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아의 의미 철학의 목적은 이데아의 발견에 있다. 모든 사유와 행동에 있어서의 최종적인근거이자 최초의 출발점이 된다. 한국 문단의 작가와 시인들이 일제히 보수꼴통의 외길로 달려가는 것은 철학적 사유의 부재가 원인이다. 철학하지 않으면 무의식적으로 자기소개를 하게 된다. 구조론에서 하지 말라는 그 자기소개 말이다. 이데아가 부재한 자리에 자신의 유년시절 콤플렉스가 자리잡는다. 콤플렉스를 보상받으려고 하면 이미 보수꼴통이 되어 있다. 에너지의 딜레마다. 뭐든 하려면 에너지가 필요한데 에너지는 외부에서 와야 한다. 이런 식이다. 집단이 먼저 가만있는 나를 건드린다. 이지메를 가하고 왕따를 가한다. 나는 이에 반발한다. 작용에 대한 반작용이다. 상대가 먼저 다가와서 가만있는 나를 건드리는 것이며 나는 복수하는 형태로 반작용하면서 에너지를 조달한다. 에너지를 외부에서 조달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이미 하지 말라는 자기소개가 되어 있다. 인간은 그렇게 타락한다. 이데아의 의미는 그런 소아병적 콤플렉스를 극복하는데 있다. 주관을 극복하고 객관으로 나아가기다. 개인을 극복하고 집단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작용반작용을 극복하고 관성의 법칙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에너지의 외부의존이 아닌 자체 동력원의 장착이다. 소인배의 권력의지가 아니라 천하인의 기개다. 당신이 소설을 쓰건 만화를 그리건 처음에는 별 수 없이 자기소개 한다. 사사로운 개인적 경험을 이야기하게 된다.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민망하게 말이다. 관성의 법칙을 얻어 소아병의 비루함을 극복해야 진정한 작가로 우뚝서게 된다. 셰익스피어에게는 있고 당신에게는 없는 그것 말이다. 사에서 공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에너지 획득에 감탄하지 않고 에너지의 조율로 나아가기다. '나도 피아노 연주할 수 있어.' 하고 자랑하는 소아병을 벗어나 스스로의 힘으로 오케스트라를 조직해 보여야 한다. 개인의 문제를 집단에 호소하지 말고 반대로 집단의 고민을 자신이 대표하여 나서는 거다. 셰익스피어는 헥트로라는 그리스 고전시대의 이상적인 영웅상을 알고 있었다. 사유의 원형이 되는 이데아다. 이에 대비되는 번뇌하는 근대인상 햄릿을 발굴한다. 거룩한 헥트로의 신성과 나약한 햄릿의 인간성이 대비된다. 고전시대와 근대라는 시대상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주류가 있어야만 비주류가 있다. 스탠더드 악보가 있어야 재즈의 변주가 가능하다. 원형이 있어여 변형이 된다. 이데아가 있어야 캐릭터가 살아난다. 이상적인 헥토르가 있어야 모순적인 아킬레스가 있고 둘의 장단점을 합친 오디세우스가 있다. 하나의 단단한 원형에서 다양한 주제가 가지를 친다. 그렇게 풍성해진다. 그게 없으면 무의식적으로 자기소개를 반복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게 퇴행이다. 밑도 없고 끝도 없고 힘도 없고 기운도 없는 글이 써진다. 뭐든 중심을 잡은 다음에 가지를 치는 것인데 가지만 나열되어 있고 기둥줄기가 없어 산만하다. 탁 치고나가는 맛이 없다. 서유기나 수호지처럼 뭔가 갈수록 아리송하게 되어버린다. 결말이 희미해지는 거다. 홍루몽도 마찬가지다. 동네 뒷산만 있고 백두대간이 없다. 점차 이발소 그림이 되어간다. 이데아의 부재이다. 철학이 먼저 망하고 문학은 그 다음에 망한다. 우리 철학하지 않으면 안 된다. 회의하는 것이 철학하는 것이다. 이데아를 찾아야 한다. 반작용을 준비한 채 상대가 먼저 작용해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자체의 치고나가는 관성력을 조직해야 한다. 남이 왕따시키면 복수하겠다는 지리멸렬함을 버리고 선제공격 들어가자. 