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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1958 vote 2 2018.04.19 (17:57:04)

 

    장자와 플라톤


    서양 철학은 플라톤 저작의 각주에 불과하다고 말한 사람은 ‘화이트헤드’다. 서구에 플라톤이 있다면 동양에는 장자가 있다. 플라톤은 이데아의 질서를 말했고 장자는 혼돈의 무질서를 말했다. 질서냐 무질서냐? 코스모스냐 카오스냐? 통제가능성이냐 통제불가능성이냐? 오늘날의 발달한 양자역학으로 본다면 장자의 혼돈개념이 그럴듯해 보인다.


    그럴 수 있다. 구조론으로 보면 물질 위에 에너지다. 물질이 질서의 세계라면 에너지는 무질서의 세계다. 무질서가 질서에 선행한다. 장자가 플라톤보다 윗길이다. 아니다. 물질과 에너지는 하나로 연결된다. 에너지의 확산방향이 수렴방향으로 바뀐 것이 물질이다. 질서와 무질서는 별개의 대립적 존재가 아니다. 무질서의 자궁에서 질서가 태어난다.


    문제는 혼돈의 죽음이다. 장자의 혼돈은 일곱 구멍이라는 질서를 얻고 죽었다고 한다. 세상의 근본은 에너지의 무질서인데 물질의 질서로 바뀌면서 근원의 생명력을 잃고 죽었다는 거다. 에너지는 좋은 것이고 물질은 나쁜 것이며 무질서는 좋은 것이고 질서는 나쁘다는 식이다. 구조론과 통한다. 뭐든 갈수록 나빠진다는게 구조론의 마이너스 원리다.


    그러나 이는 아마추어의 소박한 관점이다. 철학은 냉철하게 가야 한다.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은 인간의 주관적 감상이고 과학에 좋고 나쁜게 있겠는가? 과학자는 대범해져야 한다. 천하인의 기개가 있어야 한다. 시골 샌님의 소박함을 버리고 프로의식을 가져야 한다. 혼돈은 살아있다. 장자의 감각적 판단이 상당히 구조론과 맞지만 넘어서야만 한다.


    구조론은 에너지로 설명한다. 에너지는 최초 확산방향이니 장자의 무질서다. 수렴방향으로 바뀌니 플라톤의 질서를 얻되 그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니 5회에 걸쳐 질서는 자체모순으로 붕괴한다. 정확히는 질, 입자, 힘, 운동, 량으로 전개하면서 상부구조가 붕괴하면서 하부구조를 건설하는 패턴을 반복하다가 에너지의 바닥상태가 이르러 죽게 된다.


    이렇게 보면 장자가 틀리지 않았다. 장자의 혼돈이 일곱 구멍을 얻고 죽었듯이 구조론으로 보면 사건은 5단계를 거치며 완전히 죽는다. 그러나 그게 슬퍼할 일이랴? 사람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게 슬퍼할 일인가? 하긴 장례식은 슬픈게 맞다. 그러나 동시에 새로 태어난다. 사건은 기승전결을 거쳐 에너지를 상실하고 죽는다. 그런데 죽는게 맞는 거다.


    사건이 죽지 않으면? 불이 꺼지지 않으면? 생명체가 무한히 번식하면? 그게 더 피곤한 일이 아닐까? 죽을 사건은 적절히 죽어야 한다. 그래야 통제된다. 불은 꺼져야 한다. 골치아픈 것은 무한증식이다. 인류의 숫자가 무한히 증가한다면? 안 된다. 막아야 한다. 지구에 70억이 너무 많고 한반도에 남북한 7천만이 너무 많다. 죽는게 나쁜 것은 아니다.


    세상은 죽음을 통해 통제되는 것이며 노인이 죽어야 아기가 새로 태어나는 것이며 죽는게 나쁘다는 생각은 아마추어의 소박한 관점이며 오히려 그러한 죽음을 통해 여유공간을 얻고 진보의 기회를 얻는다. 밥은 죽어서 똥이 되고 피부는 죽어서 노폐물이 되며 풀은 죽어서 거름이 된다. 동물은 죽어서 생태계를 조절한다. 혼돈의 죽음은 괜찮은 것이다.


