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소개 하지마라 ‘자기소개 하지 마라.’ 이 말 먹히는가 보다. 뜨끔한 사람 많다고. 진짜 자기소개 하지 마라는 말은 아니고 사물을 객관적으로 보는 훈련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지식인들이 쓰는 말투 있잖은가? 이런 건 확실히 수준을 들키는 거다. 말투에 품격이 있다. 꼬맹이처럼 말할 때마다 ‘엄마 내가’ ‘아빠 내가’ 하고 나를 앞세우면 유치하다. 중학생이 되면 자신의 말버릇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어른스러운 말하기를 익혀야 한다. 대학생이 되면 사투리가 창피하듯이 박근혜의 유아어도 창피한 거다. ‘전방은요?’ 이게 말이냐? 조현아와 조현민의 말투도 이상하다고. ‘이게 뭐하자는 겁니까?’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틀어서 말하는 사람 있다. 문제가 되는 내용을 절대 자기 입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말에는 포지션이 숨어 있다. 갑을관계 권력구조가 개입해 있다. 이런 데서 품격이 판정되고 수준이 판단된다. 상대할만한 사람인지 일단 제껴버려야 할 사람인지 드러난다. 어쩔 수 없이 자기소개를 해야하는 수도 있다. 소설가의 첫 번째 작품은 자전적 소설인 경우가 많다. 이외수도 처음에는 자기 가족사 비슷한 것을 쓰더라. 캐릭터를 만들 실력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력이 늘면 객관적으로 써야 한다. 사건 안에서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이 나와야 한다. 자신의 주관적 경험을 판단의 근거로 내세우면 안 된다. 대화하다 알아낸 사실은 많은 사람이 남의 잘못을 두고 괴로워하더라는 거다. 야구시합이 끝나면 이긴 팀은 좋아하고 진 팀은 슬퍼한다. 내가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었는데 친구가 입을 닦고 모른 척하면 약속을 못 지킨 친구가 지고 의리를 지킨 내가 이긴 셈이다. 이긴 사람이 내탓이오를 외치며 괴로워한다. 승자가 괴로워하는 것은 이상한 풍속이다. 남의 잘못을 대신 괴로워하는 것도 자기소개 변종이다. 이명박이 졌는데 왜 노빠들이 암에 걸리는가 말이다. 거짓말하면 진 거다. 진실에서 지면 진 거다. 잘못한 사람이 괴로워해야 한다. 내가 의리를 지켰으면 내 몫은 한 거다. 결과가 어떻든 상관없다. 확률의 바다에서 다 용해된다. 내가 잘했는데 결과가 나빴다면 그만큼 내가 나쁜 운을 소진시켰으나 좋은 운을 저축해둔 셈이다. 확률은 에너지처럼 보존된다. 확률은행에 선행을 저축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 그 운을 찾아 먹는다. 내가 좋은 패스를 날렸는데 동료가 골을 못 넣었어도 확률은 그대로 있다. 골은 언젠가 때가 되면 터진다. 안 터져도 축구가 잘못이지 그게 내 잘못은 아니다. 괴로워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왜 괴로워하지? 인정받으려는 심리 때문이다. 내가 선행을 했는데 엄마가 그 장면을 못 봤으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게 하지 말라는 자기소개다. 만약 당신이 외국의 어느 나라에 불법취업을 해 있다고 생각하자. 3개월 비자가 만료되기 전에 열심히 벌어야 한다. 우연히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봤어도 그를 도와줄 이유가 없다. 어차피 두 달 후 비행기 타고 출국할 텐데 말이다. 그 나라 사정은 그 나라 사람들이 알아서 할 일이고 내가 참견할 이유는 없다. 반대로 당신이 탈북자라면 과연 한국인들이 나를 동료로 이웃으로 받아들이는지에 예민해진다. 이방인의 심리다. 이방인 까뮈는 프랑스인이 알제리인을 동료로 받아들일 것인지에 극도로 예민해 있다. 결국, 나쁜 사람이 징벌을 받아야 하고 착한 사람이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 심리는 과연 내가 이 사회의 일원인지에 의구심을 가진 이방인 심리에 빠진 것이다. 이방인이 나도 한국인이라고. 나도 한국에 세금 낸다고. 나도 한국인과 결혼했다고. 내 자식도 한국어밖에 못 한다고 하며 자기소개를 열심히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누가 한국인 아니라고 했냐? 했다. 그래서 불안하다. 불안해서 확인하려고 한다. 그 심리에서 벗어날 일이다. 