원점에서 시작하기다. 철학이면 무신론자의 관점이 출발점이다. 진정한 무신론자라면 핵버튼을 눌러서 지구 70억 인류를 죽이는데 아무런 죄책감이 없어야 한다. 거기에 선도 없고 악도 없다. 정의도 없고 불의도 없다. 삶도 없고 죽음도 없다. 승리도 없고 패배도 없다. 성공도 없고 실패도 없을 때 철학이 시작된다. 행복이니 쾌락이니 하는 것들은 유전자의 설정에 불과하다. 컴퓨터 프로그램에 불과하다.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내일 죽는다 해도 아무런 아쉬움이 없다. 철학자라면 누구나 통과해야만 하는 관문이다. 철저하게 자신을 지우고 의식을 비운다. 아직도 미련이 있다면 철학할 자격이 없다. 의식의 표백이다. 순수한 백지상태를 준비한다. 그래서? 비로소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 사회에서 먹어준다는 설정을 모두 버렸을 때 대신 게임이 있다. 당신이 어떻게 하든 상대가 거기에 맞대응을 한다.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든지 태산같은 허무에 질식당하는 것은 정해져 있는 수순이며 누구도 피해갈 수는 없다. 다만 유일하게 걸리는 것은 상대의 대응이다. 이건 확실히 이유가 된다. 그 게임에서 이겨야 한다. 인생에서의 승리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에게 패배해도 상관없다. 구조론에서 말하는 승리는 사건의 주도권이다. 무엇인가? 당신이 먼저 초대장을 날려줘야 한다. 내가 에너지를 관리하는 주최측이 되어야 한다. 경마장에서 어느 말에 걸든 당신은 패배해 있다. 직접 경마장을 운영해야 한다. 그것이 안철수식 자기소개의 유아틱함을 극복하는 것이다. 게임의 의미는 선을 잡는데 있고 권력을 쥐는데 있다. 사건에서 앞의 행동이 다음 행동을 구속하는 것이 권력이다. 선도 없고 악도 없고 도덕도 없고 윤리도 없고 정의도 없더라. 삶도 없고 죽음도 없고 의미도 없고 허무도 없을 때, 완전히 비워졌을 때 순수한 인간의 행동을 규율하는 것은 이미 시작되어 있는 일의 일관성과 연속성이다. 전제와 진술의 연결고리가 있다. 게임에 이기는 것은 그 연쇄고리의 첫 번째 단추를 꿰는 것이다. 사건을 다음 단계로 연결시키는 스위치를 손에 쥐는 것이다. 선택하지 말고 대응하라. 정적환경을 버리고 동적환경으로 갈아타라. 움직임은 에너지를 가두는 방법이다. 엔트로피가 작동하는 닫힌계의 설정이다. 거기에 에너지의 방향성이 있다. 당신은 지금 달리는 자동차를 타고 있다. 그 차에서 내리려고 할 때 비로소 깨닫는다. 처음 당신은 그 차의 행선지에 관심이 있었다. 이 차는 서울 가는 차인지 부산 가는 차인지가 중요한 것이다. 그 행선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아뿔싸! 차에서 내리려고 할 때 문득 그 차가 시속 100킬로의 속도에 도달해 있음을 깨닫는다. 달리는 차에서 내릴 수 없다. 기수는 달리는 말에서 내릴 수가 없다. 선원은 항해도중에 배에서 내릴 수단이 없다. 승객은 날아가는 도중에 비행기에서 절대로 내릴 수 없다. 세상에 큰 불을 질러버려야 한다. 불이 활활 타오르는 동안에는 다른 것을 할 수 없다. 그렇게 닫힌계를 걸고 사건에 가둬버린다. 사건을 다음 단계로 연결하여 기승전결로 이어가는 것이다. 게임 체인지로 그것은 가능하다. 개인의 자기소개에서 시작된다. 누구나 유아틱한 자기소개로 첫 번째 습작을 쓰게 되고 첫번 째 만화를 그리게 되지만 거기서 멈추면 김훈 되고 이문열 된다. 가족으로 상승하고 부족으로 상승하고 국가로 상승하고 인류로 상승하고 신으로 상승하며 부단히 연결해 가는데 그러한 주도권이 있다. 타인을 대표할 때 에너지의 생산자 포지션에 이른다. 셰익스피어는 진작에 그것을 해냈지만 김훈은 아직도 자기소개나 하고 있다. 이데아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다. 집단을 대표하면서 게임체인지를 통해 그 연결연결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는 것이 게임에서의 승리다. 