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냐 부족이냐? 개인이냐 가족이냐 부족이냐 국가냐 인류냐다. 노자파는 개인주의를 주장하고 공자파는 국가주의를 주장한다. 구조론은 강한 개인을 주장한다. 그것은 개인주의적이면서도 국가주의를 넘어 인류주의가 된다. 개인이 의사결정능력을 키워 인류를 대표하여 의사결정해야 한다. 여기서 헷갈릴 수 있다. 강한 개인은 한편으로는 노자의 개인주의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공자의 국가주의 같기도 하다. 개인 가족 부족 국가 인류라 하는 단어에 집착하면 곤란하다. 관념에 얽매인다면 피곤한 거다. 진짜는 사건이다. 개인단위 사건이면 곧 개인주의가 된다. 가족단위 사건이면 가족주의가 되고 부족단위 사건이면 부족주의다. 문제는 국가단위와 인류단위의 사건을 포착하지 못하는데 있다. 가족단위 사건은 누구든 알아챈다. 가족들이 한마디씩 하며 참견하기 때문이다. 부족단위 사건도 알 수 있다. 명성이나 평판이나 체면이다. 사회적 지위나 신분질서의 형태로 부족이 참견한다. 그런데 국가단위 사건은 입영통지서 받을 때나 포착되고 인류단위 사건은 글자 배운 엘리트나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아는 가족단위와 부족단위 사건은 무시하고 특별한 국가단위와 인류단위 사건을 포착해야 한다. 구조론의 강한 개인은 집단을 위해 개인을 희생시키는 전체주의도 아니고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이기주의도 아니다. 집단이냐 개인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사건이 중요하다. 사건은 사건 자신을 위해 있다. 진보는 진보 자신을 위해 존재하고 문명은 문명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 인간은 하나의 생명체다. 개미도 하나의 생명체다. 그런데 여왕개미는 특별하다. 개미를 죽이면 개미가 죽지만 여왕개미를 죽이면 그 개미군집 전체가 죽는다. 개인이 큰 사건을 대표할 때는 특별한 것이다. 평소에는 개인을 챙기고 가족을 챙기다가 중요한 때는 변신해야 한다. 인간이나 개미나 차이가 없다. 그러나 사건 안에서는 다르다. 대표성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 개인은 개미와 다를 바 없는 미미한 존재이지만 인간이 만든 문명은 다른 것이며 문명은 자체의 생명성을 가진다. 지구 온난화 문제와 같은 문명단위 사건 앞에서라면 긴장타야 한다. 헐리우드 영화의 철학은 인류가 다 죽어도 사랑하는 내 가족만은 살려야 한다는 식의 가족 이기주의다. 역겨운 거다. 그것은 가족을 타자로 보는 시선이다. 가족은 남이 아니다. 가족은 나와 같다. 인류를 위해 나를 희생할 수 있다면 가족을 희생시킬 수도 있다. 공이 사에 앞선다. 단, 가족을 죽이고 내가 살자는 식이라면 역시 가족을 타자로 보는 태도이므로 틀려먹은 것이다. 문제는 가족과 부족이 충돌할 때다. 가족을 버리고 부족에 아부하는 것은 집단의 평판공격에 굴복하는 것이다. 개인의 불로장수 집착이 고약하듯이 가족사랑 집착도 고약한 것이다. 부족에 아부하는 것은 더 고약하다. 중요한건 의리다. 부족에 의리가 있듯이 가족에도 의리가 있다. 의리는 사건 속에 있는 것이며 사건이 없으면 의리도 없다. 특별히 올라탄 사건이 없는 조폭의 의리는 가짜다. 의사결정에 있어서는 인류와 나 사이에 아무것도 없어야 한다. 진실로 말하면 국가도 없고 부족도 없고 가족도 없다. 사건만이 의미있다. 국가는 전쟁이 났을 때 있고 부족은 회사일이나 마을행사에 있고 가족은 아기를 낳고 키울 때 존재한다. 무작정 국가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이성을 사랑하는건 관객에 아부하는 부족주의다. 문제는 부족주의다. 가족이든 부족이든 국가든 상부구조에 의사결정을 위임하고 의사결정을 회피하는 것이다. 이는 에너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큰 사건에 올라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은 사건에 올라타면 어차피 답이 없다. 일베충들은 부족단위의 작은 사건에 올라타 있다. 그들은 미처 국가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알아도 희미하게 안다. 일베족에 만족하고 있다. 개인에서 가족으로 부족으로 갈수록 숫자가 많아진다. 그리고 애매해진다. 어쩌자는 건지 사건의 형태가 희미하다. 의사결정은 그 참여자 숫자를 줄이는 형태로만 일어난다. 가족만 가족이 아니다. 부족 안에도 가족이 있다. 집단의 축을 이루는 구조가 있다. 그들은 가족처럼 단단하게 결속해야 한다. 그것이 의리다. 코어가 강해야 한다. 부족 위에 국가 있지만 국가는 오히려 작다. 국가의 목적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부족이 가장 애매하고 곤란하다. 기득권 집단에 속해있다면 혹은 특정 계급이나 피부색이나 배타적인 소그룹에 속해 있다면 그것이 부족이다. 회사도 부족이고 교회도 부족이고 민족도 부족이다. 개인을 움직이게 하는 명성이나 평판이나 신분이나 지위가 부족에서 결정된다. 가족과 국가는 역할이 분명하다. 국가는 군입대 할 때 신경쓰면 된다. 투표만 잘하면 된다. 가족 역시 역할이 정해져 있다. 남편이나 아내나 자식이나 할아버지로 역할이 정해져 있다. 부족 안에서는 경쟁이 치열하다. 