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이란
read 5278 vote 0 2003.07.14 (18:10:00)

깨달음으로 가는 바른 길과 삿된 길
깨달음이란 본래 쉬운 것이다. 석가의 제자 500비구 중에 깨닫지 못한 사람은 없다. 육조 혜능의 제자들도 빠짐없이 깨닫고 있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깨달음이 터무니 없이 어려운 일로 되어 있다. 감히 『내 깨달았소』 하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 이는 잘못된 것이다.

진리의 속성은 보편성이다. 보편성이란 막힘없이 두루 통하는 이치이다. 한 사람이 깨달을 수 있다면 만사람이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진리의 보편성이다. 역으로 모두가 깨달을 수 없다면 그것은 결코 참된 깨달음이 아니다.

진입장벽은 무너져야 한다. 문턱은 낮추어져야 한다. 깨달음이 특정 소수의 전유물이 되어서 안된다. 관념의 유희에 머물러서 안된다. 대중화되고 일반화되어야 한다. 독점의 폐습은 고쳐져야 한다.  

무엇이 삿된 길인가?
● 현학으로 도피하지 말아야 한다.(이론가들)
● 춤추고 놀지 말아야 한다.(라즈니쉬류)
● 외계인과 통신하지 말아야 한다.(신비주의자들)
● 계급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단학선원류)
● 응수하지 말아야 한다.(숭산스님식 말대꾸놀이)
● 머리에 힘 주지 말아야 한다.(주화입마의 폐단)

무엇이 옳은 길인?
● 대중화(누구나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 철학화(종교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
● 과학화(환원과 재현을 통해 검증되어야 한다)
● 미학화(조선조 선비들의 고결한 경지와 같아야 한다)

깨달음은 극적인 긴장을 넘어선 궁극의 상태이다
깨달음은 『인식의 비약』이다. 깨달음을 일종의 『퇴행』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다. 요즘 말로는 『폐인』이다. 깨달은 사람이 때로는 이른바 무애행을 할 수 있다는 것과, 인간이 보통 그렇게 하고 다닌다는 것은 다르다.

도달하려는 바 평상심이란 것이 릴렉스(relax)한 상태나 나이브(naive)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믿는다면 착각이다. 깨달음은 초극이다. 극에 도달하고 극점을 넘어서서 그 다음의 경지이다.

명상합네하는 사람들과 접촉을 가져본 일이 있다. 많이 실망이다. 대개 외계인과 통신하고 있었고 주술사도 많았고, 체력단련자도 흔했고, 번역업자나 여행알선업자도 많았다. 대개 사이비였다. 진짜는 없다시피 하다.  

깨달음의 바른 길들

● 대중화로 가야한다. - 대승의 배에서 모두가 사공일 필요는 없다. 진리는 큰 배와 같아서 누구나 태울 수 있다. 누구나 그 배의 선장이 될 수 있지만 모두가 그 배의 선장이 될 필요는 없다. 깨달음의 본질은 『소통』에 있다. 그 배의 선장과 의사소통이 가능한 즉 깨달은 것이다.

● 철학화로 가야한다. - 깨달음이 특정 종교의 독점물이 될 수는 없다. 유교의 선비들이 도달하려한 경지도, 도교에서 가르치는 이상적인 상태도 궁극적으로는 깨달음이다. 기독교에도 명상이 있고 깨달음이 있다. 이는 모든 종교, 철학, 사상 그리고 원시사회의 샤머니즘에 까지 크게 공통된 바 된다.  

깨달음은 하나의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개념이다. 깨달아서 부처가 된다거나 혹은 신통력을 발휘한다거나 하는 식의 접근은 특정 종교의 입장으로서 맹랑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까놓고 말해서 그런 따위는 없다.

● 과학화로 가야한다 - 과학의 의의는 환원과 재현을 통한 검증에 있다. 스승이 한 것을 제자가 동일하게 재현할 수 있어야 한다. 스승이 시범한 것을 제자가 재현하지 못한다면 진짜가 아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계급이 없어야 하고 단절이 없어야 하고 벽이 없어야 한다.