    사실이지 구조라는 것은 복잡해서 질서와 무질서라는 두 단어로 설명할 수 없다. 장자든 플라톤이든 대충 감으로 때려잡으려 한다면 터무니없다. 진지하게 접근하자. 에너지는 확산>수렴>확산>수렴을 되풀이하다가 최후에 확산하여 죽는다. 그러나 이는 인식론의 피상적 관찰이고 존재론으로 보면 에너지는 언제나 수렴만 하고 확산은 원리적으로 없다.


    계를 적용하여 보면 질서만 있고 무질서는 없다. 엔트로피의 법칙에서는 무질서도의 증가로 표현한다. 단어에 현혹되지 말자. 장자의 접근이 상당히 구조론적이나 이런 겉보기 유사성에 현혹되면 곤란하다. 에너지는 하나의 사건 안에서 반드시 죽지만 그러한 죽음을 통해 오히려 복제하고 증폭한다. 벼 한 포기가 죽는다면 씨앗 1천 개가 살아난다.


    장자는 한 포기 벼의 죽음만 보았지 1천 개의 낱알로 살아남은 보지 못했다. 한 사람 노무현의 죽음만 보았지 1천만의 작은 노무현들은 보지 못한 것이다. 에너지는 복제되고 증폭되고 공명하므로 가공할 위력이 있다. 그것은 대단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사건 안에서 곧 닫힌계 안에서 반드시 죽는다. 사람은 늙어서 죽고 자한당은 망해서 죽는다.


    플라톤의 이데아도 막연히 감으로 말한 것이다. 아마추어의 순진함이 있다. 우리는 프로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구조론으로 말하면 최고의 것은 사건의 완전성이다. 장자는 하나의 사건 안에서 사건의 죽음을 말했고 플라톤은 그 죽어가는 과정에서 통제됨을 말했다. 죽음을 통해서 빈자리가 생기고 그러므로 오히려 질서있게 계가 통제되는 것이다.


    기계라도 망가지면서 길이 들어서 더 잘 작동한다. 자동차 길들이기와 같다. 신차보다 1만 킬로 정도 굴려먹은 것이 더 잘 나간다. 구두를 신어도 새로 산 구두보다 조금 낡은 것이 편하다. 그러나 언젠가는 모두 망가진다. 그 망가지는 5단계를 진행하는 동안 최대한 버티면서 인간은 적절히 이용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취할 것인가다.


    장자의 부정보다 플라톤의 긍정에 취할 것이 많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는 절망보다 그래도 새 생명이 태어난다는 기쁨에서 얻을 것이 많다. 자동차는 언젠가 고장나지만 그래도 오늘은 타고 가는게 낫다. 인간은 반드시 죽지만 그래도 80년이란 긴 시간 동안 할 수 있는게 많다. 장자와 플라톤 둘 다 부분적으로 맞지만 우리는 플라톤에 주목하기다.


    “유럽의 철학 전통을 가장 일반적이고 무난하게 규정하자면 그 전통이 플라톤에 대한 잇따른 각주들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플라톤의 저작에서 마구 발췌하여 꿰맞춘 학자들의 도식적 사고를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나는 플라톤의 저작에서 퍼져나간 일반 개념의 풍부함을 말하는 것이다.-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


    우리는 플라톤적 사유의 풍부함에 주목해야 한다. 장자의 사유는 빈곤하고 왜소하다. 써먹을 데가 많지 않다. 남의 일 훼방놓고 핀잔을 주고 딴지 거는 데만 쓰인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복제된다. 다다익선이다. 완전성은 복제된다. 완전한 세계 유토피아도 있고, 완전한 숫자도 있다. 4를 더하면 1+2+3+4=10이니 완전하다. 4는 좋은 숫자라 하겠다.


