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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4052 vote 0 2003.01.26 (22:25:34)

조갑제의 나라, 송복의 나라, 조중동의 나라가 전부는 아니다

70년대 한국의 대학교수들은 지식혐오주의자였던 박정희의 박해에 쫓겨 자의반 타의반으로 미국에 이민을 가야했다. 한국에서 잘나가는 대학교수가 미국에서 얻을 수 있는 직업은 음식점의 접시닦이가 유일하였다.

독일로 건너간 광부와 간호사들도 상당수는 이미 독일어를 습득하고 있던 엘리트 지식인들이었다. 진짜 노동자는 몇 안되었고 정부에서도 한국의 이미지를 좋게 한다니 혹은 민간외교사절이라니 하며 은근히 지식인들을 물색하여 보내었다.

일생동안 찬물에 손한번 안담가본 지식인들이 노동자로 신분을 위장하고 독일행 비행기를 탔다. 그들이 탄광에서 곡괭이를 휘두르며, 혹은 병원에서 환자들의 뒤치닦거리를 하며 그 심정이 어땠을지 알만하다. 생각하면 고려시대 몽고로 끌려간 이른바 『환향녀』와 본질에서 다르지 않을 것이다.

미국에서 접시닦이가 된 한국의 대학교수들

두 개의 한국이 있다. 하나는 박정희세대라 할 5060의 한국인이고, 하나는 민주화세대라 할 2030의 한국이다. 불행하게도 박노자가 발견한 한국은 군사문화에 쩔은 5060의 한국이었다. 그가 본 한국은 『여전히 폭력이 충만한 나라』였다.

한국의 지식인들이 음식점에서 접시닦이를 하며 미국의 최하층문화와 접촉해야했듯이 모스크바 국립대학을 나온 몽골의 지식인 '바트 자갈'은 동대문에서 러시아 보따리장수들의 삐끼노릇을 해야했다. 박노자가 접한 한국은 그러한 최악의 밑바닥 한국이었다.

부인할 수 없다. 박노자의 지적대로이다. 조갑제의 나라, 송복의 나라, 조.중.동의 나라는 박노자의 지적이 딱 맞아떨어지는 바로 그런 나라이다. 문제는 정작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읽어야 할 조갑제는, 송복은, 조.중.동은 아마 그 책을 읽지 않을 것이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또다른 한국이 있다. 월드컵 4강의 한국이 있고 촛불시위의 한국이 있다. 5060이 전부는 아니다. 2030의 한국은 분명히 다르다. 또 달라야만 한다. 아니면 지금부터 라도 달라지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타자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하는 한국인들

심리학자 이브러엄 매슬로우(Abraham Maslow)는 인간의 욕망을 5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생존의 단계(Physiological), 두 번째는 안전의 단계(Safety), 그 다음은 사회적 성공의 단계(Social), 네 번째는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으려는 단계(Esteem), 마지막 다섯 번째가 자기 실현의 단계(Self-Actualisation)이다.

인간의 욕구가 생존본능에서 자기실현에 이르기까지 단계적으로 목표를 높여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가 발전하고 여유가 있을수록 더 높은 단계의 가치를 추구하기 마련이다. 개인의 욕망에 다섯 단계가 있다면 국가의 목표에도 5단계가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의 목표는 어느 단계에 와 있을까?

■ 국가발전목표의 5단계

1. 생존투쟁단계 - 자주독립을 추구한다.
2. 안전투쟁단계 - 국가안보에 전념한다.
3. 성공경쟁단계 - 경제발전에 집착한다.
4. 인정투쟁단계 - 신분상승을 지향한다.
5. 자기실현단계 - 삶의 질을 추구한다.  

지금 한국은 네 번째 단계에 와 있다고 본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대체로 볼 때 한국인들의 생활방식은 신분상승을 이루어서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박찬호선수가 높은 연봉을 받았다거나, 혹은 이형택선수가 요코하마 챌린저대회에서 우승했다거나 이런 일이 있으면 방송국의 카메라는 득달같이 그의 고향으로 달려가서 가족들의 환호하는 모습을 비쳐준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텔레비젼 앞에 옹기종기 앉아서 입을 헤벌리고 『개천에서 용났네』하는 심정으로 부러워들 하고 있다. 이것이 한국의 자화상이다.

한국에서는 스포츠가 순수한 스포츠가 아니라 스포츠 이상의 무언가이다. 다른 분야에서의 성공도 마찬가지다. 설날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다들 하나씩 훈장이라도 달고 삐까번쩍한 중형차라도 몰고 고향으로 달려가서 가족들 앞에서 으시대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모양이다.
 
한국에서 과잉된 월드컵 열기나, 노벨상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일종의 타인으로부터 자기 위치를 확인받고자 하는 인정투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최근의 반미시위도 미국의 전쟁책동을 반대한다는 적극적 의미이기 보다는, 한국을 얕잡아보고 무시한데 대해 항의하겠다는 소극적 의미에서의 인정투쟁의 의미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부인할 수 없다. 여전히 한국은 그런 나라이다. 박노자가 한국의 이런 꼴을 보고 이렇게 한마디 던져주고 싶었을 것이다.

『야! 너희들 왜 그렇게 사니?』

부끄럽지만 한국의 현실이 그러하다. 어쩔 것인가?

