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이란
read 3690 vote 0 2002.09.09 (15:04:42)

비밀의 화원


[일대사건]

명상이 신과의 대화라면 수행은 신과 친구되기다. 친구가 아니고서는 진정으로 대화할수 없다. 신과의 관계를 주인과 노예의 낮은 관계에서 친구 대 친구의 높은 관계로 비약시키므로서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

신과 친구되기 앞서 자기와 친구가 되어야 하고, 자기의 주인인 사회와 친구가 되어야 하고, 사회의 주인인 자연과 친구가 되어야 하고, 자연의 주인인 진리와 친구가 되어야 한다. 그 다음에 모든 것의 주인인 신과 친구가 된다.

영적 체험에서 인식의 비약에 이르는 수행의 단계들은 이어져 하나의 전체를 이루니 一大事件이다. 한 단계를 지나 차츰 다음 단계로 나아감이 아니라 미끄러지듯 빨려든다. 합죽선을 펼쳐보임과 같다. 수행의 각 단계는 부채의 마딧살 같아 차례로 펼치지만 한꺼번에 왈칵 달려들 듯 한다.

(수행단계) (영적 상승) (인식영역) (길항원리) (피드백)
영적 체험 - 자신과 친구되기 - 현상의 지각 - 소유/상실 - 권태
체험의 공유 - 사회와 친구되기 - 작용의 수용 - 지배/소외 - 환멸
의식의 표백 - 자연과 친구되기 - 구조의 분석 - 성취/고독 - 표백
의식의 각성 - 진리와 친구되기 - 개별자의 종합 - 사랑/상심 - 무심
인식의 비약 - 신과 소통하기 - 보편자의 응용 - 행복/일탈 - 지평

내면의 뜰에 비밀의 화원이 있다. 닫힌 문을 열어제치면 해방이다. 그 자기 안의 부처를 가꾸지 않고서는 그 정원의 참된 주인일 수 없다. 수행은 정원을 잘 일구어 가지마다 꽃피워내므로서 진정한 주인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해방은 독립선언이요 자유는 주인선언이다.

요는 체험이다. 수행은 직접체험이어야 한다. 하나를 거듭함은 체험이기 때문이다. 관념은 반복할 이유가 없다. 체험은 굳이 하나하나 겪어보아야 한다. 두뇌 각 부분은 영역을 고루 나누고 있어 그 모든 부분을 자극하여 일깨워야 한다.

해방 그 자기자신과 친구하기로 부터 자유 그 신과 친구되기까지 수행은 하나의 긴 여행이며 일대사건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뜻한다. 사건에 휘말려들 듯 사태는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선택과 판단의 영역을 벗어나 있다.

영적체험에서 영혼을 발견하고 체험의 공유에서 영혼따라 길을 나서고, 의식의 표백에서 영혼의 허상을 보고, 의식의 각성에서 영혼의 실상을 보고, 인식의 비약에서 신에게 빌린 것을 되돌려 준다.

[영혼이란 무엇인가?]

마음의 존재를 아는 것은 감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기쁨과 슬픔, 그 신체감정의 흐름을 보고 자기에게 마음이 있음을 안다. 그렇다면 정신은 무엇으로 아는가? 정신과 마음은 다르다. 정신의 존재를 느끼는 것은 이성이 그 마음을 억제하고 진작할수 있음을 아알기 때문이다.

정신은 머리에 있고 마음은 가슴에 있다. 정신은 마음을 통제하고 억누르며 진작하고 고양한다. 정신은 마음보다 위에 있다. 그렇다면 얼은? 魂은? 靈은? 靈魂은? 다르다. 얼은 정신도 마음도 아닌 더 높은 곳에 있다.

영적 체험은 얼의 존재를 깨닫기다. 靈은 정신도 마음도 아니다. 마음은 감정으로서 알고 정신은 감정의 제어로서 아는데 얼은 무엇으로 아는가? 마음은 가슴에 있고 정신은 두뇌에 있는데 얼은 어디에 있는가? 특별한 체험으로서 밖에 알수 없는 그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동양적으로 말하면 精氣라 한다. 精은 죽으면 神이 되고 氣는 鬼가 되니 합하여 鬼神이다. 귀는 부산하여 흩어져 없어지고 신은 하늘나라로 간다. 정은 액체의 성질을 따르고 신은 기체의 성질을 가진다. 정은 기가 모여 鬱血이 된 것이고 기는 정이 약해져서 흩어진 것이다.