    정수가 완전하다거나 무리수는 뭐냐거나 하는 논쟁도 있다. 완전한 미녀가 아프로디테라면 완전한 인격자는 헥토르다. 불완전한 영웅은 아킬레스고 양자의 장단점을 갖춘 재미난 자는 오디세우스다. 완전놀이 재미지네. 이데아놀이 재미있잖아. 장자의 혼돈놀이보다 훨씬 낫다. 이용가치가 있다. 장자의 죽음은 1회용이나 이데아의 복제는 무한이다.


    그걸 가만 두고 볼 기독교도가 아니다. 완전한 것은 보나마나 신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를 훔쳐서 신을 각색한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교부철학이다. 동양은 장자의 혼돈놀이에 빠져 중용과 중도를 강조하며 조화를 중시한다. 주역사상이다. 역은 변화이니 불변의 태양보다 변화무쌍한 달을 더 좋아했다. 달이 변해야 농사를 지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동양과 서양의 완전성에 대한 개념의 차이 때문에 서양은 뭐를 하든 끝까지 갔고 동양은 실용주의적 일탈에 빠져 아마추어의 열정을 버리고 돈이 되고 벼슬이 되는 실용학문을 했다가 망했다. 동양은 이데아를 충분히 사유하지 않아서 망한 거다. 왜 이데아인가? 왜 플라톤인가? 절대로 풍부하기 때문이다. 복제가 된다. 대량생산된다. 다다익선이다.


    뭐든 이데아에 때려맞추면 밤새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 혼돈에 때려맞추면 수호지나 서유기처럼 되어 이야기가 파편화 된다. 이야기가 한 갈래로 모아지지 않고 산만해져 버린다. 천일야화처럼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데 중심이 되는 한 가지 주제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3일치의 법칙’은 플라톤이 말해준 완전성의 반영이라 하겠다.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그것은 이야기의 완결성이다. 이야기가 옴니버스가 되면 곤란하다. 수호지나 서유기나 천일야화는 옴니버스다. 이것저것 끌어모아서 단편모음집으로 되어버렸다. 하나의 주제로 일관되게 밀어붙이지 못한다. 발전이 없다. 그걸로는 셰익스피어가 못된다. 셰익스피어는 3일치의 법칙을 깨버렸지만 대신 완결성을 부각시켰다.


    하나의 강렬한 주제로 모아내니 묵직하다. 셰익스피어가 3일치의 본질을 이해한 것이다. 그 안에 플라톤의 이데아가 자리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영화가 지루하게 가다가도 마지막에 반전 한 방으로 뜨듯이 센 거 하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완전성을 사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영화든 음악이든 뭐든 이데아를 빼놓고는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다.


    내가 당신에게 아무 주제나 하나 던져주고 칼럼을 한 편 써오라고 주문했다고 치자.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완전성을 사유하지 않을 수 없다. 이데아가 없으면 당신은 애초에 생각이라는 것을 시작할 수 없다. 예컨대 소총에 대해서 썰을 풀어보자. 돌격소총에서 중요한건 뭐지? 그건 신뢰성이야. 전투 중에 총이 고장나면 패닉에 빠진다고. 전멸하지.


    그렇다면 AK가 짱이지. M16은 잔고장이 많아 믿을 수 없다구. 이런 썰을 풀 수 있다. 자동차라도 마찬가지다. 자동차는 신뢰성이 생명이라고. 고속도로에서 엔진이 잠겨버리면 어쩔라구? 아냐. 자동차는 디자인이 중요한 거야. 아냐. 자동차는 차체의 강성이 중요하다구. 하체가 단단해서 커브를 잘 돌아야 해. 완전성을 기초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거다.


    자신의 이데아가 있어야 한다. 소총의 이데아는 뭐다? 자동차의 이데아는 뭐다? 커피의 이데아는 뭐다? 뭐든 반드시 이데아가 있는 것이며 그게 없으면 대화가 불능이다. 당신의 이데아는 뭐지? 없다구? 그럼 당신은 대화가 안 되는 사람이야. 어른의 대화에 낄 자격이 없어. 무사는 칼을 가져야 이야기가 되고 선비는 이데아로 무장해야 이야기가 된다.


