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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선생께 들려주고 싶은 한국인 이야기
지승호님의 박노자선생 인터뷰에 별 생각없이 쪽글을 달았다가(열줄만 쓰려고 했는데 쓰고보니 30줄이 되었음) 독자들의 이의를 접하고 좀 더 깊이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저는 박노자선생을 비판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박노자선생의 의견 중에서 틀린 부분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물론 많은 부분에서 박노자와 저는 생각이 다르지만, 존중해야할 다양성 안에서 역할의 차이로 봅니다. 쪽글을 단 이유는 『박노자 하면 또 화끈하겠구만! 독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아니나다를까 역시 화끈하더군요. 그렇다면 한번 더 우려먹을 밖에요.

박노자든, 김용옥이든, 진중권이든 그 이름만으로도 팔리는 상품입니다. 많은 논쟁거리와 시사점을 던져주지요. 그것이 네티즌들이 갑론을박으로 일용할 양식이 되는 것이구요. 하여간 배우는게 남는 건데 강준만의 100프로 동의할만한 옳은 말에서 배우는 것 보다, 진중권, 김용옥, 박노자로부터 70프로 밖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배우는 점이 더 많습니다.

사실 저는 지금 박노자선생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박노자의 인기에 편승하여, 또는 박노자의 이름을 빌어, 저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굳이 박노자와 연관성을 짓자면 『박노자선생께 들려 주고 싶은 한국인 이야기』 정도가 되겠습니다.

한국인, 일본인, 미국인 무엇이 문제인가?
미국 인디언사회는 여전히 비참하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런지는 모릅니다. 제가 미국에 안가봤으니까요. 하긴 노무현도 안가본 나라가 미국 아닙니까? 미국에 거주하시는 분들은 제가 주제넘게 아는 척 하더라도 너무 타박은 마십시오. 어쨌든 제가 듣기로는 미국 인디언 사회는 백인사회에 비해서 상당히 낙후되었다고 합니다.

왜인가? 교육을 못 받아서? 백인들의 착취가 심해서? 인디언은 원래 어디 한군데가 모자라는 인종이어서? 아니라고 봅니다. 인디언이 가난한 이유는 역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역사가 없으면 자부심이 없고, 자부심이 없으면 성취동기를 발견하지 못하며, 동기유발이 안되면 노력하지 않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입니다.

역사, 민족, 정체성, 자부심, 전통 이런 단어들은 쇼비니즘적인 사고로 몰아붙여 쓰레기통에 던져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인생을 덜 살은 분이라고 감히 말하겠습니다. 이것이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박노자의 글을 읽으면 말은 구구절절이 옳은데도 『이거 아닌데..』 하는 거부감을 느끼곤 합니다. 박노자는 외국인의 시선으로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도 모르는 많은 부분들이 박노자의 눈에는 보이는거죠. 그 점 박노자선생께 고마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박노자가 절대로 보지 못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박노자가 모르는 부분은 한국인의 정(情)과 한(恨)입니다. 정이니 한이니 하면 독자여러분들은『또 케케묵은 소리 하는구나』 하겠지만 이것이 결코 간단하게 보아 넘겨도 될 일은 아닙니다. 무엇인가? 동기유발입니다. 제가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모두 '동기유발'에 관한 것입니다.

정(情)은 공동체 정서, 한(恨)은 역설적 의미에서의 권력의지다.
정(情)은 한국인 특유의 가족주의 내지 공동체정서입니다. 한(恨)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식민지 콤플렉스입니다. 세계 어느나라를 가도 정 없고, 한 없는 민족은 없습니다. 정과 한이 유독 한국인만의 정서라고 여긴다면 착각입니다. 문제는 한국인의 정과 한이 가지는 특수성입니다. 예컨대 프랑스나 영국이나 미국의 정이나 한과, 한국인의 정과 한은 다른 종류의 것입니다. 이건 민족문화의 특수성입니다.