일단 역할을 따내야 한다. 거기서 에너지가 작용한다. 그러므로 위태롭다. 검증되지 않은 거다. 결정적으로 인간은 원래 부족주의에 맞추어져 있다. 원시인들은 100개체 규모의 부족단위로 생활했던 것이다. 부족주의는 인간의 타고난 본능이며 그 부족주의를 극복하는 데서 문명이라는 사건은 시작된다. 여러 사람 앞에서 칭찬을 듣고 명성을 얻고 평판을 높이려고만 한다. 정리하자. 개인주의든 가족주의든 부족주의든 국가주의든 인류주의든 다 목적이 있고 이유가 있다. 상황에 맞게 행동하면 된다. 부족주의가 필요한 상황에는 부족주의로 행동해야 한다. 문제는 인간의 본능이 부족을 지향하는데 있다. 15살이면 가족을 배반하는 것이 정상이다. 사춘기가 되면 중이병에 걸려 가족을 배반하도록 뇌가 세팅되어 있다. 동물 중에 부모에게 효도하는 동물은 없다. 가족을 배반하는게 정상인데도 가족을 배반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교육의 효과다. 다른 가족과 경쟁에서 이겨 더 큰 세계로 나아갈 의도로 가족을 사랑하는 거다. 그런 의도 없이 무작정 가족을 사랑하라는 헐리우드의 압박은 넌센스다. 인간은 가족을 배반하고 부족을 따르도록 뇌가 세팅되어 있고 그럴 때 에너지가 솟구친다. 이 때문에 산만해진다. 그러한 부족본능을 부추겨 국가에 대한 맹목적 충성을 요구하는 것이 독재자 수법이다. 신과 나 사이에 아무것도 없어야 한다. 가족주의는 의사결정의 코어가 필요하기 때문에 중요하고 부족주의는 인간의 타고난 본능이므로 의미있고 국가주의는 625 이후 70년간 잠정적 전시상황인 한국인에게나 해당되는 특수한 것이며 힘이 없는 개도국에나 필요한 것이다. 민족주의는 팔레스타인 민족과 같은 피압박 민족에게나 필요한 것이고 선진국에는 필요없다. 전쟁이 없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인간을 흥분시키고 에너지를 끌어내는 것은 부족주의고 그 부족주의는 원시인의 본능이며 그러므로 교육되지 않은 사람의 부족주의는 위험하다. 글자 아는 사람은 본능을 극복하고 이성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명성이나 평판이나 위신과 체면에서 에너지를 끌어올 것이 아니라 이념과 이상주의와 완전성과 미학에서 에너지를 끌어와야 한다. 신과의 대결에서 에너지를 끌어와야 진짜다. 내 안에 관성력을 조직해야 진짜다. 명성과 위신과 체면과 평판 따위는 타자와의 대결에서 작용반작용의 힘을 끌어내는 것이며 신과의 일대일은 자체 관성력을 조직하는 것이다. 사건에 올라타고 사건의 치고나가는 진보주의 관성력에서 에너지를 끌어내야 진짜다. 존재론과 인식론의 문제가 얽혀 헷갈리겠다. 질 - 개인이 인류를 대표한다. 입자 - 가족이 의사결정의 코어다. 힘 - 부족에서 치고나가는 방향을 정한다. 운동 - 국가단위에서 지속되는 관성력을 얻는다. 량 - 인류 단위에서 나를 완성한다. 행동반경은 커지지만 실천은 작아진다. 천하라는 큰 사상을 모나리자라는 작은 그릇에 담아낸다.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로 점점 키우려고 하면 안 된다. 자기 안에서는 천하에서 국가로 부족으로 가족으로 나로 작아지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그 반대로 연출되어 보이는 것이다. 문재인은 일찍이 천하로 나아갔지만 최종적으로는 자기를 완성한다. 자기 스타일을 완성하면 성공이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는 우주를 구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사람에게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로 보이지만 그 반대다. 천하를 상대하다보니 결과로는그렇게 연출되어진 것이다. 의사결정은 깔때기를 구사하여 에너지를 쥐어짜는 것이다. 큰 데서 시작해야 작게 쥐어짤 수 있다. 먼저 큰 데서 시작하라고 하니 큰 것을 바라보고 작게 쥐어짜라고 하니 작은 것을 바라본다. 큰 것을 하라는 건지 작은 것을 하라는 말인지 헷갈린다. 방향성을 판단해야 한다. 천하를 대표하여 한 명을 사랑하는건 진짜지만 그냥 한 개인에 집착한다면 얼빠진 것이다. 만약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을 좋아하는게 아니라 인류에 대한 태도를 그 한 사람에게 대표하여 표현하는 것이다. 그냥 그 사람이 좋다면 그건 동물적 생식본능에 불과한 것이다. 존재론과 인식론의 구분이다. 존재론은 내 안에서 에너지를 어떻게 처리하는가이고 인식론은 다른 사람의 눈에 어떻게 보여지는가다. 타인은 거울과 같아 반대로 보인다. 타인에게는 천하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을 완성해 가는 마이너스의 과정인 것이다. |
"타인에게는 천하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을 완성해 가는 마이너스의 과정인 것이다"
"한 방향으로 깊이 사랑하면
다른 모든 방향으로의 사랑도 깊어진다" -안네 소피 스웨친-
한 방향(천하.인류)으로 깊이 사랑하면
다른 모든 방향으로의 사랑도 깊어진다
가족이냐 부족이냐를 읽고..
안네 소피 스웨친의 말인 '한 방향'의 의미에 구조론의 천하나 인류를 대비시켜서
이해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 봤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