화투를 쳐도 그렇다. 계속 선을 잡고 패를 돌려서 동적상황에 머무르면 이미 상대는 제압되어 있다. 그것이 철학이다. 철학에 미치지 못하는 자기소개는 상대방이 먼저 어떻게 해서 내가 어떻게 뒷북을 친다는 식이다. 비루하기 짝이 없다. 석가는 치사하게 인생이 고라서 어떻다고 개소리를 했고, 예수는 유치하게도 인간이 원죄를 지어서 어떻다고 개소리를 했다. 둘 다 상대방이 먼저 저질렀고 자기는 피해자란다. 어린이의 치기다. '엄마 엄마! 쟤가 나를 때렸엉. 때찌해조.' 이런 거다. 부끄러운 일러바치기다. 놀고 있네. 공자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뭐하고 있어? 나아가 천하를 접수지 않고?’ 이것이 공자의 가르침이다. 반면 노자는 등신처럼 말했다. ‘얘야! 그러다 다치는 수 있느니라. 안전하게 집에서 놀거라.’ 틀려버렸다. 천하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소설을 써도 처음은 어차피 자기소개가 된다. 왜 햄릿소개를 못하나? 셰익스피어도 처음 입문할 때는 자기소개식 습작을 했을 것이다. 안철수처럼 ‘제가 엠비아바탑니꽈’ 하고 자기소개 시전한다. 그러나 게임체인지를 통해 나를 극복하고 우리로 나아가고 인류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 방법으로 달리는 버스에 태워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에너지를 유도해낸 다음은 능란한 기술자가 되는 거다. 상대방을 이기려고 애를 쓸 이유는 없다. 안철수를 이기는 것은 이기는 것이 아니다. 게임에 이긴다는 것은 당신이 그 차의 속도를 더 가속한다는 말이다. 나를 넘어 우리가 되었다면 그 버스를 운행한다. 누가 시비하면 더 가속하여 버린다. 홍준표가 방해하면 문재인은 더 속도를 높여 버린다. 통일로 가는 버스에서 홍준표가 내리려고 한다. 버스 창 밖으로 탈출하려고 하다가 비행기 창 밖으로 탈출하는 수 있다. 당연히 죽는다. 이미 문재인이 속도를 충분히 높여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합리성이다. 우리는 목적을 중요시한다. 그러나 무신론자는 목적이 없다. 인생의 목적 따위는 원래 없다. 출세니 명성이니 돈이니 성공이나 따위는 신기루와 같은 것이니 부질없다. 행선지는 어차피 상관없다. 서울을 가든 부산을 가든 상관없다. 고속으로 가는지가 중요하다. 누구도 중간에 하차할 수 없도록 동動으로 묶어버린다. 인간의 자의적인 목적은 고스톱에서 쓰리고에 피박을 씌워 몇 점을 났다고 의기양양해 하는 격이니 아무런 의미가 없다. 희망을 버리고 꿈을 버리고 모두 버렸을 때 최후에 남는 것은? 사건의 연속성 뿐이다. 연속성이 차의 속도다. 차는 100킬로다. 당신은 내리지 못한다. 상대방이 맞대응하므로 헤어나지를 못한다. 사건은 기승전결로 간다. 구조론으로는 질 입자 힘 운동 량이다. 도덕도 없고 윤리도 없고 선도 없고 악도 없고 정의도 없고 불의도 없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믿을 것은 게임 뿐이며 방법은 에너지 효율성이며 이에 질서가 필요한 것이니 승은 기를 따르고 전은 승을 따르고 결은 전을 따라야 한다. 수순대로 가야 한다. 그곳에 권력이 있다. 에너지가 있다. 사건의 기에 서는 것이며 이데아를 장착하는 것이며 게임 체인지를 통해 천하의 게임으로 갈아타는 것이다. 사건의 주도권을 쥐고 상대방의 맞대응에 이기려면 더 많은 에너지를 가져야 한다. 옳고 그름도 없고 선악도 없고 정의와 불의도 없지만 에너지의 우위를 잃을 수는 없다. 행복도 쾌락도 성공도 명성도 모두 부정했을 때 질서가 남고 수순이 남고 사건의 연쇄고리가 남고 포지션이 남고 권력서열이 남는다. 출발점이 남는다. 원형이 남고 이데아가 남는다. 동네 뒷산은 사라지고 백두대간 남는다. 사건의 출발점은 어디인가? 신이다. 