지금 한국이 우경화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 정과 한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정과 한을 버려야만 한국이 진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박노자는 냉정하게 한국인의 우경화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한국인들이 박노자의 가르침을 받고도 양말 벗듯이 쉽게 정과 한을 벗어버릴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박노자의 말은 옳은데 실천은 어렵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박노자는 한국인의 단점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지, 그 참된 원인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유의미한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합니다. 그 정과 한이 모자를 벗듯이, 혹은 신발을 벗듯이 간단히 벗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박노자의 충고를 받고도 실천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콤플렉스는 발전의 에네르기다.
모두에 말한 인디언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인디언 사회가 왜 낙후되었을까요? 인디언 뿐 아니라 아프리카나, 남미나, 에스키모나 공통적으로 이러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디언의 낙후와 한국인의 정과 한 사이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느냐구요?

한국인의 한은 식민지 콤플렉스입니다. 일본의 한은 이차대전 패전 콤플렉스입니다. 이 한(恨)들이 일본과 한국을 우경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이 패전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진보하기는 어렵습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식민지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한국은 진보하기 어렵습니다.

인디언사회는 백인사회에 속해 있습니다.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해 있기 때문에 일본 콤플렉스를 긍정적인 에너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일본에 대한 열등감이 한국의 발전에 긍정적으로 기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디언은 미국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열등감이 성취동기가 되지 않고 오히려 자포자기와 허무주의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독립, 민족, 자주, 정체성, 이런 단어들을 우습게 생각해서 안됩니다. 이것이 공동체의 동기유발입니다. 역설적으로는 권력의지입니다. 한(恨)이 클수록 권력의지가 큰 것입니다. 인디언이 미국으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국가를 가지고 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발전했을 것으로 저는 믿습니다. 즉 한국이 여전히 일본의 식민지로 있다면 한국인들은 인디언처럼 비참해졌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설사 어떤 인디언이 출세하여 권력을 잡았다 하더라도 그 권력이 인디언사회의 권력이 아닌 이상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인디언은 인디언공동체 안에서 우쭐하고 싶은데, 미국이라는 국가가 인정하는 권력은 인디언 사회 안에서는 작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축소지향의 일본인? 천만에!
한국인에게 콤플렉스가 있다면 일본에게도 미국에게도 같은 원리의 문제가 있습니다. 저는 어떤 의미에서 한국과 일본과 미국이 공통적으로 병자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문제가 있어요. 한국은 식민지 콤플렉스가 문제고 일본은 패전 콤플렉스가 문제고 미국은 열등감은 아니지만 본질에서 이와 비슷한 문제가 있습니다.

대신 프랑스나 영국 등 승전과 패전을 거듭했던 나라들이나, 강대국 사이에 끼여서 곡예를 해야했든 북유럽의 소국들은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겨도 보고 져도 봤기 때문에, 시행착오로부터 교훈을 얻어 제 길을 잡은 것입니다.

일본의 병은 이어령교수가 지적한 예가 있습니다. 『축소지향의 일본인』입니다.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마세요. 일본인이 축소지향을 해서 작은 전자제품을 잘 만든다는 생각은 한마디로 얼빠진 소리입니다. 상식적으로 그게 말이나 됩니까?

작은 물건을 만드는 축소지향이 아니고, 일본인의 주된 관심사가 일본 내부를 지향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먼로독트린 이후 미국인은 미국 내부의 문제에만 관심을 가지는 미국식 축소지향이 있습니다. 미국이 축소지향을 할 때 곧 미국인의 권력의지를 미국 내부를 향해 투사할 때 세계는 조용했고, 반대로 미국의 권력의지를 미국 외부를 향하여 투사할 때 세계는 시끄러워졌습니다.

사실을 말하면 축소지향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은 표현입니다. 권력의지의 내부지향이 적당한 표현입니다. 미국인들이 세계인의 축제인 월드컵에 무관심하고 자기들끼리 미식축구나 프로야구에만 열을 올리는 식입니다. 전통적으로 민주당이 더 내부지향이고 공화당이 더 외부지향입니다. 근데 요즘은 민주당과 공화당노선이 섞여버려서 이 경향이 크게 두드러지지는 않습니다.