프로이드식으로 말하면 마음은 자아로서 에고이며 정신은 초자아로서 슈퍼에고다. 이드나 리비도는 정신의 길항작용을 의미한다. 마음의 심층복합영역 25구성요소 마다 의식의 흐름에서 yes/no를 결정하는 기능이 있다. yes의 拮에서 의식은 흐르고 no의 抗에서 피드백한다. 프로이드는 길항작용에 따른 피드백원리를 이해하지 못하였으므로 이드나 리비도라는 가상의 것을 지어낸 것이다.

그렇다면 얼은? 프로이드의 분류법은 적절하지 않다. 동양의 정기 혹은 귀신도 뚜렷한 근거가 없다. 적합하지 않은 이론체계에 기초하고 있다. 수행은 영혼의 긍정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런데 영혼은 없다. 그러나 무언가 있다. 있되 거기에 없고 다른데 있다. 있는 것은 소통이다.

[영혼의 의미]

영혼의 의미는 인간의 존엄성을 담보하는 절대적이고 고유한 가치가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인간에게 영혼은 없다. 인간은 결코 바퀴벌레나 소, 말보다 더 나은 존재일수 없다. 인간에겐 결코 고유한 자성이 없다.

모든 것은 부정된다. 영혼도 없고 가치도 없고 존엄도 없다. 인간은 돌멩이나 흙보다 더 우월한 존재가 아니다. 도덕도 윤리도 사회도 문명도 그 어떤 고상한 가치도 사막의 신기루 같은 것이다.

인간은 비참한 존재이다. 고로 구원되어야 한다. 구원은 신으로부터 존엄을 빌리는 것이다. 영혼은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 없고 신에게 있다. 영은 있다. 그러나 고유하지 않고 상대적인 관계로 있다.

고립된 인간은 바퀴벌레보다 더 나은 존재일수 없다. 인간의 인격성은 신으로부터 빌어온 가치다. 그것은 배달이다. 인간은 신으로부터 가치를 배달받아 신의 창조작품인 역사와 문명에 배달하는 집배원같은 존재이다.

가치배달은 인류의 사명이다. 그 사명을 수행한다는 전제로 인간의 가치는 성립한다. 모든 것은 다시 긍정된다. 인간은 절대적으로 가치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존엄한 존재이며 목적적 존재이다. 구원은 있다.

진정한 가치는 한 개인에게 고유하지 않고 인류전체, 사회전체, 역사전체, 문명전체로만 성립한다. 영혼이라는 불멸의 에너지덩어리가 가진 질량의 무게로 평가되는 가치가 아니라 신 앞에서 자기 맡은 바 역할을 다하는 상대적 가치다.

[라디오와 방송국]

영혼은 죽어도 죽지않는 불멸의 에너지덩어리 같다. 불교에서는 동물의 영혼을 인정하고 기독교에서는 인간만 인정한다. 영혼은 질량 비슷한 것을 가지며 삿된 수행법에서는 그 영혼의 질량을 높여가는 것이 수행이라고 말한다.

영혼은 없다. 있다해도 가치없다. 생물이 무생물에 없는 특별한 것을 가질수 없으며 동물이 식물보다,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할 수는 없다. 신 앞에서 모든 피조물은 동일하다. 의미는 관계로서만 성립한다.

영혼의 불멸성은 내세나 천국을 긍정하기 위한 기초이다. 그러나 배달의 관점에서 보면 한 인간이 죽고 다른 인간이 태어나는 것과 내가 죽어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라디오에 비유할수 있다. 라디오를 발견한 미개인은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듣고 라디오 속에 꼬마요정이 산다고 믿는다. 영혼이 있다고 믿는다. 꼬마요정은 없다. 고유한 불멸의 에너지덩어리는 없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없는가? 아니다. 있다. 있되 거기 있지 않고 방송국에 있다.

정신이 라디오이면 마음은 스피커를 통해 울려퍼지는 소리들이다. 영혼은 아나운서다. 아나운서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라디오 속을 아무리 뜯어보아도 꼬마요정은 보이지 않는다. 아나운서는 신의 방송국에 있다.