착한 사람이 패배하고 나쁜 사람이 승리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시스템을 믿고 확률에 대응하면 된다. 내 행동이 합리적이었는지만 판단하면 된다. 부부간에 트러블이 있다. 남편이 잘못을 저질렀다. 이때 부인의 대처법은? 남편을 현금인출기로 생각하면 된다. 남편의 잘못은 남편의 책임이지 내 책임이 아니다. 내가 잘못한 건 물론 고쳐야 한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죗값을 치른다는 따위는 없다. 흑인값을 치르면 백인이 되고 남자값을 치르면 여자가 되나? 그런거 없다. 죄에 대해 보상을 하거나 징벌을 하거나 어떻게 하려고 하는게 자기소개다. 그런 심리는 역시 자신이 확고한 사회의 일원인지에 의구심을 가지고 불안해하는 것이다. 신상필벌과 인과응보를 통해 동료임을 인정받는 거다. 왜? 남의 자식이면 나쁜 짓을 해도 꾸짖지 않는다. 남의 자식이면 선행을 해도 상을 주지 않는다. 소가 열심히 일해도 월급을 주지 않는다. 개가 열심히 짖어도 승진을 시켜주지 않는다. 결국, 인간은 자기가 이방인이 아니고 타자가 아니고 사회의 일원인지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기어코 복수하려고 하고 기어코 대가를 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반대로 피곤하게 구는 자는 남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남편이 이상한 짓을 하면 ATM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남편을 자신의 일부라고 여기므로 남편 잘못에 내가 괴로운 거다. 나쁜 남편은 남이다. 나를 개입시키지 말자. 감정이입 하지 말자. 대신 괴로워하지 말자. 엄마는 자식이 잘못하면 괴로워한다. 남편은 자식이 아니므로 괴로워하지 말자. 죄를 지었으면 지은 대로 놔둬라. 왜 처벌하지? 죄를 지었으면 지은 거고 구태여 처벌할 이유는 없다. 처벌하려고 기를 쓰는 행위가 사실은 소외불안 때문이다. 적절히 맞대응하고 통제를 하고 교화를 하면 그만이다. 시스템으로 대응하면 된다. 소매치기는 죄가 작지만, 범죄를 그만둘 때까지 감옥에 가둬놔야 한다. 죄가 문제가 아니고 통제가능성이 문제다. 어떻게든 통제되고 제압되어야 한다. 문제는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해서 나도 그만큼 잘못을 저지를 권리가 있다는 식의 태도다. 일종의 까방권 같은 것이다. 쟤가 먼저 때렸어요! 하고 일러주는 식이다. 상대가 먼저 잘못해서 잘못 1등을 놓쳤다고 덩달아 2등잘못을 해야 한다는 해괴한 논리는 뭐지? 이재명이 잘못했으니 그만큼 나도 잘못할 권리가 있다는 식으로 나오는 일부 문빠들 행동이 그렇다. 남경필 행동이 그러하다. 이재명 가족사 사실 문제가 있다. 이재명 가족사에 문제가 있으면 갑자기 남경필 가족사는 훌륭한 것으로 되어버리는가? 이런 괴상한 논리를 펴는 것이다. 이 역시 엄마 앞에서 인정받으려는 꼬맹이 행동이다. 형의 잘못을 일러바치면 귀염받는다는 무의식의 작용이다. 사실 가족 안에서는 그런 논리가 먹힌다. 무조건 경쟁자를 이기기만 하면 된다. 형제는 둘이다. 둘 중의 하나를 제끼면 나머지가 선택된다. 그런데 그런 가족논리가 사회에 먹히겠느냐고.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왔으면 그런 가족논리는 벗어나야 한다. 어린애냐? 상대방이 잘못했으면 상대방이 진 거다. 상대가 졌으면 내가 이겼는데 왜 내가 벌을 받지? 잘못을 저지르는 건 벌을 받는 거다. 죄가 그 자체로 곧 벌인 것이다. 상대가 벌을 받았다고 나도 벌을 받아야 공평한가? 나를 개입시키지 말라는 말이다. 초딩은 시험을 백 점 맞으면 선생님이든 엄마에게든 칭찬을 들어야 직성이 풀린다. 초딩심리 졸업해야 한다. 사회로 나오면 칭찬도 없고 처벌도 없다. 주식투자를 해서 10억을 벌었다고 칭찬하는 사람 없다. 10억을 번 그 자체가 이미 칭찬이다. 쿨해져야 한다. 진상짓 하지 말자. 왜 칭찬을 들으려고 하지. 왜 처벌하려고 하지? 최근의 예는 마카롱 11개 사건이다. 점주가 잘못했다면 점주가 벌을 받은 건데 왜 내가 벌을 받으려고 노력하지? 잘못 그 자체가 벌이다. 왜 화를 내지? 이것들이 나를 우습게 보나 하는 옹졸한 마음이 있는 것이다. 역시 소외될까 봐 불안한 거다. 당신이 이방인이라면? 텃세가 심한 시골마을에서 당신이 유일한 외지인이라면? 텃세를 부리는 시골사람은 당신을 소외시킨다. 마을 몫으로 내려온 돈은 이장이 분배하는데 외지인 몫은 빼고 자기들끼리 나누어 가진다. 항의하면 당신은 부역에 안 나왔고 마을 기금을 안 냈고 하며 수십 가지 이유를 댄다. 그래서 화가 난 것이다. 자신이 외부인이고 이방인이고 남취급을 받을지 모른다는 불안심리 때문에 소속을 확인하려고 화를 내는 것이다. 