민주당이 개입주의, 공화당이 고립주의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부시의 정책은 분명히 전통적인 공화당의 개입주의 노선에 충실한 것입니다. 세계가 어떻게 되든 신경쓰지 말고 미국 국내문제만 신경쓰자는 쪽이 전통적으로는 민주당노선입니다. 클린턴의 슈퍼301조도 뿌리를 더듬어가면 200년전 먼로주의의 발상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축소지향과 확대지향 혹은 권력의지의 내부지향과 외부지향은 세계 어느나라나 다 있어요. 다만 섬나라는 격리, 고립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경향이 더 노골적으로 잘 관찰되는 거지요. 미국과 일본이 권력의지의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다는 뜻입니다. 한국에도 물론 있습니다. 경상도 전라도 따지는 지역감정 이런건 내부지향적 권력의지입니다. 학벌, 인맥, 연고주의 이것도 내부지향입니다.

권력의지의 인류학적 리트머스 시험지 인디언사회
왜 인디언인가? 인디언사회가 발달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이런 권력의지의 내부지향이 극단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대다수 인디언들의 관심사가 인디언 부족 내부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범위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발전이 안되는 거에요.

문제는 만약 어떤 인디언이 외부지향 즉 인디언부족사회를 벗어나 인류와 세계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을 때, 인디언사회와 완전히 결별해버린다는 점입니다. 이 점은 흑인사회에도 비슷하게 나타납니다. 외부지향의 흑인들은 흑인사회를 완전히 떠나서 백인마을에 거주하며 백인들과 사교하고 삽니다. 다시는 흑인사회에 얼씬거리지도 않아요.

인디언에게는 두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내부를 지향하는 길입니다. 이 경우 부족내부의 문제에 매달리다가 에너지를 낭비해서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못하는 대신 인디언 부족사회의 지도자가 됩니다. 반대의 경우 성공하지만 인디언사회와 완전히 결별합니다.

즉 미국 주류 사회에서 출세하면서 동시에 인디언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인디언은 별로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디언사회가 고급두뇌를 지속적으로 백인사회에 약탈 당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인디언사회는 발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미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인디언독립국을 건설하지 않는 한.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상도나 강원도의 촌구석에서 속칭 『개천에서 용났다』는 말 듣고 출세한 사람이 다시 지역사회로 돌아오는가? 천만에! 완전히 떠납니다. 그러므로 지역은 발전을 못하는 것입니다. 왜 역사가 필요하고, 민족이 필요하고, 정체성이 필요하고, 자부심이 필요한가? 물론 이거 잘못 나가면 쇼비니즘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없으면 우리는 인디언사회처럼, 흑인사회처럼 인재를 약탈당하고 나라가 망하는 겁니다.

더 중요한 문제는 내부지향을 했을 때, 즉 바깥으로 나가서 출세할 생각을 하지 않고, 지역사회의 리더가 되려고 내부에서 치열하게 경쟁을 할 때 그 사회는 절대로 발전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대신 공동체의 문화와 전통은 지킬 수 있겠죠.

그러므로 좋은 사회는 내부지향과 외부지향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는 사회입니다. 왜 정(情)이고 한(恨)인가? 이러한 균형을 위해서입니다. 인디언사회처럼 몰락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정은 상대적으로 내부지향입니다. 한은 역설적의미에서 권력의지로 변하여 외부지향으로 나타날 때가 많습니다.

한국인의 한은 구체적으로 일본에 대한 열등감이며, 이 열등감이 외화하여 권력의지로 승화된 것이 우리가 세계에 도전하고 성장하는 정신적 에너지원입니다. 물론 이 때문에 우경화되어서 사회적 모순이 커지고 있는 거죠.