과학의 세계에서는 언제나 제자가 스승을 넘어선다. 스승이 남긴 토대에 제자가 뼈를 세우고, 그 다음의 제자가 살을 채우는 식으로 인류의 거대한 공동작업이 이루어진다. 진실하다면 언제나 청출어남이어야 한다.

● 미학화로 가야한다. - 미학은 내적인 자기완결성과 논리적인 자기일관성을 의미한다. 곧 완전함이다. 깨달음은 완전한 인격을 의미하며, 완전한 인격은 완전한 소통을 의미한다. 예컨대 조선조 선비들이 도달하려 했던 정신의 지고한 경지 역시 인격적인 완전함을 의미한다.

하나의 계급은 하나의 의사소통그룹이다. 깨달음은 그 계급과 종교와 문화권의 벽을 넘어서 누구와도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완전한 소통은 은폐됨이 없는 완전한 노출에 의해 가능하다. 완전한 노출은 이를테면 산의 정상과도 같은 완전한 극점에서 가능하다. 이는 미학적인 견지에서 하나의 일관된 논리, 외부세계에 의존함이 없는 내적인 자기완결성, 전일적인 삶의 형태를 의미한다.

여러 삿된 길들
깨달음의 본질은 소통에 있다. 여러 삿된 길들의 공통점은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소그룹을 만들고 다단계의 진입장벽을 설치하므로서 널리 소통됨을 방해한다는데 있다. 이는 깨달음의 본질에 반하는 태도이다.

● 현학으로 도피하지 말아야 한다. - 이론적인 측면은 깨달음 그 자체의 본질과는 별개이다. 깨달음은 수학의 발견 그 자체이지 난해한 수학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을 지나치게 어려운 문제로 만들려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진입장벽을 만들어 독점하려는 태도이다.

● 춤추고 놀지 말아야 한다. - 깨달음은 정신의 릴렉스(relax)한 상태나 나이브(naive)한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깨달음은 문제를 뛰어넘는 것이지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그 자리에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새처럼 날아오르는 것이다.

라즈니쉬류의 놀이들은 특정한 장소와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거기에는 특정한 장소를 소유하고 이를 제한적으로 공급하므로서 집금하려는 상업적인 기도가 감추어져 있다. 이는 변형된 부동산사업의 일종일 수 있다.

● 외계인과 통신하지 말아야 한다. - 근자의 유행하고 있는 일로 외계인과 통신한다는 자들이 많다. 심령이나 비행접시니, 최면술이니, 초자연현상이니, 귀신이니, 이런 것들과 명상을 관련지으려는 시도에는 대개 상업적인 기도가 은폐되어 있다.

그들은 대개 무언가를 판매하기 위한 목적으로 허상을 지어내는 것이다. 그들은 가상의 무언가를 설정하고 그 내부에 체계를 부여하는 방법으로 정보를 가공하고 생산하며 그 정보의 공개를 제한하는 방법으로 부가가치를 창출하려 든다.

● 계급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 - 깨달음은 돈오돈수이다. 조금씩 나아간다는 따위는 없다. 한 순간에 도달하지 못하면 영원히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스승이니 제자니 하는 구분은 필요하지 않으며 선각이니 후학이니, 사형이니, 사제니 하는 잡다한 피라밋조직이 필요하지 않다.

이런 따위들은 대개 조직이나 집단을 만듦에 있어 교주의 비밀을 대중에게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의도가 은폐되어 있다. 사이비집단이 교주와 신도 사이를 차단하는 방법으로 교단의 비밀유지를 정당화하기 위해 중간조직이 동원되는 것이다.

● 응수하지 말아야 한다. - 선문답을 말대꾸놀이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기이한 넌센스퀴즈를 내고 맞춰보라는 식이다. 상대를 이겨보겠다는 일체의 응수는 깨달음과 거리가 있다. 선문답의 이해는 단지 가짜를 가려내는 데 소용될 뿐 그것만으로 진정한 것에 도달할 수는 없다.