영혼은 신에게 있다. 인간에게는 신의 음성을 전달받는 성질이 있다. 인간에게는 神聖性이 있다. 그것은 靈이다. 인간에겐 영은 반쪽짜리다. 신의 주파수에 채널을 맞출 때 공명한다. 비로소 완전해진다. 신과 하나가 된다. 梵我一如다.

영적 체험은 우연히 그 라디오가 켜지는 것이다. 체험의 공유는 라디오소리에 귀기울이기다. 의식의 표백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인 꼬마요정이 라디오 속 어디에도 없음을 확인하기다. 의식의 각성은 아나운서를 발견하기다. 인식의 비약은 그 아나운서가 신의 방송국에 있음을 알기다.

수행은 미개인이 라디오를 발견하고 그 목소리의 주인인 꼬마요정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꼬마요정은 없다. 신의 방송국에 주파수를 맞출 때 신의 목소리를 듣는다. 인간에게는 고유한 에너지덩어리로서의 영혼을 가진 것이 아니라 신과 소통할수 있는 성질로서의 영성을 가지고 있다.

[내면의 부처]

개에게도 인간에게도 영혼은 없다. 그러나 무언가 있다. 인간에게는 아주 특별한 것이 있다. 홀로 기능하지 않고 외부와의 교감에 의해서만 작동한다. 그것은 잠들어 있으며 일깨워야 한다. 최초에는 신이 먼저 인간에게 인사한다.

내면의 부처이다. 닫힌 비밀의 화원을 발견하고 문을 열게 된다. 다섯 친구를 발견하게 된다. 모두와 친구가 되어야 한다. 진실로 사귀었을 때 깨달은 것이다. 소통할수 있다. 대화할수 있다. 하나가 될 수 있다.

신이 잠든 인간의 부처를 일깨운다. 정신이 하드웨어라면 마음은 소프트웨어다. 그 컴퓨터는 누가 켜는가? 컴퓨터는 입력된 프로그램을 따라 스스로 작동하지만 최초에 단 한번 누군가 켜주어야 한다. 최초에 밖에서의 어떤 힘이 미치어 컴퓨터를 켜주는 것이 영적 체험이다.

마음은 연기다. 정신은 배우다. 처음에는 멋도 모르고 연기한다. 나중에는 제법 알고 연기한다. 영적 체험은 배우로서의 자기발견이며 체험의 공유는 동료배우들을 발견하기며 의식의 표백은 무대를 발견하기며 의식의 각성은 대본을 발견하기며 인식의 비약은 연출자인 신을 발견하기다.

삿된 수행법들은 영혼이라는 본질을 놓치고 있다. 수행은 직접체험이다. 위빠사나처럼 관하거나 화두참구법으로 골똘히 생각하거나 하는 것은 관념적 접근이다. 깨달음은 한순간에 폭풍처럼 강타한다. 골똘히 살피거나 집중하여 살피거나 한다면 시간이 걸린다. 참되지 않다.

깨달음에 1초가 더 걸릴수는 없다. 라디오를 켜는 즉시 소리가 난다. 점차적으로 라디오를 켜가는 일은 있을수 없다. 위빠사나의 어디에도 영혼의 개념, 신의 개념이 없다. 체널러들은 시리우스 별자리의 외계인과 소통한다고 한다. 신은 그냥 준다. 한꺼번에 전부 준다. 오로지 받을 준비가 되었는가만 중요하다.

[영적 체험]

영적 체험은 영혼의 발견이다. 영혼은 없다. 고로 영혼을 발견할수는 없다. 그것은 하나의 체험일 뿐이다. 발견되어야 할 것은 신이다. 영혼을 발견하였으나 흔적을 보았을 뿐 실상을 본 것은 아니다.

죽음의 체험이다. 죽음은 거대한 상실이다. 인간은 소유하므로서 자기존재를 정당화하지만 죽음으로서 완벽하게 부정된다. 이때 자기 외부의 모든 단서에 흥미를 잃고 마음은 내면을 향하며 귀납적 사고를 끝막고 연역적 사고로 유턴한다.

권태다. 일체의 가치에 흥미를 잃어버린다. 소유, 지배, 성취, 사랑, 행복은 이슬같은 것이다. 식욕을 잃고 삶을 잃고 모든 것을 잃는다. 깨닫고자 하는 희망이 남아있다면 권태가 아니다.