    당신이 어떤 의사결정을 앞두고 있다면 먼저 무엇을 생각하는가? 이데아의 완전성을 떠올려야 한다. 신을 떠올려야 한다. 거기서 연역적 사유를 한다. 장자의 혼돈을 떠올리면 막혀버린다. 썰을 풀지 못한다. 할말이 없으니 분위기가 어색하다. 분위기가 어색하면 서로 민망하니까 명상을 한다는 핑계로 눈을 감아버리는게 동양인들이다. 답답한 거다.


    귀납은 일단 사유가 아니다. 귀납은 자료수집이다. 진짜 사유는 연역이며 연역은 이데아로부터 시작되며 이데아는 완전성의 표상이다. 왜 우리가 신을 사유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아니면 의사결정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완전한 인간의 이데아로 사유하자. 완전한 인간은 헥토르다. 아킬레스는 불완전하다. 헥토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지?


    그러나 당신은 이미 불완전한 아킬레스에게 끌리고 있다. 히어로 영화만 봐도 무결점 헥토르형 히어로보다 번뇌하는 아킬레스형 히어로가 대박을 내더라. 히어로도 약점이 있어야 한다. 그게 아킬레스건이다. 그래서 인간적이다. 둘 다 갖추면 오디세우스다. 그래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가 만들어졌다. 우리가 근원의 완전성을 사유하지 않을 수는 없다. 


    우주 전체의 완전성을, 과거의 죽은 완전성이 아니라 실시간으로 응답하는 살아있는 완전성을 그대는 사유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결정적으로 그것은 있다. 부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지금 어떤 의사결정을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우주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면 그 우주가 현재진행형의 사건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 의사결정의 중심은?


    전쟁이 일어나 있다면 국가는 존재하여 있다고 봐야 한다. 부족민이 전쟁을 벌이되 아직 국명을 정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단 있다. 임시정부가 타국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을 없다고 하면 일베충이다. 다른 사람의 인정은 인식론의 관점이며 존재론의 관점에서는 그것이 있다. 의사결정단위가 기능하고 있다면 국가는 있는 것이다.


    신은 있다. 완전성은 있다. 사건은 있다. 에너지는 있다. 이데아는 있다. 장자의 혼돈이나 주역의 중도사상은 에너지의 어떤 측면을 설명하려고 한 것이나 전모를 보지 못했다. 더 크게 봐야 한다. 반드시 복제의 원본이 있다. 의사결정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있다. 인간의 필요에 의해 있는 것이 아니다. 국가나 민족이 나의 필요에 의해 있다는 말인가?


    가족은? 엄마 아빠는 내가 필요해서 만들었나? 아니다. 당신이 부모를 부정해도 그것은 있다. 탄생과 동시에 헤어져 죽는 날까지 얼굴 한 번 못봤다 해도 그것은 있다. 그리고 끌림이 있다.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당신이 나는 아빠도 없고 엄마도 없어 하고 부정한다고 해도 어떻든 영향을 미친다. 부재면 부재로 영향을 미친다. 영향이 있으면 있다.


    누구도 신을 부정할 수 없다. 다만 희미하게 있느냐 강렬하게 있느냐의 차이다. 개미나 벼룩에게 신은 희미하다. 사건이 작기 때문이다. 우리가 큰 사건을 벌이면 신은 크게 존재하는 것이며 반면 쇄말주의에 빠져 지엽말단에다 지리멸렬한 관심을 가진다면 그것은 작게 존재하는 것이다. 당신은 신의 크기만 결정한다. 복제의 원본이 되는 무엇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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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고향은

2018.04.20 (13:31:00)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는...
동렬님의,
하나의 주제로 일관되게 밀어붙이는 완전성은...
미술에서 말하는 '크로키'라는 스케치 기법과
닮았다는 생각입니다
장자처럼 모두를 취득하지 말고
에센스를 포착하고 밀고 나가는 삶의 연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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