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은 간단히 이게 이렇게 되면 저게 저렇게 된다는 거다. 이것과 저것이 있고 둘 사이에 관계가 있다. 둘은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보고 저것을 안다. 1+1=2가 맞으면 2+2=4도 맞다. 전제와 진술의 관계다. 전제가 옳으면 진술도 옳다. 그런데 과연 1+1=2가 맞냐? 전제가 옳은가? 전제의 전제를 따져보면 된다. 그래도 안 되면 전제의 전제의 전제를 따져보면 된다. 이렇게 계속 추구해 들어가면 언젠가 하나는 맞아떨어지는게 나온다. 반드시 나온다. 최종보스를 찾은 다음 거기서부터 다시 퍼즐조각을 맞춰보면 문제가 풀린다. 어떤 것이 그곳에 존재한다는 것은 그 이전에 그것이 그것으로 되는 절차를 거쳤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자궁이 있다. 거기서 만난다. 형제는 다르지만 같은 자궁을 거쳤다. 거기서 풀린다. 둘의 일치가 확인된다. 전제가 옳다는 확인이다. 전제와 진술의 관계는 자궁과 출산의 관계이며 자궁의 자궁의 자궁을 추구하면 근원의 일치에 이른다. 모든 것의 자궁은 우주의 탄생이다. 그래서? 세계는 에너지에 의해 통일적으로 존재한다. 우주는 팽창한다. 우주가 한 덩어리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기차가 간다. 기차가 한 덩어리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기관차와 객차가 별도로 살림을 차렸지만 에너지로 보면 죄다 연결되어 있다. 객차가 간다. 과연 가는가? 객차의 전제는 기관차다. 기관차가 가면 객차도 가는건 확실하다. 기관차가 가는지는 엔진을 보면 알 수 있다. 기차가 멈춰섰다면 다르다. 기관차는 기관차대로 볼 일이 있을 것이고 객차는 객차대로 입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플랫폼을 떠나 선로를 달리기 시작하면 얄짤없다. 개별적인 사정은 무시되고 중앙의 통제를 따라야 한다. 알아봤더니 과연 기차는 달리고 있더라는 견해가 구조론이다. 그래서? 달리는 기차에서 이탈할 수 없다. 사람들은 사랑이니 행복이니 쾌락이니 명예니 성공이니 이런 걸로 꼬셔보려고 하지만 그런데 넘어갈 내가 아니다. 예수의 원죄? 웃기셔! 난 죄 없다. 사람 겁주려 하지마라. 석가의 고苦? 놀고 있네? 조금만 치사하면 인생이 즐거운데 무슨 고苦 타령이람? 천국? 내세? 윤회? 해탈? 다 바보 같은 수작이다. 초딩도 아니고 말이다. 인간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논리는 달리는 기차에서 이탈할 수 없음의 논리 하나뿐이다. 보기 싫은 사람 얼굴을 계속 봐야 한다. 이탈할 수 없다. 군대 가보면 알게 된다. 이건 강력하다. 나의 성별에서 이탈할 수 없고 나의 피부색을 이탈할 수 없다. 남자는 여자가 될 수 없고 여자는 남자가 될 수 없다. 이거 강력한 논리다. 기차가 멈춰섰다면 다르다. 창문을 닫고 방문을 잠가버리면 된다. 내 피부색을 남에게 보여주지 않으면 되고 내 성별을 남에게 감추면 된다. 내가 SNS에서 여자행세를 하든 백인행세를 하든 지들이 어떻게 알아내겠는가? 그런데 기차가 달린다. 기차가 움직이므로 나도 움직여야 한다. 세상이 진보하므로 나도 움직이게 된다. 동적환경에서는 들통나고 마는 것이다. 움직이면 관문을 통과하게 되고 거기서 들킨다. 수준을 들키고 성격을 들키고 피부색을 들키고 성별을 들키고 능력을 들킨다. 아바타를 들킨 안철수 꼴 난다. 공자가 좋은 것을 말했다. 만남의 논리다.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듯이 필연적으로 만나게 된다. 그것은 확실히 좋은 소식이 맞다. 다만 빚쟁이가 먼 곳에서 만나자고 찾아오면 그건 피곤하다. 노자의 도덕경은 한마디로 부정적 사고의 힘이다. 인간은 부정할 수 있다. 거기서 권력이 나온다. 엄마가 아기에게 말한다. 짜장면 먹을래? YES 아니면 NO다. YES를 하면 권력이 없다. NO를 투척해야 다들 내 얼굴을 바라본다. ‘싫어! 