영적 체험은 자아의 발견이지만 피드백의 길항원리에 따라 동시에 자아의 완벽한 상실이다. 자기를 살해하므로서 천하를 버리고 그래도 여전히 남는 것은 자기자신 뿐이다. 완전히 자기를 버렸을 때 진정한 자기와 친구가 될 수 있다.

자아(ego)는 나라고 여겨지는 모든 것이다. 내몸, 내마음, 내가족, 내나라, 내지위, 내를 이루는 모든 것이다. 그 모든 나의 주인인 자아를 완벽하게 살해했을 때 그래도 살해되지 않는 것은 내 뿐이다.

나의 모든 것을 잃었으므로 권태다. 그 어떤 것도 흥미롭지 않다. 깨달음도 명상도 흥미로울수 없다. 명상과 수행은 저절로 되는 것이지 의도하여 되는 것이 아니다. 먼저 나를 살해하므로서 모든 것을 초극하라.

[체험의 공유]

체험의 공유는 영적체험의 일반화과정이다. 여기서 모든 행동, 모든 실천, 모든 움직임, 모든 변화를 끊는다. 모든 변화하는 것은 타인과의 접촉을 통해 사회화하는 과정이며 그것은 역사의 진보 문명의 발전으로 성립한다.

모든 행동은 타자에 대한 지배와 간섭, 개입의 형태로 성립한다. 체험의 공유는 거대한 소외이다. 일체의 실천에 대한 완벽한 환멸이다. 꼼짝할수 없다. 가담할수 없다. 개입할수 없다. 생각할수도 없다.

모든 변화, 모든 운동, 모든 행동, 모든 개입, 모든 간섭, 모든 간여를 완벽하게 끊었을 때 무엇이 남는가? 자기로부터 완벽하게 분리된 사회가 남는다. 환멸의 끝에서 자기와 사회는 1 대 1의 대등한 관계로서 다시만나게 된다.

영적 체험이 자기를 살해하므로서 진정한 자기와 친구되는 것이듯 체험의 공유는 궁극적 환멸을 통하여 사회를 완전히 떠남으로서 사회와 참된 친구로 다시 만나는 것이다. 완전한 소외가 대등한 관계를 이끌어낸다.

인간은 어떠한 형태로든 사회에 개입해 있다. 이미 지배종속관계가 성립해 있다. 이 상태에서는 절대로 사회와 대등한 관계가 될 수 없다. 근원적 환멸은 사회로부터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이다. 절대소외다.

위대한 역사의 진보, 영광된 문명의 건설을 최후에 긍정하게 되기 위해서는 내가 이 사회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철저한 객관화과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만약 내가 무언가를 눈꼽만큼이라도 바란다면 그 순간 지배종속관계가 되어 사회의 적이 된다. 모든 것을 버림으로서 모든 것을 얻는다. 환멸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사회를 위하여, 국가를 위하여, 타인을 위하여 라며 '위하여'를 발표한다면 그는 사회의 적이다. 참된 것은 '위하여'가 아니라 '의하여'이다. 일체의 희망과 야심을 말소하지 아니하고서는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없다.

[의식의 표백]

모든 것을 지워버리기다. 추억과 기억과 습관과 의식과 이미지들을 지우개로 지워버리듯이 타자와 접촉할수 있는 모든 촉수를 지워버린다. 눈을 감고 감각을 감고 마음을 감고 의식을 차단하고 일체의 접촉을 끊는다.

이제 진정한 혼자가 된다. 절대고독에서 의식의 표백이다. 자기를 살해하고 사회를 살해하였거든 이제 자연까지도 살해하라. 물을 보고 물을 떠났거든 그 흐름까지도 떠나야 한다. 자연스러운 흐름까지 끊어버리면 고독이다.

상실로 밖으로 내민 촉수를 끊고 환멸로 안으로 내민 촉수를 끊고 고독으로서 가만이 있어도 스스로 다가오는 것 까지 끊어버리다. 상실이 집으로 돌아옴이면 환멸은 식구들을 불러들이기며 고독은 안으로 문을 걸어잠그기다.

