야 한다.

 

엄(嚴)은 짝짓기에 방해되는 주변의 잡스러운 것을 물리치는 것이다. 여자친구를 사귀려 하는데 그쪽 집안 식구들이 사돈의 팔촌까지 나서서 ‘이 결혼 반댈세’ 하고 떠들어댄다면 애초에 실패다. 심플해져야 한다.

 

세상의 모든 미는 심플함에서 나온다. 잡다한 미도 물론 있지만 그 잡다함 속에도 잘 찾아보면 모종의 심플함이 숨어 있다. 그저 잡다하기만 해서는 결코 미가 될 수 없다. 짝을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짝을 지을 수 없으면 범종이 당목을 만나지 못하고, 북이 북채를 만나지 못하고, 찐빵이 앙꼬를 만나지 못하고, 활이 화살을 만나지 못하고, 총이 총알을 만나지 못해서 실패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결대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방해자들이 있는지 보자. 학연, 혈연, 지연 하고 주워섬기는 것들이 다 방해자들이다. 온갖 사회의 편견, 차별, 줄세우기 따위가 다 방해자들이다. 궁물 노리고 공연히 따라다니는 조중동들 사방에 널려있다.

 

짝짓기의 법칙은 거리가 멀수록 좋다는 거다. 화장실과 사돈집은 멀어야 한다. 현실은 어떤가? 지식의 근친상간이 난무한다. 같은 서울대 출신과 서울대 출신이 짝지어 참된 가치가 창출되는 일은 결단코 없다.

 

상고 나온 노무현 대통령과, 서울대 나온 유시민과, 특전사 갔다온 문재인이 짝지어져야 의미가 있다. 거리가 멀기 때문에 에너지의 낙차가 큰 것이다. 거리가 먼 동과 서가 손을 잡아야 의미가 있다. 각자 독립하고 서로 대등한 채로 서로의 존엄을 인정하면서.

 

같은 대구경북끼리, 같은 소망교회끼리, 같은 고대출신끼리, 같은 강남귀족끼리 마른 논에 올챙이처럼 오골오골 몰려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존엄이란 거리가 먼, 마주칠 기회가 없는, 서로 토대를 공유할 수 없는, 그래서 꼭 만나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만나지 못하는, 그러므로 서로를 간절히 필요로 하는 사람을 찾아내서, 그리고 마침내 사막을 건너와서 서로 만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만나야 할 사람이 만나지 못하게 장벽을 쌓는 것은 나쁘고, 만나야 할 사람이 만날 수 있도록 길을 터주고 중매를 서주는 것은 좋다. 그 만남의 순간에 공연히 끼어들어 잡음넣는 일 없도록 하는 것이 존엄이다.

 

비슷한 것끼리 떼로 몰려있으면 존엄하지 않다. 거지가 존엄하지 않은 이유는 떼거지를 이루기 때문이다. 간디는 거의 거지였지만 그의 가난한 서재에서는 언제나 홀로였고, 책을 일곱권 밖에 팔지 못한 소로우 역시 월든 호숫가에서 거지에 가까웠지만 홀로였고, 그림을 한 점 밖에 팔지 못한 고흐 역시 고갱을 잃고 홀로되었고, 석가모니 역시 직업이 거지였지만 홀로 있었기 때문에 존엄한 것이다.

 

만나고자 하는 사람이 찾아가서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재벌회장처럼 주변에 이상한 것들이 잔뜩 둘러싸서 병풍을 치고 있으면 만나고자 해도 만날 수 없다. 그것은 존엄하지 않다. 잡된 것이다. 쓰레기다.

 

돼지가 존엄하지 않은 이유는 돼지우리에 떼로 몰려있기 때문이다. 개가 존엄하지 않은 이유는 들판에서 아무 개나 야합하여 붙어먹기 때문이다. 만나야 할 개끼리 만나지 않고 거리의 아무 똥개라도 짝짓기 때문이다.

 

인간이 진정 만나야 할 사람은 1/60억이다. 60억 분의 1을 찾지 않고 길바닥에서 아무나 만나므로 존엄하지 않다.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기 위해 사막을 터벅터벅 걸어서 건너오지 않았으므로 존엄하지 않다.

 

한국이 존엄한 이유는 유럽의 여러나라들과 달리 수십여개국 속에 묻혀있지 않고 송곳처럼 바깥으로 삐져나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러미일이라는 세계 4강 사이의 팽팽한 긴장 속에 끼어있기 때문이다. 악기의 리드처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급소를 이루고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예전부터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서구문명이 미국과 일본을 거쳐 중국, 인도로 상륙하는 지금이 마침 그렇다.

