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론자의 문제 종교의 신은 당연히 부정해야 한다. 그런 거 없다. 그러나 신의 개념이 언제나 기독교의 신과 같은 모습으로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신의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어왔다. 공자와 노자가 들먹이는 신은 다른 거다. 그것을 이신론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여기서는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봐야 한다. 구조론의 신은 기독교의 신도 아니고 이신론의 신도 아니다. 그런데 있다. 사물이 아닌 사건이 있다. 신은 사건이다. 신을 부정한다는 것은 첫째,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의미를 부정하게 된다. 맥락을 부정한다는 것이다. 사물은 서로 떨어져 별개로 각자 존재하지만 사건에 의해 모두 연결된다. 신의 부정은 그 연결의 부정이다. 연결되지 않으므로 의미가 없다. 그런데 연결되지 않는다. 내가 죽어 내세에 다른 사람으로 태어난다든가 혹은 내가 죽어 천국에서 부활한다든가 하는건 없다. 죽다 살아나기 없다. 죽으면 끝이다. 그런데 연결된다. 손가락은 다른 손가락과 연결되는 것이 아니고 신체와 연결된다. 뇌와 연결된다. 말단은 중심과 연결된다. 부분은 전체와 연결된다. 그래서 의미가 있다. 손가락이 닳아 없어지면 새 손가락이 돋아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손가락이 그 일을 떠맡는다. 그렇게 일로 연결된다. 업무에 의해 연결된다. 역할에 의해 연결된다. 신의 부정은 사건 안에서 의미의 부정이며 신의 긍정은 의미의 긍정이다. 내가 죽어서 천국에 태어나건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건 사실 그건 의미가 없다. 그걸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지만 그런데 죽음이 왜 무서운 거지? 연결되어 있으므로 죽음은 없다. 그것은 내 인생에 일어나지 않는 사건이다. 손가락이 부러져도 다른 손가락이 그 역할을 떠맡으므로 사건으로는 계속 살아있다. 인간은 원래 죽지 않는다. 비록 몸뚱이는 죽지만 여러분은 자신의 죽음을 목격할 수도 없다.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은 몸뚱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역할을 말하는 거다. 역할이 죽지 않기 때문에 나는 죽지 않는다. 몸뚱이래야 단백질에 회분에 수분인데 다 합쳐도 700원이 채 안 된다. 신이 없다는 것은 둘째,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유가 있다는 것은 즉 원인과 결과가 연결된다는 것이다. 연결되지 않으므로 이유는 없다. 살 이유도 없고 죽을 이유도 없다. 살든 죽든 그것은 생물학적 본능이다. 유전자의 명령이며 화학적 전기신호에 불과하다. 그래서? 결정적으로 통제되지 않는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형제들은 연결되어 있다. 저녁이면 식탁으로 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형은 아우에게 또 아우는 형에게 어떻게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런데 말이다. 저녁에 식탁으로 모이지 않는다면? 통제할 수 없다. 명절에도 모이지 않는다면? 설날인데도 제사 지내러 고향에 내려오지 않는다면? 통제할 수 없다. 우리를 모이게 하는 것은 사건이다. 직원들은 회사로 모이고 병사들은 전장으로 모이고 시청자는 TV 앞으로 모인다. 모이기 때문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사건에 의해 모두 모여있다. PC는 각자의 책상에 있지만 네트워크로 모두 연결되어 있듯이 말이다. 신이 있다는 것은 사건 안에서 연결되어 있고 모여있고 의미 있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거다. 그러므로 내가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또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결정할 수 있다. 사물은 이유도 없고 목적도 없고 원인도 없고 의미도 없이 그냥 버려진 채 덩그러니 존재하는 것이다. 비참이 그 가운데 있다. 그러나 사건은 명백히 방향성이 있다.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고 의미가 있다. 구원이 거기에 있다. 신은 있지만 사물로 존재하지 않고 사건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는 사건 안에 각자 하나씩 자리를 잡고 있다. 사람은 무수히 태어나고 또 죽는다. 사물로 보면 인간은 70억분의 1의 존재다. 인생이 의미 있어봤자 70억분의 1만큼 의미가 있다. 즉 거의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사건으로 보면 복제된다. 70억이 하나를 공유하는 것이다. 세상을 70억 조각으로 조각내어 하나씩 나눠 가지는 것이 아니다. 누구든 그 70억을 모두 가진다. 그러므로 의미가 있고 이유가 있고 또 통제되는 것이다. 십여 호가 사는 마을에 우물이 하나 있다. 가구당 다섯 명의 식구들이 살고 있다. 마을 우물 하나를 50명이 함께 사용한다. 우물의 50분의 1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물 하나를 온전히 다 사용한다. 누구라도 그러하다. 우물의 물은 그만치 넉넉하기 때문이다. 200년 전만 해도 지구의 인구는 다 합쳐서 10억 명이었다.
인구는 늘어나고 있다. 조만간 100억 명을 채울 것이다. 백억분의 1로 몫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100억이라는 인류자원을 누구나 사용할 수 있다. 유튜브 조회수 100억 도전이 가능한 시대다. 사물과 사건의 차이다. 사물로 보면 인구가 늘수록 개인의 비중은 줄어들지만 사건으로 보면 인구가 늘수록 개인의 기회는 되레 늘어난다. 상호작용대상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목장의 양떼가 늘어난 셈이다. 신이 있다는 것은 사건이 있다는 것이고 복제되어 있으며 공유한다는 거다. 그러므로 자원이 증가한다는 거다. 인간과 오랑우탄은 유전자 99퍼센트를 공유한다. 같은 인간끼리는 유전자는 99.999퍼센트를 공유한다. 인간은 인류문명의 진보라는 임무를 공유한다. 각자 다른 임무를 맡은 것이 아니다. 경찰도 도둑도 결과적으로 진보에 기여하는 것은 같다. 주인공이냐 조연이냐에 따른 역할 차이가 있는 거다. 신이 있다는 것은 그 역할을 인정한다는 거다. 반대로 신을 부정한다는 것은 그 역할을 부정한다는 것이다. 그 경우 결과론만 있을 뿐 원인론은 없다. 단지 결과적으로 어쩌다 인간이 살게 되었을 뿐 살아야 하는 이유 따위는 없다. 틀렸다. 이유가 있다. 원인이 있다. 목적이 있다. 사건이 있기 때문이다. 그 목적과 원인이 당신에게 없을 뿐이다. 대신 당신에게는 임무가 있다. 임무는 신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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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명문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오타인거 같아서 리플 올려 봅니다. 뒤에서 3번째 단락입니다/
사건으로 보면 인구가 늘수록 개인의 비중은 줄어들지만 -> 사물로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