난 짬뽕.’ 이걸로 주목을 끈다. 그것이 권력이다. 인간은 뭐든 반대만 할 수 있다. 그러다가 망한다. 밖으로 난 촉수를 하나씩 닫아걸 때 권력이 생긴다. 대문을 닫고 창문을 닫고 전화를 끊고 인터넷을 끊으면 사람들이 뭔 일 있나? 하고 안부를 물어온다. 잠시 권력을 누린다. 그러다가 최종적으로 목숨을 끊게 된다. 끊을 것이 목숨밖에 없는 지경에 내몰린다. 홍준표가 묻지마 NO를 투척하듯이. 남북회담을 반대하여 잠시 이목을 끌 수 있지만 결국 당의 생명을 끊는다. NO가 인간을 잠시 살게 하지만 NO를 소모하여 결국 인간은 죽는다. 부자는 많은 NO를 구사할 수 있다. 집이 커서 닫을 창문이 많기 때문이다. 빈자는 집이 작아 대문도 없으니 닫을 것이 없다. 자기 목숨 하나 외에는. 공자는 반대로 창문을 열고 대문을 열어 손님을 맞는다. 아무나 쓸 수 있는 방법은 아니다. 친구를 사귀어둔 사람만이 친구를 맞을 수 있다. 친구가 없는데 친구가 찾아오겠는가? 그런데 말이다. 잊고 있었지만 사실은 친구가 있었다. 더 큰 세계로 올라가면 된다. 게임 체인지다. 트럼프와 김정은이 갑자기 친구가 되듯 말이다. 갑자기 버스가 흔들리면 옆에 있는 사람을 붙잡게 된다. 친구가 된다. 호랑이가 나타나면 낯선 사람과도 친구가 되어야 한다. 배가 흔들리면 한 배를 탄 사람은 모두 친구가 되어야 한다. 세상이 흔들리므로 인류는 친구가 되어 있다. 그것이 진보의 논리다. 기차가 달리므로 친구가 된다. 힘은 긍정이나 부정에서 오는게 아니다. 더 큰 단위의 사건에서 오는 것이다. 2002년 월드컵은 큰 사건이었다. 큰 사건에 의해 친구가 되는 것이다. 큰 사건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남북한 정상의 회담은 큰 사건이다. 북미회담은 인류사 단위의 사건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사건 속의 존재임을 발견해야 한다. 사건은 중심이 있다. 기차는 엔진이 있고 태풍은 눈이 있다. 지진은 진앙이 있고 탄생은 자궁이 있다. 그 중심을 통제해야 해결된다. 인간은 작은 사건에서 좌절을 맛보고 큰 사건에 달려들게 된다. 또래들과의 경쟁에서 패배하고 공부에 매달리는 격이다. 그러나 작은 사건에서 패배한 사람이 큰 사건에서 승리할 수 있겠는가? 큰 사건에서는 크게 패배하는게 보통이다. 그래도 길은 있다. 큰 사건은 드물게 일어나므로 시간을 벌어 대비할 수 있다. 큰 사건은 단체전이므로 동료와 함께 묻어갈 수 있다. 처음부터 큰 사건에 마음의 대비를 해야 한다. 천하인의 기개를 가져야 한다. 호연지기를 키워야 한다. 선비가 되어야 한다. 군자의 태도를 갖춰야 한다. 아부하려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용감하게 나아가야 한다. 두려움 없이 큰일을 벌여야 한다. 큰 것을 실패하면서 작은 것을 얻게 되는 것이 역사의 순리다. 큰 사건은 실패했지만 관성력을 남겨두므로 후배들이 해결해준다. 노무현이 실패한 것을 문재인이 해결하듯이 문재인이 남긴 것을 그다음에 등판한 사람이 해결하는 것이며 그렇게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가는 것이다. 인생에 최후로 남는 것은 친구밖에 없다. 보고 싶은 사람을 보고 보기 싫은 사람을 안 보는 것이 삶의 유일한 가치다. 나머지는 스쳐 가는 풍경에 불과하다. 큰 사건 속으로 뛰어들었을 때 만날 사람을 만날 확률이 높다. 변희재 따라다녀봤자 태극기 할배들 얼굴이나 보게 된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은 것은 나의 탐미주의다. 최후에는 미학이 남는다. 똑똑하고 용감하고 유쾌한 사람을 만나겠다는 것이 나의 미학이다. 그런데 예의 바르고 잘 생긴 사람까지 만나게 되는 것은 덤이다. 박원순과 최문순의 구수한 얼굴로 만족하는데 문재인에 조국에 임종석에 이낙연이라니 다들 잘생겼잖아. 이런 호강은 바라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선악은 의견이 갈린다.