콰큐틀 인디언부족의 경우
인류학적 관점에서 볼 때 콰큐틀 인디언의 사례가 흥미있는 예가 됩니다. 북아메리카의 콰큐틀 인디언들에게는 기이한 풍습이 있습니다. 마을의 유력자들이 포틀라치(potlatch)라 불리는 축제에서 자기 재산을 이웃들에게 나눠주거나 싸그리 불태워버리는 것입니다. 집에 불을 질러 홀랑 태워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때 더 많은 재산을 불태운 사람이 마을의 지도자로 대접받습니다.

아직도 이와 유사한 풍속이 곳곳에 남아있어서 북미지역의 인디언사회가 발전하는데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이는 인디언 특유의 평등주의입니다. 이와 비슷한 풍습은 세계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뉴기니아 마링족의 돼지도살축제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서 평등주의 가치관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재산을 버려서 이웃과 평등해지는 대신 명성을 얻고 마을의 지도자로 떠오르는 것입니다.

이는 인디언의 내부지향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경우입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부족사회의 바깥은 어떻게 돌아가든지 조금도 흥미가 없는 것입니다. 출세하겠다는 야망이나 미국이라는 국가에 이바지하겠다는 생각 따위는 안중에 없습니다. 머리 속에 생각하는 것이라곤 오직 부족 내부에서 어떤 평판을 듣느냐는 것 하나 뿐입니다.

일본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이라는 섬 자체가 하나의 우주요 세계요 전부입니다. 일본 안에 300여개의 소국이 있어서 서로 경쟁합니다. 이것이 이어령교수가 말하는 일본의 축소지향입니다.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독립한 미국의 14개 주가 각각 하나의 독립국이어서, 이들끼리 서로 경쟁할 뿐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든지 관심이 없다는 생각이 먼로주의입니다. 아직도 많은 미국인들이 이런 생각에 빠져 있어서, 월드컵에는 무관심하고 미식축구에만 열을 올리는 것입니다.

일본은 명치 이후 갑자기 외부지향으로 변하여 180도로 돌아섰습니다. 이것이 일본을 극우화하여 태평양전쟁의 원인이 됩니다. 여기서 확대지향의 크기는 내부지향의 크기와 반비례합니다. 독일도 비슷합니다. 오랫동안 내부적으로 분열되어 자기들끼리 다투다가 어느날 갑자기 180도로 돌아서서 전 세계와 전쟁을 벌이는 것입니다.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일본 등 한번씩 사고를 친 나라들의 공통점은 내부지향이 매우 심하다가, 갑자기 외부지향으로 돌아서면서 균형감각을 잃었다는 점입니다. 이탈리아나 스페인도 내부를 들여다 보면 그 국가 자체가 하나의 세계입니다. 공국, 자치도시, 교황의 직할령, 프랑스의 보호령 등으로 나라가 갈갈이 찢어져서 이탈리아 안에서 서로 경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스페인은 지금도 바스크분리주의자들이 싸움을 걸고 있어요. 예컨대 카딸루냐 사람들은 자기는 스페인사람이 아니라 까딸루냐 사람이라고 믿고 있고, 발렌시아 사람들은 스페인사람이 아니라 발렌시아인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도 어떤 면에서 고립된 섬입니다. 반도이지만 사실상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내부지향이지요.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무관심하다가 일본의 식민지로 당하면서 180도로 돌아서는데 이 경우 필연적으로 우경화합니다. 미국이 최근 극우의 길을 걷는 것도 같은 원리입니다. 관심이 내부에서 외부로 갑자기 돌아서면서 균형감각을 상실한 것이지요. 자기 가족 밖에 모르던 시골 촌넘이 도시로 이주해 와서 현지인과 사사건건 충돌하는 경우와 같습니다.

원인을 정확하게 알아야 제대로 된 처방이 나옵니다. 이건 어느 쪽이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닙니다.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내부지향의 관심은 상대적으로 평등주의 또는 진보주의로 나타납니다. 대신 외국과 경쟁을 덜하므로 발전은 적습니다. 외부지향의 관심은 대개 우경화로 나타납니다. 문제는 내부지향이 심할수록 그것이 외부지향으로 바뀔 경우 더 극우화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필요한건 균형감각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내부의 모순에서 얻은 성취동기를 외화하여, 외부세계에서 성공한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구조가 되기 위해서는 예의 그 정과 한이 있어야 합니다. 정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공동체정신입니다. 여기서 본질은 동기유발입니다. 정이 동기유발이 된다는 말이지요.