● 머리에 힘 주지 말아야 한다. - 어떤 육체적인 신비체험을 경험하고 그것을 깨달음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지나치게 머리에 힘을 주어서 생긴 정신착란의 일종이다. 간화선을 한다며 온종일 머리에 힘주고 앉아있는 식은 참된 명상이 아니다. 건강을 해칠 뿐이다.

인간의 목적은 상승에 있다.
인간의 목적은 하나다. 그것은 상승이다. 사회적인 신분의 상승일수도 있고 다른 형태의 것일수도 있다. 『깨달음』이라는 개념의 유효성은 그 상승의 일반화에 있다. 즉 모두가 단번에 상승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회에서 그러한 상승은 자격증을 획득한다든가 돈을 번다든가, 결혼을 한다든가, 혹은 귀족들의 사교계에 초대장을 받는다는 것으로 이루어지며 이는 극소수의 행운아들을 제외하고는 도달이 불가능한 어려운 목표이다.

종교는 손쉽게 그러한 상승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게 한다. 종교단체가 제안하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되는 즉 일체의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예컨대 외국인이거나, 피부색이 다르거나, 신체적인 장애를 가진 사람도 종교집단 안에서는 평등한 대접을 받는 것이 보통이다.

깨달음의 본질은 그러한 상승이 사회적인 틀에서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인간 내부에서 먼저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즉 돈을 벌거나, 결혼을 하거나, 자격증을 취득하거나, 공동체에 소속되지 않고도 개인의 내면에서 그러한 상승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사회에서 신분상승을 통하여 도달하려고 하는 일체의 가치들은 특정한 『의사소통그룹』에 참여하는 형태로 되어 있으며, 그 소통의 본질을 꿰뚫으므로서 사회에서 신분상승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가치들을, 그러한 신분상승과정을 생략하고 곧바로 도달하려는 것이 깨달음의 목적인 것이다.  

삿된 길은 깨달음에도 자격증이 필요하고, 깨달음에도 출세의 계단이 있고, 깨달음에도 공동체의 소속이 필요하고, 깨달음에도 십일조가 필요하고, 깨달음에도 스승의 인가가 필요하다는 식이다. 이는 소통을 차단하는 사회의 폐습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깨달음의 본질을 훼손하는 바 된다.

깨달음의 목적은 인격적 완전성에 있다
개는 깨달아서 완전한 개가 될 수 있다. 결코 개가 깨달아서 인간이 되거나 부처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화가는 깨달아서 완전한 그림을 그릴 수 있고 음악가는 깨달아서 완전한 음악을 연주할 수 있고, 목수는 깨달아서 완전한 건물을 지을 수 있다.

인간은 깨달아서 완전한 인격, 완전한 소통의 완전한 삶에 도달할 있다. 깨달음이 도달하는 것은 미학적인 견지에서의 완전함이며, 이는 곧 내적인 자기완결성이다. 즉 인간이 주변환경의 여러 제약에서 벗어나 정신적으로 완전한 독립을 이루고, 그 주변의 환경과 완전한 소통을 실현하는 것이다.

깨달음의 목적은 이심전심의 소통에 있다. 소통의 일차적인 벽은 언어이다. 그러므로 깨달음의 목적은 언어를 넘어서는 데 있다. 소통의 벽은 또 문화와 종교, 피부색, 성별, 계급 그리고 이외의 여러 가지 환경적인 제약들로 존재하고 있다. 깨달음의 목적은 그 소통의 벽들을 넘어서는데 있다. 이것이 본질이다.

깨달음으로 얻는 것은 소통이다. 소통을 위해서는 그 소통의 대상과 수평적인 위치에서 마주설 수 있어야 한다. 대등한 위치에서 마주서기 위해서는 환경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이 필요하다. 그리고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소통하기 위해서는 일체의 은폐에서 벗어나 완전한 노출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초극이다.

결론적으로 너와 나 사이에 대화가 되는가이다. 삶에 있어서 어느 선까지 수평적인 공유가 가능한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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