밖에서 뉘 부르는 소리 있어도 귀를 막고 듣지 않기다. 위대한 반전은 여기서 일어난다. 내면의 울림과 떨림을 향하여 활짝 열어제치기다. 마음이 닫히고 정신이 닫힐 때 영이 깨어난다. 새로운 시작이다.

'위하여'의 세계에서 '의하여'의 세계로의 거대한 전복이다. 타자에 간섭하고 개입하고 접촉하는 세계를 떠나 내면의 울림과 떨림만을 받아들이는 세계이다. 그 어떠한 이유도 이유가 되지 않는다. 절대고독에서 모든 일은 남의 일이다.

아무런 이유 있을수 없는 절대맹목에서 새로운 하늘과 땅이 열린다. 자연과 친구가 된다. 완전히 고독한 자 만이 순수한 친구가 될 수있다. 자기를 버리고 희망을 버리고 추억까지도 없이했을 때 순수하게 꽃 그 자체를 사랑할수 있다.

꽃이 내게 주는 이익, 내가 꽃에게 주는 것을 완벽하게 떠나 꽃이 꽃 그 자체임을 인정할 때 꽃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그 자체를 사랑하게 된다. 꽃의 아름다움을 사랑한다면 이미 침투하고 투사한 지배종속관계다. 그것이 꽃이 아닌 것이 아니고 꽃이라는 그 자체를 순수하게 받아들일수 있다.

[의식의 각성]

모든 것을 깨부셔도 결코 부숴지지 않는 하나가 남는다. 진리다. 마음이 동작을 멈출 때 진리가 동작한다. 무심이다. 모든 것은 자기 내부에 완벽하게 갖추어 있다. 밖의 것을 끊었을 때 안의 것이 드러난다.

위를 쳐다보는 '위하여'의 귀납세계를 종식할 때 아래를 보는 '의하여'의 연역세계가 문을 연다. 온전히 내면의 울림과 떨림 만으로 하나의 하늘이 되고 하나의 땅이 되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다.

절대무심에서 일체의 법을 살해할 때 하나의 진리가 드러난다. 신과의 체널링이며 진리와 공명하기다. 밖으로 내민 마음의 촉수로 생각하지 않으며 안으로 내민 정신의 촉수로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절대상심에서 초극이면 내면의 영이 눈을 뜨고 진리의 화엄세계를 펼쳐보인다.

그것은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구경하는 것이다. 고민도 번뇌도 사색도 생각도 아니다. 대상을 염두에 두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끊고 염두도 없애버릴 때 절로 실상이 떠오르는 것이다.

사유, 사색, 생각, 위빠사나의 관, 화두참구는 대개 무언가 대상을 두고 퍼즐맞추듯 짜맞추어보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실상의 세계는 이미 갖춘 것을 호주머니에서 구슬꺼내듯이 그저 집어낼 뿐이다.

[인식의 비약]

수행은 여기서 끝난다. 자기내부에 생각의 공장을 가지고 일체의 외부단서 없이 주문대로 배당한다. 마음도 정신도 손을 놓고 온전히 시스템만으로 작동한다. 신이 인간을 창조할 때 그 창조원리의 백프로를 인간안에 넣어두었다.

인간이 외부의 단서로 사유하므로서 자기안의 부처를 활용하지 못한다. 신의 방송국에 주파수를 맞출 때 내면의 부처가 눈뜨게 되며 전혀 다른 형태의 인식과 사유체계를 획득하게 된다.

신의 입장에서 보며 신의 관점에서 판단하고 신의 경지에서 말한다. 인간은 결코 신이 될 수 없지만 신은 얼마든지 인간이 될 수 있다. 내면의 부처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것은 거대한 일탈이며 새로운 지평이다.
이러한 과정은 점진적으로 한 단계씩 쌓아가는 것이 아니라 한순간에 일어난다. 수행은 직접체험이므로 이 과정을 반복하므로서 점점 분명해지고 점점 근접도를 높여가는 것이다. 오늘은 영적체험을 수행하고 내일은 체험의 공유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다섯단계는 동시에 순서대로 작동한다.

수행의 반복은 숙련일 뿐이며 최초에 인사하였을 때 이미 완성된 것이다. 새로운 것을 더욱 찾아낸 것이 아니라 이미 갖춘 것을 분명히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고로 수행은 한순간에 끝나는 것이며 동시에 영원히 반복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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