보통 한 인간이 사회에서 성공하겠다는 야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어릴 때 가족끼리, 혹은 이웃끼리, 혹은 친구끼리의 경쟁의식으로부터 촉발됩니다. 그 경쟁의식이 내부경쟁으로 되어서, 어른이 되어서도 가족끼리 싸우고, 이웃끼리 싸우고 친구와 싸우는 나라는 발전이 없습니다. 그 경쟁의식을 외부로 돌려 세계와 경쟁하는 나라가 발전합니다. 그런데 그 내부의 공동체가 아주 없다면?

가족도 없고, 이웃도 없고, 친구도 없다면? 그 사람은 성취동기가 없습니다. 경쟁을 해야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출세하려고 애쓸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부지향이 없이 외부만 지향한다면 그 사람은 고향을 완전히 떠나버립니다. 이 경우 떠돌이 밖에 안되지요.

결국은 내부의 모순을 외부세계에의 도전으로 풀고 다시 내부로 돌아오는 것이 정답입니다. 금의환향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런 사회가 발전합니다. 그러므로 내부와 외부 둘 중 어느 하나도 포기해서 안되며 이 둘이 황금률의 균형을 유지할 때 사회는 발전하는 것입니다.

다시 박노자로 돌아옵니다. 박노자는 한국인이 보지 못하는 한국의 많은 문제점을 잘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외부인의 시선입니다. 한국인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고 훈수를 던져줄 뿐, 한국 스스로가 실천에 나서게 할 수 있는 성취동기를 던져주고 있지는 못합니다.

그 성취동기는 반드시 우리 내부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 성취동기를 만들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정이고 한입니다. 사실은 둘 다 은폐된 권력의지입니다. 정은 어머니의 가족에 대한 권력의지이고 한은 외부세계에 대한 권력의지입니다. 그 권력의지의 동기유발을 생산하는 것이 우리의 역사이고, 정체성이고, 민족이고, 자존심이고 열등감입니다. 그러므로 외부인이 개입하는 데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을 방문하여 『당신들은 왜 출세하려고 노력하지 않나요? 당신들은 왜 게으른가요?』하고 말해서 안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의 권력의지는 내부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이웃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평등해지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부자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면, 공동체의 평등주의를 깨뜨리기 때문에 이웃으로부터 나쁜 평판을 얻고 따돌림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프리카가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내부와 외부의 모순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권력의지가 내부를 지향하면 부족끼리 싸웁니다. 르완다의 비극도 부족간의 갈등 때문입니다. 외부를 지향하면 아프리카를 떠납니다. 부족간의 경쟁심을 적절하게 외부로 돌려 사회발전의 자양분으로 삼는 일은 아프리카에서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아프리카를 가르킬 수 있나요? 제가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에 가서 "당신들은 틀렸어! 왜 부족끼리 싸움질이나 하고 있지? 왜 열심히 일해서 벌은 재산을 축제 때 다 먹어조져 버리지?" 이렇게 물어서 안됩니다. 아프리카를 가르키려면 진짜로 부족인이 되어야 합니다. 부족간의 경쟁의식을 부정해서 안됩니다. 그렇다고 부족의식을 인정하고 가만 놔둬서도 안됩니다. 부족의식은 인정하되 그것을 적절하게 외부로 돌려, 싸우되 안에서 싸우지 않고 밖에서 경쟁하게 해야 합니다.

이유없는 반항의 이유
제임스 딘이 출연한 『이유없는 반항』이라는 영화를 기억하나요? 미국이 한창 잘나가던 베이비붐세대에 나서 물질적인 어려움을 모르고 풍요 속에서 자란 세대가 고민에 빠져 사고를 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토록 풍요한데 그들은 왜 고민하고 사고를 치는 걸까요? 고등학생 주제에 멋진 스포츠카를 몰 정도로 풍요한데.