사회가 반응하면 아 내가 확실히 이 사회에 소속된 일원이 맞구나 하고 안도한다. 어떻게든 반응을 보려고 한다. 악플러들도 그렇고 매를 버는 철수 준표 승민 성태도 그렇다. 정치판의 왕따라서 어색하기 때문이다. 일부러 자신의 실력을 숨기고 있는게 낫다. 100점 맞을 수 있지만 80점 정도로 보여주다가 나중에 깜짝 놀래켜주는게 좋다. 구조론을 굳이 알리려고 할 이유도 없다. 나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할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인류는 별 볼 일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폭로할거다. 당신들 주제에 구조론이라니 가당키나 해? 뭐 이런 거다. 보통은 자유와 사랑과 행복과 성공이 인생의 목적이 되고 의미가 된다. 그러나 이는 자기소개이니 허무한 거다. 역시 타인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것이다. 확인도장 받으려는 심리다. 그렇다. 사람들은 대개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타인에게 인정받는데 둔다. 초딩은 선생님께 인정받고자 한다. 그러나 그게 철학일 수는 없는 거다. 남에게 인정받으려 한다면 남에게 숙이고 들어가는 것이다. 노예냐? 기독교는 구원에 의미를 두니 노예신분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역시 자기소개다. 무슬림은 천국에 의미를 두니 부자나라에서 태어나려는 것이다. 역시 자기소개다. 힌두교는 내세에 의미를 두니 귀족으로 태어나는 것이 소원이다. 역시 이방인의 심리다. 불교는 해탈이니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역시 자기소개다. 자유인 되어 뭣하게? 우월성을 인정받으려는 거다. 열등감을 보상받아서 뭣하게? 누가 널 열등하다고 말했지? 아무도 열등하다고 말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자신을 열등한 존재로 낙인찍은 다음 거기서 탈출한다면서 생쇼를 하는 거다. 개인이 뭔가 챙겨 받으려고들 한다. 도교는 불로장수에 의미를 두니 역시 자기소개다. 유교는 벼슬하는 것이니 권력을 쥐는 것이다. 이건 좀 낫다. 자기소개가 아니라 사회소개다. 구조론은 에너지를 얻는 것이니 집단의 의사결정 중심으로 쳐들어가는 것이다. 이는 우주소개다. 내가 무얼 얻으려고 한다는 것은 남을 의식하는 행위다. 구조론의 답은 미학에 있다. 자체의 완전성을 따라가는 것이다. 자동차는 자동차답게 완성하고 인간은 인간답게 완성하고 문명은 문명답게 완성하기다. 나 이 차를 운전할 수 있어. 난 이 차가 좋아. 이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된다. 이 차는 험로주행에 제격이지. 이 차는 장거리 운행에 피로를 덜 수 있지. 나를 빼고 자동차를 소개해야 한다. 결대로 가야 한다. 어떤 대상이든 자체의 논리와 질서와 결이 있다. 에너지가 진행하는 루트가 있다. 거기에 맞추어 말해야 한다. 우리는 개입하여 에너지 공급을 조절할 수 있다. 내가 무언가 보상받고 이득 보고 챙긴다는 건 유치하다. 나라면 남이다. 나와 남은 대칭이 된다. 나를 내세우는 것은 남을 의식하는 것이니 이미 남의 노예가 되어 있다.
엄마가 자식에게 내가 엄마잖아. 내가 엄마 맞지? 하고 묻지는 않는다. 엄마곰이라면 새끼곰이 밀림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모든 환경에 한 번씩 두어본다. 추위도 겪게 하고 더위도 겪게 하고 강물도 건너게 하고 바위절벽도 오르게 한다. 천하를 소개하고 세상을 소개하고 자연을 소개하고 문명을 소개하고 진보를 소개해야 한다. 자기소개를 했다는 사실이 문제가 아니고 천하소개를 안 했다는 사실이 문제로 된다. 자기소개 해도 된다. 단 천하소개가 먼저다. 당신은 새끼곰이 아니고 엄마곰이니까. 차를 샀으면 산으로도 가보고 들로도 가보고 전라도든 충청도든 골고루 한 번씩은 가봐야 한다. 연인을 사귀었으면 극장에도 가보고 피자집에도 가봐야 한다. 자기소개식 말투를 쓰는 사람은 안 가본 사람이다. 안 사귀어본 사람이다. 그러니 소개할 그 무엇이 없는 것이다. 왜 진리를, 진보를, 문명을, 자연을, 신을 소개하지 않는 거지? 왜 연인을 사귀어놓고 극장에도 놀이공원에도 제주도에도 한 번 안 가 보는 거지? 가 봐야 한다. 왜? 그것이 사귐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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