 

결이 있다. 결이 뻗어서 마침 도달한 것이다. 급소가 있다. 급소가 움직여 마침 도달한 것이다. 단 한번 뽀뽀를 할 수 있을 뿐이라면 어디에다 뽀뽀를 할 것인가? 가장 반응이 큰 곳이 있다. 그곳이 먼저 만나야 가장 넓은 면적이 뒤따라 접촉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

 

존엄은 급소다. 급소는 산의 정상처럼 뾰족한 곳이다. 그냥 존엄한 것이 아니라 메커니즘이 있는 것이다. 에너지의 입력부터 출력까지 작동하는 메커니즘 안에 결이 있고, 흐름이 있고, 급소가 있고, 방아쇠가 있고, 승부처가 있고, 타이밍이 있고 그 결정적인 시간과 공간의 지점에서 우리는 작게 입술 대 입술로 만나지만 반응이 크게 일어나서 마침내 신을 만난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뭐뭐만 하면 돼!’ 하는 기능주의에 빠져 있다. 고시만 붙으면 끝. 시집만 잘 가면 끝. 조기유학만 갔다오면 끝. 서울대만 붙으면 끝. 노래만 잘 부르면 끝. 돈만 많으면 끝.. 이런 식으로는 졸을 면치 못한다. 존엄을 얻을 수 없다. 참된 가치는 다른 것을 위하여 기능하는데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는 이용되고 팽된다. 1회용으로 버려진다.

 

사막을 건너오지 않으면 안 된다. 참된 짝짓기를 성공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안 된다. 1/60억이 아니면 안 된다. 결따라 가지 않으면 안 된다. 팽팽하게 긴장되지 않으면 안 된다. 소리가 나지 않으면 안 된다. 기승전결의 기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내 안에 이야기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방아쇠다.

 

타이밍과 승부처와 급소의 3위일체가 아니면 안 된다. 존하고 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너는 누구냐?’ 하는 질문에 우렁찬 대답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유행가 가락에 흘러나오는 사랑과 진짜 사랑은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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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1.08.09 (10:21:11)

제가 이 글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막연히 존엄하다고 말은 하면서도 속으로는 '조까~' 하는 보통사람들의 냉소적인 사고를 버리고 존엄의 의미를 제대로 알자는 것이오.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 아이를 죽이면서(낙태든 다른 어떤 이유든) "내 아기 내가 죽이는데 니가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면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이 고통을 느끼오.

 

고통을 느끼는 이유는 전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느끼므로 존엄한 것이지,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고 태연히 그 아기를 죽이는 사이코패스는 존엄하지 않습니다.

 

다이아몬드가 다이아몬드인 이유는 무대에서 열창하는 프리마돈나의 가슴에 조명이 포커스를 맞출 때 모든 관객의 시선을 그리로 모아주기 때문이지 강남졸부 복부인 아줌마의 가슴에 붙은 다이아몬드는 그저 돌멩이에 불과합니다.

 

존엄한 장면에서 존엄한 것입니다. 시시한 장면에서는 인간도 그저 벌레와 다름 없습니다.

 

급소가 있고, 결이 있고, 흐름이 있고, 진보가 있고, 예술이 있고, 가치가 있는 것이며 그 존엄의 길을 따를 때 존엄한 것이고한 편으로는 누구나 무의식적으로 인류의 그 길을 따르고 있는 것이며

 

그러면서도 가끔 나타나는 역주행하는 또라이들이 있는 것이며 그 역주행은 존엄하지 않습니다. 그런 또라이 쇄끼들은 분리수거가 정답입니다.

 

존엄할 때 존엄한 것이며 대접해줄 때 대접받아야 합니다. 인간으로 대접해주는데 딴전을 피우고 뻘소리를 하면 귀싸대기 맞습니다.

 

한 송이 국화는 꽃을 피울 때 존엄한 것이고 꽃을 피우지 않았는데도 존엄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애시당초 꽃을 피울 생각이 없는 곁가지들은 전지가위로 잘라주는게 정답입니다.

 

진보가 존엄한 것이며 보수는 존엄하지 않습니다. 예술이 존엄한 것이며 수전노는 존엄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가능성은 존엄하지만 그 인간의 행동은 존엄할 때만 존엄합니다.

 

진보는 세계의 진보가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존엄한 것이며 보수는 중국의 공산당 보수와 한국의 친일보수가 딴판이므로 존엄하지 않습니다.

 

막연히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은 안 맞습니다. 좋은 다이아몬드도 발가락 여사에게 가면 똥입니다.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가 있어야 좋은 것이며 마땅히 할 일을 해야 좋은 것입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1.08.09 (10:47:19)

 

사진을 보니 서로 엇나가게 돌을 놓았는데...사람이 발을 놓는 위치를 감안한 듯..

그러다보니 돌다리 길이 쭈욱 이어져 길이 보이오.

가운데 작은 돌들이 놓여 있는 것 같은 착시... 사람이 지나가며 밟은 자리들... 그대로 가는 길을 보여주오.

돌 다리는 놓는 것은 생각을 해서 놓는 것이지만, 사람이 발걸음을 떼어 걸어가는 것은 저절로 저런 길을 만들게 되는 것.

사람의 보폭을 잘 이해한 징검다리...

사람이 가는 길을 생각한 존엄한 징검다리....

프로필 이미지 [레벨:1]id: 느닷없이느닷없이

2011.08.09 (20:22:01)

적재적소의 급소에 적절한 건드림... 마치 애무의 정석과도 그 맥이 통하는 것 같습니다!

[레벨:11]벼랑

2011.08.21 (12:30:41)

많이공감합니다 개인적으로 불교를 공부하고있는데 붓다의 천상천하유아독존을 아주 잘 풀어낸 것 같습니다 불교쪽 학자나 스님들은 인간의 존엄성 문제를 거의 접근하지 못하고있는데 이 글은 단연 최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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