그러나 미추는 의견이 갈리지 않는다. 아기들도 잘생긴 사람은 알아본다. 얼굴이 잘생겨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미학이 진실하다는 말이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는 헷갈릴 수 있지만 적어도 추태를 부리면 안 된다는 말이다. 솔직하고 담백하고 깨끗하게 가야 한다. 인신공격에 폭로전이면 좋지 않다. 선비는 미학으로 말한다.
아름다울수록 더 아름다워야 한다는게 미학의 논리다. 코가 잘생겼으므로 입은 못생겨도 된다는건 미학이 아니다. 잘생겼기 때문에 조금 못생긴 것이 더 도드라져 보인다는게 미학이다. 진보는 도덕적이므로 더 도덕적이어야 한다는게 미학의 논리다. 진보는 도덕적이므로 조금 부도덕해도 셈셈이 된다는 것은 미학이 아니다. 미학은 전부 연결되어 하나의 통짜덩어리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부분을 보고 전체를 헤아릴 수 있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중요한 것 하나가 훌륭하면 나머지는 문제 삼지 않는 것이며 반대로 다 잘 되어도 하나가 잘못되면 아주 0점이 되는게 미학의 논리다. 호연지기로 팽팽한 긴장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미학이다. 전전긍긍하는 것은 미학이 아니다. 미학은 동적환경 속에 숨어 있는 관성력을 찾고 각운동량을 찾고 방향성을 찾는 것이다. 에너지를 찾고 기운을 찾는 것이다. 반드시 그것이 있어야 한다. 음식에 맛이 있어야 하고 그림에 균형이 있어야 하고 음악에 화음이 있어야 하고 전체를 한 줄에 꿰어내는 매개변수 하나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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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론에서 말하는 각운동량의 의미는
힘이 형태변화를 일으킬 때 겉보기로는 은폐됨을 의미합니다.
힘이 있는데 겉으로는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이다가 갑자기 힘이 드러나는 경우입니다.
우리는 길이나 속도 크기 질량 따위를 보고 힘을 파악합니다.
그런데 돌고 있는 팽이는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돌고 있는 팽이를 손으로 쥐면 손다칩니다.
그 힘은 어디서 갑툭튀한 걸까요?
갑자기 돌발적으로 나타나는 힘의 존재는 매개변수의 추가를 말합니다.
즉 길이 크기 속도 질량 외에 추가로 뭐가 하나 더 있다는 겁니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는 버스가 달리는 힘을 우리는 모릅니다.
버스가 갑자기 멈추면 쏠림이 일어나며 그때
우리는 그 버스가 운동하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돌고 있는 팽이가 힘을 가지고 있음을 모릅니다.
그 팽이가 힘이 다하여 쓰러질 때 갑자기 크게 동작을 하며 큰 원을 그리는데
그것을 보고 멍청한 사람은 깜짝 놀라지만 아는 사람은
홍준표가 죽을 때가 되니까 발악을 하는구나 하고 비웃지요.
각운동량은 주로 뭔가 본체에서 이탈해 나갈때 갑자기 동작이 커지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가만있던 넘이 갑자기 지랄발광을 하면 뭔가 떨어져 나간 거지요.
그걸 보고 다음 단계를 예측할 수 있는게 그게 말하고자 하는 방향성입니다.
반대로 뭔가 떨어져 나갔는데도 점잖은 태도를 유지하고 있으면 그런 사람은 조심해야 합니다.
감사함다~
동렬님, 늘 깨우침의 글 감사합니다. 동렬님의 여러 글에서 읽다보면 <각운동량>이란 개념이 자주 나오는데, 제가 그 의미를 확실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좀더 설명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