부모세대는 베이비붐 세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베이비붐 세대의 권력의지는 그들의 평등한 공동체인 학교를 중심으로 형성됩니다. 즉 학교라는 평등한 공동체 안에서 친구들 사이에 좋은 평판을 얻어서 정신적인 리더가 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들은 반대로 생각합니다. 학교는 잊어버리고 친구는 끊어버리고 공부나 열심히 해서 밖으로 나가 출세하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생존경쟁이야! 넌 출세를 해야 해! 친구 따위는 잊어버려! 학비는 내가 다 대줄게! 빨간 스포츠카도 사줄게! 부족한거 있으면 말해!』

제임스 딘은 왜 방황할까요? 그의 성취동기는 물질적 욕망이 아니라 여자친구 앞에서 남자다움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부모 세대가 강요하는 출세하고 성공해보겠다는 야심 따위는 제임스 딘에게 없는 것입니다. 동료들로부터 인정받아야 진정으로 성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국식으로 표현되면 정(情)입니다. 클린턴의 성공을 보세요. 그가 마리화나를 피운 것은 반전세대인 히피족 친구들 사이에서 동료로 인정받기 위해서입니다.

계급의식이 성취동기가 되는가?
정리 해 보겠습니다. 한국인의 성취 동기는 정과 한입니다. 정은 공동체정신이고 한은 식민지 콤플렉스이며 역설적 의미로는 권력의지입니다. 공동체의 구성원들로부터 인정받고 싶다는 심리가 한국인을 부지런히 일하게 하고 있고 또 일본에 당한 한을 풀고 세계로 뻗어나가고 싶다는 권력의지가 오늘날 열심히 일하는 한국인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박노자는 이러한 부분을 간단히 무시해 버립니다. 박노자가 내세울 수 있는 동기유발은 하나 뿐입니다. 그건 계급적 관점입니다. 계급적 관점이 과연 한국인들에게 동기유발의 기제로서 작동할 수 있을까요? 천만에! 가난뱅이 마을에서 자란 소년은 가난뱅이 마을에서 중간쯤 살았기 때문에 자신이 중산층인 것으로 착각합니다. 부자마을에서 자란 소년은 부자마을에서 중간쯤 살았으므로 중산층으로 착각합니다. 이 나라는 가난뱅이나 부자나 다 자신을 중산층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계급적 관점이 동기유발이 안됩니다.

지역감정이나 반공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외부에서 주입된 가짜 동기입니다. 625를 경험한 세대에게 레드컴플렉스는 명백히 동기유발의 하나가 됩니다. 그러나 전후세대에게 부모세대의 레드컴플렉스는 웃음거리밖에 안됩니다.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경험되지 않은 계급적 관점은 여러 가지 동기 중의 하나가 될 수 있을 지언정, 계급적 관점 하나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한다면 억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개개인에게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유년기의 구체적인 체험이며 그것은 가족공동체, 지역공동체, 학교공동체에서의 경험입니다. 가족 혹은 친구 혹은 급우들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심리가 오늘날의 부지런한 한국인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20~30대의 진보주의적 경향의 비밀은?
20~30대가 부모세대보다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은 학교공동체의 경험 때문입니다. 물론 40~50대도 학교를 다녔지만 그들은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더 일찍 사회로 진출했고 더 일찍 경쟁에 내던져졌습니다. 급우들과의 끈끈한 정은 20~30대가 훨씬 더 강하며, 이 때문에 20~30대가 더 진보적인 결정을 내린 것이 이번 대선에서 노무현의 당선입니다.

마찬가지로 미국사회의 진보적인 에네르기는 대부분 마리화나를 피우고 록음악에 열광했던 히피세대의 공동체적 정서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적 정서가 강한 나라들이 더 진보적인 경향을 보입니다. 미국이 북유럽보다 더 보수적인 이유는 미국의 경우 광대한 국토와 다양한 인종구성으로 하여 공동체가 더 빨리 해체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인들에게는 평등하고 싶어도 그 평등할 친구와 급우와 가족이 주변에 별로 없는 것입니다.