지금 한국은 대한민국 대 대한민국의 투쟁 중

박노자의 눈에 보인 한국은 국가안보에 집착하는 5060의 제 2단계 안전투쟁(Safety)의 단계와 경제발전에 집착하는 4050의 제 3단계 성공지상주의(Social)단계였다. 그렇다면 3040은 타자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인정투쟁단계(Esteem)에 와 있고 이제 막 얼굴을 내미는 2030은 자기실현의 단계(Self-Actualisation)에 해당된다.

이러한 구분이 딱 맞아떨어질리야 없겠지만 대체로 이러한 역사의 흐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올해부터 주 5일 근무제가 시작되면 우리도 삶의 질을 추구하게 된다. 삶의 질을 추구하는 것이 곧 자기실현의 단계이다.

박노자가 가 보았다는 노르웨이나 스웨덴은 이미 제 5단계에 와 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은 워낙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다 보니 2,3,4,5단계가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다고 볼 수 있다. 멕시코 국경을 넘어온 불법이민자들은 1단계에 와 있을 것이고 눈 부릅뜨고 강도들로부터 채소가게를 지키는 한국인들은 제 2단계이거나 아니면 제 3단계일 것이다.

16세기 서구가 마녀사냥의 혼란에 빠져있을 때, 중국은 이미 수준높은 문화를 꽃피우고 있었다. 서구가 1단계나 2단계에 와 있을 때 어느 면에서 중국은 이미 5단계의 삶의 질을 추구했던 것이다. 박노자가 관심을 가졌다는 불교나 유교나 도교의 가치들은 어느 면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근대화 이후 새로운 가치기준이 제시되자 한국인은 다시 제 1단계의 생존투쟁으로 퇴행하고 말았다.  

당신은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텔레비젼이 없어서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한동안 방송사들 사이에 외국인 불러다놓고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쪽팔리는 질문을 던지는 일이 유행이었다. 몇 년 전에는 좀 발전된 버전으로 업그레이드되었는데 뭣인가 하면 외국인에게 강제로 고추장이나 김치를 먹인다든가 혹은 시골에 데려다가 힘든 노동을 시키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어떤 아줌마가 아바이순대를 독일까지 들고가서 『이게 바로 전설의 한국형 소시지』라며 독일인들 입에 강제로 멕인 일도 있었다.

방송사들이 카메라를 들이대면 파란 눈의 색목인들은 『한국이 좋아요』『코리아 넘버원』하며 천편일률적인 대답을 늘어놓곤 한다. 그들은 물론 한국인들에게 좋은 충고를 해주어봤자 득될거 없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는 현명한 사람들이다. 타자의 시선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암튼 박노자는 한국인이 되었다. 박노자의 시선은 상대적으로 공정하고 객관적인 것이다. 그는 한국인들에게 가슴 저릿한 충고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가 박노자의 충고를 받아들이는데 주저할 이유는 없다. 문제는 대안이다. 박노자는 충고할 수 있을 뿐 대안을 제시할 수 없다. 그는 여전히 한국의 많은 부분을 보지 못했고 한국인을 속속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답은 지금부터 우리가 제시해야 한다.

샘물소리 높은 바위 틈에서 흐느끼고

박노자가 쓴 『당신들의 대한민국』의 첫 꼭지는 『샘물소리 높은 바위 틈에서 흐느끼고, 햇빛이 푸른 솔에 차갑기만 한 (泉聲咽危石, 日色冷靑松)』으로 시작하고 있다. 아하! 그는 한국에서 이상향 샹그릴라를 찾은 것이다.

그가 외웠다는 부운(浮雲)이니, 고봉(孤蓬)이니 공담(空潭)이니 하는 당시(唐詩) 나부랭이는 말하자면 무릉도원(武陵桃源)이다. 그는 조용한 은자의 나라 한국에서 전설의 무릉도원을 발견하기를 기대한 것이다.

박노자가 한국에 와서 발견한 것은 수준높은 삶의 질을 구가하는 무릉도원이 아니라 전근대였다. 유감스럽게도 그의 눈에 맨 먼저 띈 것은 박정희의 망령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군사문화와 폭력문화를 보았다.

사실이지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여전히 삶은 즐기는 것이 아니라 생존이다. 변해야 한다. 한국인들은 이제 더 이상 경제성장에 집착할 이유가 없다. 변할 때도 되었다. 요는 지금 한국에서 문제되고 있는 사항들은 세계 어느나라나 한번쯤은 앓고 지나가는 홍역이라는 점이다.  

치유되어야 할 한국인의 집단적 외상

박노자가 지적하고 있는 한국의 우경화는 한마디로 식민지콤플렉스다. 식민지의 경험과 625의 전쟁이 한국인들에게 집단적 외상을 입힌 것이다. 그렇다면 치유되어야 한다. 어떤 방법으로 치유할 것인가이다.

정신질환자에게 『당신 미쳤수!』 하고 알려주어서 치료되는 경우는 잘 없다. 콤플렉스를 극복하는데는 칭찬보다 좋은 방법이 없다. 정신적 외상을 극복하는 방법은 따끔한 충고가 아니라 따뜻한 격려이다. 그러므로 지금 한국인에게는 칭찬이 필요하다. 월드컵 4강의 경험과 촛불시위와 인터넷정치 성공의 자신감은 한국인들이 비로소 정신적 외상을 극복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나는 항변하고 싶다. 이 나라는 박정희의 나라가 아니라 전태일의 나라라고.

덧글 ..
이 글은 박노자의 주장에 대한 반론이 아닙니다. 그냥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박노자를 언급하는 이유는 그가 유명하기 때문이지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어쨌든 박노자 덕분에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되었으니 박노자에게 감사해야겠죠. 양해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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