사건은 나의 사건이 아니라 우주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에너지의 우위에 서려면 상대와 내가 공유하는 토대를 얻어야 한다. 토대의 토대의 토대를 계속 추구하면 최초에 이른다. 의사결정의 중심에 이른다. 거기서 신을 만난다. 사건은 원래부터 격발되어 있었음을 알게 된다. 문명의 불길은 당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불타고 있었다. 당신과 상관없이 게임은 벌어져 있었다. 당신이 탑승하기 전에 차의 속도는 충분히 올라가 있었다. 당신은 이 차가 서울 가나 부산 가나 광주 가나 행복 가나 출세 가나 성공 가나 묻지만 신은 차갑게 말한다. 당신은 절대로 내릴 수 없다고. 당신의 질문에는 답해주지 않는다. 그건 아무러나 상관없기 때문이다. 당신 자신의 버스를 만들기 전에는 말이다. 인간은 임무를 받아서 태어나지만 자신이 무슨 임무를 받았는지 모른다. 집배원은 편지를 배달한다. 자신이 무슨 소식을 전하는지는 모른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지 나쁜 소식을 전하는지 모른다. 최후에 결정하는 것은 모두 연결되어 있음 그 자체다. 우편망이 살아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전달되어야 할 좋은 소식이다. 사건의 기승전결 각 단계들에서 어떤 소득을 얻어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인생에서 어떤 목표를 달성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사건을 연결시켜 가는 것이 소득이다. 그대가 행복도 버리고 사랑도 버리고 쾌락도 버리고 성공도 버리고 명성도 버리고 모두 버렸을 때 사건의 엮여있음이 드러나고 연결망이 드러난다. 서로 공유하는 토대가 드러난다. 나를 버리면 너가 남고 너를 버리면 우리가 남고 우리를 버리면 너희가 남고 너희를 버리면 천하가 드러난다. 이데아가 드러난다. 한 덩어리로 엮여 에너지 흐름에 휩쓸려 있음이 드러난다. 모래시계의 모래알은 한 알씩 떨어지지만 한 알의 운명은 모래시계 전체의 질량이 결정한다.
그러한 엮여있음에 등을 떠밀려 인간은 오늘 하루를 살아간다. 떨어지는 모래알처럼 하루씩 하루씩 인생을 떨구고 있다. 그래서 신이다. 최후의 이데아는 신이다. 철학은 나를 버린다. 나를 버리면 토대의 엮임이 드러난다. 토대의 공유로 인한 엮임에 질서가 있다. 에너지가 있다. 에너지의 중심에서 신이 포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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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한 엮여있음에 등떠밀려 인간은 오늘 하루를 살아간다. 떨어지는 모래알처럼 하루씩 하루씩 인생을 떨구고 있다. 그래서 신이다. 최후의 이데아는 신이다. 철학은 나를 버린다. 나를 버리면 토대의 엮임이 있다. 토대의 공유로 인한 엮임에 질서가 있다. 에너지가 있다. 에너지의 중심에서 신이 포착된다. '
이 단락에서 특히 이 문장이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네요. 어떤 애잔함도 전해지고..., 인간에 대한 연민이랄까...
' 떨어지는 모래알처럼 하루씩 하루씩 인생을 떨구고 있다 '
' 철학은 나를 버린다 '
모든 것이 시작되는 지점...,
철학이 나를 버리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 까지...
과연, 철학이 자기를 버리는 것이라면, 철학하고 싶은 인간이 몇이나 될까? 그래서 깨달음.
철학이란 사변은 구조론의 이데아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패배를 선언해야 할 것 같습니다. 구조론의승리입니다.
(11연 - 비로소 의사결정을 할 수 없다.→ 있다.)
"문재인이 속도를 높여버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