■ 일본의 경우
내부지향적 권력의지 - CEO가 직원을 가족으로 여기는 일본 특유의 연공서열식 기업문화
외부지향적 권력의지 - 침략적, 극우주의적 근성, 급속한 산업화의 성공

■ 미국의 경우
내부지향형 권력의지 - 고립주의, 먼로주의, 세계정세에 무관심한 미국인들
외부지향형 권력의지 - 개입주의, 침략책동, 세계경찰 노릇.

■ 세계의 경우
내부지향형 권력의지 - 반세계화운동, 환경운동, NGO들의 활동
외부지향형 권력의지 - 세계화, 다국적기업의 활동

한국인의 정과 한의 본질은 무엇인가?
정이나 한은 그 자체로는 가치중립입니다. 내향형이든 외향형이든 그 자체로는 진보도 아니고 보수도 아닙니다. 다만 이것이 사회에 투사되어 나타날 때 긍정적으로 혹은 부정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진보가 되기도 하고 보수가 되기도 합니다. 중요한건 어느 한쪽으로 너무 기울면 그 반동이 반드시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공동체주의가 너무 강조되면 어느날 갑자기 180도로 돌아서서 극우주의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균형감각입니다.

■ 내향형 동기유발의 특징
내향형 동기유발의 긍정적 요소들 - 평등정신, 공동체정신, 가족, 친구, 급우들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심리
내향형 동기유발의 부정적 요소들 - 자학적인 내부경쟁, 지역감정, 퇴행적 부족주의,

■ 외향형 동기유발의 특징
외향형 동기유발의 긍정적 요소들 - 진취적, 도전적, 창조적 사고
외향형 동기유발의 부정적 요소들 - 침략적, 공격적, 극우적 사고

■ 정(情)의 긍정과 부정
정(情)의 긍정적 요소들 - 공동체정신, 평등주의 가치관
정(情)의 부정적 요소들 - 지역감정, 가족주의, 배타적인 경향, 외부인에 대한 포용심 부족

■ 한(恨)의 긍정과 부정
한(恨)의 긍정적 요소들 - 외부세계를 향한 도전적인 권력의지
한(恨)의 부정적 요소들 - 퇴행적, 자기비하적인 경향

결론적으로 박노자가 모르고 있는 것은 인간의 동기유발에 관한 부분입니다. 박노자의 진보주의는 말은 옳으나 한국인의 정과 한에 직접적으로 닿아있지 않기 때문에 공허한 것입니다. 한국인을 직접적으로 자극하여 행동으로 나서게 할 정도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박노자의 계급적 관점도 물론 일정부분 동기유발이 되고는 있으나 억지스러운 점이 많습니다.

정이나 한은 자기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배어드는 것입니다. 계급적 관점은 인위적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민족을 부정해서 안됩니다. 월드컵의 열기는 민족의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슬기롭게 이용해야 합니다. 그때 광화문 앞에서 우리는 평등했습니다. 그 평등의 체험을 진보주의로 연결시켜내는데 지혜를 발휘해야 합니다.

사실 이상의 이야기는 직접적으로 박노자에 대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박노자가 유명인이므로 특별히 언급하는 정도입니다. 굳이 말한다면 박노자에게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자는 생각입니다.

결론적으로 중요한건 동기유발이며 좌파가 말하는 동기유발은 계급적 관점이고 우파가 말하는 동기유발은 민족주의인데 둘 다 틀렸습니다. 진정한 동기유발은 내부를 지향하는 공동체정서와 외부를 지향하는 권력의지이며 그것을 알기 쉽게 정이나 한으로 설명한다면 약간의 어폐는 있으나 크게 틀리지는 않습니다.

정답은 그 공동체주의와 권력의지를 적절하게 컨트롤하여 진보적인 방향으로 승화시켜가는 것이며 다른 쪽을 무시하고 어느 한쪽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해서는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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